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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1)
2013년 03월10일(일)
(요18:1~11)
0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0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0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0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0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0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0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0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0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다 따라서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 네 오늘 말씀입니다.
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심(18:1~11)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갔다. 빗나간 것은 바로 되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구속 되어야하는 문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아들은 이 뜻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사람이다. 빗나간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구속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아들은 이 뜻을 알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다는 그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온 인류를 빗나간 자리에서 돌아오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들이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 잔을 받으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를 알면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어떤 잔을 받아야 된다.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 알면 나는 그 뜻을 시행해야 한다. 나라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 그렇게 해야 하고, 대장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 그렇게 해야 한다.
a.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해 잔을 받으심.
예수를 잡으려고 온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보낸 하속들과 유월절을 위해 성전 수비대로 주둔한 로마 군대들이었는데 그 뒤에는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있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로 이루어진 세상과 인간을 대표한다.
이 잔은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와서 무엇을 했는가?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중점 되는 요점은 구속(救贖)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다는 등의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빗나간 아담을 구속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 모든 사람이 관여가 되었다. 성경에서 이렇게 열거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보낸 하속들과 유월절을 위해 성전 수비대로 주둔한 로마 군대들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을 종합하면 종교와 정치로 이루어진 세상과 인간을 대표한 것이다. 공연히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기록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크게 말하면 종교(宗敎)와 정치(政治)다.
b. 유대종교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함
유대 종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예수를 잡으러 왔다. 이 동산은 예수께서 가끔 기도하려 가시는 곳이었음으로 이를 안 가룟 유다가 그 길을 인도하였다. 유다는 스승을 팔고 넘겨주기로 약속했음으로 앞잡이가 되어 그를 붙잡기 쉽도록 안내했다.
그런데 유대종교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세상이 죽이기로 결정하기 전에 유대종교가 먼저 죽이기로 결정했다. 유대종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이라는 기관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예수를 잡으러 보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라는 성은 완전히 바위산이다. 동산이 없는 곳이다. 동산이 있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것은 아마 어떤 부자가 가지고 있는 동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부자의 동산인데,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데 아마 그것이 니고데모의 것이었다,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것이었다는 이런 설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끔 동산으로 가셨다. 가끔 가서 기도하러 가는 곳이었다. 이것을 안 가롯 유다가 그들을 인도했다. 유다는 스승을 팔고 넘겨주기로 약속했으므로 앞잡이가 되어서 그를 잡기 쉽도록 그들을 인도했다.
c. 종교와 세상은 하나님 아들을 거부함.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종교를 시작했고, 네피림의 후손들은 바벨을 건설하고 하늘에 오르자고 했다. 이 안에서 빗나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을 죽이려고 몰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선악과가 있었고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 열매를 먹음으로서 생명의 사람이 아닌 지식의 사람이 된 것이다.
종교와 세상은 하나님 아들을 거부한다.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알고 보면 가인의 길이다. 가인은 아벨과 제사를 드리다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예배를 하다가 아벨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종교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은 예배를 하다가 죽였다는 것이다. 그냥 유대종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니까 자기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맹점이고 종교의 무서운 점이다.
종교와 세상은 다 같이 하나님 아들을 거부하는데 1차적으로는 종교가 거부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세상은 라멕의 길이다. 가인과 아벨이 있고 그 다음에 라멕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세상이 시작되게 된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종교로 시작했고 네피림의 후손들은 “하늘에 오르자”하고 바벨을 건설했다. 그러니까 세상을 보면 간단하다. 이 두 가지다. “하나님께 예배를 하자.”는 것과 “우리가 하늘에 올라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는 이 두 가지다. 이 안에서 빗나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을 죽이러 온 것이다.
항상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길을 방해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길을 보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과 다르기 때문에 가로막는데,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한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옳은 길로 가는 것이라면 자기들은 자연히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참 이상한 것이 자기가 심판받는 길로는 안 가려고 한다. 자기가 심판을 안 당하려고 하니까. 요즘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마지막 환란에 심판을 안 당하려고 믿는 것이다. 마지막 환란이 오면 심판이 오는데, 오장창 하는 그때 심판을 면하려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똑 같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러 온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선악과가 있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는데 아담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생명의 사람이 아닌 지식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사람”하면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아니고 지식으로 사는 사람이니까 지식의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자기 지식으로 하는 사람이다.
d.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어야 끝이 남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그 지식으로써 생명으로만 가능한 모든 것을 모조했다. 하나님 같이 되어 동산이 아닌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님이 없는 불순종의 인간은 문어진 바벨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죽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지식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어야 끝이 난다는 말이 그 말이다. 왜냐하면 지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그 지식으로써 생명으로만 가능한 모든 것을 모조하고 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지식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을 보면 ‘정말 그렇네. 생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옛날에 성경을 쓸 때 이런 것을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니다. 창세기를 쓸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생명과 지식의 대조가 이렇게 나타난다. 아마 세상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해져서 생명으로만 가능한 것을 기계로 만들어내는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도 만들어내는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육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단계가 초보단계이지만 많이 접근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언젠가는 간도 만들어서 집어놓고, 인공간을 집어넣는다든지 하는 이런 것이 생기지 싶다. 지금 인공심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생명으로만 가능한 일을 지식으로 모조하고 있다.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되어서 동산이 아닌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불순종의 인간은 무너질 바벨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만들고 만들어도 도로 바벨이다. 그래서 도로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 같은 데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갈수록 더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 나타나는 기상이변 같은 것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 한참을 잘나가는 판에 북극이 녹고 있다. 이것이 녹아 내려서 불이 범람하게 되면 과연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높으니까 좀 늦게 침몰되겠지만 어차피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넘어오는 데 몇 미터 높다고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말세가 오기는 올 것 같다. 우리는 잘한다고 했는데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지식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한 결과가 이렇다. 지식은 지식의 원리가 있고 생명은 생명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지식에서 만든 것과 생명에서 나온 것이 같을 수가 없다. 생명에서 나온 것은 몇 만 년이 가더라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인공으로 만든 것은 가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또 가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밀림에서 사는 생물들이나 동물들을 보면 그 안에서 다 똑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든 것을 보면 북극이 녹는다든가 남극까지 녹아내린다든가 이런 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면 다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을 수 없고 지식을 바꾸어서 생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지식은 지식의 길로 가고 생명은 생명의 길로 가는 데 지식으로 가는 길은 가다보면 바벨이 된다. 가다보면 무너지고 가다 보면 무너지고 하게 된다.
세계 역사가 그렇지만 개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명으로 사는 길은 가면 갈수록 쉬워진다. 그런데 지식으로 사는 길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학문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생명을 떠나서 더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모든 잔꾀다. 이것은 가면 갈수록 자꾸 꼬여서 어려워진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잘 나가는 데 뒤로 가면 헝클어져서 거짓말을 한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게 된다. 잘 기억이 안 되고 너무 많아버리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생명은 기억을 안 해도 상관이 없다. 항상 똑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은 탄로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감당을 못한다. 너무 벌어져서 수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탄로가 나는 것이다. 탄로가 나고 나면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하고 늘 그렇다.
그러나 지식은 지식의 원리가 있고 생명은 생명의 원리가 있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만든 것과 생명에서 나온 것은 같을 수가 없다. 지식을 바꾸어 생명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면 밭을 갈아엎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는 방법은 없다. 어떤 방법도 불가능하다. 가라지를 밀로 바꿀 수만 있다면 밭을 갈아엎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가라지를 밀로 바꾸면 그만이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밭을 갈아엎어야 된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왜 다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가라지를 밀로 바꾸자는 말이다. 여러 말을 하지만 다 그 말이다. 가라지라는 것은 다 인정한다. 그것을 밀로 바꾸어 보자는 이야기다. 지혜를 통해서, 연구를 통해서, 참선을 통해서,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가라지를 밀로 바꾸어 보자는 것 아닌가?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내용은 그것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자.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밭을 갈아엎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무성하게 나 있으니까 그것을 가져다가 그냥 밀로 만들어 버리면 될 것을 왜 그것을 뒤엎어서 새로 심는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옳고 맞는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만일에 가라지를 밀로 바꿀 수 있는 지혜만 있다면, 지혜로 그것이 바꾸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예수를 어리석다고 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면 되는 데, 지혜를 통해서 고치면 될 텐데 왜 밭을 갈아엎어야 되는가?’ 이 말이다. 헬라인이라는 것이 희랍권이다. 인도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 그 말은 나를 찾으면 된다는 말이다. 나만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밭을 안 갈아도 된다. 그렇게 가는 사람들은 밭을 가는 사람들을 보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밭은 갈아엎어야 된다. 왜냐하면 지식은 지식의 노선이 있고 생명은 생명의 노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개선시켜서 가라지를 밀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세상에는 많은 말이 있다. 좋은 말이 많은 데 그 말이 ‘가라지를 밀로 바꾼다는 말인가, 아니면 땅을 갈아엎어야 된다는 말인가.’ 이것을 우리는 구별해야 된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좋은 말에 넘어가게 된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려면 얼마나 이론이 잘 되어 있어야 되겠는가? 그러니까 들으면 그럴듯하게 된다. 그런데 밭을 갈아엎는다는 이야기는 별 이론이 없다.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별 이론이 없다. 그러니까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알고 보면 훨씬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거짓말을 못한다. 안 그런가? 머리가 좋아야 거짓말을 한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드러나 버린다. 적어도 며칠 후에 드러나야 머리가 좋은 것이다. 그런데 한달이나 몇 달 후에 드러나면 그 사람은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밭을 갈아야 된다는 말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는 지혜, 지식, 이런 것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모든 사람을 원 위치로 구속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인 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 빗나감을 바꾸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길이 없음으로 예수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셨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모든 사람을 원위치로 구속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부인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알고 알아보고 예수를 따랐다면, 그렇다면 밭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예를 들면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라도 포함해서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이해하고 따랐다면 밭을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이다. 가라지 하나만 밀로 바꿀 수 있다면 모든 가라지를 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 중에 누가 한 사람이라도 알았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맞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는가? 모던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구속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길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다. 가라지와 밀의 길은 완전히 서로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부인했다. 그 부인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구속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속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구속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구속을 안받아도 될 사람이 있는데 괜히 구속을 들도 나왔으니까 잘못된 게 아닌가?
이 빗나감을 바꾸기 위해서는 죽음 밖에는 길이 없다. 예수는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해서 된다면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지론이다.
1)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어주심
예수께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시고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나서셨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생명을 버리고 지식을 취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더니 “나사렛 예수라”했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서 엎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문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다더라. 죽은 사람도 살렸다더라.’는 이런 소문이 났으니까 ‘이 사람은 엄청난 사람이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바로 앞에서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까 얼마나 놀랐겠나. 그래서 놀라 자빠진 것이다. 예수의 영광에 엎드려진 것이 아니고 깜짝 놀라서 자빠진 것이다. 얼굴을 본 일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그때 사람들이 다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내가 여기 있다.’하고 나섰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생명을 버리고 지식을 취한 온 인류를 대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앞에 ‘난 여기 있다.’하면서 예수가 드러난 것이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산에서 ‘당신의 이름은 누구십니까?’했을 때 ‘나는 있어서 있는 자다. I am that I am’했는데 그 말과 같은 말이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표시한 것이라고 하는데 좀 무리한 것 같다. ‘나는 나다.’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나. ‘내가 여기 있다.’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나.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이다.
2) 예수는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으심
오히려 베드로가 칼을 뽑아 잡으러 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의 귀를 치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느냐” 하시고 검을 도로 꼽으라고 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그 잔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이 잔은 빗나간 인류를 죽음을 통해서 구속하는 것이었다. 구속은 죽음으로만 성취되어진다. 칼로 대항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잡으러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의 귀를 쳐서 귀가 떨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귀를 붙였다고 되어있다. 여기서는 아주 친절하게 이름을 “말고”라고 까지 해놓았다. 그래서 아마 제자 중에 요한이 제사장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아니면 어떻게 이 말고라는 사람을 알겠나.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다. 그런지 저런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요한이 이것을 기록할 때는 그 사람들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칼을 도로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느냐.”이렇게 말씀했다. 이것이 요점이다. 어디에 가면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 5.16이 일어났을 때 함석헌 선생이 이 말을 인용했다. 이 말은 ‘총칼로 혁명을 일으켰으니까 총칼로 망한다.’는 이런 뜻으로 신랄하게 썼었다.
‘검을 도로 꽂으라.’했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잔을 받으시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검을 가지고 대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검으로 대항한다면 아버지의 일이 다 틀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잔은 빗나간 인류를 죽음을 통해서 구속하려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그 잔을 받아야 될 일이지 칼을 가지고 대들어서 싸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마찬가지로 내가 받을 잔을 받지 않고 무슨 다른 방법으로 막는다든지 무력으로 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생기면 내가 받아야 될 잔을 안 받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요즘 청문회 한다고 하는데 받을 잔을 확실히 받은 사람은 괜찮은데 안 받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나 같으면 ‘내가 그때 국무총리 할 줄 알았나. 너거는 국회의원 할 줄 알았나.’이렇게 하면 되겠던데 ‘앞으로 잘 하면 되지.’하면 뭐라고 하겠냐는 것이다. 그 말은 못하고 빙빙 돌리니까 가지고 노는 것이다. 옛날에 김종필씨가 청문회를 하면서 “당신은 서산 목장이 있고 제주에 귤밭이 80만평이 있고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내가 이 나이에 뭘 했으면 그 정도도 못 벌었겠냐.”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는 것이다. 그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 뭘 했으면 그 정도를 못했겠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칼로 대항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잔을 받아야 될 일은 잔을 받아야 된다. 칼로 대항할 일이 아니다. 잔을 받으면 조용해져 버리는데 받지 않으면 시끄러워진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잔을 받고 죽는 그것을 원하고 있다. 잔을 받고 자기 앞에서 꺼꾸러지는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방통위원회 붙잡고 정부조직법을 반대하고 안 풀어주고 있다. 그것은 기싸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무릎을 꿇어라 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무릎을 꿇겠나. 무릎 꿇으려면 뭐 하러 대통령하겠냐는 것이다. 안 꿇으려고 하는 것이다. 저렇게 시간이 가면 안 풀어주는 사람만 욕을 얻어먹게 된다. 계속 저렇게 하면 정부조직을 못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나. 저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안 된다고 말하게 된다. 지금 야당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냥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줄 수도 없고 이제는 끝까지 안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주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원래 잘못하면 그런 것이다. 새로 출발하는 사람이 하겠다는 대로 해주고 잘 못하면 그때 뭐라고 해야 된다. 우리도 누구에게 일을 맡기면 100% 맡겨야 한다. 100% 맡기고 그 사람이 잘 못할 때 수정을 해야 하는 것이지 미리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 맡기면 되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잔을 받을 것은 받아야 된다. 내가 받을 잔은 받아야 된다. 그러면 인생을 사는 것이 쉬워진다. ‘아~ 이것은 내가 받을 잔이구나! 나 아니면 받을 수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쉬워진다.
3) 예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김
아담은 예수가 싫어서 동산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이 사람 예수를 받아들일 이가 없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그리스도는 이런 아담에 의해서 무시 되고 버림받았으며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예수와 아담의 만남은 그 역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 같다. 자기가 걸어온 길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걸어와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나는 왜 이런 생겼나?’이렇게 하면 안 된다. 내가 그렇게 걸어갔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내가 걷기를 산으로 갔기 때문에 발이 삔 것이지 평지를 걸었는데 발이 삐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산에 가서 내가 왜 발이 삐었지 하면 안 된다. 산에 왔으니까 발을 삐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해야한다.
지난번에 칠십이나 된 노인이 무슨 자랑을 하려고 얼은 산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죽었다. 얼어있는 산에 뭐하려고 올라갔는가. 젊은 사람도 아니고 노익장을 과시하려고 그랬는가. 그 추운 날, 땅이 얼어있는 날 산에 올라가서 미끄러져 죽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 일어 날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런 일이 많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다고 하면 그 일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다 와가지고 그 결론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 내가 이렇게 걸어와서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 알아야지.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걸어가기 때문에 발도 삐고 걸어가기 때문에 무릎도 다치고 하는 것이지 안 걸어가면 발을 삘 일은 없다. 밖에 나가니까 비도 맞고 지나가는 차가 물도 치고 하는 것이지 집안에 가만있으면 누가 물 칠을 하는가.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하신 일이 있다. 하신 일에서 마지막에 온 것이니까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겠고, 또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은 이 길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이 길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아담은 예수가 싫어서 동산을 떠난 것이다.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났다는 말은 예수가 싫어서 동산을 떠났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수 만년 후에 올 예수가 싫어서 떠났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잔을 받는 그것이 싫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냐는 것이 싫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싫은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싫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아는가? 예수를 모른다. 그래서 잔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냐 하신 분이다. 그런데 내가 못 받겠다고 하면 나는 예수가 싫은 사람이다. 내가 그냥 그 잔이 싫은 것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했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아들을 거절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뭐 예수를 본 일이 있는가. 거절한 일이 있는가. ‘모든 사람이 다 선악과를 먹었다.’고 했는데, 누가 선악과를 본 일이 있는가. 먹은 일이 있는가. 없다. 없는데 왜 우리가 다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냐면 그 원리는 다 똑 같다.
그러니까 아담은 동산에서 왜 나왔냐? 예수가 싫어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지 않겠냐는 것이 싫어서 나온 것이 아담이다. 우리 속에 아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는 이런 잔은 안주면 좋은데 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런 잔은 못 받겠다는 것도 있다. 이것이 아담이다. 그러니까 아담이 이 사람 예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이때 동산에서부터 싫었는데 이제 와서 예수를 받아들이겠는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그 동산에서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던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못 받아들인다.
언제부터 내가 우리 조상부터 싫어서 대대손손 원수진 상태인데 받아들이겠냐는 것이다. 자자손손 영원토록 원수진 상태이니까 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믿기가 어려운 게 바로 이것이다. ‘예수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이런 것은 누구나 한다. 그것이 아니다. 동산에서 싫은 예수, 그 사람이 지금 나타났으니까 지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역사이래로 그리스도는 여러 아담에 의해서 무시되고 버림받았으며, 핍박을 받고 유린되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종을 보냈더니 때리고 욕하고 했다. 그래서 또 보냈더니 때리고 능욕했다.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되겠지하고 보냈더니 상속자니까 죽이자하고 죽였다는 것으로 비유를 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도 보면 “창세 이래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했다.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 죽임을 당해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이 말이다. 항상 동산을 떠난 그 사람 아담은 바로 이 예수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버리고 핍박하고 죽였던 것이다.
그리니까 예수와 아담의 만남이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종교와 예수의 만남은 예수와 아담이 만난 것이다. 예수와 빌라도가 만난 것은 예수와 아담이 만난 것이다. 아담 안에는 빌라도도 들어있고 유대종교도 들어있다. 그러니까 두 방면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나무를 심어 놓으면 가지가 둘도 되고 셋도 되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는 역사의 결정판이다. 마지막 싸움이다.
동산에서도 이런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있었는데 우리는 그 동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서 “너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했는데 간단하게 그런데 먹고 동산에서 쫓겨났다. 참 동화 같은 얘기인데 이것이 지금 현실이다. 예수와 세상이 만날 때 보니까 바로 동산에 있던 그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은 그 받은 지식으로 외형적으로는 바벨을 건설하여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고, 안으로는 하나님 같이 되어 생명을 대적한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밖에 없고 하나님 아들은 예수뿐이다. 아담은 지식의 능력으로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 같이 되었으나 아들은 생명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려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다.
아담은 받은 지식으로 외형적으로는 바벨을 건설했다. 그래서 밖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고 있고 안으로는 하나님같이 되어서 생명을 대적하고 있다. 어찌하던지 자기 생명을 개발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어찌하던지 자기 것을 꺼내서, 자기 것을 만들어서.
그래서 불교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이 너 안에 부처가 있다는 것이다. 너 안에 부처가 있다. 그 부처를 끄집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학생들 기독교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관여해서 제재도하고 격려도하는 이런 것이 싫은 것이다. 밖에서 누가 뭐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점점 더 세상이 문명화되고 점점 더 고도로 현대화되어 나 갈수록 사람은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게 된다. 자기 이외에 모든 것을 배제하게 된다. 이런 방향으로 인간성이 가고 있다. 이것은 아담이 본색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심어놓으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 나무의 형체가 드러난다. 열매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열매의 본색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지금 수 만년동안 자라오면서 지금 와서 아담의 본색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갈수록 더 드러난다. 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 익는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아담으로 드러나게 된다.
창세기 2장에 있는 아담은 우리가 잘 모른다. 요즈음 나무를 보면 움이 트려고 하는데 그 안에 무슨 꽃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거기서 꽃이 나온다. 또 꽃만 보고서는 열매를 모른다. 열매가 나와서 커지는 것을 보면서 그때야 사과인지 매실인지를 알게 된다. 지금 우리는 아담을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그런 시대로 가고 있다. 점점 개인주의화 되고 점점 자기밖에 없는 세계로 돌아가며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원시시대에는 바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점점 현대로 들어올수록 자기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말은 아담이 점점 아담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안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생명을 대적하고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고 하나님 아들은 예수 밖에 없다. 참 아들은 예수밖에 없고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다. 아담은 지식의 능력으로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 같이 되었으나 아들은 생명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려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는데 여기서 지식의 길과 생명의 길이 갈라졌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문제가 여기에 와서 하나는 지식의 노선으로 하나는 생명의 노선으로 명백하게 갈라졌다.
그런데 능력으로 하나님 같이 된 자들은 순종하는 생명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신 이를 핍박하고 죽이기로 결안한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아들을 죽여 없앤다면 거짓 하나님 같은 자들은 저절로 죽은 자로 드러난다. 자기들이 자기들을 스스로 끝내게 되는 것이다. 가짜가 진짜를 없애면 가짜는 자동적으로 끝난다. 하나님의 지혜는 거짓을 끝내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이 뜻을 받들어 잔을 받으신 것이다.
능력으로 하나님 같이 된 자들은 순종하는 생명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신 이를 핍박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가 대항하게 되어있다. 참 하나님 아들을 죽여 없앤다면 거짓으로 하나님 같이 된 자들은 저절로 죽은 자가 될 것이다. 진짜가 심판을 받고 죽어버렸다고 하면 가짜는 보나마나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묘한 지혜 같다. 참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죽도록 허락을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러면 거짓은 저절로 죽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자기들을 스스로 끝내게 되는 것이다. 가짜가 진짜를 없애면 가짜는 자동적으로 끝나버린다. 끝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보석상에서 가짜 다이아몬드가 나와서 진짜 다이아몬드를 다 청소 해버렸다면 다시 말해 진짜가 아니라고 다 없애 버렸다면 가게는 뭐가 되겠는가? 완전히 가짜 가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거짓을 끝내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이 뜻을 받들어서 잔을 받으신 것이다. 이것은 묘한 지혜인 것 같다. 우리는 진짜를 살려서 가짜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진짜를 죽도록 놔둠으로써 가짜가 없어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짜가 죽어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길이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이 왜 이것을 못하는가 하면 다시 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지혜를 가지고 버텨보려고 하느냐하면 죽어버리고 나면 다시 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죽고 다시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면 그는 다시 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고 방법이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다시 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취했다가 다시 살릴 수가 있으니 얼마든지 마취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은 마취 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죽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지 마취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완전히 죽어버렸으면 그것은 끝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끝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사람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죽어도 다시 살게 하신 이를 믿는 것이 참 믿음이며 참 소망인 것이다.
어떻게든지 아담을 끝내야 한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스스로 죽었음을 나타내게 하셨다. 인류는 하나님 아들 예수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행실로써 스스로 죽은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아담은 끝을 내어야 한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사실은 죽은 것인데 아담이 스스로 살았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스스로 죽었음을 나타내게 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죽었다.’ 이렇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인류는 하나님 아들 예수를 죽임으로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진실한 자를 죽였으니까 자기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행실로서 스스로 자기가 죽은 자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짜가 진짜를 이겼다고 해서 박수치고 환영할 일이 아니며 그것은 가짜가 진짜 가짜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말로 가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짜 일지라도 진짜를 인정한다면 그나마 우리는 조금 살아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를 완전히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진짜로 가짜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4)모든 사람이 예수를 배반함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했다.
스승을 배반한 가롯 사람 유다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인들을 데리고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왔다고 했다. 유다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온 것이다.
스승을 배반한 가롯 사람 유다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인들을 데리고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왔다고 했다. 유다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온 것이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예수의 행보에서 아담의 목적을 성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승을 세상에 넘겨주고 그 결말에서 자신의 길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성공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은 다 유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예수를 팔고 잡으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왜 예수를 넘겨주려고 했을까?” 하는 얘기는 그전에 많이 했다. 가롯 유다가 악질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행보에서 아담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예수를 따라온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아담의 목적이다. 자기도 하나님같이 되고 싶어서 따라 왔고,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따라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보니까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마음은 조급하고 인생은 다 늙어 가는데 이러고 있다가 언제... 잘못하며 우물쭈물 하다가 세상 끝나겠네!’ 쉽게 말해서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청춘 다 지나가 버리면 어디서 보상을 받느냐!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박을 한 것이다. 예수를 넘겨주고 그래도 거기서 승리하면 내가 따라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빨리 봇짐을 싸야 되지 않겠냐! 이렇게 생각을 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고 그러는데 배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제자들도 다 똑같았다. 같은 마음 이었다. 행동만 이렇게 했을 뿐이지 다 같은 마음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아담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담은 아담의 길이 있기 때문에 아들의 길을 기다릴 수 없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어떻게 믿겠으며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그러니까 누구라도 지루하고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사람을 따라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기미를 보니까 점점 저러다 보면 틀림없이 잡혀 죽겠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따라왔던 소망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민첩하게 행동을 한 것이다. 돈이 욕심나서 넘겨준 것이 아니다. 넘겨주고 결말을 보자. 결말을 보고 기미가 있으면 따라가고 기미가 없으면 그만이다. 이런 얘기다. 결말에서 자신의 길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어떤 사람도 다 그렇다.
주식하는 것과 똑같다. 이것이 올라갈 것인지 내려갈 것인지 재지 않는가. 그래서 신문기사가 나면 금방 올라가고 안 나면 금방 내려가고, 민간한데가 주식 시장이다. 아침저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똑같은 삼성전자를 가지고도 매일 아침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연평도에서 총소리 났다하면 팍 떨어져 버린다.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다 그렇게 재고 있다. 자기 살길을 위해서 다 재고 있는 것이다. 모두 그렇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성공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은 다 유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입장에 서 있다. 누구든지 다 그렇다. 유다 보고만 나쁜 놈이라 할 것이 아니다. 우리도 다 똑같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예수를 팔고 잡으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 않는 일이 세상에 일어난 일은 없다. 모든 일은 다 당연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가 갑자기 이런 것이 아니고 많이 연구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다 어수룩했고 가롯 유다는 좀 영능했던 것 같다. 사리판단이 빠른 그런 사람인 것 같다. 다른 자제들은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다 왔으니까 세상 판단이 느린데 가롯 유다는 시골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뭔가 좀 빠릿빠릿한 사람이라 일찍 행동을 개시한 것 같다. 그래서 유다는 이런데서 항상 인도자가 된다. 언제든지 예수를 파는데 인도자가 될 사람이다.
5) 예수는 당연한 일로서 아버지의 잔을 받으심
그 자리에서 인류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베드로가 칼로 대항하려 했던 것도 알고 보면 가롯 유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아담의 목적 앞에 섰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다. 다른 것은 그는 예수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당연한 일로서 아버지의 잔을 받으셨다. 그 자리에서 일류 중에 어느 한 사람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특이하다.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도 그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거기도 배신자가 있을 것이고, 공자님 제자들 중에도 버리고 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이지 이렇게 아주 사그리 모든 사람들과 제자들이 자기 스승인 예수를 버리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베드로가 칼로 대항하려 했던 것도 알고 보면 가롯 유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칼로 대항한 것이 의협심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속도 있지 않겠는가! 자기 선생을 보호하려는 마음속에 또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그 선생을 통해서 뭔가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목적 앞에 섰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용기 있게 칼을 뽑아 들었던 사람이 세 번이나 “나는 모른다. 나는 결단코 아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와 크게 다를 바 가 아니다. 다른 것은 무엇이냐? 예수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사랑했다. 한번을 고백해도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십니다.” 아니면 “죽는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고 내가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했다. 이게 다른 점이다. 비록 그것을 무슨 말인지 모르고 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는 예수를 사랑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예수를 따르리라고 하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를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아주 크게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따르지는 못하지만 네가 따를 사람은 못 되지만 그러나 네가 예수를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예수를 좋아 하는 사람이구나!’하는 이것은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 갔던 것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는 모든 사람(아담)으로부터 부인 되고 버림받아야 했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아담은 예수가 죽을 때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시인하고 끝이 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류 구속을 위해서 정해진 길이었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류를 구속하려면 흠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는 모든 사람으로 부터 부인되고 버림받아야 했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것이 정해진 길 이었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아담이니까 아담의 세계에 와서 그가 환영 받았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아담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았다면 그것도 아담이다. 그러니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담은 예수가 죽을 때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시인하고 끝이 난다. 그 이전에는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류 구속을 위해서 정해진 길이였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류를 구속하려면 흠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 유대사람들의 전승 속에 들어있는 특이한 일이다. ‘인류를 구속하려면 흠 없는 어린양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을 구속하려면 흠 없는 어린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계시라 밖에 할 수 없다. 사람(인류)가 구속되려면 흠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똑 같다. 이것은 옛날 예기가 아니다. ‘우리 안에서도 구속하려면 흠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 구속하려면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 받았느니라.”(엡1:7)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없이 구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좋은 지혜도 배울 수 있고, 훈련도 할 수 있고, 수양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데 구속은 안 된다. 구속은 이분의 죽음을 볼 때만 가능하다. 이분의 죽음 앞에서만 인생의 원위치를 찾게 되지 그렇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찾아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죽어서 어떻게 그것을 찾겠냐는 것이다. 죽은 것을 보고 내가 아는 것이지 내가 죽어서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죽으면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자아가 죽는다, 나를 비운다.’ 이러는데 진짜로 비우면 비운 자기를 어떻게 보겠냐는 것이다. 진짜로 죽었으면 죽은 자기를 어떻게 보겠나. 유체이탈해서 공중에서 본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상가들이 하는 말이다. 죽으면 우리는 우리를 못 본다. 죽어서 내가 나를 본다면 죽는 게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밖에는 우리를 구속할 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는 구속이 안 된다. 그분의 죽음 안에만 구속이 있다. 내가 죽는 다고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포기한다고 해서 구속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비운다고 구속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분 안에만 구속이 있지 내가 비워서 구속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죽어서 구속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은 헛일(소용없다)이다. 왜냐하면 내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죽는 다면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죽는데 내가 나를 어찌 알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분의 죽음 안에만 구속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죽음 안에만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새로운 세계가 없다. 내가 죽었는데 새로운 세계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 안에만 새로운 세계가 있고 잃어버린 내가 있다. 그래서 예수의 피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밖에는 우리를 구속할 피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외는 우리를 구속할 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수양이나 그런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마음을 비운다. 안 비운다.’는 이런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다.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마음을 비워도 비운 나다. ‘내가 죽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무소유다.’라고 죽었다. 그렇지만 무소유는 나도 무소유다. 그것이 별거라고 무소유라고 떠들어 댄다. 재산이 아무것도 없으면 무소유이다. 무소유라고 하는데 고집은 또 얼마나 센가? 그런데 왜 무소유인가? 고집은 소유 아닌가? 고집도 소유이다. 주장은 소유 아닌가? 주장도 소유다. 생각은 소유 아닌가? 생각도 소유다. 진짜 소유가 없으려면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야 된다. 고집도 없고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야 된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구속을 받으면 완전히 빈 사람이 된다든가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된다든가 무소유가 된다든가 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 이 사람은 빈 사람도 아니고 채워진 사람도 아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안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된다는 말이지 비워진 사람이니까 저사람 참 구속이 많이 됐네. 야 저사람 사심이 없더라. 그러니 구속이 많이 됐네. 이런 것이 아니다. 그냥 사심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 뿐 이다. 사심이 없다고 찌개도 없겠는가? 속으면 안 된다. 이러한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나는 다 비웠다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 다 비웠다던데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이네 이러면 안 된다. 그러니 속을 데가 아주 많다. 굉장히 많다.
구속은 예수 안에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느냐?”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밖에 받을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이 잔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 잔 말고 또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는 실패한 것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밭을 갈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다. 예수는 구속자이다. 인류를 구속하려면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원인간이 되려면 그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인간이 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이 되자는 것이지 인간이 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아무 욕심 없는 솜털 같은 사람이 되자는 말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사람이 되자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 사람이 되자는 말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자는 그 말이지 솜털 같은 사람이 되자는 말도 아니고 공기 같은 사람이 되자는 말도 아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람이 되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엉뚱한 곳으로 빠지게 된다. 여러분도 놀라운 사람이 되려고 공상하지 말라. 나도 해보니 안 되더라.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 안에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되자.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귀한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밖에 나를 구속할 이 없고 당신 안에 밖에는 나의 구속이 없습니다. 주님, 주님 안에서 우리가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게 편리하고 내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