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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성도의 유익을 위해, 질서를 따라 예배(방언과 예언)
(찬송 216장)
2023-3-14, 화
맥락과 의미
11-14장은 예배에 대해 가르칩니다. 11장에서, 교회는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하며 하나의 몸으로 예배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예배 가운데 나타납니다. 성찬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연합됩니다.
12-14장은 예배에서 신령한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12장에서는 성도가 각각의 은사로, 그리고 각 지체가 서로를 염려하고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13장은 그 모든 은사를 사용하는 원칙이 되는 사랑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14장은 사랑 가운데 교회와 성도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40절이 전체 내용을 요약합니다.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품위 있게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1-25절). “질서 있게”는 ‘복종하면서’ ‘구약의 제사장으로 임명된 직분자의 반차를 따라서’(26-40절) 하라는 것입니다.
1. 성도의 유익 위해 알 수 있는 말로 가르치고 기도/찬양하라(1-25절)
2. 복종하며 질서 가운데 예배하라(26-40절)
1. 성도의 유익 위해 알 수 있는 말로 가르치고 기도/찬양하라(1-25절)
1) 나의 유익을 위한 방언보다 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는 예언(1-5절)
우리는 방언 말하기를 구하기보다 예언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방언은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예언은 성도와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당사자 사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즉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2절).
예언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가르치고 위로하여 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적 은사를 항상 사모하는데, 예언, 즉 말씀이 교회에 풍성하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1,39절).
방언은 자기 자신의 영적 성장에는 유익합니다. 그것은 사모할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면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하지 말라”(39절)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할 일은 방언이 하는 실제적인 일, 곧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14-16절). 방언을 하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누리는 축복이 교회에 전달되도록 통역하기를 구하라 합니다(5절).
2)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방언의 통역이 있기를 구하라 (5-19절)
교회의 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말씀의 전파(계시, 지식, 예언, 가르치는 것)입니다(6절). 방언의 경우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가 있는 성도는 교회의 예배에서 통역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12절).
방언으로 기도하고 축복하고 찬송해도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함께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과 영으로만 만나지 말고 “마음으로”(14,15,15)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합니다. 즉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 통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도 더 명료하고 유익이 되고 다른 사람도 “아멘” 하며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6절).
사도는 자신에게 방언의 은사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방언을 하기 보다는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 원합니다(19절). 다른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또 기도와 찬양보다 먼저 복음 말씀의 가르침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막연히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할지를 잘 배웁시다. 구원의 일을 하신 하나님을 배울 때 우리는 그 영광과 은혜를 감사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 예언은 믿음을 일으킴(20-25절)
20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참으로 유치하다고 책망합니다. 지혜에서 장성한 사람, 자신과 온 교회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감사 찬양하는 참 지혜가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청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미쳤다”고 반응하게 합니다(23절).
그러나 예언을 하면, 즉 말씀을 가르치면 그 말씀이 사람들이 감춘 죄를 책망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25절)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전파하”게 합니다(25절).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자랑하기보다 방언 통역을 구하고 예언의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은 방언을 하는 시대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쉬운 말로 예배해야 한다는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는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과 어린이들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기도하고 감사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에게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각자에게도 복음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자녀들도 말씀을 달게 받고 기도하고 감사 찬양하는 예배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복종하며 질서 가운데 예배하라(26-40절)
26-40절은 복종하며 질서와 평화가 있는 예배를 세우도록 가르칩니다.
27-28절은 방언을 통역하는 것, 29-33절은 예언에 대해, 34-36절은 여성은 복종하며 질서 가운데 예배하라고 가르칩니다. 34-38절은 사도의 이 가르침이 어느 교회나 보편적으로 따라야 할 권위 있는 말씀임을 선언하고, 39-40절에서 결론을 맺습니다.
1) 방언과 통역을 할 때 잠잠히 복종함과 질서(27,28절)
예배를 드릴 때는 방언 통역을 합니다. 27절에는 “차례를 따라” 방언을 하라고 합니다. ‘각자의 부분대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앞서 은사에 대해 말할 때(12:27, 13:9,10)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필요한 것을 모든 성도에게 다 주시지 않고 부분적으로 주셨습니다. 통역이 있는 방언을 하는 성도도 자기에게 주신 부분으로 교회를 섬기고, 또 다른 성도들이 그들의 방언으로 교회를 섬기도록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통역을 주시지 않을 때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자기의 방언 내용을 절제하면서 복종하여 교회의 유익을 구합니다.
2) 예언의 말씀 선포에서 잠잠히 복종함과 질서(29-33절)
예언의 말씀을 교회에 선포할 때 다른 예언하는 성도가 분별해야 합니다(29절). 바른 말씀이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장로 직분자가 있어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깨달음이 있는 자를 장로 직분자로 세웁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에게 예언의 말씀이 오면 잠잠해야 합니다(30절). 자신과 은사를 가진 다른 모든 성도가 다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는 “제제를 받습니다.”(32절) 즉 굴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굴복은 질서를 따른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를 만드는 “화평의 하나님”입니다(32절). 이것이 예배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언으로 말씀을 전하는 다른 사역자들에게 굴복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다른 사역자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께 굴복시킵니다.
지금도 목사는 성경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말씀에 굴복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와 사역자들이 그들의 위치를 교회에서 가질 수 있도록 굴복해야 합니다. 칼빈과 같은 교회의 좋은 선생들의 글을 읽고 배우며 그들을 통한 성령님의 제제를 받아야 합니다.
3)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히 복종함과 질서(34-37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다(34절). 복종해야 합니다. 여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말씀 전하는 자들도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32절, 제재를 받음). 복종은 하나님의 교회에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40절).
여자가 교회에서 복종하는 것은 그를 가르칠 남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남편이 말씀을 배운 후, 집에서 아내와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여성이 가정에서 남편에게 배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많이 묻고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남편의 직분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가르칩니다.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서 많이 묻지 않고 자기에게 물을 수 있도록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35절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앞서 11장에서 여성이 예배할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으면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6). 머리에 쓴다는 것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한 몸이 된 자로서 예배를 드리는 영적 실상을 표시합니다.
그냥, 개인 자격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은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부끄러운 것을 덮어주심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영적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의 공적 예배는 가정에서 말씀을 배우고 질서 있게 가정을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36절). 이렇게 책망하는 것을 보아서,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의 원인 중 하나가 은사를 받은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가르치고 무시하는 태도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했습니다.
현재에도 이런 무질서가 교회에 번져가고 있지 않은지 두렵습니다. 교회에서 여성을 목사, 장로, 집사로 세우면 자신의 남편도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서게 하는 셈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가정의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도는 예배에 대한 이런 가르침에 도전하는 사람을 향해, 이 말씀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합니다(37절). 교회의 예배가 사람이 명료하게 알지도 못하는 방언이나 신비적 경험 추구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지식으로 배우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은사가 있다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성령께서 주시는 감사와 찬양에 의지하여 복종하여 예배드리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가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여 배우고, 교회에 와서도 한 남편의 아내로서 잠잠히 복종하며 예배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지금은 예언과 방언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한국말로 전파하는 말씀, 한국말로 기도 찬양하는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통해 말씀을 가르쳐서 예언하고 계십니다. 영적 탐욕, 영적 영웅주의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방언이나 은사를 사용하지 맙시다. 목사들이 복종과 질서의 영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기도하고 감사 찬양하도록 기도합시다. 성도와 목사 모두 선포된 말씀에 순종합시다.
각 가정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가족을 가르쳐서 가족이 가장에게 복종하여 배우면서, 교회에서도 잠잠히 복종하며 예배하도록 기도합시다.
예배에서의 복종과 질서가 무너지면 성도의 관계에서도 무질서와 분열이 생깁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재산 분쟁이 생기고 일반 법정에 가서 고소하여 교회가 세상의 멸시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어(예언) 성도가 항상 감사 찬양하며, 또 필요한 것을 기도로 아뢰는 예배를 회복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심에 감사합시다. 우리 교회의 예배가 더욱 품위있고 질서있게 되려면 무엇이 개선되어야 할까요? 나의 예배 준비와 실제 예배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과거에 방언과 예언을 주신 성령님께서
지금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 가운데서 은혜를 주심
사도의 시대가 지나면서 방언과 예언으로 예배하며 교회를 세우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방언과 예언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날은 의미가 없습니까?
방언과 예언은 특별한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보통의 은혜의 수단(말씀, 성례, 기도와 찬양)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오늘날 보통의 은혜의 수단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배웁니다. 말씀, 성례,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드릴 때 항상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또 질서 있게 복종하면서 해야 합니다.
과거에 방언과 예언을 주신 성령님께서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 가운데서 계속해서 생생하게 일하십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예언 대신에 이미 주신 풍성한 예언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설교할 때 하나님은 계속 성도를 가르치셔서 구원의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방언은 사람이 모르는 천사의 말, 혹은 외국어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각자의 나라말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축복이 예배 가운데 계속됩니다. 예언과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해서 성령님의 활발한 일하심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자라온 이 시대에 우리는 더욱 더 성령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참고> 27절, “차례를 따라”(아나 메로스)
27절에는 “차례를 따라”(아나 메로스) 방언을 하라고 합니다. ‘메로스’는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12:27, 13:9,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방언은 한 사람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각자에게 주신 부분만큼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참고> 40절, “품위 있게”(유-스케모노스)=성도의 유익을 위해
“품위 있게”(유-스케모노스, 40절)는 대충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7장 36절에 “이치에 합당하지 못하면”(아-스케모노) 약혼녀와 결혼하라고 합니다. 약혼자와 파혼한 자매에게 ‘모양이 좋지 못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12장 23절에 보면 “아름답지 못한(아-스케모논) 지체”는 더욱 아름답게 하라고(유-스케모시네) 합니다. 모양새 좋지 못한 자를 덮어주고 세워주라고 합니다.
13장에서 사랑은 “무례히(아-스케모노) 행하지 아니하며”(5절)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양새가 좋게 되도록 영적으로 유익하도록 은사를 사용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기 위해(3,4,4,5,12,17,27절) 은사를 사용하고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참고> 40절, “질서 있게”(탁시스)-“복종”하면서(휘포-타소마이, 32,34절)-반차를 따라서
예배의 질서는 복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질서의 또 다른 뜻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탁시스)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직무를 행했습니다(눅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탁시스)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6,10, 시편 110:4).
구약에서 제사장 직분을 세웠습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직분이 구약에서 주신 제사장 직분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아무나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사에 따라, 직분에 따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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