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족이란 호칭
|
|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
연변과기대에서 바라본 연길시(옌지) 전경. 중간에 볼록 솟은 산은 모아산으로 연길시의 주산이다. 고구려 발해 시기에는 봉화대로 사용됐던 곳이다. 모아산 왼쪽을 돌아 차로 약 20분만 달리면 용정시가 나온다.
연변은 지금
연변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준말이다. 연변(이하 연변)은 흔히 ‘200백만 조선족의 심장부’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볼 때 연변은 동북지역 가장 동쪽인 '변두리의 땅'이란 의미다. 연변은 중국에서 조선족자치주로 첫 출발을 한 후 50여 년간이나 지속되면서 민족의 정치, 문화, 교육,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연변은 길림성 내 동쪽 한반도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으며, 북쪽은 흑룡강성과 경계를 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길림서의 통화지구와 닿아 있다. 동서의 길이는 306km, 길림성 면적의 23.7%를 차지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물결을 따라 해외와 중국 내륙의 도시로 진출하는 동포들이 늘면서 조선족 최대의 거주지였던 연변도 급격한 인구 감소와 가족해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1992년 한.중 수교이후 한국인들이 찾아들고 국경무역이나 거주를 목적으로 한 흑룡강성이나 길림성 등 다른 지역의 동포들이 유입되면서 줄곧 중국 최대의 한겨레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말 연변 인구는 약 220여만이다. 그 중 동포의 호적인구는 82만 481명으로 총 인구의 37.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호적상의 인구일 뿐 실제 연변에서 거주하는 동포들은 60만명 가량인 것으로 보고 있어 실제 인구비율은 20퍼센트대에 불과하다고 본다.
186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연변에 터를 잡기 시작한 뒤 1911년 연변의 동포인구는 12만 6천명으로 한족인구 3만 5천명에 비해 3배이상을 차지했다. 1945년엔 무려 70여 만명에 달했다. 광복 이후 한반도로 귀국 인구가 빠져나가 1949년엔 52만 9천명으로 총 인구의 63퍼센트를 차지하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정무원(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고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명, 현재 연길시, 돈화시, 훈춘시, 화룡시, 도문시, 용정시 등 6개시와 왕청현, 안도현 등 2개의 현이 있다.
1996년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대륙 내부로 동포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변화인데 그 빈자리를 한족들이 계속해서 메꾸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가다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존립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섞인 이야기도 들린다.
현재 연변의 각 도시 조선족 인구비율은 용정시 67%, 화룡시 60%, 연길시 58%, 도문시 58%를 차지하고 있는데 돈화시의 경우는 10% 미만이다. 2006년 연길시통계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주도인 연길시의 인구는 42만 9100명, 그 중 동포인구는 24만 7700명으로 한국 내 중국 동포 숫자와 맞 먹는다.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소재지로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연길시는 분지이며 부르하통하가 시를 남과 북으로 나누고 있다. 부르하통하는 만주어로 '버드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이다.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폐지한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연기가 안개처런 자욱하다'고 해서 연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연길의 겨울에는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다.
1989년 한국의 해외여행전면자유화조치로 한국인들이 중국, 홍콩, 일본 등을 통해 연변에 오기 시작한 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갑을방직(현 대경방직)이 한국투자 1호 기업으로 연변에 정착하면서 한국의 의류, 방직 등 노동집약형 제조업체와 각 종 서비스업체가 진출하고 백두산 관광이나 학업을 위해 연변을 찾는 한국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연변과기대의 설립과 한국의 IMF는 한국인들의 연변 유입을 가속화 시켰다. 특히 2000년 이후 사업이나 취업보다는 생계형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현재 연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1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연변한국상회는 한국인들의 조직체인데 매년 연변과기대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열고 있다.
현재 한국과 연변의 인적 물적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매주 연길-인천을 오가는 항공편이 매주 20편에 달하며 연변의 훈춘-러시아의 자루비노-한국의 속초를 잇는 동춘항운과 훈춘-나진-부산을 잇는 동룡항운(화물선)이 운행하고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의 동포 간부비율은 인구비율 37.7퍼센트를 밑돌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건 당시 동포 간부의 비율은 약 78%에 이르렀다. 연변은 역대로 중국의 고위급 동포 간부를 배출하는 전진기지 였으나 최근 몇 년간 동포 간부의 단층현상이 생겨남으로 인해 동포 간부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는 정계로 진출하기 보다는 상업에 종사해 성공하려는 동포들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고 있다. 현재 연변에는 주정부 김진길 주장, 주인대 장룡준 주임, 주인대 한창진 부주임, 주법원 정성철원장, 주정협 오병권 부주석 등 10여 명의 부청급 이상 동포 간부가 요직에 있다.
연변에서는 1953년부터 조선어를 한어와 병기해 쓰고 있다. 거리 간판에서부터 상표에 이르기까지 2개언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한글은 한자 위쪽이나 오른쪽에 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국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말 연변의 동포 유치원생은 8565명, 초등학생은 2만 3651명, 고.중학생은 2만 2600에 달해 학생 총 수의 16퍼센트 미만에 달해 인구비율에도 못 미친다.
한국에 있는 중국 동포는 2006년말 기준으로 약 23만명. 그 중 연변 출신이 약 10여만명으로 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해외에 진출했으며 10여 만명이 베이징, 상하이, 칭따오, 심천 등 연해도시로 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통한 동포 인력을 믿고 연변에 진출했던 한국의 노동집약형 제조업체들은 극심한 인력난과 고임금 등에 시달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변은 그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시아의 ‘황금 삼각주’에 위치해 예로부터 국경무역이 발달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상무국에 따르면 2005년 1월부터 10월까지 연변의 대외무역액은 5억 6956만 달러로 작년 동기대비 25퍼센트의 성장세를 보였다. 수출액은 3억 9216만 달러로 작년 동기대비 33.4퍼센트 성장했다.
북한의 함북, 양강도와 인접한 도문, 삼합, 권하 등 8개의 대북한 통상구를 가지고 있는 연변은 대외무역에서 북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수출입 품목으로는 북한의 철, 석탄, 농수산물 등의 원재료가 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변의 훈춘, 러시아의 자루비노, 한국의 속초를 잇는 동룡항운을 통한 한국과의 무역액도 1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주로 연변의 한국기업 원자재와 농산물, 목재, 해산물이 주 교역품목이다.
현재 연변에 투자한 외자기업은 500여개. 한국기업은 150여개에 달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기업들로는 갑을방직을 인수한 대경방직, 쌍방울, 이건산업, LG창호, 풀무원, 광명특종유리 등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연변은 통일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을 잇는 금삼각주로 ‘철의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길목이 돼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TSR이 지날 것으로 보는 도문과 훈춘 등은 그 핵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산족의 꿈이 이루어 지길 빌어본다.
*사진설명:
매년 가을 연변과기대 대운동장에서 열리는 주연변 한국인체육대회. 연변한국상회가 주최하고 연변과기대가 후원하는 이 체육대회는 연변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 1만명 중 3천여 명이 참가하는 화합의 무대다.
연변과기대 제9회 졸업생들이 졸업식장에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다. 뒤로 보이는 도시는 연길시. 그 가운데 우뚝 선 산은 연길의 주봉이라 할 수 있는 모아산이다. 연변과기대는 연길시 북산가 언덕위에 있는 대학으로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엔 공동묘지 였다.
[발해를 가다; 동모산]
발해를 가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뒤 698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들이 세운 발해는 926년 거란(요)에 의해 멸망당할 때 까지 229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한때 ‘해동성국’ 이라고 불리어 질 만큼 동북아시아의 패자 였던 발해는 숱한 전설과 의문을 남긴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유현종의 소설 대조영을 보면 대조영은 고구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부장이었고 그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은 양만춘이 죽자 안시성 성주가 된다. 걸사비우는 말갈족 추장의 아들로 나온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구당서>와<신당서>의 내용은 자못 다르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보면 대조영은 ‘고려별종’으로 나오고 신당서에는‘율말말갈족으로 고구려에 복속했던자’라고 나온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모든 기록에서 말갈족으로 명시하고 있다. 하여튼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은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현유진 성산자촌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성산자성이라고 하는 이 성은 고구려의 유장 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 첫 수도의 외성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 국내성의 외성인 환도산성처럼 평지에 우뚝 솟은 동모산은 해발 600미터 정도로 그리 높지 않았다. 동모산의 평지에 있는 영승유적지와 돈화시 동강구 임업국 사택 등이 있는 오동성은 발해의 성터와 유적,유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프로축구팀 이름인 장백호랑이의 첫 이름은 바로 오동성을 딴 오동팀이었다.
멀리서 보면 동모산은 고구려의 첫 수도 였던 환인의 흘승골성에 비해서 규모는 작지만 모양새가 비슷했다. 비류수가 흘승골성 옆을 지나 듯 동모산 영승유적지 옆으로는 목단강이 흐르고 있다.
발해에 앞선 나라의 이름은 진국(震國)이었다고 한다. 성산자촌 입구에는 ‘진국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 성산자촌에 오심을 환영한다’는 나무로 된 아치형 문이 서 있다.
성산자촌의 마을 주민들은 동모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오십이 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는 그 곳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고 하며 왜 자꾸 동모산에 대해 묻는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조선족을 찾으니 이 마을엔 조선족이 없다고 했다. 발해의 가장 오래된 수도 였던 옛 상경용천부 영안시 발해진에는 조선족 마을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하기야 돈화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에서 조선족의 비율이 10퍼센트 정도로 가장 낮다.
동모산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는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굴된 륙정산 발해무덤군이 있다. 택시기사들도 ‘꽁쭈펀띠’(공주무덤)라고 하면 모두 다 안다. 내가 펀띠 발음을 잘못해 택시기사가 어느 반점으로 우릴 안내했다. 나의 서투른 한어발음이 택시기사로 하여금 반점과 무덤을 헷갈리게 한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현유진 성산자촌 입구에 있는 아치형 대문에 동모산이
발해진국의 첫 수도 임을 알리는 글이 쓰여 있다.
[용정의 명동촌]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가 윤동주의 서시 이고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에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분이
바로 윤동주다.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북간도 용정의 명동촌.
용정은 조선의 이주민들이 북간도땅에 처음으로 정착한 마을이다.지금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에서 조선족 비율이 67퍼센트나 될 정도로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 연길의 두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송정, 해란강,서전서숙 옛터,대성중학교,3.13 반일의사릉,15만원탈취사건 유적지,간도주재 일본군총사령관, 용정 조선은행, 주덕해생가 옛터,명동촌, 안중근의사 훈련유적지,등 등 밟히는 곳이 역사유적지다.
용정의 역사를 알고나면 왜 용정에 아직도 조선족들이 그렇게 많이 사는 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변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이다.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는 1994년 뜻 있는 분들의 의지로 복원돼 지금은 백두산관광을 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으로 정착되었다. 이 마을 노인회 회원들과 부녀회원들은
지난 해 7월부터 한국의 관광객들이 단체로 윤동주 생가를 보기위해 이 마을에 오면 농악공연을 하며 관광수입을 벌고 있다.
연길(옌지)의 북한식당
연길시에는 조선족 동포 식당, 중국식당, 한국식당, 북한식당 등이 섞여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조선족 동포 식당과 중국식당 이지만 한국식당과 북한식당도 눈길을 끈다.
최근 연길에 많이 들어서고 있는 것은 위구르식 ‘촬집’. 뀀집 이라고 도 하는 이 식당은 서민들이 가장 즐겨 가는 곳 중의 하나로 양고기 꼬치구이 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격도 싸고 맛도 있다. 양고기 맛은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맛이 아니지만 양념장으로 양고기 냄새를 없애 먹을 만 하다.
대구에도 북부정류장 인근에 ‘신장반점’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는 위구르식 꼬치와 칭따오 피주(청도맥주)등을 파는데 연길보다 훨씬 비쌌다는 기억이 난다.
물론 정통 중국요리집도 있고 개고기집도 즐비하지만 남한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건 역시 북한식당이다.
연길에 있는 북한식당은 3곳이다. 류경호텔, 해당화, 평양식당 등이 그것인데 류경호텔은 남한 사람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류경호텔의 평양냉면은 이 호텔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메뉴다. 메밀을 위주로 한 평양 물냉면은 전분을 위주로 만든 함흥식 비빔냉면보다 또 다른 시원한 맛이 있다.
연변의 개장국
[훈춘 : 두만강의 3국(북한-중국-러시아)국경에서 ]
3국(북한-중국-러시아)국경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안에서 북한, 중국, 러시아 3국 국경을 보고 싶다면 훈춘시 방천의 망해각에 오르면 된다. 훈춘은 만주어의 역음으로 원래는 '꼬리'라는 뜻이었는데 '강물 지류'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국경' 또는 '변경'이란 뜻으로 변했다.
방천은 1860년대 조선 경흥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이다. 처음 마을 이름은 버들방천 이었다가 광복이후 ‘변방의 산천’이란 뜻인 방천(防川)으로 변했다. 버드나무가 하도 많아서 버들방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연길시를 가로지르는 부르하통하도 만주어로 버드나무란 뜻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의 어머니가 유하(柳河)부인이다. 유하란 명칭은 이곳에 아주 많다. 길림성엔 유하현도 있다. 유하는 바로 '버드나무가 있는 강'이란 뜻이다. 이는 만주족인 말갈족이 우리와 같은 혈통임을 대변해 준다.
방천의 망해각에 올라 서면 두만강 너머 북한 두만강시 홍의리를 보고, 러시아의 하싼을 볼 수 있다. 북한 쪽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 지난해 압록강과 접한 집안의 맞은편 북한도시인 만포시 부근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대로 큰 숲이 있는건 아니지만 중국 쪽 산에는 나무가 많다. 나무를 다 베어 땔감을 해서 그런가? 벗은 북한 쪽 산을 바라보자니 더욱 비감하다.
이곳의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니고 누런 황톳 빛이다. 북한의 무산광산에서 배출하는 광산 폐수와 용정, 도문의 각종 공장에서 폐수와 생활오수가 모두 두만강으로 합수하기 때문에 그렇다. 두만강 푸른물은 노래에만 있는 것이다.
방천의 망해각에 올라서면 1587년 조.일전쟁 발발 5년 전,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북방 6진 중의 하나인 경흥진 조산보 만호로 근무했던 지역인 녹둔도가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녹둔도는 당시엔 두만강 하류의 삼각주였으나 지금은 섬과 대륙이 붙어 러시아 땅이 돼 버린 곳이다. 이곳 녹둔도 둔전관을 겸했던 이순신장군은 여진에 생애 첫 패전을 하게되고, 첫 백의종군을 경험한다.
이곳은 두만강 최하류 지역이라 곳곳에 사구와 모래톱이 이어진다. 녹둔도는 예나 지금이나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는 곳이다. 가끔 호랑이가 출몰해 사람과 가축을 죽이기도 하는 곳이다.
방천 망해각에 올라서 동쪽을 바라보면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보인다. 이는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큰 다리이기도 하다. 통일이 되면 철의 실크로드는이곳을 통해 러시아, 유럽으로 이어질 것이다. 대륙에 붙긴 했으나 섬보다 못한 남한이 언젠가 북한과 통일이 돼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웅비할 날이 멀지 않아 꼭 올 것이다.
[길림성 지안시]
오녀산성, 졸본성
주몽의 발길 따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BC37년 천제(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 주몽이 동부여 금와왕의 왕위계승권자인 대소의 핍박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동부여를 탈출, 연타취발의 졸본부여로 망명해 고구려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句麗國), 또는 고리, 구리, 고려, 구려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이보다 200여년이나 앞당기고 있다.
역사학계에 통설로 알려진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은, 현재 중국 요녕성遼寧省.랴오닝성) 동쪽 끝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에 있다. 이 성은 동쪽으로 길림성(吉林省.지린성)과 거의 맞닿아 있고 광개토대제비와 국내성이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길림성 집안(集安.지안)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거리상으론 가깝지만 환인(桓仁.환런)에서 집안(集安.지안)을 가려면 험준한 산악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등 교통이 불편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통화(通化.퉁화)는 이 두 곳을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도시다. 통화-환인은 차로 2시간, 통화-집안은 차로 3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환인에서 집안까지는 5시간 이상이나 걸린다.
요녕성에는 만주족의 자치현이 많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의 인구는 지금 약 1천만 명. 우리와 같은 몽골로이드로 숙신, 읍루, 말갈, 물길 등으로 불려졌던 그들은 지금 호구에만 만족(滿族)표시가 되어 있을 뿐 언어, 문화적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이 소멸됐다.
1990년에 성립된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은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인 북쪽의 신빈(新賓.신빈), 남쪽의 관전(寬甸.콴디엔), 서쪽의 본계(本溪.번시) 등과 같은 만족자치현(滿族自治縣)에 둘러싸여 있다.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에서 만주족 인구는 약 15만 명 정도로 전체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 인구는 약 8천명이다. 이곳에는 조선족 소학교와 중학교도 있다. 환런(桓仁)의 옛 명칭은 발해의 서경 압록부 소속 4주 중 하나인 환주(桓州)였다. 고구려시대엔 5부 중 관나부 지역이다.
중국성시사전에 따르면 환인(桓仁)은 ‘전국시대에서부터 진대(秦代)에 이르기까지 부여족, 고구려 부락의 활동지구로 한나라 때는 현도군에 속했다’고 한다. 또 ‘3국. 양진. 남북조에서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구려의 영역 이었다.’ 고 되어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우리나라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제 비문에 있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으로 나와 있고 중국의 삼국지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돼 있다.
그러나 홀본, 졸본, 흘승골성, 이 세 지명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몽은 추모를 한자로 옮기면서 생긴 것이고 홀본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졸본, 흘슬골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류곡은 현재 환런수웨이쿠(桓仁水庫)로 막힌 계곡이라 볼 수 있다. 옛 졸본천이자 비류수였던 강의 이름은 지금의 혼하(混河)다.
주몽이 오이, 마리, 협보 등 그를 따르는 무리와 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다가 대소의 군사에 쫓겨 엄호수에 이르러 진퇴양난의 처지가 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외치며 하늘에 도움을 청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는 비류수는 압록강의 가장 큰 지류다. 그러나 이 비류수는 지금 댐으로 갇혀있다. 졸본성 인근 비류수 중상류를 막은 환런댐은 랴오닝성에서 가장 큰 수력발전 댐이다. 1970년대 초에 완공된 이 댐으로 수많은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들이 물에 잠겼다.
최근 봄 가뭄으로 운봉댐(雲峰水庫.윈펑수웨이쿠) 상류 부근의 수량이 줄자 고구려성터와 고분 2천3백여기가 댐 바닥에 드러났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압록강 유역에는 고구려유적이 수도 없이 많다. 2006년 5월 14일 연변통신에 따르면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와 중국 길림성 집안시 청석진(靑石鎭.칭스진)의 압록강 접경에 수력발전소 2개를 잇따라 건설하기로 중국과 북한이 합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댐으로 귀중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수장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졸본성을 당나라 후기시대의 명칭이었던 오녀산성(五女山城.우뉘산청)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고구려의 백암성이 당나라의 연주성으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은 대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후기 때 명칭으로 바뀌거나 아예 고구려를 없애고 요나라, 금나라로부터 시작한다.
[대련, 려순; 요동반도] 비사성
대련의 고구려 흔적
대련의 진산인 대흑산(大黑山.다헤이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비사성은 둘레 5km, 성벽 높이 3~5m, 너비 약 3m의 가파른 산성으로, 길림성 장춘 인근 부여 농안성에서 시작된 천리장성의 끝자락이다.
비사성은 대련시 동북쪽 금주구((金州區.진조우취)에 있다. 금주구는 대련의 신흥경제개발구로 현재 외국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다. 최근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개발구에는 현재 3천66백여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이중 일본이 600여개로 가장 많고, 한국기업은 350여 개로 그 다음이다.
대련에서 비사성을 가려면 대련시민들에게 베이샤청(卑沙城.비사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보다 다헤이산산청(大黑山山城.대흑산산성)이 어디에 있냐고 하는 것이 찾기 쉽다. 비사성은 고구려, 발해인들이 부르던 오래된 산성의 명칭이었지만 요즘은 대흑산산성으로 바꿔 부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흑산은 해발 663.1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면 산세가 험해 그런지 꽤 높아 보인다. 꼭대기는 현재 중국의 해군레이더 시설이 있어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그러나 서쪽으로 난 차로를 통해 점장대에 올라서면 대련시와 발해만, 황해가 한 눈에 펼쳐진다. 대흑산은 삐쭉삐쭉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바위산이다.
대흑산 비사성은 수나라나 당나라 수군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고구려 수군과 맨 먼저 맞닥뜨리는 성이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곳이 뚫리면 바로 황해를 적에게 내주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수. 당의 수군은 비사성을 교두보로 삼아야만 장산군도를 지나 평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비사성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 본기 제9편에 따르면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며, 오직 서문으로만 올라 갈 수 있다’고 돼 있을 정도로 서쪽을 제외하곤 삼면이 가파르다.
수나라 양제 때 수군제독 내호아는 비사성을 뺏기 위해 요동반도에 상륙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고구려 군이 산성에 올라 농성전으로 버텼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태종 때는 장량이 수군을 몰아 이곳을 점령해 고구려인 8천명을 사로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패배를 함에 따라 당 군도 이곳에서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롄시내에는 러시아(사진 아래)및 일본 거리가 남아 있다. 제국주의 시대 다롄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이기도 했다.
[뤼순 감옥 ; 안중근 의사 수감]
안 의사의 발자취는 북방(동북3성)곳곳에 남아있다. 흑룡강(黑龍江.헤이룽장)성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시킨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역이 있으며, 연변에는 용정 선바위와 명동촌, 삼합, 훈춘 등이 있다. 그리고 요녕성(랴오닝)성에는 그가 처형된 뤼순이 있다. 이렇듯 북방 어느 곳이든 그의 발길과 영혼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연변에도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머물렀던 마을이 더러 있다.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도 그 중 하나다. 김약연, 윤하현 등이 살고 있던 용정의 장재촌과 명동촌은 당시 간도 이주민들의 최대 집중촌이었다. 그런데 이곳 말고도 안 의사가 머물렀던 곳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연변 훈춘시 경신진 권하세관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안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이토오를 암살하기 위한 모의를 했다는 장소다. 그러나 이곳은 역사적 고증이 안 된 ‘유령의 집’이라는 또 다른 연변 지식인들의 주장이 있다. 그들에 의하면 "안 의사가 이 마을을 들르긴 했으나 옛 집은 이미 망가졌고, 그가 거처한 장소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길림성의 성도, 장춘]
만주국과 위만주국
길림성(吉林省.지린성)의 성도(省都) 장춘(長春.창춘). 봄이 일찍 온다고 붙인 이름이다. 일설엔 봄과 여름이 겨울에 비해 짧아 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창춘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구는 약 700만. 창춘시내 인구는 약 4백만 정도다. 이곳에 사는 재중동포는 약 4~5만 정도. 연변이 지린성내에 있기 때문에 지린성 정부엔 동포간부가 많이 포진해 있다. 한국인은 약 3000명 가량 살고 있다.
장춘시 조양(朝陽.차오양)구 정부는 2004년 6월부터 계림로와 목단가 일대를 한국인 상업특구로 개발해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특구는 계림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인민대가에서 서쪽 신민대가까지, 남쪽은 자유대로에서 북쪽 동광로까지로 면적은 1064평방킬로미터다. 현재 차오양구 코리아타운에는 한글간판이 있는 60여개의 한국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도시의 역사는 인근 지린시보다 훨씬 짧다. 1954년 9월 중국인민정부는 지린시에서 창춘시로 성도를 옮겼다. 고구려, 부여의 역사유적이 산재한 지린과 달리 이곳엔 고대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1930년대 일제 때 지은 건축물을 비롯한 근대 유적들이 많다. 약 2천년 전에는 관성자(寬城子)라는 부여의 궁궐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38년 푸이가 위황으로 있던 강덕 5년 만주국은 창춘에 중국 최초로 영화촬영소를 세웠다. 당시 명칭은 만주영화협회다. 1945년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접수해 둥베이영화사로 바꿨다. 1955년 동북(東北.둥베이)영화촬영소는 장춘영화제작소로 변경되었다.
장춘은 일제 치하 만주국(1932~1945)때 신경(新京)으로 불렸다. 신경(新京)은 만주벌판에 세운 철저한 계획도시로 기본설계부터 조경까지 모두 일제가 구상한 신 수도였다. 원형은 훗카이도 삿포르를 본떴다고 한다.
특히 남방 한족들은 더 그러하다. 중국 한족은 북방이민족에게 항상 시달렸다.근세엔 서구열강과 일본에 당했다. 그러나 역사의 치욕을 인정하는 대신 잊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을 본 딴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현 지린성 공산당위원회), 만주국 국무원(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白求恩)의 이름을 딴 현 백구은 의대 기초의학원), 검찰청(현 인민해방군 제461의원), 교통부(현 백구은 의대 예방의학원), 사법부(현 지린대 신민학교), 경제부(현 지린대 의대 제3임상학원), 군사부(현 백구은 의대 제1임상학원), 외교부(태양회 레스토랑), 중앙은행(현 인민은행 지린성 본사), 전신전화국(현 지린성 전신공사 본사)등이다.
이 밖에도 창춘엔 일제 만주국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2기)과 이한림 전 건설부장관(2기)등이 다녔던 만주 군관학교는 장춘시 라라툰(蘿蘿屯)에 있는데 현재 인민해방군 탱크학교(장갑병기술학교)로 돼 있다. 그 외 동양척식회사, 만선척식회사, 위만 건국대학교, 등 백여 개가 넘는 만주국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제의 만주국을 만주국으로 쓰지 않고 빠짐없이 가짜라는 의미의 ‘위(僞)’자를 붙여 위만주국으로 일컫는다. 즉 ‘만주국은 없고 거짓’이라는 의미다. 또 그들은 공식적으로 만주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동북3성으로 부른다.
중국인에게 만주는 청나라의 중원 정복을 떠오르게 한다. 만주라는 지명을 사용하면 청나라와 현재의 중국을 동일시해 국가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다. 가깝게는 만주국을 앞세운 일본의 침략을 연상케하기 때문에 만주라는 말을 쓰는 것을 극구 꺼려한다.
중국인의 민족분류에도 '주'자를 빼고 만주족이 아닌 만족(滿族)으로 기재돼 있다. 한국인들이 무심코 쓰는 만주벌판은 중국인들 사이엔 동북평원일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라는 명칭을 고수한다.
만주라는 명칭은 원래 청 태조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우면서 자신을 만주 칸(Khan)이라 한데서 유래한다.1635년 청 태종 황타이지는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개칭한 뒤, 만주는 점차 부족명칭에서 지역 명칭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왔다.
황타이지는 북방에 살던 여진족과 오르천족, 허저족, 어웬커족, 따우르족, 몽골족 등 북방민족과 조선족 등을 복속해 만주족으로 통일했다. 여기서 재중동포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들이다.
유럽은 만주를 지명으로 쓰지 않고 족 명으로만 썼다. 즉 유럽인은 만주의 본래 용례대로 만주족을 ‘만주(Manju 혹은 Manchu)’라고 칭하고, 만주지역은 ‘만주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만추리아(Manchuria)라고 칭해왔다. 아직 웹스터 영어사전엔 만주가 'Manchuria'로 돼 있다.
만주는 요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나눠졌지만 곧 동북3성이 만주로 돼 갔다. 만주는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우리 선조들의 발상지였으므로 우리는 만주도, 동북3성도 아닌 ‘북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남만(南滿) 철도를 양도받았다. 그 후 창춘 지린 등 16개 도시를 개방시켜 일본인의 통상과 거주를 자유롭게 하면서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야금야금 만주의 지배권을 넓혀갔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뒤 1932년 3월 1일 일제의 만주국을 세웠다. 그들은 만주지역에 먼저 만주친일정권을 세우고 만주국을 독립시킨 후 결국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일본, 만주족, 한족, 조선인, 몽골족 등 다섯 민족이 화합하는 ‘오족협화 왕도낙토건설’이란 미명아래 북방지역을 마구 수탈했다. 일제는 3살 때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올랐으나, 1912년 신해혁명 때 쫓겨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의 초대 황제로 삼았다. 그리고 중국인을 국무총리 및 각 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사령관이 태상황으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주국은 13년째 되던 1945년 멸망했다. 위만주국 위황궁의 주인이었던 위황 푸이도 일본이 망한 뒤 중국을 접수한 공산당의 인민재판을 받고 10년간 랴오닝성 푸순전범관리소에서 복역하던 중 석방되었다.
그 후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저우언라이(주은래)의 배려로 역사 집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6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1987년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석권한 베르나르도 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장춘 위황궁 동덕전에서도 촬영됐다.
장춘시내에서 동북쪽 변두리 광복로(光復北.광푸베이)에 있는 위황궁(僞皇宮.웨이황꿍)은 12만평 정도의 위만주국 궁궐이다. 위만주국의 얼굴마담격인 푸이 황제는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 궁궐은 푸이가 어릴 때 살았던 베이징의 자금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황타이지가 머물렀던 선양의 고궁에 비할 바도 못 된다. 그러나 위황궁은 장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됐으며 현재 지린성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위만주국 위황 푸이가 살던 곳.
창춘 문화광장 인근에 있는 옛 만주국 국무원 건물이다. 지금은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白求恩)의 이름을 딴 백구은 의대 기초의학원으로 돼 있다. 그의 전신상이 건물 앞에 있다. 이곳은 만주국의 최고행정기관이었다. 건물 앞엔 만주국에 복무했던 중국인 한간(漢奸.민족반역자 또는 매국노)들의 사진과 행적이 자세하게 전시돼 있다.
일본 토쿄의 국회의사당을 본떠 1936년에 완공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다..
당시엔 총 연장 6km의 지하통로가 창춘역과 관동군사령부와 연결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됐다. 지금은 의과대학 실험실로 이용하고 있다.
[만주군관학교]
신경군관학교. 옛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자리다. 이곳은 선양의 봉천군관학교와 함께 만주국 장교를 길러내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쓰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은 땅크학교라 부른다.
이 학교 출신 조선인들중에는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를 비롯해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만주군 헌병 대위), 백선엽(봉천9기·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 김석범(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등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 교의·중령)과 김창룡(관동군 헌병교습소·헌병오장)도 만주 군맥의 일원이다.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한 제3공화국은 만주 출신 군인들이 주도했다 할 수 있는데, 세력의 태생적 배경인 일본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통치 시절 만주국에 5족 협화의 미명 하에 만주 군관학교와 관리양성기관인 대동학원을 세웠다. 수많은 일본인들과 식민지의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박정희 또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서, 그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일본 내의 정계 인사들(대표적으로 기시, 야쓰기, 고다마) 사이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외교재개에 대한 기대가 일었다. 그리하여 만주인맥의 영향력은 후일 일본과의 외교정상화 과정에서 일본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인사들이 물밑접촉을 가진 사실이 드러남으로써도 알 수 있다. 박정희의 군정은 미국 정부의 인정이 매우 필요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국의 극동전략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즉, 미국은 일본, 대만과 우리나라를 자유주의 진영의 전초로 삼으면서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 바, 일본과 우리나라가 외교를 재개하여 우호를 다지는 것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동북아의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길이었던 것이다.-
한국상업특구는 계림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인민대가에서 서쪽 신민대가까지, 남쪽은 자유대로에서 북쪽 동광로까지로 면적은 1064평방킬로미터다. 사진은 특구의 표지석과 상징물이다.
[하얼빈]
하얼빈의 한 호텔에서 바라본 하얼빈 시가지 모습. 러시아풍 건물이 많은 매력적인 도시다.
하얼빈은 만주어로'그물을 말리는 곳'이다.
겨울을 파는 하얼빈
한국인들이 ‘하얼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안중근 의사일 것이다. 하얼빈은 또 일제가 인간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 마루타부대가 남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인구 400만이 넘는 흑룡강성(黑龍江省.헤이룽장성)의 성도로 중국 8대 도시 중 하나다.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마당’이라고 불리는 이 하얼빈은 도시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특히 하얼빈시 중심인 중앙대가의 러시아풍 건물들은 과연 중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색적이다. 거기에다 겨울이 되면 거리 곳곳에 눈과 얼음으로 만든 온갖 예술조각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겨울 하얼빈의 압권은 빙등제다. 빙설대제라고도 하는 이 축제는 하얼빈의 겨울추위 상품이다. 연평균 영하 20도가 넘는 도시의 겨울을 특화한 것이다.
빙등제는 1963년부터 열리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제1회 하얼빈빙설제가 열리면서 부터다. 하얼빈시를 가로지르는 쑹화강의 단단하고 흰 얼음과 자연설을 이용해 거대한 얼음과 눈 조각상을 만들고 야간엔 형형색색의 조명을 밝혀 장관을 연출한다.
송화강(松花江.쑹화장)의 얼음은 조각품들의 무진장한 자원인 셈이다. 매년 1월 초에서 2월 말까지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일본의 삿포르 눈축제를 제치고 독일 뮌헨의 맥주축제인 옥토버축제와 브라질의 리우카니발과 함께 세계3대축제로 손꼽히기도 한다.
2005년 가을 지린성 지린시의 화학공장 폭발로 죽음의 강이 되어버린 쑹화강이 겨울을 맞아 꽁꽁 얼어붙었다.
쑹화강의 얼음은 빙등제 얼음조각의 무진장한 자원이다.
[길림성 지안] 광개토태왕릉
장수태왕릉에서 바라본 광개토태왕비와 릉.
허물어져버린 광개토태왕릉 위로 철제사다리가 놓여 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태왕의 묘실에 이른다.
장수태왕능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태왕릉.
장수태왕릉 뒷면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해 무덤을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랴오닝성 등타시 시따요에 있는 백암성. 1천 4백 여년이 흐른 지금도 옛 위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구려의 옛 산성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백암성에도 훼손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 성벽의 훼손이 가장 심하고 북쪽 성벽에도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 있다.
|
| ||||||
| |||||||
[ 지안 : 광개토태왕비]
|
* 박진관 기자의 연변기러기 중에서 요약 발췌 한 것임
[ 박진관 기자의 연변기러기 ]
첫댓글 잘 보았읍니다
역사 공부 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