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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活 第六主日(생명주일)
活性化된 生命 文化를
■5월5일 부활 제6주일—.
생명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영 `성령을 믿는다' 고 사도신경 안에서 고백합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聖靈)으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내면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당신 아들을, 다음에 당신의 영을 인간 역사 안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결정적 자기 계시(啓示)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의 성령은 하느님의 얼 또는 영으로 표현되며 히브리어로 `루아'라 고 하는데, 공기의 움직임, 바람, 또는 숨결 등을 뜻합니다.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루아' 개념은 성서 저자들에 의해 활력과 생명을 지니신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유체험을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됐습니다.
■신비로운 활력에 넘치는 분ㅡ.
바람처럼 신비로운 활력에 넘치는 분이십니다. 또한 만물을 살리시고 지탱하는 입김처럼 만물을 창조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이 같이 하느님 체험이 바람과 입김을 뜻하는 `루아' 개념과 쉽게 결부돼 활력과 생명력을 지니신 하느님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로 채택됐습니다.
하느님이 진흙으로 친히 빚으신 `사람'의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그가 살아 있는 `아담'이 됐습니다(창세 2,7) 인간은 숨 쉴 때 살아 있고 호흡이 정지될 때 죽습니다.
숨은 곧 생명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숨을 주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안에 탄생되고 활기차게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 체험과 직결된 것은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이 두 체험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한 실체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현존하고 하느님의 영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로 체험되고 인식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초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그분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과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작용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 완성ㅡ.
승천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이 지난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은 오순절로 이스라엘 민족의 농경 축제인 첫 곡식을 봉헌하는 감사절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선사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비롯해 땅 끝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대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민중 앞에서, 법정과 의회에서, 그리고 관헌과 왕 앞에서 성령이 주신 지혜와 언변으로 진리를 강력히 전해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
■죽음의 문화 전복은 시련뿐ㅡ.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함께 또한 교회에 봉사해 자신의 신앙을 튼튼히 하도록 은총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이웃과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공동사명은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성령 안에서 성부와 이루는 그리스도의 친교에 참여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준비하게 하고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도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 끌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상기하게 하시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도록 정신을 열어주십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친교와 일치해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명주일—, 전쟁 살인 폭력 낙태 안락사 착취 탄압… 이들이 `생명주일'의 원인 제공 매개체일 것입니다. 활성화된 생명 문화 없이 죽음의 문화 전복은 시련뿐입니다. 낙태는 실정법으로 규제돼 있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것은 우리의 전부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한 차례의 오염도 겪지 않았을 아직 처녀지의 맑고 잔잔한 흐름의 밑바닥에 갈아 앉은 정서에서,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자극을 보내온다. 가슴 안에 칠해질 색상 따라 스미고 울리는 감정의 발현—! 그것을 깊숙이 자기 안에 간직할 수 없을 때,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한다고, J. 주베르는 말했다. 시인은 이래서 시를 쓰는 것일까? 맑고 감동적인 인상을 퍼내듯이ㅡ. 五月, 시는 결국 장미의 쾌락이다. 시의 작업은 어렵다지만,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창작 정신을 발휘할 수 있으면 족하다. 그 만큼 그것은 어떤 작품이라도 가능하다는 도전력일 것이다. 그러나 독자를 때로는 자기 곁에 앉혀 두고 유리. 외면하지 않도록 다듬고, 나가게 된다. 이 표현의 작업은 그 가능성을 풍부한 경험에서 높일 수 있다. 다만 어렵다고 생각해 쓰기에 망설인다던가? 어느 장르의 작업이나 뼈를 깎는 아픔이란 결코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감동 결핍시대라지만, 당신을 향해 웃으며 고무하는 五月의 향기에 주목하라! 상실감에 찌든 표정은 지나가는 소녀들의 미소로 씻어내면 족한 것을….
5 일 어린이날 · 立夏 8 일 어버이날 11일 入養의 날 15일 스승의 날 17일 부처님오신 날 18일 五·一八 민주화운동 기념일 19일 發明의 날· 20일 成年의 날 21일 夫婦의 날 · 小滿 25일 防災의 날 31일 바다의 날
길길이 높게 솟은 아파트의 후박나무마다 모란이듯, 하얗게 꽃이 피어 첫 여름의 기쁨을 구가하고, 라일락은 매혹적인 향기를 바람에 날린다. 보라, 이 꽃나무에 쏟아지는 햇살을. 얼마나 부시도록 황홀한가…!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 맑고 깨끗한 날씨인가! 나무 밑을 거니는 내게 보내오는 햇빛은, 온 누리를 샅샅이 들이비추고 있지만 실상 내게 더욱 미덥게 쪼인다. 이 빛은 오늘 뿐 아닌, 내일도 하루 눈부시게 기쁨을 나누게 된다. 五月의 아름다움은 가난한 이웃, 학대 받는 지역의 생활인을 먼저 동정하고, 그늘진 곳에서 불이익에 시달리도록 한, 사회를 가장 저주하는 듯하다. 아- 이 땅에 넘치는 자연의 활력과 달리 우리사회의 싱그러운 五月의 생리를 어서 찾아오라! 잘못 걸었던 길을 왜? 악몽 부활의 시대는 좌절을 남긴다…. 五月이기에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내일을 두려워 말라. 피곤한 오늘이 거기 누워 있다 해도 새로운 계절 앞에 말쑥한 매무시로 환영의 목례부터 나눔이 이상적이다.
보리 이삭 익어가는 신(神)의 섭리를 읽게 하는 은총의 五月… 이런 분위기 따라 꾸밈없이 입은 그대로, 서늘한 미풍과 함께 신록의 숲, 호수, 산길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행위주의자에게는 절대의 진리나 지상명령이 더욱 애매해진다. 실생활에 밀접한 교섭이 없는 `절대`나 `진리`란, 차라리 행위주의자에게 해를 줄지 모른다, 또한 이성에도 착한 이성과 악한 이성이 있다. 그러니까 인간 생명에 절실한 관계없는 사상이란, 일련의 과도한 피로에 지친 이성의 유희일 뿐이다. 공허한 `절대`나 `진리`가 곧 그것이다. 진리—, 그것은 개개인의 전유물이 아닐까? 진리에는 절대의 자유가 요청된다. 천부의 자아를 연마해야 된다. 한 번 쯤 쉼표 찍고, 물음표를 던져보고 싶지 않는가? L. N. 톨스토이 백작이나 F. W. 니체가 이룬 해탈의 길에서, 그 같은 고통의 경험을 필요로 했다….
그는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 곧 자기 결점을 보족하기 위해 전진할 뿐이다. 창조와 진화가 무한하기에 결국 그에게는 궁극이 목적이 없다. 다만 자기완성의 욕망이 질 낮은 공리주의자가 아닌, 어느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초연`이라는 정복의 의미를 갖는다. 五月의 태양은 四月의 그것 보다 열 띄고, 따뜻한 체온을 부풀게 한다. 이 달의 하늘 또 한 잘 닦아진 사파이어 블루의 귀고리, 티끌 없는 화사한 대기와 달리 왁자한 삶의 절규가 싸늘하게 지난 밤공기를 흔들었다. 물질과 군중의 인간 안에 서성이는 생명체들은, 거칠고 우울하고 스산하다, 파릇파릇한 나뭇잎의 감미로운 향기와 달리 우리는 황량한 말투를 이웃에서 듣는다. 산책길에 낙화를 밟지 않고 피해 걷자. 우리를 흐뭇하게 하고 박수를 받다가 뿌리로 돌아가는 최후를 잔인하게 유린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내가 가는 길목에서 나를 찾지 않으려는가!
오늘의 세태가 비어(卑語)시대지만, 유독 말끝에 신체의 결함을 빗대어 어두운 찌꺼기를 남긴다. 지나간 四月은 인간 교육의 부재,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언어의 영향을 서슴없이 드러내야 했다. 꽃향기가 매혹적으로 정돈된 자연의 구도는, 사랑의 생기에서 돋보인다. 이제 풋풋한 五月, 연인의 숨결 같은 그 본래의 오묘한 상황의 다큐멘트를 느껴볼만 하다. 아- 五月이여! 우리를 소외하지 말아다오. 찔레나무에 매달린 눈빛 남은 꽃 부들기가, 五月을 향해 기도하듯, 소리 없이 법당 뜰에 푸득푸득 날린다. 사랑이 밴 꾀꼬리와 산 꿩 울음이 겹쳐 몽환적인 帝釋山 산자락의 작은 절, 장미꽃 핀 大覺寺의 전아한 풍경소리… 미래에 사랑이란—. 그런 것은 없다. 사랑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활동이다. 사랑을 지금 보여주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L. 톨스토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