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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정류장
마선숙
창동 버스 정류장은 나와 자식의 고향
딸은 엄마인 내게 걸핏하면 대들었다. 엄마도 자기 자신을 가꾸며 나름대로 인생을 설계하는 여자로 살라고 충고(?)했다. 딸이 보기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였다. 늘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신문 한 장 읽지 못하는 내가 딸 입장에서 보면 딱하고 안쓰럽고 그러다 보면 화가 나서 신경질을 부리는 것 같았다.
딴은 이십 년을 도시락 장사하는 것처럼 살았다. 육 남매의 맏이로 시집 와 시부모님과 시누 시동생 우리 애들까지 열한 식구 살림을 했으므로 아침마다 도시락을 대여섯 개 씩 싸느라 나를 돌아볼 수 없었다. 대식구라 당연히 쪼들려 우리 애들은 그 흔한 학원 한번 못보내고 틈틈이 집에서 공부시킬 수밖에 없었다. 빠듯한 살림이라 구루마에서 파는 옷 아니면 입혀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의 유일한 행복은 버스 정류장에서 아들, 딸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엄마로서 자식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처음엔 애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은근히 구속한다며 일부러 늦게 오기도 했다. 그러나 말없이 산처럼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창동 버스 정류장 나무에 기대서서 우리 애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자식들이 곧 버스에서 내릴 것이라는 기대는 무척 나를 설레게 했다. 또 애들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몰랐다. 그 습관은 계속 이어져 애들이 대학 다닐 때도 집에 전화만 해주면 지하철역 앞에서 애들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랬던 아들과 딸이 어느덧 장가 들고 시집 가 내게 친손주와 외손주를 안겨주었다.
세월 흘러 요즘의 딸은 친정에 올 때마다 예전과 다른 소리를 해서 나를 웃게 만든다.
"엄마처럼 살지 않는 게 나의 꿈이었어. 늘 밑지고 손해보는 엄마를 이해 못했어. 그 많은 식구들 의견을 다 존중하고 사는 엄마가 바보 천치 같았어. 그런데 요즘 내가 자신도 모르게 엄마처럼 살고 있는 걸 깨달았어. 밑지는 장사가 남는 장사고 바보처럼 사는게 꼭 바보는 아닌가봐."
딸은 그동안 엄마한테 횡패(?) 부린 게 미안한 듯 쑥스럽게 웃었다. 여성학을 부전공한 딸은 첫 시집 제사 때 밤새 울었다고 했다. 알지도 못하는 남편 조상 제사를 지내고 새벽까지 설거지하느라고 다리가 퉁퉁 부었는데 남편은 자기 형제들과 화투하는게 억울하고 부당해 속이 뒤집혔다고 햇다. 평소 자식한테 남편 성과 자기 성을 붙여 주겠다고 주장하던 딸애였다. 외손주가 놀이방서 배워 온 "엄지는 아빠 손가락, 검지는 엄마 손가락"이라는 노래에 분개해 "검지는 똑같이 엄마 아빠 손가락"으로 노래 가사를 바꾸라고 서슬퍼렇게 항의하던 딸애였으므로 이해되고도 남았다.
"엄마한테 반말해서 강하게 똑 부러지게 살겠다고 여성학을 부전공했어.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지켜준건 여성학이 아니라 엄마의 바보같은 사랑이었어. 어릴적엔 버스에서 내릴 때 엄마의 꾀죄죄한 모습이 챙피했어. 늘 김치 냄새나는 엄마 옷차림을 동무들이 볼까봐 쉬쉬 했었어. 그렇지만 엄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른 길로 새지 못하고 꼬박꼬박 집으로 오게 되더라구."
딸애는 말을 마치고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엄마때메 우리는 탈없이 바르게 성장해 제 앞가림 하지만 엄마는 이제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 엄마 허리가 날로 구부러지는 것 같아 슬퍼."
"엄마는 너희들이 올바르고 건강하게 커준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나는 복이 많은 것 같았다. 자식을 무사히 낳고 키워 짝 맞춰주기까지는 험한 산을 등반하는 것과 똑같다. 유난히 힘든 입덧과 진통, 스물네 시간 잠못자고 보살펴야하는 유아기. 그리고 무사히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부닥치게 되는 대학입시. 간신히 대학입학에 성공하면 또 앞을 가로막는 군 입대와 취직이라는 거대한 벽. 인생은 장애물 경주라더니 도처에 도사린 암초와 함정에 산산조각 나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한 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데 무사히 모든 난관을 뚫고온 자식들이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 늘 안개 속을 헤매는 두려움과 싸워야하지만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면 꿋꿋이 헤쳐나가겠지 하고 믿었더니 그대로 되는 것 같다. 자식은 믿는만큼 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내 생일날 식구들이 다 모였었다. 그 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로 생일 선물을 한턱 하려는지 "우리 어머니처럼 착하고 부드러운 시어머니 만난 건 내 복이야"하고 진심인지(?) 빈 소린지 좌중을 웃겼다. 그러자 아들이 냉큼 제 처 말에 반박했다.
"몰라서 그렇지 엄마는 철의 여인이야. 지독하게 잔인해. 엄마가 늘 정류장서 우리를 기다려 영화관으로 뺑소니도 못치고 자석처럼 끌려 왔다니까. 나쁜 길로 새지 못하게 꽁꽁 우리를 묶는 밧줄이었다니까. 엄마의 소리없는 무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구."
식구들은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이 도시락 싸고 김치 담그고 고추나 말리던 내게도 잔인한 데가 있었다니 애들한테 미안한 것 같기도 했다.
요즘의 가정은 Home이 아니고 House라고 한다.
다소 잔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들이 옆길로 새지 않은 것에 위안하며 애들의 자유를 박탈한 미안함을 상쇄하려 한다.
House가 아닌 Home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면 더 잔인할(?) 용기도 있으니 어떤 의미에선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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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들 꽃
장옥자
지난 봄 식목일을 하루 앞둔 날 저녁에 나는 포항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함께 가겠다던 남편도 아이들도 떼어 놓은채 친정가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무거운지 버스에서 그만 내려버리고 싶었다.
"이왕 결정된 일이야 그러니 너무 심란해 하지 말고 오빠 의견에 따르도록 하자."
좋은게 좋은게 아니냐며 나에게 기분좋은 얼굴로 내려오라고 언니는 신신당부를 했다.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건 아니지만 재작년부터 오빠가 부모님의 산소를 이장하겠다는 말을 흘렸을 때 언니와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잘 계시는 부모님을 다른 자리로 모신다는 게 영 마뜩찮았다.
'묏자리 때문에 오빠 사업이 안 풀린다구?'
'묏자리 때문에 막내 녀석이 사법고시 5년차로 남아있다구?'
오빠 사업이 지지부진한 건 IMF 때문이었고, 그 후론 슬럼프를 딛고 일어설 본인의 의지가 약했던 탓이지, 그것이 어찌 묏자리 탓이란 말인가. 또 동생 녀석이 잘 다니던 직장 팽개치고 사법고시판에 발 디딘건 순전히 자신의 의지이며, 고전하는 것 또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남들보다 노력을 덜했거나 하는 문제이지 산소 잘못 쓴 탓 할 이유가 딸인 내가 보기엔 조금도 타당해 보이지 않았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하는 오빠의 태도 때문에 그간 속내가 여간 불편했던 게 아니었다.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이방인처럼 낯설어 보였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땅속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내일이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셔야겠구먼요.'
친정에 도착하니 이미 한방중이 되어 있었다.
이튿날 작업은 아침 6시부터 시작되었다. 포크레인의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골리앗같은 육중함이 지나가는 자리엔 이름모를 풀꽃들이 놀라서 파르르 떨며 쓰러져 갔다.
부모님은 우리 4남매가 다녔던 초등학교 뒷산에 누워 계신다. 전형적인 배산임수는 아니여도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추억하며 굽어 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이다. 부모님으로서는 이만한 자리도 없을거라며 행복해 하실지도 모르는데...
고인이 되신지 16년 째인 아버지의 모습은 앙상하게 남은 유골뿐이었다. 칠성판에다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런히 누이시고 수의를 덮었다. 어머니 산소를 작업하던 오빠는 별안간 나를 향해 한 쪽으로 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동생조차도 떠밀다시피 나의 접근을 막았다. 평소 심장이 약해 놀라기를 잘하는 나를 배려해서이긴 하겠지만 도대체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 있기에...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어제 저녁 고속버스 속에서도 줄곧 어머니는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 얼마나 궁금했던가! 어쩌면 '세상 모르고 참 잘 잤네!' 하시며 관속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는 '전설의 고향'같은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바보같지만 나는 그런 상상도 안해본건 아니었다.
"나 괜찮아, 엄마를 만날거야. 나도 엄마를 만나고 싶어."
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 다가섰을 때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이 딱 멈춰버린 듯 옷 입은 채로 실례까지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7년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자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다시 염습을 하기 위해 축축한 수의를 풀어냈을 때, 7년 세월이 정지되어 버린양 어머니는 거의 그대로 계셨다. '세상에, 이럴수가!'
우리 4남매는 오열했다. 오빠와 동생은 어머니께 새옷으로 갈아 입히셨다. 뽀송뽀송한 수의로 갈아 입으신 어머니는 새로 준비한 관속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와 두 번째의 이별을 하셨다. 30분 남짓한 거리에 마련된 묘소에 부모님을 안장시켜 드렸다. 잔솔가지 밑으로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을 한다발 꺾어다 방앞에 가지런히 놓아드렸다.
'어머니 새집이 마음에 드시나요? 이제 습기 축축한 곳에 누워 계시지 않아도 되겠구만요. 우리 4남매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게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늘 독백 속에 갇혀 버린다. 다듬잇돌을 얹어 놓은 듯 무겁던 그간의 마음들이 토슈즈를 신은 어린 발레리나의 몸짓처럼 가벼워졌다.
산을 내려오다 발밑에서 함초롱히 웃고 있는 노오란 뱀딸기 꽃이 보였다.
지난 여름 포항까지 갔으면서도 비가 너무 많이 와 부모님 산소에까지는 가지 못했다.
지금쯤 부모님 계시는 곳에는 들국화 쑥부쟁이가 만발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어머니의 미소를 닮은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그 곳에 가고 싶어진다.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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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1-정류장
한경민
낭패란 느낌을 가질때가 종종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사소한 낭패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2호선을 갈아 탈 때가 그렇다.
나는 걷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2호선을 타야할 땐 항상 4호선 맨 뒷칸에 자리를 잡는다. 집이 4호선 삼선교 역에 있이 때문에 세 정거장만 가면 된다. 지하철에 타서 왼쪽 문 옆에 바짝 기대어 유리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머리를 만지면 금세 동대문운동장역에 도착이다.
"이번 정거장은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역입니다. 2호선을 갈아타실 승객은 이곳에서하차 하시기 바랍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언제나 똑같이 들리는 기계음을 따라 2호선을 갈아타야 하는 사람들은 준비 자세에 취한다. 4호선 제일 뒤 칸에 타는 사람은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기 바쁘다. 맨 앞에 선 사람은 지하철이 왔든지 안 왔든지 관계 없이 뛰기 바쁘다. 4호선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는 2호선을 탈 때 정확한 계단의 수는 알지 못하지만 한 호흡에 달려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의 수이긴 하다. 무조건 제일 먼저 내린 사람은 그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먼저 올라간 사람을 뒤쫓아 올라간다. 차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 뛰어 올라가면 생각할 겨를 없이 뛰기에 바쁘다. 모든 사람들이 뛰기에 뛰는 사람이 대부분이겠고, 빨리 갈아타고 어딘가 중요한 일을 봐야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혼자 걸어 올라가다가 차를 놓칠까봐 우선 뛰고 보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뛰는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같이 뛰는 경우가 많다. 앞에 뛰는 사람이 2호선이 온다는 기계음을 들었구나. 곧 지하철이 오는구나. 놓치지 말자. 그런데 번번히 힘들게 올라 갔을뿐 지하철은 대기하고 있거다 곧 오겠다는 싸이렌도 들을 수 없다. 정말 낭패를 본 것 같은 마음이 든다. 4호선에서 2호선을 갈아 탈 때마다 뛰지 말고 천천히 올라가자 생각하지만 모두들 뛰어 올라가기 때문에 나도 뛰어올라 간다. 그보다 뛰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올라 갈 여유를 찾을 수 없다. 내가 걸어 올라가기 때문에 뒷 사람은 짜증을 내고 나를 피해서 올라가다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 사람이 생길줄 모른다. 그래서 같이 뛴다.
한번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난이 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번번히 낭패감을 느끼는 그 상황을 놓고 장난기가 발동하여 실행을 준비했다. 사람이 많이 타는 시간을 골라서 4호선 맨 뒷자석에 평소 때와 같이 비치는 유리에 내 모습을 정돈한뒤 한치에 오차도 없는 기계음을 듣고 문이 열려 뛰기 시작했다. 장난을 치기로 한 날 만큼은 뛰는 목적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난이다. 그래서 평소때보다 더 빨리 숨이 콕콕 막히도록 열심히 뛰었다. 역시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체 내 뒤를 열심히 뛰고 있다. 앞 사람이 뛰니까 차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열심히 뛴다. 당연히 2호선 지하철은 대기하고 있지도 않고 곧 오겠다는 빨간 신호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낭패감에 대한 보상을 느꼈던 경험이었다. 난 무작정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마음을 정돈 시켰다. 오늘도 이 지하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태우고 똑같은 곳을 지나게 될 것이다. 각자의 목적에 맞는 정류장에 내려 줄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을 말이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목표가 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오로지 한 가지 목적과 계획만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앞에서 달리니까 내가 생각할 시간없이 쉬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나대로 느리게 여유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세상은 느리게 가는 사람들을 귀찮아 하고 미련한 사람들이라며 걸리적 거린다고 한다.
그런데, 각자마다 자기가 가야할 정류장이 있는 것을 왜 앞선 사람들이 바쁘게 뛰던 모습으로 살지 못하면 참으로 게으른 사람이라 하는 걸까? 오히려 앞선 사람이 뛴다고 해서 무리하게 뛰어가는 사람보다 느리게 가더라도 자기가 가야 할 목적지에 숨이 차지 않게 가는 사람이 더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사람들은 참 여유가 없다. 나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바른 음성을 쪼아 살고 있는 걸가? 정도의 고민은 하면서 살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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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2-들 꽃
이종숙
고향집 뒷동산에는 임자없는 무덤 세 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을 묏분단이라 불렀는데, 무덤이래야 반은 허물어지고 주저앉아 어느 누구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낮은 언덕빼기의 흙더미쯤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따뜻한 햇살이 비치고 잔디가 고르게 자란 그곳은 새삼 무섭거나 두렵지도 앉은 무덤터였다. 그래서 철마다 그곳은 우리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그러나 집집마다 한가위가 다가와 조상님께 성묘를 할 때가 되면 마을 어른들은 빼놓지 않고 임자없는 무덤에 풀을 베어 주었다. 따로이 약속을 정해서 순번을 메기지 않아도 당연히 벌초는 이루어 졌고 그런 날이면 우리 극성맞은 장난꾸러기들도 무덤의 임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묏분단에 올라가지 못했다.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나는 들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우물물을 긷기로 하고 집안의 잡일을 맡아 했다. 운좋게 일이 일찍 끝나면 묏분단이 비탈진 언덕길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일을 삻은 고구마를 일부러 들고 나가 묏분단 잔디에서 먹던일이었다. 그 일은 언니와 나의 작은 만찬이고 들놀이 나온 기념 성찬이었다. 늦여름이 되면 아침, 저녁으로 가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맘때가 되면 묏분단 한 쪽 가에는 노랗고 가느다란 줄기의 키다리 꽃이 피었다. 마을 어른들이 구석구석 벌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숨었었는지 유난히 키 큰 꽃은 해마다 그 자리에서 피었다. 가는 줄기에 작고 노란 구슬을 하나씩 꿰어 놓은듯 했던 그 꽃이름이 마타리임을 안 것은 훨씬 뒤였다. 다가가 코를 대고 킁킁 거려도 특별한 향기를 맡지 못했는데 가끔은 얼룩무늬 나비가 날아와 앉았던 것을 보면 언니와 내가 맡지 못했던 감춰진 향기가 있던 것 같았다. 내가 큰 키의 언니가 마타리를 닮았다고 하면 언니는 애꿎은 마타리의 긴 목을 꺾어 냈다. 지나치게 수수한 그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타리처럼 그렇게 가냘픈 몸을 가졌던 언니는 집안 형편으로 어릴 때부터 일을 해야 햇다. 기숙사가 딸린 작은 섬유공장으로 언니가 취직을 한 뒤로 우리는 더 이상 묏분단에서 놀지 못했다. 다만 언니 생각이 날 때마다 혼자 파란하늘을 보며 앉아 있엇다. 그때의 하늘은 참으로 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간간이 집에 오던 언니의 소식이 끊겼다. 아무도 모르는 언니의 소식을 기다리며 엄마의 한숨은 깊어갔고 나는 사춘기의 방황속에 있었다.
네 해 만에 돌아온 언니는 혼자가 아니었고, 갑자기 십년을 뛰어넘은 듯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마타리 같던 가는 몸은 세 배나 되게 부풀어 있었고 더 이상 잔디밭의 추억을 떠올릴 수 없는 억센 풀이 되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고단한 몇 해를 힘겹게 살던 언니는 어느날 혼자가 되어 마타리처럼 세상의 한 구석에 섰다. 언니에게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는 들꽃처럼, 가는 몸을 한 채 초라하게 서 있었다. 나는 언니 옆에서 마타리 향을 맡듯 그렇게 코를 킁킁거리며 서 있었다. 역시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마른 바람처럼 버석거리는 언니의 건조한 목소리 속에 나비가 맡았음직한 불분명한 향으로 새로운 출발의 신호를 들려줄 뿐이었다.
옷 가방을 들고 언니는 안산행 전철에 탔다. 이제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듯한 눈빛으로 미싱사가 되기 위해 떠났다. 흐린 내 눈에서 전철이 멀어져 갔다. 남은 기찻길만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화서역 광장에서 바라본 들 길에는 이른 가을을 맞이한 풀잎을 보았다. 가끔 풀사이를 헤집고 나온 여뀌꽃의 희고 붉은 빛이 너무나 선명했다. 저 작은 들꽃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아침, 저녁으로 갑자기 낮아진 기온을 생각하면 머지안아 저 들도 질 것이다.
떠나고 난 뒤 언니는꼭 한번 전화를 했다
"나 잘있어 그런대로 편하니까 공연히 내 걱정에 마음 쓰지마"
나는 알았다. 마타리처럼 은은한 향이 언니에게 숨겨져 있었음을..
동생이 혹여 자신으로 하여 괴로울까봐 오히려 안심시키는 마음, 은은한 향을 품었다가 그 향이 꼭 필요한 나비에게 오롯이 주었던 마타리꽃처럼 언니도 그랬었구나.
지천으로 고향의 들판을 덮었을 들꽃들이 이제 제 삶을 갈무리하고 있겠지.
언니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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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3-어머니의 들꽃
유혜경
문을 열자 쑥 내미는 어머니의 손에 들꽃이 한 묶음 들려있다.
"어머니 왠 꽃이예요?"
"자 선물이다 너 가져라"
방긋 웃는 어머니의 눈이 말갛다.
"아 이뻐요 어머니 너무 이뻐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면서 꽃병에 물을 담고 어머니의 눈가는 곳에 놓아 드린다 노인정에서 화투를 치며 노시는 줄 알았는데 오늘도 어디를 다녀 오신걸까
어제도 어머니는 먹지도 못할 나물을 잔뜩 뜯어서 치맛자락에 감싸쥐고 들어오셨다. 며칠 전에는 그러시는 바람에 남편까지 난리를 부렸었다. 너무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하다가 내가 먹을테니 무쳐서 달라는 어머니 말씀에 가슴이 콱 메여 온다. 알겠다면서 차마 어머니 보시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소쿠리에 담아 베란다에 두었다. 서른 셋의 한참 나이에 홀로되어 7살, 4살 태어난 지 49일된 자식 셋을 잘 키워내신 어머니다. 대차게 사셨던 당신의 과거가 너무나 떳떳하여 자식들에게도 늘 당당하셨다. 자식에게 고맙게 해준 사람에게는 빨래라도 해주어 마음의 빚을 남기지 않으셨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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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1-정류장
박명숙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무일 없이 순탄하게만 살아지진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몇 번 시련의 매듭으로 묶여진 시간들도 있을 것이고, 기쁨의 절정도 있을 것이다. 작은 정류장도 있을 것이고, 큰 정류장도 있겠지만, 그 중에 시련의 시간들 속에서 그 순간들을 잘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그 시간들, 그것은 긴 시간 속에서의 인생의 큰 정류장이 아닐까 한다. 내게도 그런 시련들이 있었고, 인생의 정류장에서 새로움을 향한 차로 갈아 탄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몇 해전 가을 어느날
내게는 참으로 슬픈일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갔으며 그로 인한 상처로 난 무척 많이 방황을 하며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눈물로 고개를 떨구었고, 바람에 나뭇이이 내 옷깃을 스치며 후르르 떨어져도 그 나뭇잎을 주어 들고 함께 가슴 져려오는 서글픔에 온 몸을 떨었다. 내게는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해도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헤어나야 한다고 하면 할수록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갔고, 집에 틀어박혀 멍하니 창문 앞에 앉아 나의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나를 주체못하고 슬픔 그 자체에 나를 맡기며 한없는 절망에서 허우젹댔다. 어느날은 밖으로 뛰쳐나와 목적도 없이 마냥 걸어 다녔다. 집앞 큰 길 가로수 밑에 서서 지나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들 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라고 생각하니 더 큰 고통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의 시간, 그리고 옆으로의 시간들을 아득히 밀려오는 그리움과 함께 어린시절을 생각했고, 학창 시절의 봄날같이 따사로운 꿈들도 떠올랐으며 맑은 정신의 소유자로 살고 있었던 젊은 날의 나의 싱싱했던 날들도 생각났다. 그 순간 이대로 이 시간 안에 갇혀있는 이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떠나간 시간과 떠나간 사람의 그림자를 붙들고 아쉬움 속에 시간을 보낼 수 만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나니 이미 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삶에 내 마음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의 한 정류장을 지나갔으며 또 다른 방향으로 나의 삶의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한 정류장에 오래 머물렀던 기억도 있고 금방 떠나왔던 정류장도 있다. 슬픔이 배인 정류장만 있는 건 아니다. 대학교에 합격하던 날은 내 인생의 화려함이 기다릴 것 같은 정류장이었고, 그 것은 내가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길을 열어 주었다 결혼이라 큰 정류장에서는 함께 떠날 사람과의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하는 큰 의미가 있었다. 정류장이란 시간의 의미는 그 곳에 머물러 있게도 하고 그곳에서 떠나게도 한다. 아주 먼 곳으로 밝고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도 있고, 어둡고 침을한 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미 떠나왔다고 흐르는 시간에 맡겨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의 삶보다는 자신의 조그만 정류장을 만들어 좀 더 밝고 맑고 푸르른 곳을 향하는 멈춤의 의미로서의 정류장도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은 너나 할 것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살고 있으며 신문이다 방송이다 컴퓨터다 하면서 쏟아지는 정보와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쫓아가느라 숨이 턱에 차도록 헉헉대며 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겐 멈춤의 작은 정류장에서의 휴식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우리네 삶 속에는 크든 작든 내 뜻이 아니던 내 뜻이던 어떤 모양으로 든지 정류장이 있다. 아름다운 삶의 방향으로 향할수 있는 '시간의 멈춤으로서'의 정류장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의 빛나고 멋진 삶을 위하여, 정류장에서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힘을 내어 힘껏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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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청계천의 흔들리는 육교
최명순
시부모님은 청계천의 평화시장과 신발 상가 사이 육교위에서 노점을 하셨다. 아버님은 신발장사를 하셨고, 어머님은 그 옆에서 군밤장사를 하셨다. 두 분은 6.25 때 월남하시어 가정을 이루셨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고 생선장사며 안해 본 것 없이 전전하시다가 청계천까지 흘러오셨단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많이 끓는 곳에 돈다 많을 것이란 신념으로 두 분은 흔들거리는 육교위에서 장사를 하셨고, 그 곳이 삶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젊음을 보내고, 자식들 다 키웠을 때였다. 그러니까 24년전 아버님은 시장 사람의 보증을 섰고 그것이 잘못 되어 그동안 눈 비바람 맞으며 모은 돈 다 없어지고 오히려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 홧병으로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지만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든가 뒤 이어 어머님은 뇌졸중으로 중풍을 맞았고 반신불수의 몸이 되셨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 연년생의 아이가 셋이었고 남편도 직장을 잃고 살 곳 마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청계천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어이 청계극장 뒤 골목에 셋방을 얻어서 살게 되었다. 그것은 당신의 병이 나으면 군밤장사를 해야 한다는 집념이셨다. 어머님은 지팡이를 짚고 하루 한번씩 흔들리는(출렁이는) 육교 군밤 장사하던 자리에 올라와서 앉아있다 오시곤 했다. 하지만 중풍이란 병의 특성상 완치란 어렵고, 오히려 깊어만 갔다. 그때 어머님의 연세가 51세. 조그만 사각의 방안에서 외롭게 지내야 하는 세월이 그렇게 길 줄이야 당신인들 알았으랴.
친구들도 멀어지고 이웃도 꺼려하고 자식들도 점점 지쳐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둘째인 우리에게만 의지하셨다. 따라서 난 어머님의 회생을 위해서 오리도 잡아서 피를 먹여드리고 벌침도 맞혀드리며 하느라고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나도 며느리로써 의무만 다할 뿐이었다. 어머님은 언제나 지팡이를 짚고서 내가 손수 잘라준 짧은 머리로 청계천 골목 길을 느릿느릿 그림처럼 걸어다니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지저분한 골목길을 15년동안서성이셨다. 그 곳은 어머님의 젊은 세월이 잠들어 있음이리라.. 어쩌다 혼자서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쪽으로 돌아가는 입으로 실쭉실쭉 웃으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이상한 할머니라고 놀리기도 해서 속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동안의 나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처음엔 사실 어머님이 그렇게도 미울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당신의 지금이 먼훗날 내모습이며 나도 늙어가는데 하는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렇게 15년이 흐른 어느날, 어머님은 나의 손을 잡으시며 청계천 육교 출렁거리는 육교에 군밤장사하던 자리가 꼭 한번만 보고싶다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50분을 걸어서 육교위까지는 못 올라가고 밑에서만 올려보다가 또 50분동안을 걸어서 왔다. 그후 어머님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셨고 그해 가을 서서히 몸이 굳어갔다. 하루는 옆에 앉은 이 못난 며느리의 다리를 손으로 한없이 쓸어내리시더니 눈물을 흐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굳어져가는 혀로 '에미야 고생했다. 미안하다" 하시며 평안한 얼굴로 하늘나라로 가시었다.
젊은 나이 51세에 중풍 얻어서 15년동안 시달리다가 남에게 미움만 받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너무나 가여워서 난 통곡을 했다. 왜 잘 해드린 것 보다 못한 것만 가슴에 남아서 못질을 할까.왜 후회는 항상 뒤에 오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내 설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님 상여 나가던 날 혼절할 정도로 나는 울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항상 다니시던 이 길을 어둡고 퀘퀘한 냄새와 지저분한 청계천의 골목길을... 이젠 다시는 올수 없는 어머님의 저승길이 서러워 회환의 눈물만 흩뿌려야 했다. 그렇게 청계천의 흔들리는 육교는 어머님의 일생과 함께 나의 인생까지도 흔들리는 아픈 시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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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이은옥
그해 겨울 참 눈이 많이도 내렸다.
문풍지를 댄 구옥의 창문을 열면 바람은 물밀듯 밀려왔고 암담해 보이는 산은 흐릿한 모습으로 멀리 서 있곤 하였다. 급히 세든 길가의 집은 새벽녘이면 지나는 차들의 굉음으로 흔들거렸고 아무리 옷을 껴 입어도 허기진 듯 몸은 항상 추웠다. 그와 내가 꿈에도 그렸던 호반의 도시는 그렇게 쓸쓸하고 끔찍한 기억으로만 남아 버렸다. 아마도 아름다운 기억이란 더 훗날을 위해서 저장되는 것일까? 서글프고 힘들었던 어두운 기억들로 그시절은 묻혀져 갔다. 안집의 노부부는 밤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봐 아침이면 방문을 두드렸다 작은 쟁반에는 무심히 하얀 김이 오르는 밥과 된장국이 노여져 있곤 했다 할머니는 손을 꼭 잡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중얼 말하고 했다. 이미 간 사람은 잊으라고...어디에 서 있건 다리는 땅 위가 아닌 허공을 휘저었다. 집에, 방안에 있을라면 뜨거운 것들이 가슴을 헤집고 나와 미칠 듯 울부짓게 하엿다. 또 눈물은 끝없이 내리는 눈처럼 그 겨울을 녹아 내리게 하고 그 위에 다시 바람이 불어댔다. 춘천에서 원주가는 길로 원주에서 다시 청주로 길에서 길로 이어지는 수많은 도로 위에서 서 있는 날들, 다시 안 올것처럼 가방 가득 짐을 싸고는 뒤 돌아 보지도 않고 집을 나선다. 어디든 길을 나서면 다시 막막하고 허허로와 다시 그 집을 그리워하고 또 돌아온 집에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거리로 내 몰았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정류장에서 서성이는 날들.사랑은 사랑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잊기보다 내 마음에서 집착의 꿈을 놓는 것이 더 힘들어 정작 사랑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내 열정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엿을까 정말 그때는 죽기보다 숨쉬고 사는 일이 더 고통스러웠다.
삶이란 때로는 계획에 없던 아주 큰 복병으로 우리를 기습하고는 한다. 어느날 문득 돌이켜보면 원하지도 않았던 자리에 서 있음을 본다. 무언가에 끌리듯 운명이란 말처럼 시작되는 사소한 만남들.. 그 사소한 시작으로 우리의 생이 흔들고 좌절되는 날들이 있기 마련아닌가.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그 삶의 버거움으로 이제껏 살았던 터전을 뒤로 하고 낯선 길을 가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흔들림은 어찌 나무랄 수 있으랴 다만 그 흔들림으로 자의든 타의든 상처 받는 이가 있으며 그 책임이 다 내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낯선 길에서의 낯선 선택을 결국 내가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그해 하염없는 눈발과 허허로움으로 헤맸던 거리를, 그 버스 정류장을 생각하면 지금 아무리 내가 가진 것이 초라하고 힘들어도 그 슬픈 망설임보다는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나 어떤 선택이나 어떤 결단들이 가져오는 갈림길 훗날 잘했다거나 못했다거나 하는 결론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다시는 그 눈발속 갈곳 막막한 정류장에 다시 서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 일 것이다.
모르겠다.
더 나이들어 부끄러움이나 후회없이 옛날을 말할수 있을 때 그때 내가 섰던 그 자리가 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어쩌면 우리 모두 언제나 바람 부는 정류장에서 서성이는 외로운 여행객 일지도.
입선- 들 꽃
전성순
평창까진 아직 멀었다. 그런데 이 길은 왜 그리 먼거야 내 머리는 온통 '산허리에 피어 있는 메밀꽃이 달밤에 소금을 뿌린 듯 흐뭇이 다가와 숨이 막힐 지경'인데...가는 곳이 거기만 아니었어도 따라나서지 않았을 터다 의무감이랄까 밀린 숙제라 해야 할까 아무튼 읽고 쓰는 쪽에 뜻을 둔 사람들을 흠모하며 기웃거리다 보니 메밀꽃과 봉평장은 꼭 봐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9월의 볕을 쫓아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목적지에 다다랐을때는 설핏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산간지방엔 벌써 첫서리가 내린 뒤라서 바라고 있던 메밀밭의 ??부신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허생원과 동이'가 이미 그 흰소금을 모두 소달구지에 싣고 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한 주일만 일찍 왔어도 불 수 있었을 거라 한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언덕 저편 무리지어 수런거리고 있는 꽃대궁만 보아도 기억의 사다리는 어느새 내 어릴적 풀숲에 달아 있는 것을... 아스라이 눈에 밟히는 반딧불 같은 풍경들.. 그 따스함이 있기에 내 삶은 아직가지 그런대론 견딜만 한지 모르겠다. 오래전 산촌 마을 학교에선 잘 살아보자는 구호아래 풀씨를 모아 오라는 과제 아닌 과제가 있었다. 오리 저도는 가깝다고 여기며 다니던 길 동물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아카시아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놀이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책 보따릴 토방에 던져놓고 곧장 산으로 들로 내달리던 날들이다. 풀씨를 훑어 주머니에 넣고 풀물든 손을 휘휘 저으며 언덕을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꿀뚝에서 여기가 피어올랐다. 앞 산머리 위에 거터앉은 노을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풀을 베어 말려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니 참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억새며 산 쑥, 칡넝클이 그득히 담긴 머슴 아저씨의 나뭇짐 속엔 때때로 산딸기 가지나 머루송이 개암 열매같은 천연 간식이 자주 들어있었다. 풀향기 그윽한 지게더미에서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라 나풀대던 열 살 계집애가 중년이 되어 예까지에 돌아온 것이다. 머슴이었던 이 서방의 지게에 실려온 풀이며 작은 들꽃더미들은 마당에 널렸다가 마른 풀냄새를 일으키며 아궁이에서 불꽃으로 타들어 갔다. 더러는 젖은 채 마당에 펼친 멍석 끝에서 저녁 모깃불로 쓰이고 그 풋풋한 냄새와 매운 연기로 모기를 몰아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금세 별이 좌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는데... 그 아름다웠던 시간을 혹시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모처럼 벗어난 일상, 달콤한 기억 속을 더듬다보니 숙소로 정한 산 아래 오두막에 이르렀다. 강물을 움켜 쥘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린 왜 생활의 신선한 기쁨이나 즐거움을 유행가 가락에나 묻으며 지내야 하는 건지...이슬로 세수한 들꽃을 꺾어 식탁에 얹고 모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밥맛이 그만이다. 그야말로 '황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고 해야 할까.
가랑비를 나고 와 코끝을 간질이는 감국, 구절초,쑥부쟁이 냄새에 언저리 다재나무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간밤 까만 비로드 천에 덥혔던 하늘이며 잠자던 새 그리고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순수의 무리를 욕되게 한 것은 아닌가 해서 하지만 내가 흠뻑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뒤꼍 가마솥에 한 소쿠리 담겨 있던 찐 감자의 파실파실한 분만큼이나 뽀얀 의식이 가슴자락을 메우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들꽃처럼 평범하면서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마음과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이를 보면 주저없이 달려가 덥석 손을 잡고 싶어진다. 들꽃엔 그런 시선이 들어있다. 보는 이에게 아무런 짐 지우지 않고 소슬한 침묵으로 가난한 이들을 달래주고 어루만지는 기운. 그래서인가 나는 그 작은 생명이 눈물이 날 만큼 사랑스럽다. 산길이나 들길을 걷다보면 이따금 여린 꽃잎들이 내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치 소리 같기도 하고 풀피리 소리 같기도 한 그 내밀한 속삭임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저어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들꽃향기'란 음식점이 있는데 선생의 이미지가 그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들꽃향기! 이제껏 들어본 인상 평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지만 고맙기 그지없지만 낮가림을 잘하는 나는 얼버무리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고 말았다. 어조는 부드럽지만 뜻은 분명한 사람을 보면 들꽃을 떠올린다 그 꽃들은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다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하여 피운 꽃이 속절없이 진다고 하여 나처럼 안달하거나 속상해 하지도 않는다. 산과 들 어느 곳에서나 피어나 말없이 제 길을 가는 들꽃이고 싶다. 그처럼 순수하고 맑은 생각을 내 안의 그처럼 순수하고 맑은 생각으로 내안의 꽃을 피워냇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참아내기 힘든 삶의 아픔들을 들길을 거닐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담담히 남아있는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정류장에서
김종옥
때 이른 첫 추위가 코 끝에 매달린 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몇 대의 버스들이 목을 죄는 매연을 내뿜으려 달려나갔다. 붕~ 타실까요? 붕~ 아니면 그만이구요.
붕~ 그리고 매연, 매연, 뭉게뭉게...
정류장 표지만 못 미쳐도 아니고 지나쳐서도 아닌 정확한 위치에 조심스레 서서 잠깐 기다려주는 아량까지 베푸는 버스를 기다리며, 게으르거나 혹은 조급한 버스를 몇 대나 지나보냈다. 난 아마 완전히 지쳐버릴 때까지 버스를 타지 못하고 정류장에 하냥 앉아있을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매개한 목이며 검댕이를 뒤집어쓴 콧 속을 행궈낼 때에야 내 미련함을 스스로 조롱하겠지만.... 치사스러움과 배신과 천박과 저질과 위협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아직도 버스 정류장은 그렇다 계속 그렇다. 서울 변두리에서 국민학교 3년과 중학교 3년을 버스로 통학했다. 버스들은 포장덜된 길 위를 무섭게 돌진해댔고. 대개는 표지판 못 미쳐 혹은 지나쳐 급정거하기 일쑤였다. 목을 빼고 먼지로 온 얼굴을 도포하며 기다리는 수고도 헛되게 운없는 날은 뛰어 닿기도 전에 약올리듯 버스가 떠났다. 더 운없는 날은 차장의 억센 팔에 밀려 무리에서 뜯겨져 나와 정류장에 남겨졌었다. 정류장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에 몸이 익을 무렵에는 버스가 설 곳을 미리 가늠하고 섰다가 용케도 내 코앞에서 버스 문이 맞춤으로 열리는 행운도 더러 잡았다. 그 날은 하루종일 재수가 좋을 것이었다. 매번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수고를 덜 하고 서 버스를 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재수좋은 일이었을게다. 커가면서 정류장의 혼잡은 차츰 덜어갔지만 몇 가지 경험들이 보태지면서 정류장에 대한 기억은 늘 우울한 잿빛 또는 음험하고 탁한 붉은 빛으로 채색되어 변하지 않았다. 엄마는 두 번이나 정류장에서 핸드백을 뜯겼고 주인을 따라나왔던 물색없는 강아지가 한 마리 치여 죽었으며, 물건을 잔뜩 이고 진 행상이 수도 없이 차장과 운전사에게 타박받고 쫓겨났다. 허둥지둥 걸음을 떼던 노인들은 잽싸게 내빼는 버스를 항상 놓쳤고 목발에 의지한 장애인 또한 매번 한쪽 목발을 치켜들고 종주먹을 들이대며 분풀이를 해댔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때 우리반이었던 여자애가 처녀티를 내며 차장 옷을 입고 '오라이' 하는 모습까지 보았잖은가 그 애가 내 손에 되돌려준 차비 삼십원을 내려다보며 난 정류장에서 한참을 황망스레 서 있었다. 그럴진대 거개의 영화나 드라마는 얼마나 사기였는지.. 항상 영상의 이미지는 실제보다 우아했다. 몇 안되는 사람들이 느긋이 버스를 기다리고, 그 중의 하나는 기다렸단 정인을 만난다. 흑은 그를 떠나보낸다. 가끔은 저만치에서 차마 보내기 싫었던 그가 다시 버스를 내리기도 한다. 가슴에 꽉 찬 슬픔을 안고 버스를 타러 이리저리 뛰는 우스운 풍경같은 것은 애당초 없다. 출렁거리는 슬픔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주인공은 우아하게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난 화가 치밀었고 굉장히 억울했다. 내 정류장은 저렇지 않아 거긴 치사스러울 정도로 처절한 곳이지 하면서.
오래잖아 난 정류장에 대한 내 '혐오'는 바로 내 위선과 닿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난 내 인생을 정류장에 투영해 놓고는 결코 그 곳에 속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모범' 이든 '일반'이든 주저없이 손을 들어 택시를 타거나, 얼굴에 번들번들 윤나는 해멀쑥한 청년이 열어 주는 자가용 문을 턱하니 닫고 거드름 피우며 앉거나 하기를 바랬었다. 으스스한 칼바람 속에서 혹은 내려 꽃히는 여름태양 아래서 목 빼고 섰는 그저그런 군상 속에 끼이지 않았으면 하고 내심 바랬던 것이다. 열망이라고 까지 하긴 뭣하지만 그저 막연하게나마 그것을 꿈꿔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 시장 바구니를 들고 정류장에서 종종걸음 걷게 될 것이 미리부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은, 백 번 화를 냈지만, 결국은 나도 영상 속 정류장 모습처럼 내 삶의 본 모양에다가 분단장을 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내 오랜 고질병인 이 '허영'은 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제법 수양을 쌓았다는 지금까지도 어떻게 이리 질기게 남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가끔은 신이 나서 펄펄 뛰며 친구들과 버스를 향해 내달린 적도 있었고, 반가운 얼굴을 기대하며 쑥스러운 웃음 흘리면서 정류장을 빙빙 돈 적도 있었다. 그 다정하고 소담스런 풍경은 다 어쩌고 아직도 초라한 허영만 남아 정류장에 앉아 도리질만 치는 것일까. 불혹의 나이도 훨씬 넘기고 내 아이들이 사춘기도 다 지날 때 쯤이면 나도 농익게 늦철이 들어 치고 볶아대는 정류장의 시끌벅적하고 고단한 삶의 벌건 생살갗들이 이쁘고 고와보일 수 있을까, 철이 더 들면, 더 다정하게 철이 들면...
아직도 바로 내 코앞에 미끄러지듯 멈춰주는 느긋한 버스를 맞아 우아하게 걸음을 떼고 싶어서 매연을 참으며 난 미련스레 정류장에 앉아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