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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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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1] 스크랩 나의뿌리 "재령이씨"
바람산 추천 0 조회 256 14.04.30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함안 산인 모곡(고려동유적지)

모은공 이오 19세손(상장군 21세, 덕고공 16세, 갈촌공 14세) 병용(함안파수)

 

시조 월성(경주)이씨 표암공 이알평(신라건국좌명공신) - 원대손 소판공 거명(중시랑) - 금현 - 금서(신라말기) - 윤홍 - 승훈 - 주복(고려초중기) - 칭(문하시랑)---경주, 진주, 장수, 우계이씨

              - 우칭(소판공 문하시중. 재령군. 재령이씨 분관시조) - 창혁 - (       ) - 후세손 원영(공부상서) - 근인 - 장. 대봉 

                                                                                                                                                               - 차. 소봉 

 

상장군 소봉(공민왕의 부마) - 사재령공 일선(영남제파) - 1. 모은공 이오(고려동) - 2. 개지 - 3. 율간공 중현 - 4. 무(덕고공파) - 5. 경성 - 6. 갈촌공 이숙(합천군수,장성현감)(갈촌공파) - 7. 이단(사복시주부) - 8. 혼 - 9. 몽규(호 온동) - 10. 동수(호 낙천정) - 11. 길룡 - 12. 춘점 - 13. 시인 - 14. 영록 - 15. 수영 - 16. 수우 - 17. 봉현(봉수) - 18. 기호 - 19. 병용 - 20. 일섭, 상섭 

 

 

종친관련 싸이트      www.jrec.com.ne.kr

                               문화재, 충신, 항렬(돌림자), 지역, 기타자료 참조

대표유적지 : 함안 고려동 유적지

 

고려동 입구 자미화(백일홍)-600년유래

*좋은사진 주신분 고맙습니다

재령이씨와 고려동

 

재령 이씨 가문화의 유래

자미화가 재령 이씨의 가문 꽃이라는 이야기는 이문열 소설 「선택」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자미화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지평공(持平公, 諱 申- 상장군공의 손자)의 아우 되시는 모은공(茅隱公)의 휘는 오(午)로 공민왕 때 성균관 진사가 되신 분이다. 우러르던 포은(정몽주) 선생과 가형(家兄, 지평공)이 잇따라 죽음을 당하고 나라의 운세가 글러감을 보자 진취(進取)에 뜻을 잃으셨다.

한때 여러 선현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새기면서 지내시다가 다시 은말삼현(殷末三賢) 중에 기자(箕子)의 예를 따라 멀리 남쪽 함주(咸州=함안) 모곡(茅谷)에 숨으셨다.

 

자미화가 재령 이씨들의 꽃이 된 것은 그 이후가 된다. 모은공이 모곡에 터를 잡으신 것도 바로 그 자미화 때문이었다. 망국의 한을 품으신 채 남녘 땅을 정처없이 헤매시던 공은 그곳 깊은 골짜기 수풀 사이에 한 그루 자미수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멈추셨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사랑스러움을 돌아보시다가 마침내 그곳을 숨어 살 땅으로 정하시고 띠풀을 베어 집을 얽으시니 그게 재령 이씨가 남쪽에 살게 된 연유요, 자미화가 재령 이씨들의 꽃이 된 시작이다.

 

뒷날 고려가 망하자 공은 호를 모은(茅隱)으로 삼고 사는 곳을 고려동(高麗洞), 붙이는 밭을 고려전(高麗田)이라 이름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인근 두심동(杜尋洞)에 숨어 살며 만은(晩隱 )을 호로 삼던 전(前) 판도판서(版圖判書) 홍재, 전 공조전서(工曹典書) 조열과 더불어 그 자미수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며 나라 잃은 선비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셨다. 그때 남기신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喬木如存可假花 교목여존가가화

王春惟到暮山家 왕춘유도모산가

悲歌哀詠相隨地 비가애영상수지

恥向長安再着紗 치향장안재착사

 

둥치라도 남으면 꽃이 필 수 있는 것을

해 저문 산속 외딴집에도 봄은 찾아왔구나

슬픈 노래 부르면서 서로 따르는 이 자리

서울 가 다시 벼슬 살기는 부끄러움일 뿐이네

 

중종 때 홍문관 교리를 지낸 하옥(河沃)이란 분은 모은공의 행장에 적기를, 당시의 절개 있는 사람들은 그 시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 백이숙제의 채미가(採薇歌)와 기자의 맥수가(麥穗歌)에 비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 자미수 곁에 정자를 지어 자미정(紫微亭)이라 이름하고 그 연유를 기(記)에 남겼다.

 

<... 서산(西山)의 고사리는 은(殷) 왕가의 해와 달을 홀로 보존했는데, 한 번 전해져서 진처사(晉處士=도연명)의 율리(栗里) 장미화가 되고, 두 번 전해져서 우리 선조의 모곡리(茅谷里) 자미수가 되었다...>

그 뒤로 재령 이씨는 자미화를 가문(家門)의 꽃으로 귀히 여기고 어디로 가든지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 나무를 심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져 한강 정구 선생도 「함주지(咸州誌」를 찬술하면서 자미화는 이씨들과 성쇠(盛衰)를 같이 한다는 구절을 남겼다.

 

 

본관지(本貫地) 황해도 재령(載寧)이란

황해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군(郡)으로서 북쪽 평야지대와 남쪽의 산악지대로 대별된다.

북쪽에서 드물게 보는 넓은 재령평야의 중심부를 차지하며 경지면적도 4만여 정보에 달하며, 조선시대 왕실의 진상미(進上米)로 명성을 높인 북률무사미(北栗無砂米)는 질이 우수하다. 북부에는 재령철산(載寧鐵山)이 유명하며 군의 중남부에 솟은 장수산(長壽山, 745m)에는 장수산십이곡(十二曲)·벽암계(碧岩溪)·장수산성 등의 경승지가 있는데 황해금강(黃海金剛)이라고 부르며, 산허리에는 묘음사(妙音寺)가 있다. 명승고적으로는 녹족정(鹿足井)·낙풍정(樂豊亭)·현암사(懸岩寺)·벽송정(碧松亭)·호연담(浩然潭)·전덕루(全德樓) 등이 있다. 장수면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평리(龍坪里) 버들 서식군락이 있다.

 

군의 북쪽에 있는 또하나의 장수산(長水山)는 세종지리지에 군의 사람들이 진산으로 삼는다고 하며 長水山에서 멀지 않는 서어산(鋤於山)에 우리 시조(載寧君)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재령군은 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중반(重盤)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안능(安陵)·한홀(漢忽)·안주(安州)로 개칭하였다. 고려 성종 때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 때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하였으며 고종 때는 재령현(載寧縣)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초 태조 6년에 풍주(豊州)소속의 삼지현(三支縣)을 병합하였고 태종 15년(1415)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여 재령군(載寧郡)으로 오늘에 이르며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에 속한다.

 

 

☆☆☆ 재령이씨의 분파(分派)에 대하여(상세보)

17개파외에 지파에 대하여 게시판에 질문이 많으므로 지파까지 설명을 덧붙였다. 족보실과 계파도를 참고하면 더욱 이해하기가 쉬울 것으로 생각됨

재령이씨는 비조 표암공(휘 謁平)께서 기원전에 경주의 표암(瓢巖)에 내려오신 후 이씨로 사성받았으며 약 천년이 지나 소판의 벼슬을 지낸 휘 거명(居命)이 경주이씨의 중시조 격이 되고 소판공의 7세손인 휘 우칭께서 재령군에 봉군됨으로서 비로소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였는데 그 시기는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분관시조로부터 정확히 몇 대가 흘렀는지 알 수가 없으나 고려말경에 공민왕의 부마이신 상장군 휘 소봉(小鳳)부터 계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상장군을 중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상장군의 아드님은 두 분인데 휘는 일상(日祥)과 일선(日善)이다.

휘 일상(日祥)은 묘소가 실전되고 기록이 미비하나 좌우위보승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후손은 경북의 청도와 김포 및 상주에 세거하여 왔다.

⑴ 청도에 이거한 파는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워 식성군(息城君)에 봉군되신 이운룡(李雲龍) 장군의 업적이 크기 때문에 기강-금호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고 있어 우리는 통칭 식성군파ⓐ라 부른다.

⑵ 김포와 상주에 이거한 파는 김포에서는 휘 일상(日祥)공의 시호가 문헌이라는 설이 있어 문헌공파라 부른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보면 휘 일상(日祥)의 아드님에 지보주사(경북 예천군수)를 역임한 단활재(短豁齋, 휘 惠)공의 기록이 더확실하고, 이분은 조선초기에 한시(漢詩)을 잘 지은 것으로 청구풍아(김종직편찬)와 춘정집(변계랑 저)에 전하며 고려가 망하자 진주의 태기태(현 진성 상촌리)로 은거하였는데 단활재공의 유사가 진양지에 실려 있으므로 필자는 단활재공파ⓑ라 부르고 있다.

현재 단활재공의 묘제를 위해 진주-진성에 재실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5년 김포종친회의 정관개정에서 임진왜란에 선영을 지키다 순절하신 휘 광세(光世) 공이 난후에 좌승지의 증직되었으므로 문헌공-승지공지파라 부른다.

 

휘 일선(日善)은 사재령을 역임하여 사재령공이라 부르고, 고려가 망하자 고려왕조의 외손으로서 자녀 6남 1녀를 데리고 경남 밀양의 조음으로 은거하였다.

⑴ 장자는 휘 신(申)인데 고려말에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여 이성계 일파와 대적하다가 포은 정몽주선생이 살해되고 간관 김진양등과 함께 유배를 가셨는데 불행하게도 유배지에서 별세하였고, 밀양의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호를 계은이라 하므로 5대를 지나 후손이 끊어졌지만 계은공파(溪隱公派)라 부른다.

⑵ 둘째는 휘 술(戌)인데 사정을 역임하여 후손이 주로 청도 금촌과 김해여래에 뿌리를 내린 파로 우리는 사정공파(司正公派)ⓒ라 부른다. 사정공의 손자중 휘 계손은 군수를 역임하고 밀양무량원에서 청도금촌으로 입향하셨는데 군수공의 증손은 휘가 백신(白新)으로서 임진란의 금성전투에 공을 세웠으며 현손이신 휘 결은 학문이 일천하여 유림의 사표가 된 분인데 호가 지암이라 금촌의 종친들은 지암종중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산의 원동 등지에 세거하였던 양산파는 수년전까지 영해 현령공파로 기록되었으나 최근에 사정공파 청도금촌의 큰집으로 뿌리가 확인되어 사정공파-양산파라 부른다.

⑶ 셋째는 휘 축(丑)으로 고려말 생원을 지냈기 때문에 생원공파ⓓ라 부르고 후손은 밀양일원과 김해 진영에 살고 있다.

⑷ 넷째는 휘 오(午)이며 밀양에서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하신 성균진사이며 스스로 호를 모은(茅隱)이라 불렀기 때문에 모은공파라 한다. 모은공파는 그 후손이 전체 재령이씨의 80%이상을 차지하고 그후대에 계속해서 분파되어 이해하기가 대단히 복잡하다.(뒤에 다시 설명)

⑸ 다섯째는 휘 유(酉)인데 밀양의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손은 함안도항을 근거로 함안-의령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처사공파ⓔ이다.

⑹ 여섯째는 휘 인(寅)인데 후손이 없으므로 기록이 미비하다.

⑺ 따님 한분이 계셨는데 진양하씨에게 시집갔으며 진주수곡의 하씨가 그 후손으로서 현재 수곡의 묘소는 도기념물로 제정되어 있다

 

<모은공파>

모은공은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한 후 손자가 넷인테, 첫째인 근재공(휘 孟賢)과 둘째인 율간공(휘 仲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으며 넷째인 사의공(휘 季賢)은 모곡에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⑴근재공파는 아들이 일곱인데

㈎ 장자는 휘 상으로 문과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거쳐 교리까지 이르러 교리공파ⓕ라 부르고 임진난전후에 면천에 이거하였기 때문에 면천파라 부른다.

㈏ 제2자는 휘 위(瑋)로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감찰공파ⓖ라 부르고 인천 원주 남원에 살고 있다.

㈐ 제 3자는 휘 래인데 은진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감공파ⓗ라 부르고 세거지는 남양주 덕소인데 양주파를 일명 은진공파라고도 한다

㈑ 제 4자는 휘 속인데 손자가 문과에 올라 참의까지 역임했으나 후손이 없어 잘모른다.

㈒ 제 5자는 휘 종이며 진주판관을 역임하여 판관공파ⓘ라 부르고 묘소는 경기도 포천에 있지만, 후손은 주로 진주에 살고 있으므로 근재공파에서는 진주파라 부르기도 한다.

판관공의 손자가 둘인데 초주공(휘 간)과 목사공(휘 철)이다. 초주공의 손자는 진주의 사봉에 터를 잡은 행와공(杏窩公, 휘 중영)과 지수면 청원리로 이거한 행정공(杏亭公, 휘 중광)이며 행정공은 부용당성안의의 문인으로 병자호란을 맞아 찰방의 벼슬까지 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에 항의하여 청원리에서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장자는 휘가 현근이며 호는 백촌이며 차자는 휘가 현재이며 진사로서 호가 죽촌이고 계자는 휘가 현주인데 통덕랑으로 호가 매촌이다. 따라서 진주에서는 행정공팡의 지파로서 백촌공파 죽촌공파 매촌공파라고도 한다. 목사공의 후손은 경기도 이천에 세거하고 있다.

㈓ 제 6자는 휘 애인데 작은아버지이신 율간공이 영해부사로 외직에 가실적에 따라가서 영덕의 창수면에 뿌리를 내렸다. 울진현령을 역임하셨기 때문에 영해파를 현령공파ⓙ라 부르며 후대에 가장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영남- 성리학계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하였던 파이다.

현령공의 손자인 운악공(휘 涵)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아드님은 모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장자는 휘가 시청이며 호는 청계이고 둘째는 휘가 시형이며 호는 우계이고 셋째는 휘가 시명이며 호가 석계이고 넷째는 휘가 시성이며 호군을 지냈다. 따라서 영해에서는 청계공파 우계공파 석계공파 호군공파로 세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석계공의 아드님은 대학자가 배출되여 퇴계학파의 종장을 역임하여 재령이씨의 큰 업적을 남긴 파이다. 존재선생(휘 徽逸) 갈암선생(휘 玄逸) 등을 위시하여 정묵재(휘 尙逸) 평재(휘 隆逸) 정우재(휘 靖逸)등 모두 학업에 전념하신 선조이며 손자는 밀암(휘 栽) 고재(휘 만)등이 영남의 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거유이다.

운악공이 의령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령공파의 의령지파(통정공파)가 있으며 의령과 진주진성에 살고 있다.

영해파에서는 위에 열거한 선조의 호를 따서 존재파 갈암파 밀암파 평재파 고재파 등으로 지파를 부른다.

㈔ 제 7자는 휘 구(玖)이며 진사로서 원주에 후손이 살고 있으므로 원주파 또는 진사공파ⓚ라 한다. (그러나 계대가 확실치 않은 부분이 있어 원주파는 재령이씨의 다른 큰축을 이루는 파라 생각된다.)

 

⑵ 병조참지까지 역임하신 율간공은 아드님이 둘인데

㈎ 장자인 휘 포는 김해로 이거하여 김해사직공파ⓛ라 부르고 사직공의 손자는 휘가 대형(大亨)인데 임진난에 김해성을 사수한 공로로 판결사에 증직되어 김해에서는 판결공파라고도 한다.

㈏ 차자는 함안의 모곡을 위시하여 함안일원에 세거하고 있어 함안파라 부르고 휘가 무(珷)인데 호를 덕고라 부르므로 덕고공파ⓜ라 한다.

함안 덕고공파는 후손의 숫자가 많아 손자대에 더 분파되어 4손자중

장손이신 휘 沔은 장악원주부를 역임하였고 호를 미촌이라 하여 주부공파 또는 미촌공파이다.

둘째 손자는 휘가 익이며 호는 간옹(艮翁)이라 간옹공파라 한다.

셋째 손자는 휘가 정(瀞)이며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임진난에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청주목사까지 마치고 말년에 함안에서 진주 수곡(원당)으로 이거하여 남명의 덕천서원의 산장을 역임하였다. 호는 모촌이며 문집이 전하고 이파를 모촌공파라 부른다.

넷째 손자는 휘가 숙(潚)이며 호는 갈촌이라 갈촌공파라 부르는데 임진난에 창의하였으며 장성현감 합천군수직을 역임하여 합천파라고도 한다. 후손의 숫자가 많으며 함안과 진주에 널리 세거하고 있다.

 

⑶모은공의 넷째 손자인 휘 계현은 두 형이 관직에 나아갔으므로 부모님을 봉양하시다가 셋째형(후손은 알 수 없음)을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사의(司議)의 벼슬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사의공파라 부른다.

사의공의 아드님은 넷인데 함안의 서쪽과 진주로 이거하여 세거해왔다.

㈎ 장자는 휘 변으로 첨지의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첨지공파ⓝ라 하고 창원-진해 등지로 이거하여 오늘에 이르며 창원파라고도 한다.

㈏ 둘째아드님은 휘가 침(琛)이며 부호군 통정에 이르러 통정공파ⓞ라 부르고 통정공의 손자는 휘가 예훈(禮勛)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호는 성재이기 때문에 성재공파라고도 한다. 성재공의 장자는 진주의 진성면 일원에 세거하였으며, 차자는 휘가 강(堈)이며 호는 도산으로 진주의 대곡면 마진리 소도산아레 세거하였으므로 도산공파라 한다. 또한 통정공의 셋째 아드님은 휘가 희성(喜成)인데 임진난 전후에 함안의 지곡에 살았으므로 지곡파 또는 호가 도암이라 도암공파라 칭한다.

㈐ 셋째 아드님은 휘가 종(琮)이며 군자감주부를 역임하여 주부공파ⓟ라 부르고 처가인 진주의 운곡(현 하동군 옥종면)으로 이거하여 진주파(하동파)로도 불리웠으며, 현손인 휘 영국(榮國)은 진주의 수곡으로 입향하였는데 호에 따라 심운재공파라 부른다. 또 후손의 일부는 전남의 광양에 까지 세거하므로 광양파도 여기에 속한다.

㈑ 넷째 아드님은 휘가 전(琠)이며, 산림에 뭍여 학문을 하면서 제자를 길?기 때문에 처사로 알려져 있으므로 처사공파ⓠ라 부른다. 함안의 고문헌에 이처사 사적이 전한다.

임진왜란의 전란으로 후손의 숫자가 적으며, 함안지곡의 도암공파와 가까운 집안이다.

이상 열거한 파는 대체로 지리적으로 가깝게 살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파보를 만들어 왔으며, 앞으로 우리 재령이씨의 족보는 ⓐ-ⓠ17개파의 파보가 합쳐서 대동보가 되기를 기원한다.

 

☆☆☆ '칠산림(七山林)' 영남 남인 명문가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 7개 가문(진성이씨·여강이씨·의성김씨·풍산류씨·인동장씨·재령이씨·전주류씨)의 후손들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국 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오일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 ‘숭선에서’의 전설적 작가 강준용 등 수많은 문인(文人)을 배출한 영양군에 모였다. 이들 7개 가문은 조선후기 퇴계의 학문적 계승과 영남남인의 여론형성을 주도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주실마을’과 함께 영양군을 대표하는 문화마을로 재령이씨(載寧李氏) 영해파(寧海派)의 세거지이다. 현재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전통한옥 체험관, 정부인장씨 예절관,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유서 깊은 이곳에 7개 가문의 후예 400여명이 스승과 제자로 연결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고 우의를 다지기 위해 재령이씨가 주관해 모였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았다. 재령이씨는 고려 성종 때 이우칭(李禹稱)이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황해도 재령에 세거하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경남 함안 모곡리(고려동. 안담)에 정착하여 낙남조(落南祖)가 된다. 영남일대에 거주하는 재령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예이다.

 

이후 이오의 증손 이애(李?)가 영덕군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고,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충효당을 짓고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이함은 진성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시청, 시형, 시명, 시성, 시진)을 두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모두 이함의 후예들이다.

 

이함의 3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정부인 장씨 장계향 부부는 아들 7형제(상일, 휘일, 현일, 숭일, 정일, 융일, 운일)를 두었는데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七賢者)라고 불렀다.

 

특히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인 1남 정묵재 이상일, 2남 존재 이휘일, 3남 갈암 이현일, 4남 항재 이숭일 그리고 갈암의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와 6남 융일의 아들인 고재 이만은 재령이씨 ‘칠산림’(七山林)으로 불릴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석계의 장남 이상일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사위가 되었다.

 

석계의 3남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임란 이후 영남인으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귀암 (歸巖) 이원정(李元禎)에 이어 세 번째로 판서직에 오른 인물이다.

 

갈암의 3남 밀암 이재(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인 한산이씨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를 거쳐 다시 대산의 외증손인 전주류씨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학맥이 외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관계에 있어 ‘지고 밑지라’는 가풍을 실천하며 신의로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덕을 베풀면서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키워낸 영남 남인의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사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재령이씨-덕고공파-갈촌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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