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7:1~3 막9:1~13 눅9:28~36
변화산 사건은 그리스도의 생애 중 성육신, 십자가 대속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5대 중요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야 되심을 제자들 앞에서 확증하신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데 이 사건이 있기전에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고,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것을 말씀 하신 일이 있다.
그리고 이 변화산 사건인데, 마태와 마가는 엿새후라고 기록했고 누가는 팔일쯤이라 썼는데 이는 유대인의 날짜계산법이 틀려서 그런것이므로 우리식으로 따지면 일주일 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이 높은 산을 전승에 의하면 다볼산이라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는 헤르몬산이라고 추정하는 의견이 많다. 이유는 다볼산은 해발 560m로 높은 산이라 보기 어렵고 정상엔 요새가 있어 신비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기엔 부적절한 반면, 헤르몬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2770m로 웅장한 위용에 유대인들이 성산으로 취급했고 또 당시에 예수께서 계셨던 가이샤랴 빌립보와 가까운 산이 헤르몬산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그의 형제 야고보, 이 세제자를 데리고 기도를 하시러 이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아마도 저녁쯤이 되어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은 곤하여 깊이 잠든다. 그런데 잠을자다 밝은 빛과 말소리에 제자들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눈이 부시도록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된채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늘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가는 예수께서 입으신 옷이 세상의 빨래하는자가 그렇게 희게 할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썼고, 또한 마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썼는데 계1:16 단12:3의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광채였다.
이 빛은 마치 출 34:29~35의 모세가 출애굽시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올때의 모세의 얼굴에서 났던 광채와 비슷하다. 그러나 모세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된 것으로 수건으로 가리면 가려지는 광채였고 그리스도의 광채는 입고 있는 옷도 투과해 희어질 정도의 그리스도 본연에서 발산되는 광채였다.
여기서 누가만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새' 라고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구약의 전 사건과 예언의 중심명제였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와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한 대속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이다.
이 세 제자는 모세와 엘리야를 본적이 없지만 주님이 열어주신 영적직관력으로 그가 엘리야와 모세임을 알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현실적이고 영광스런 장면에 제자들은 심히 황홀해 하면서도 두려워 떤다. 그때, 엘리야와 모세가 떠나려 하자 베드로는 황급하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한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오시면 따로 거처를 따로 마련해 모시는 풍속이 있어 베드로가 이 두 사람을 붙잡기 위해 이런 말을 한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내려와 이 일대를 덮자,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리는데 그 빛난 구름속에서 하나님음성이 들린다.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에 제자들 더욱 두려워져 심히 떨고, 예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떠보는 데, 이미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내용의 변화산 사건의 의미는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올라간 제자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산으로 올라간 제자들은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의 대표인 엘리야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제 율법과 예언의 시대는 갔으니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할것을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알리신 사건이다.
또한 이 사건은 일주일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때 제자들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중 하나라고 한다고 대답하고,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 사건과 연장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에 말씀으로서만이 아니라 직접 시청각으로 보여 줌으로서 자신이 사람들이 말한 구약의 엘리야나 모세같은 선지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하신다.
또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십자가 고난을 두고 낙담한 제자들앞에서 자신은 죄인으로서 죽는 것이 아닌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메시야로서 죽으시고 영광으로 재림하실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소망을 주려 보여주신 사건이기도 하다.
말씀의 결론을 내어 이 변화산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자.
첫번째는 신앙의 정절이다.
베드로는 일주일전에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놓고, 막상 유대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자,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베드로가 지어야 할 초막은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만의 초막일 뿐이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 크리스챤도 베드로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섬겼던 다른 신, 즉 돈이나 성공의 신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그리스도의 초막 옆에 따로 그것들을 모시기 위한 초막을 지으려 한다.
하지만 단연코 우리에게 필요한 초막은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의 초막일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서의 사명감당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누리고자, 초막을 짓고 살며 산에서 내려가지 않고 그 영광속에서 머물기 원했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내려오셔서 간질에 걸린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자신의 사명을 마저 감당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때로 기도나 찬양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하고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산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 또한 마냥 그 임재안에서 있으려 하면 안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가 맡기신 사명대로 세상에 나가 힘써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세의 수도사처럼 세상을 등지고 기도와 말씀 생활에 치우쳐 운둔하는 것은 옳지않다.
그리고 세번째는 이 변화산 사건이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후 있을 영광스런 몸으로서의 부활을 예고함과 동시에 장차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을 예시하신 것으로, 우리 또한 주의 재림의 날에 예수님처럼 산자나 죽은자나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할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의 영광의 날에 대한 소망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사라져 버릴 옛것에 미련을 두면 안된다.
또한 본문의 변화산 사건전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죽기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 제자에게 주의 영광을 체험시켜 주신 것 처럼, 죽기전에 즉, 순교하는 스데반집사가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본것과 같이 다른 제자들도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들은 일화로 어느 기독교핍박국가에서 예수믿는 자들을 강가 나루에서 일렬로 세워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한명씩 빠트려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환상이 열려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와 수많은 천사들을 보고 환희에 차서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처형을 집행하던 어느 병사에게도 같은 환상이 열려 그 영광을 보고 나도 이제 예수를 믿겠다며 그 들틈에 서서 강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구전으로 들은 내용이라 어느때, 어느나라인지 알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인들은 이렇듯, 죽기전에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보게 된다.
예전에 본 '퀴바디스'란 영화에서 수많은 크리스챤을 십자가에서 또는 화형으로, 아니면 사자의 밥으로 던져져 죽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죽고 난후에 하나같이 두려움이 아닌 환희에 찬 표정을 지어서 네로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모두 순교의 순간에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본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이런 체험은 비단 순교의 순간에만이 아니라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주신것처럼 고난을 앞두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주시기도 한다.
예수님은 요14:18의 고아처럼 너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기제자들에게 고난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서 항상 내주하시면서 때로는 이러한 초현실적인 영광과 기쁨의 체험을 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소망과 위안을 준다.
고난 중에 있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에게 고난이 임하기전에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환상으로인지 진짜 나타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힘들 때마다 자신에게 나타나신 그 예수님의 모습으로 인해 고난을 감당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히브리어로 '알다'란 의미가 있는 '야다'는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몸으로 마음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부간의 동침에도 이 야다를 쓴다.
우리나라 고전인 춘향전은 참으로 영적인 소설이다.
춘향은 이도령을 머리로만 짝사랑한것이 아니고 깊은 교제가 있었기에 변사또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었다.
우린 이렇듯 성경으로만이 아닌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고 깊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붙들고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나 환난의 순간에 넘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에 그리스도만을 위한 단하나의 초막을 짓고 영광의 주의 재림의 날까지 세상에서 사명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한다.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