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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때[時]와 개벽(開闢)
「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6. 때[時]와 개벽(開闢)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99-116(P.975)
* 세계사의 변화와 시대의 변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종교적이고 심정적이다. 사실 사회적 실증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실증을 점더 면밀하게 점검하고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면, 변혁보다는 기복이나 평안(구원)을 찾아가는 신앙이 등장하게 되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것처럼 은둔으로 흐를 경향이 있다. 게다가 변화의 근거를 상층의 논리에 의해 선천세계와 후천세계를 나누는 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혼란과 불안의 시대에, 인민에게 근심하지 말고 수련과 정진하게 방향을 잡았다는 것은 장점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 표현으로 인민이 전쟁기계로서 역동성에 대해 그리고 자연(본성)의 역량을 확장하고 솟아나게 하는 경향이 위소(偉小, 偉大의 대구)하더라도 끈질김과 흐름에 대해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789년 대혁명이후에서처럼 절후사(société de saison)가 필요하다. 김상웅(金三雄, 1943-) 전 독립기념관장이 전하는 어느 글에서, 구데타 이후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의 일화로, “박정희 부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김종필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박 부의장에게 ‘어젯밤에 모두 잡아넣었습니다. 약 2만8천명가량 되는데 수송에 필요한 열차도 준비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들을 거제도로 데려가서 한데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한꺼번에 사살해버리는 것뿐입니다.”(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를 전한다. 들뢰즈가 보면 전쟁기계가 2만 8천명이나 된다고 할 것이다. 동학혁명 후에도 상당하지 않았을까?
저자가 동학을 영적 코뮤니즘으로 종교성을 강조한 쪽으로 갔는데, 이돈화를 근거로 한 것 같다. 이돈화가 동학의 발전적 이론과 실천을 전개하려고 하였지만, 일본제국 아래서 심적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 속에 도가적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동학이 사회 실천적으로 수련과 조직의 확장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종교적틀 만큼이나 사회적 틀을 중요시 했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식민지 지배에서 인민이 전쟁기계라는 점을 알았을 것인데, 종교성으로 공동체를 구상했다는 것은 동학의 역동성을 내면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지. - 이돈화의 사고가 문제일까? 동학사상이 일제하의 사회와 연관 속에서 내재성으로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인가? (51V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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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자유와 현실 39
제1장 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1. 천명(天命)과 무극대도(無極大道) pp 41-61
2. 두 가지 방법과 능동적 신비주의 pp 61-67
3. 경험과 표현(表顯) pp. 67-83.
4. 세계불안과 자기 인식 pp. 83-91
5. 개방성과 연대성 91-99.
6. 때[時]와 개벽(開闢) 99-116.
7. 심령의 윤리와 영적 코뮤니즘 11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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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때[時]와 개벽(開闢) 99-116
역사의 변화 법칙과 새로운 세상으로의 생성에 대한 관념은 ‘때[時]와 개벽(開闢)“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이 개념은 일종의 동학적 역사 철학을 형성한다. (99) [나는 동학적 역사.. 동적(dynamis) 역사로 읽었다가 동학(動學)이 아니라 동학(東學)으로 읽었다.]
우주와 개체들 에 대한 최시형의 현존 경험은 그의 스승의 의미 세계를 새로이 반복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스승[수운]이 인식한 진리를 후천(後天) 개벽시대 – 결정적 시점(1860)에서부터 5만년 동안 - 를 전개하는 ‘근본원리’로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스승[수운]을 개벽의 시조를 상징하는 천황씨(天皇氏)라 부른다. 최시형에 의하면 자신들의 도는 “천황씨의 본심을 회복”한 것이다. (100)..
회복은 주역(周易)의 이치에 따라 “지난 것이 되돌아오게 되는 법칙[無往不復之理(무왕불복지리)]”에 의한 것이다. 그의 스승[수운] 역시 “현재 순간에 천령이 강림한 것[只今天靈(지금천령)이 강림(降臨)]”을 “무왕불복의 이치를 받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자신의 시대 쇠(衰)해버린 선천(先天) 시대(5만 년 전에 시작한 역사)의 생명력을 다시 회복했다는 의미이다. (100)
최시형도 스승의 현존 경험을 우주의 “창조적 생성의 근본[조화지근본(造花之根本)]”을 ‘시창(始創)’한 것으로 파악했다. 5만년 전에 창조적 형성의 힘이 시작하여 성장하다가 최제우의 시점에까지 그 생기가 쇠퇴했다는 것이다. (100)
성쇠ㆍ순환하는 역사적 때[時(시)]의 법칙과 우주적 생명 원리[道(도)]의 시간적 운명은 일치한다. “이 시대의 운수는 천지개벽 초의 대운을 회복하는[斯世之運 天地開闢初之大運回復(사세지운 천지개벽초지대운회복)]”, ‘잉태(孕胎)’의 과정에 있다. ‘개벽의 운수’와 새로운 시대의 진실인 ‘개벽의 원리[開闢之理(개벽지리)]’는 회복의 과정에서 만난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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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시형과 후세 동학교도들이 주목한 것은 5만년 주기의 순환 법칙이 아니라, 최제우에게 결정적 시점에서 일어난 새로운 정신적 의미를 반복함으로써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다. (101) [종교적 시원 또는 기원을 삼는 의미로 된다.]
진정한 인격은 ‘먼저 마음 가득히 즐거운[滿心快哉(만심쾌재)] 후에 희열과 감격으로 생명의 창조성에 마음을 확정[造化定]’한다. 본원의 생명원리는 ‘쾌활의 원리[快然之理(쾌연지리)]’이며, 이것을 직관한 인격은 “문득 젖먹이의 적자지심을 회복한다[怳然復赤子之心(황연복적자지심)]” 이 회복이 ‘성철의 영역[聖哲之域(성철지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 이제 민중[生民(생민)][인민]은 상호 긍정에서 오는 쾌활성을 향유하는 관계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101-102)
새로운 주체성의 창조와 일반화[布德(포덕)]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도는 ‘미래의 도[未來之道(미래지도)]이다. (102)
“현재를 후천시대가 개벽하는 시대[現時(현시)가 後天開闢(후천개벽)임]”로 파악한다. (102)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人心開闢)이니, 장래 물질 발명이 그 극에 달하고 여러 가지 하는 일이 이전에 없던 발달을 성취할 것이니, 이때에 있어 도심(道心)은 더욱 쇠약해지고 인심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었으니, 그러므로 우리 도를 천하에 포덕하여 창생을 널리 구원하는 것[布德天下, 廣濟蒼生(포덕천하, 광제창생)]은 한울의 명(命)하신 바이다.”
... 그러나 그 문명사의 전개는 발전하면 할수록 위기에 봉착하고, 그 위기는 인심의 위기가 된다. 그리고 인심의 위기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후천개벽의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 부호로 나타난다. (102)
문명사의 물질적 팽창의 방향을 근대화로 생각한 이용구(李容九, 1868-1912)는 ‘개방과 통상’의 시대에 동학이 갖게 될 이해관계를 최시형에게 묻는다. 최시형의 대답에 의하면, “우리 도(道)의 운수는 세계와 함께 돌아가는 것[與世同歸(여세동귀)]이니, 우리 도(道)도 이 운세를 당하여 일변해야 번영할 것”이지만, “곧 세계에 드날리게 될[布揚於世界(포앙어세계)] 우리 도는 외국 병마가 아국 강토에 몰려들어 쟁탈하는” 운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도를 드러내는 것(顯道, 현도)”, 즉 “우리 도의 주의[名義(명의)]”를 드날리는 것이다. (103)
이어서 손병희가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최시형은 전쟁 중에 ‘계책전[策戰(책전)]’이 중요함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서양의 무기는 세상 사람이 대적할 수 없는 것이나 살인기계[殺人器(살인기)]라고 하는 것이요, 도와 덕은 사람을 살리는 기틀[(活人機(활인기)]이니, 그대들은 이때를 당하여 지극정성으로 도를 닦는 것[修道(수도)]이 옳다. (103) [들뢰즈에서 국가의 폭력은 살인기계(殺人器械)이고 인민이 리좀으로서 연결접속하여 저항하는 것은 전쟁기계(戰爭機械)가 되겠다. (51UMB)]
위 문답에서 볼 때, 최시형의 사상은 실로 마음의 힘을 진정한 삶의 제일의적(第一義的) 원리로 보는 심학적(心學的) 철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 역사철학적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었다. (104) `
이것은 형이상의 심층적 “현기진리[玄機眞理, 현묘한 기틀로서의 진리]이다. 이 진리를 ”본체로 하여 그것의 발용을 구체적 현실계에 구현하는 것[體用合一(체용합일)]“이 인생의 진로이다.(104)
체용합일적 인생관이 지향하는 미래의 ‘신세계(新世界, 손병희)’는 정신과 물질이 종합된 ‘도덕 문명의 세계[道德文明之世界(도덕문명지세계)’이다. 그러므로 최시형의 도는 기존의 세상과 함께 가는 여세동귀(與世同歸)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초월의 영역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往而不復(왕이불복)]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만유에 내재하는 천도(天道)의 연속적 약동성에 근거한 마음을 본체로 하여 생기로운 연대성을 창조해가는 길이다. 이러한 방식의 생활이 우주의 약동적 생성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돌아간다는 [수운 최제우의 길] ‘동귀일리(同歸一理)’,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길이다. 최시형에게는 이 길이 “세계인민의 정신을 환기[喚起世界人民之精神(환기세계인민지정신)]"하는 ‘광휘’이다. (104)
“무궁의 진리(無窮의 眞理)를 투시[透(투), 통찰]하여, 무극(無極)의 대운명에 참여하라.” (105)
이 운명에 동참하는 결단의 시간이 현재의 때[時]이다. .. 최시형에 의하면 도는 “미래를 표준으로 한다[未來(미래)를 表準(표준)]”한다. 그리고 도는 인간이 “현재의 때를 활용[用時用活(용시용활)]하여 형통하게 된다. (105) [미래 = 확장, 퍼짐]
시간은 달의 주기나 생물의 활동주기, 왕조의 변화처럼 “차고 비며[盈虧(영휴) 盈虛(영허)] 왕성하고 쇠퇴한다[盛衰(성쇠)].” 시간은 천체들의 주기처럼 측정할 수는 있으나 측정된 시간은 구체적 형상을 가지 물체들이 진행하는 지속의 길이다. 다시 말해 사건들의 흐름과 분리되지 않는 구체적 시간이다. (105)
.. 약동불식이라는 부단한 구체적 지속을 실제로 보는 전통적인 시간관에 익숙한 최시형에게는, 인도인이나 그리스의 제논(Zenon, 전490-전430)이 생각한 연장 없는 점과 같은 순간개념이나 이 정지된 순간들의 연속체와 같은 수학적 관념들은 낯설었다. (106) [최시형의 지속의 시간관은 저자의 평이 아니겠는가. 생명적으로 풀어보려고 벩송의 견해와 유사하게 되었다.]
최시형의 구체적 시간관 ... [그에게서] 순간은.. 별안간 현존하게 되는 질적 순간이다. 깨달음이라는 근본경험이 일어나는 결정적 사건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영원의 한울(天천)이 ‘인간의 마음에 있게 되고[在於心(재어심)]’, ‘인간의 마음이 한울에 있게 되는[在於天(재어천)]’ 상호 내재의 경험이다. .. “한울과 마음은 본래 두 가지의 것이 아니며 마음과 한울은 서로 합치하게 된다[天與心, 本無二物, 心天相合(천여심, 본무이물, 심천상합)].”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한울이고 한울이 인간이니 인간의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의 밖에 인간이 없다(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인시천 천시인 인외무천, 천외무인)].” 이러한 최시형의 관념은 이돈화에 의해 인내천(人乃天, 인간이 한울이다)으로 정리된다. ... 인간은 우주의 존재 의미를 소통적 개방성으로 이해한다. (106-107) - [이항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논리에다 변증법을 끼고 있다. 이항 논리는 상보관계이며, 영혼과 신체의 문제는 벩송과 들뢰즈 식으로 이중화 또는 이중구속(분절)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종교적으로 합일이라고 표현해야만 할 것인데, 여기서 합일은 상층에서 라는 것이다.]
동시대는 우주와 인간의 상합(相合)에 기초한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활동[動]의 시대이다. .. 현재의 활동은 “대운을 함께 성취해가는 터전[共成大運之地(공성대운지지)]이 된다. (107)
이것은 ‘공간적 내세’가 아니라, 시간의 성숙을 통해 역사가 완성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인 ‘시간적 내세’이다. (107)
... “허무의 상태가 능히 이(理)를 낳는다[無能生理(무능생리)]”. (107-108)
이처럼 동학적 삶이란 역사와 인간의 생활에 영원성을 개입시킨다. 포덕 0년 ... 이는 진부한 생활양식의 반복이 아니라 0년에 민중적 성인이 경험한 진리를 반복[復]하는 활동이다. (108)
...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의 기독교적 시간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이미 발생했던 사건이 앞으로 일어날 그 사건에 대한 강한 보장”이다. .. (108-109)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결정적 시간(kairos)’이며, 현재(nun)의 시간은 불완전하지만 그 빛에 의해 완전한 시대로 전환된다. (108-109)
그런데 쿨만이 요한복음을 중시하면서도 영원성의 내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그는 기독교적 직선 사관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보만의 지적처럼 “성서적 시간 파악은 선적이고”, “그리스적 시간 파악은 순환적이라는” 쿨만의 “언제나 잘못된 표현”에 기인한다. (109) [유대가 직선적이라는 점은 산술적이라 것인데, 그 표현에는 666을 싫어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점성술과 이집트 천문학을 받아들인 그리는 원(구球)적이라는 점에서 기하적이고 순환적인데, 비례수에서 2/3은, 0.6666.. 이라는 점이다. 이 두 사고는 표면과 표면 위의 사고인데, 지표와 천구의 사고이다. 1830년에 와서야 인간의 이성이 표면 아래(심층)의 사유를 실증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 영혼의 문제제기가 이때쯤에서 제대로 되지만, 소크라테스가 회오리의 사유를 했다는 설이 있고, 벩송이 이 관점을 받아들인다. - 신에 대한 개념작업(la conception)은 인간 지성의 발달에서 반영물 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51UMJ)]
... 그렇다면 왜 초기 기독교가 영원한 신성의 내재를 느끼고 말할 수 없었겠는가? 또한 그리스인도 다른 민족처럼 “차안에서 피안적이고 불[비]가시적인 신의 계시를 파악하고자 했다. (109)
물론 기독교적인 피안적 영원성의 내재는 신 그 자체의 내재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신의 성령(Spirits)의 내재이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죽음 이후 성령의 임재라는 성서의 내재는 ‘조물자(造物者)’인 ‘무극대도’ 자체의 내재성에 더 비중을 두는 동학의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 이돈화)와는 대비된다. (110)
동학의 영원성에는 미묘한 양의성, 즉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성격이 있다. 최시형에 의하면 “우리의 도는 무극에 본원하여 태극에 나타나니 천지상하에 뿌리를 내리고 변화의 이치(理)는 혼원한 하나의 기에 잠기어 있다(吾道 源於無極而顯於太極 根着於天上地下 理潛於混元一氣(오도 원어무극이현어태극 근착어천상지하 리잠어혼원일기)]. (110) .
최제우는 “하늘과 땅, 음과 양이 갈라진 후에 무수한 만물이 생겨[化, 화]나서”라고 말한다. 그는 또 본체적 존재를 “그림자를 비추는 태양[太陽流照影(태양유조영)]에 비유한다. 태양은 자기 동일적으로 머물며 피물의 시간적 변화를 영원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110-111) [상층의 사유에는 대지(지구)의 자기원인에 대한 사유가 없다. 표면(지표)과 상층(천구)의 대비는 형상형이상학의 토대이다. - 표면과 상층의 이런 사고는 국가와 종교(권력과 권위)의 상조(상호보조)를 맞추는 사고이다. 서로 닮아간다. 목적론과 기계론이 상조관계이듯이 말이다.]
.. 우주는 129,600년을 주기로 형성과 파괴를 거듭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순환의 이치[循環之理]’가 경과하는 ‘전만고와 후만고(前萬古 後萬古)’를 생각하는 최제우의 견해에는 분명 생성계의 영원한 주기적 리듬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들어 있다. (111) - [생성과 소멸의 주기를 말하는 것은 형상형이상학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오성의 사고의 한계이다. ]
이 점에서 이돈화는 스피노자의 개념을 활용하여 무극대도를 ‘능산적 자연’으로, 삼라만상을 ‘소산적 자연’으로 해석한다. .. 전통 이학은 ‘만물이 하나의 생명원리[萬物一理, 정이천(程伊川)]라는 원융한 체계를 의식적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111)
최제우의 현존경험과 최시형의 개체 공경의 삶은, 만유가 언제나 신성한 활력의 표현이었음을 직관한 결과였다. 최시형은 “진실성과 공경심과 종교심[誠敬信(성경신)]”을 모든 사회적 활동의 윤리적 기초로 삼는다. (111-112)
이 점에서 손병희는 동학적 세계관을 불교적 어휘로 해석할 수 있었다. 불가에서는 말하는 세간(世間)이라는 현실세계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불행해지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하는 사건들의 그물체계(인연(因緣)의 체계)이다. .. 이 경험이 우주적 영원을 표현하는 활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채울 것이다. 이 활력이 표출하는 능동성은 마음을 쾌활하게 한다. (112)
최시형의 사상과 인격이 보여주는 신비주의적 직관과 능동적 실천성의 결합은 마음과 우주의 상합을 기초로, 내면[내부]과 외면[외부]의 합일을 창조해나가는 삶의 양식을 삶의 모델로 제시했다. (112) [외부 내부]
신체와 외부 자연은 본질적으로는 결코 권력과 산업의 수단인 객관적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약동불식하는 심리[영혼]적 실재의 현상적 표현이다. ... 정신은 우주적 연대성을 느끼는 포괄성과 개방성을 갖는 인격, 자연사의 시간적 흐름을 통관하는 무한과 영원의 관점을 체화한 인격에서 그 진정한 본질에 도달한다. (113) [심리는 영혼이다]
... 바로 이러한 내적 필연성이 최시형으로 하여금 제국들의 세계사적 억압에 저항하게 했으며, 일상의 궁핍과 환난을 기뻐하게 만들었다. 동학혁명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을 때, 최시형은 탈옥할 수 있었음에도 죽고자 했다. 감옥에서 그가 남긴 최후의 유언은 “조금도 근심하지 말고 그저 잘들만 (大道를) 믿으시오”였다.
동학혁명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친 종교적 관념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동학의 이상사회는 신비주의적 철학이 갖는 영적 코뮤니즘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 (114) [변혁운동의 귀결이 영적 공동체로 간다는 점은 종교화의 길이다. 프랑스 대혁명 후 계절사(季節社)와 같은 심층의 흐름도 필요했는데, 일제의 강점으로 역사의 회오리가 더 큰 것 같다.]
... 언어[개념, 외연]란 의미의 명확성이 증가할수록 의미가 빈곤해지는 법이며, 의미가 모호한 예술과 종교의 언어는 의미의 풍요와 심원함이라는 불투명한 아우라나 성운(星雲)을 배경으로 갖는다. 이 모호한 성운의 세계가 형이상학적 느낌을 동반하는 주체적 깨달음이라는 지혜의 차원이다. (115) [언어 = 개념, 외연. 의미 = 내용, 내포. ]
이렇게 볼 때 이제까지 동학과 대종교(大倧敎) 및 민중적 사상가들에 대한 철학계의 관심이 성리학과 실학에 비해 현저하게 미미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파악했듯 동서양의 위대한 철학 체계는 ‘실천적 신비주의’와 내면의 빛에 대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잇다 ...“이론적 지혜는 이론들을 통해 더디게 목표에 이르지만, 도덕적 탁월성은 단숨에 도달한다.” (115)
7. 심령의 윤리와 영적 코뮤니즘 116-125.
이 점에서 최시형의 선악을 넘어선 심령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와 의의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윤리관은 근본경험이 갖는 우주적 소통성(疏通性)을 향유하는, 이른바 낙천(樂天, 하늘을 즐거워함)의 경지[境界(경계)]에 연원한다. 이 경계에서의 느낌은 장자(莊子)의 표현으로 천락(天樂, 하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116)
소극적 측면의 즐거움은 (1) ..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이며, (2) 주체가 자신 안에 내화도어 있는 억압적 심리구조를 탈각하는 방식이다. (116)
적극적 측면의 즐거움은 (1) .. 존재에 대한 긍정... (2) 존재에 대한 긍정은 천(天)의 작용과 공감할 때 오는 마음의 개방성에 근거한다. (116)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이 동학사상을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로 파악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우주적 근본경험이 갖는 구조적 의미에 있다. 이 구조적 의미가 최시형이라는 개성을 통해 역사 안에 나타났다. (117)
동학의 최제우와 최시형은 그것을 스스로 체회(體會)하여, 민중 각 개인의 존재의의를 우주적 연결체계 속에 정초하고 그것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의 어휘를 사용한다면 진정한 인간은 계약적 권리를 가진 외면적 관계로 분열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제도적 가치를 초월하여 생명의 원천으로 환원된, 그리고 가진 것 없는 민중성으로 환원된 ‘바닥사람’이다. (117)
동학의 윤리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포함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대의 ‘타율적 윤리학’은 ‘권력설(權力說)’이었으며, 이것이 역운동하는 생명의 창조적 힘에 의해 점차 개체의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율적 윤리학’으로 진화해 왔다. (117-118) [조선말(19세기 후반)은 권력의 부재시기가 아닐까? - 중국의 지배권과 일본의 침탈에 대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의 시대. 기존(노론) 권력이 다른 외세와 결탁하려는 시기가 아닐까? - 그리고 20세기는 이미 일본침탈의 시기이다. 타율적이라기보다 외세 지배의 시기이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간도로 망명이 한 부류이고, 리좀의 흐름으로 민족종교들이 내재적으로 흐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마도 이돈화의 진화적 생명철학의 관점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인철학(新人哲學)에 의하면... 수운주의는 “시대에 반항하는 불평(不平)의 철리(哲理)”이다. (118)
이러한 이돈화의 해석이 보여주듯 동학철학은 극복과 저항을 결합한다. .. 폐쇄성과 억압성을 면치 못하는 선천(先天)의 역사이며, 새로운 후천의 역사는 생명 진화의 방향으로 인간의 비밀스런 진상이다. .. 이런 의미에서 최시형은 말한다. “사계절이 차례가 있어 만물이 풍요롭게 무성하며, 주야가 뒤바뀌면서 태양과 달이 분명하고, 장구한 시간에 생명원리{理氣(이기); 한울의 자기 질서에 따른 창조적 힘}는 변질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주의 지극히 성실한 휴식없는 원리이다. [四時有序 萬物盛焉 晝夜飜覆 日月分明 古今長遠 理氣不變 此天地至誠無息之道也(사시유서 만물성언 주야번복 일월분명 고금장원 이기불변 차천지지성무식지도야)]” .. “순수하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노력하는 휴식 없는 성실성으로써 우주의 원리와 운행을 함께하면 비로소 그를 대성대인(大聖大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使此純一無息之誠 與天地同度同運則 方可謂之大聖大人也(.사차순일무식지성 여천지동도동운칙 방가위지대성대인야)]” (118-119)
생명진화의 방향과 극복의 노력을 개체의 자유와 연대성의 이상과 연관시키는 생각은 함석헌(咸錫憲 1901-1989)에게도 나타난다. .. 새 시대의 자유는 상공업에 바탕한 서양 시민사회가 성취한 ‘외면적 자유’가 아니라 사적 소유와 상품 및 제도에서 자유로운 ‘내면적 자유’이다 .. 부르주아 사회가 사적 이익의 조절을 위해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의제를 취하고 있지만, 이제는 전체가 자유와 연대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대표들을 이끌어 가고 국가는 사회로 흡수된다. 학자와 관료의 권위주의적 생각은 민중 전체의 사유에 의해 사라진다. .. “황금신의 십계명을 깨버리지 않으면” 도래하는 이상인 ‘가나안’은 ‘안나가’가 될 것이다. (119)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 대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 리좀으로서 인민이 매끈한 공간을 흐르며 새로운 고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데 60년의 일본제국주의 와 또다시 60년의 미국제국주의, 즉 앙글로색슨 사고에서 벗어나는 사유는 남북이 상보관계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인민은 연합할 선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51VLF)]
자유의 윤리는 기존의 선악관을 넘어서 개체의 내적 본질인 우주 생명의 응축이자 투명한 영혼인 종자(씨알)로 환원해 들어가, 타인은 물론이고 만유와 연동하는 투명한 소통적 관계를 사유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영혼의 코뮤니즘(spiritusal communism)이다. 동학의 정치적 비전 역시 이 방향에 놓여 있다. (120) [윤구병은 톨(씨앗)이 아니라 결(파동)으로 사유할 것을 강조한다. 씨알, 또는 원자를 토대로 하는 사고는 소박한 유물론이다. 진솔한 유물론의 질료 차원은 흐름이고 결이다. (51VLG)]
또한 함석헌의 저항의 철학(1967), 혁명의 철학(1968), 인간혁명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가 사용한 개념인 ‘창조적 다수’의 ‘우주적 윤리’는 언제나 긴장과 저항을 주체적 덕으로 포함한다. 자유와 연대의 형이상학적 원리인 ‘씨알은 새로운 생명의 내재적 가능성의 총체요 그루터기“이기 때문이다. (120)
잠재성은 창조의 원천이자 위기[부정성]의 근원이기도 하다. .. 그[함석헌]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그는 ‘모순의 인간’이다. (120) [잠재성, 즉 권능은 위기가 아니라 도약의 근원이며, 긍정성이다. 이렇게 위기 또는 부정성이라는 견해는 이항대립으로 놓고 하나를 긍정으로 놓는 헤겔식 사고이며, 유일신앙자들의 논리이다. 그럴 경우 ‘모순의 인간’이라 한다. “생성의 인간”이고 소수자 되기의 인간이며, 그게 전쟁기계이다.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전쟁기계이지만, 상층에 있기에 살았다. 많은 전쟁기계들은 심층이었기에 죽음과 의문사를 한다. (51VLG)]
그러나 다른 사람이 사색과 학습으로 도달하는 세계지혜를 단번에 주파한 최시형에게는 잠재성과 그것의 표현인 삼라만상이 이미 생명의 세계로서 그리고 기쁨의 세계로서 향유되는 것이었다. (120) [생성은 향유가 아니라 환희이며, 그 세상을 누리는 것은 자유이다.]
그의 내면은 모순의 감정으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생사여탈의 권한을 품고 있는 평화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내적인 덕에서 나오는 그의 언어와 행동이 민중[인민]의 봉기와 함께 했을 때 그것은 혁명이 되었다. (121)
생명진화의 방향은 폐쇄적 집단이 명령의 방식으로 개체에게 강요하는 법칙주의적 윤리로부터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개방적 인륜에의 윤리로 나아간다. .. 이러한 진화의 운동이 동학의 대신사(大神師, 최재유)와 신사(神師, 최시형)를 통해 자각되었다.. 개체의 자각에서 우주의 궁극적 본질이 내부에 있다는 것[內有神靈(내유신령)]이 알려진다. 이 본질이 자기 실현의 힘을 가지고 밖으로 작용[작동]하여 타인을 주체로서 공경하면서 변화시켜 나간다[外有氣化(외유기화)]. .. 이것이 바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작용[작동]을 한다는 의미에서의 신령한 내적 본성이 세계에 출현했다[性靈出世(성령출세)]는 의미이다. (121)
선악의 피안인 궁극의 선 ‘지선(至善)’ 안에서는 ‘경천(敬天)ㆍ경인(敬人)ㆍ경물(敬物)’이 실현되는 공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 “사람 사람이 마음을 공경하면 기혈[심신의 생기]이 평안하고 조화롭게 되며, 사람 사람이 타인을 공경하면 만민(萬民)이 와서 화합하고, 사람사람이 사물을 공경하면 만상(慢相)이 와서 자태를 드러낸다. 거룩하여라! 공경하고 공경할 진저! [人人敬心則 氣血泰和 人人敬人則 萬民來會 人人敬物則 萬相來儀 偉哉 敬之敬之也夫(인인경심칙 기혈태화 인인경인칙 만민래회 인인경물칙 만상래의 위재 경지경지야부)]”(121-122)
손병희에 의하면 존재긍정의 경험은 각 개체를 ‘영성의 결정체[靈之結晶]로 인식한다. ... “본연의 성품이 닫히면 만유의 근원소가 되고, 본연의 성품이 열리면 만유의 빛나는 거울이 되니, 만유가 거울 속에 들어와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으며 이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신령한 활력이며, 신령한 활력은 생명의 힘의 작용효과이다[性闔則 爲萬里萬事之原素 性開 則 爲萬里萬事之良鏡 萬理萬事 入鏡中 能運用曰 心 心卽神 神卽氣運所致也(성합칙 위만리만사지원소 성개 칙 위만리만사지량경 만리만사 입경중 능운용왈 심 심즉신 신즉기운소치야)]” .. 본성이 펼쳐지는 전개에 따라 마음은 ‘활발한[活潑潑(활발발)]’ 능동성을 갖는다. (122)
원래 이 활발성은 선가(禪家)에서 자유의 쾌활성을 의미한다. 왕양명, 특히 왕심재(王心齋, 이름은 艮(간))를 중심으로 하는 태주(泰州) 학파는 그것을 마음의 능동적 활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손병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인간본성의 활력을 살려 그것을 구체적 행동의 주체적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122-123) [손병희는 주자보다 양명학을 읽었다는 것인가?]
인간 심리에 대한 임상학적 접근은 동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최제우는 자신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질병(疾病)’ 상태로 있는 것으로 진단했다. .. 이런 문맥에서 당(唐) 송(宋)대에 발달했던 도교철학의 ‘성명쌍수(性命雙修, 내적 본성과 신체적 에너지를 함께 양육하여 조화시킴)’의 정신에 따라 ‘성신쌍전(性身雙全, 내적본성과 신체의 동시완성)’은 이돈화와 그 이후에까지 동학의 인간론의 주요원리가 된다. (123) [질병이란 정신병리일 것인데, 그런데 사회적 의미로 쓴 것 같다.]
이러한 문맥에서 동학의 윤리는 이돈화가 강조하는 최제우의 ‘삼단사상(三段思想)’을 포함한다. 제1단은 ‘보국(輔國, 나라를 도움)’으로서 ‘민족개벽(民族開闢)’이다. 제2단은 ‘안민(安民)’으로서 ‘사회개벽(社會開闢)’이다. 제3단은 “세계의 덕을 펼쳐 민중을 널리 구제하는 것[布德天下 廣濟蒼生]”으로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이다. (123)
... 인류의 질병을 치유하는 해방적 투쟁을 해야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동학혁명이 소유를 위한 투쟁이 아니었듯, ‘동물적’ ‘소유투쟁’이 아니며, ‘인간다운’ ‘인간젹(人間格)의 투쟁’이다. 이러한 방식의 실천을 이돈화는 ‘창조투쟁(創造鬪爭)’이라 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동학적 개벽의 의미에 인문주의[인도주의]를 가미한다. (123)
이 변형의 방향은 “유물적 계급투쟁이 끝나는 날 다시 어떠한 출구를 찾아 나갈까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 (124) [이돈화는 사회주의 국내에 들어와, 계급투쟁이란 것을 알았다.]
영적 코뮤니즘은 역사 내에서 어떤 제도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돈화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를 ‘성공불거(成功不居, 공을 성취한 상황에 안주하지 않음)’라고 했다. 이 때문에 동학적 신념의 소유자는 미래의 희망을 대망하는 시간 안에 살게 된다. .. 이러한 시간성 안에서는 현실적인 것이 차라리 환상적이며, 미래의 환상적인 것이 현실적이다. (124) [저자는 헤겔의 용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현실로 치환하는 것은 전도된 심리학이며 정태적 종교의 특성이다. ]
이 윤리의 시간적 본성은 최제우의 「시문(詩文)」에 잘 나와 있다.
겨우 한 가닥 길을 얻어, 걸음걸음 험난한 길을 걸어가노라.
산 밖에 다시 산이 보이고, 물 밖에 또 물을 만나도다.
다행이 물 밖에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에 산을 넘어왔노라.
바야흐로 들 넓은 곳에 이르니, 비로소 대도가 있음을 깨달았도다.
안타까이 봄소식을 기다려도 봄빛은 마침내 오지 않네.
봄빛을 좋아하지 않음이 아니나, 오지 아니하면 때가 아닌 탓이지.
비로소 올 만한 절기가 이르고 보면, 기다리지 아니해도 자연히 오리라.
봄바람이 불어간 밤에, 수많은 나무 일시에 알아차리리.
「詩文(시문)」 [1861년 6월 이후]
裳得一條路 步步涉險難 상득일조로 보보섭험난 / [纔得一條路 재득일조로]
山外更見山 水外又峯水 산외갱견산 수외우봉수
幸渡水外水 僅越山外山 행도수외수 근월산외산
且到野廣處 始覺有大道 월도야광처 시각유대도
苦待春消息 春光終不來 고대춘소식 춘광종불래
非無春光好 不來卽非時 비무춘광호 불래즉비시
玆到當來節 不待自然來 자도당래절 불대자연래
春風吹去夜 萬木一時知 춘풍취거야 만목일시지 (여기까지 저자의 번역)
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일일일화개 이일이화개
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삼백육십일 삼백육십개
一身皆是花 一家都是春 일신개시화 일가도시춘
甁中有仙酒 可活百萬人 병중유선주 가활백만인
釀出千年前 藏之備用處 양출천년전 장지비용처
無然一開封 臭散味亦薄 무연일개봉 취산미역박
今我爲道者 守口如此甁 금아위도자 수구여차병 [전문]
봄의 빛과 바람으로 상징되는 우주적 경지[宇宙境界]는 애타게 기다리는 열망의 초점이지만, 어느날 그것이 은밀히 세상에 실현되는 그 ‘때’에 세상은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사의 존재의미가 총체적 개벽에 있음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는 날을 대망하는 동학적 삶의 양식은 일종의 존재론적[종교적] 종말론이다. 이 긴박성은 존재의 의미인 개벽의 자유가 일으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125)
(13:24, 51VLG)
*******인명록....
[천황씨(天皇氏), 是中国上古神話時期的君主的後裔,三皇之一,號曰天靈,十二人,在西域昆侖山即位,共在位一萬八千年。一说天皇氏即伏羲。[4500-3500 사이의 전설(신화) 속에서 인물들 중의 하나. 재위 1만 8천년이라는 것은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1만 년 전쯤에 빙하기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인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1824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 천도교 창시자.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 동경대전, 용담유사
1827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조선의 종교인, 교육자, 사상가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 초명은 경상(慶翔),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경상도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 [최시형이 처형될 때 일흔 하나인데, 이용구가 딱 서른이구나. -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을 때, 플라톤도 거의 같은 나이였다.]
1861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천도교(동학) 지도자,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자(字)는 응구(應九)이며, 망명 중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 최시형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1868 이용구(李容九, 1868-1912) 경상북도 상주 출생.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장,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끌었다.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이다. 23세 때 동학당에 입교, 2대 교주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 1905년[서른일곱]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 사상을 가진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에 맞서 친일 사상을 가진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1884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일제명: 白山一熊, 백산일웅, 1884-1950)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지도자, 사상가. 천도교 도호는 두암(豆菴)이며 아호로 야뢰(夜雷)와 백두산인(白頭山人)이 있다. 신인철학(新人哲學)(초판 1930, 중간 1963)
1901 씨알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동경사범 출신, 박정희 유신에 저항한 재야 학자.
1903 열암(冽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호(號)는 열암(冽巖) 서울대 교수. 1903년 7월 1일 평안남도 평양.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정희 유신에 협력.
1940 김경재(金敬宰 1940)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학위 Universiteit Utrecht (네델란드) / 그리스도교와 아시아 종교들의 만남: 한국의 접목과정에서 상관방법, 지평융합, 패러다임 전환(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Asian religions: Method of correlation, fusion of horizons, and paradigm shifts in the Korean grafting process) J.A.B. Jongeneel, 1994.
[김월해(金月海 s.d.) 교단 간부?. 천도교경전요해:논학문편, 천도교중앙총부, 1982. 천도교 사상, 천도교중앙총본부, 1983. 천도교경전요해:수덕문편, 천도교중앙총부, 1985.
[전대열(全大烈, s.d.), 싸우는 평화주의자 함석헌 (1982 초판)의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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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불렀다. 북송北宋시대의 관리이자 이학가(理學家),
1472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 명나라의 철학자, 심학의 대가.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1483 심제(心齋) 왕간(王艮, 1483-1541) 명나라의 양명학 좌파 사상가. 자는 여지(汝止), 태주(泰州) 안풍장(安豊場) 출신. 태주학파의 지도자. 38세 때 처음으로 왕양명이 강서 지방에서 양지(良知)의 학(學)을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가 그 학문에 크게 감복하여 그 후 제자의 예절을 취하였다. 양명의 사후에 그는 문호를 개방하여 일반 서민을 강학하였다.
[1619 선산(船山)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중국 명말(明末)청초의 사상가, 학자. 자(字)는 이농(而農), 호(號)는 강재(薑齋). 만년(晩年)에 형양(衡陽)의 석선산(石船山)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으므로 선산선생이란 불린다. 그는 주자학의 선험적인 이(理)의 철학을 비판하고, 오히려 장횡거(張橫渠)의 기(氣) 철학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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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 1894-1978),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Das hebräische Denken im Vergleich mit dem griechischen, 1952), 허혁, 분도출판사, 1975, 페이지 321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 1894-1978), 노르웨이 신학자,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 이 저술은 학위논문인데,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베르그송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허혁(1919-1997) 신학자, 이화여자 대학교의 교수. 1919년 황해도 해주 출신,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 복음 신학자. 루터파 성서해석자. 국적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날 때는 독일인이었으나, 전쟁 후에 프랑스인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학위를 했으며, 논문은 독일어로 쓴 것 같다. 파리 소르본과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을 화해시키려했다. 크리스트와 시간(Christus und die Zeit: Die urchristliche Zeit- und Geschichtsauffassung, 1946), 채위 옮김, 1974. 프랑스어판(Christ et le Temps, Delachaux et Niestlé, Paris, 1958)
war ein evangelischer Theologe und Exeget. / [Carl E. Braten, History and Hermeneutics, 채위(蔡偉) 역, ꡔ歷史와 解釋學ꡕ(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69), ] / Calvin의 신인식론, 채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신학논단 3, 1957, 71-86 / 채위(蔡偉, s.d.), 목사.]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서른)에 출간하였다.
제논(Zenon, Ζήνων ὁ Ἐλεάτης, 전490-전430) 엘레아학파의 제논,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운동을 부정하다. 제논의 역설(부조리) 논증: 거북이와 아킬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