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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7
창세기 41:17-36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석(2)
바로의 꿈은 꿈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이기에 꿈을 꾸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에 언약의 아들이 해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언약의 아들 안에서 실행되고 완성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앞에서도 이미 바로의 꿈을 상세하게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또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확증해 주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17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 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17-24절).
바로의 꿈 내용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나일 강 가에 서서”라는 표현은 아랫 물 주변에서 서성이며 거기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종교성을 가진 세상의 모든 인간, 땅적 존재를 대표한다.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란 문자적인 율법에 매여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진 소망을 상징한다. 복음을 겉으로만 읽고 해석하여 형통과 번역의 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의 열매, 곧 육의 열매를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으로 보여준다. 외형적으로 보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열매가 복음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하게끔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는 복음의 본질적인 것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인간들에 의해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살해당한 하나님이 복음이다. 그 복음의 열매를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으로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흉하고 파리한 것, 가늘고 마른 것이지만 그것이 살지고 아름다운 것과 무성하고 충실한 것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연약한 육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자적 율법 해위에 매인 죄인들을 먹어 삼켜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 곧 생명의 길이다.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표현이 나오는데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19절)라는 말씀과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21절)라는 말씀이다.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19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흉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시는 것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다는 의미이고,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21절)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보기에 흉악한 복음이 소멸되지 않고 그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단하였기에 끝났다고 생각하였지만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바로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복음, 진리에 대한 계시이기에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24절)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세상은 복음을 알지 못한다. 아니 복음을 지식적으로 공부하여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늘의 것, 곧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으로 확정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묵시의 세계, 종말의 현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비밀을 다 드러내 주셨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기에 하늘의 생명은 진리 안에서 은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25-26절). “꿈은 하나라”라고 한 것은 바로가 꿈을 겹쳐 꾸기는 하였지만 한 가지 곧 한 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이기에 하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바로에게 꿈으로 계시를 주셨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바로가 꿈을 꾸었다는 자체만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아들 요셉이 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언약의 아들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심이 중요한 것이다. 바로의 꿈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요셉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결국 성경이 말씀하는 꿈이란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계시이다. 따라서 꿈에 대한 해석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며 그 역사 속에서 구원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세상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힘에 의해 억울함을 당하고 희생된 요셉과 같은 존재에 의해 꿈은 해석되고 그 구원 역사는 요셉이 당한 것과 같은 이런 희생 속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27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27-31절). 바로의 꿈에 대한 해석은 일곱 해의 풍년이 임한 후 다시 일곱 해의 흉년이 임한다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말의 ‘셰바’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낸 수이다. “흉년”의 ‘라아브’는 ‘배고픔, 부족, 결핍, 기근’이라는 뜻이고, “풍년”의 ‘사바’는 ‘풍부함, 풍성함, 포식, 많은 배부름’이라는 뜻이다. 풍년 자체로는 그 의미를 다 드러내지 못한다. 흉년이 있어야만 풍년의 의미가 무엇인지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이 하나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죄 가운데서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이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애굽에 내려지는 풍년은 단순히 먹을 것이 풍성해져 잘살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풍년’이라는 말의 ‘사바’는 모음으로만 보면 ‘셰바’(일곱)와 같은 단어이고 이것을 확장해서 보여주는 것이 ‘샤바트’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곱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안식이다(창 2:2).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 ‘라아브’, 곧 ‘부족, 결핍, 배고픔’으로 말씀이 없는 기근이고 주림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라고 하나님의 샬롬, 곧 평안과 안식을 전했던 것이다.
“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32-36절).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32절)라는 말씀은 바로의 꿈은 두 번이었으나 겹쳐 있다는 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요셉에게 성취하시려는 언약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우리 성경에는 “이 일”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하다바르’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실행되어 성취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말씀’(다바르)이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절)라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33절)이란 애굽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8, 24절). 곧 요셉을 지칭하는 것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땅적 존재가 아닌 하늘적 존재가 오셔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풍년일 때 많이 거두어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언약의 말씀으로 보자면 일곱 해의 풍년을 주신 것은 오분의 일을 거두게 하시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다섯’이라는 율법을 다 사용하면 풍년을 결코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문자를 거두어야 풍년 안에서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유대인들 중에 있는 서기관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없는 자들과 같이 진리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늘 곳간에서 진리를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자가 오셔야 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새것과 옛것”을 흔히 신약과 구약으로 말하는데 이 표현은 ‘옛것이면서 새것’이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생명을 허락하신 것이다(202503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