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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빌립보서 제 4 강 메시지_아산UBF
생명의 말씀을 밝혀
말씀 / 빌립보서 2:12-30
요절 /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그리스도 찬가를 배웠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2:6-8).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2:9-11). 낮아짐은 예수님이 자원하신 것이었고, 높아짐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르친 직후, 그 마음을 실제로 살아낸 세 사람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은 자기 생명을 전제로 부어드렸고, 한 사람은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종처럼 수고했고, 한 사람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6절부터 8절까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자기를 비우심, 종의 형체를 가지심,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12절부터 30절까지 이 세 사람의 몸을 통해 순서대로 반복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운 사람으로, 디모데는 종의 형체를 입은 사람으로, 에바브로디도는 죽기까지 복종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I. 부르심 (12-16절)
바울은 먼저 모든 성도를 향해 부르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낮아지셨으니, 이제 너희도 그 마음을 삶으로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이루라"는 이미 심겨 있는 것을 끝까지 일하여 완성해 내는 것입니다. 13절은 그 근거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으셨고, 우리는 그 심겨진 마음을 삶으로 자라게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그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함입니다.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빌립보에 갈 수 없습니다. 그가 없는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고,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로, 디모데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납니다. 시내산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이 산이 진동하고 불이 붙는 것을 보며 두려워 떨었습니다(출 19:16). 이것은 자기가 받은 것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경외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십자가까지 내려가신 그 값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값의 무게를 내 삶으로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4-1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원망과 시비는 개인의 인격면에서 보면 자기중심성의 결과물입니다. 상황에 대한 불만이 원망이 되고, 사람에 대한 불만이 시비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권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는데(6절), 원망과 시비는 자기 권리를 끝까지 붙들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마땅히 주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관철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마땅히 내 것"이라는 바탕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자기 것인 영광조차 붙들지 않으셨습니다. 원망과 시비를 버리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를 버릴 때, 우리는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 별처럼("포스테레스", φωστῆρες, 창 1:14의 광명체) 빛나게 됩니다.
한편,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리더나 다른 사람들을 돕는 영적 리더에게 더욱 주목해야 할 이슈 입니다. 목자라고 하면서 개인의 호불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악의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명역사를 가지고 자아실현 하려는 경우입니다. 개인의 호불호를 버리지 못하는 리더가 있는 공동체에서 원망과 시비가 발생합니다. 개인의 호불호 때문에 공동체의 공정성을 관리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는 공동체에서는 원망과 시비가 그치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공동체의 공정성을 관리하여야 하는 리더가 자기 뜻, 자기 이득을 성취하고자 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원망과 시비가 발생하겠습니까? 영적 리더, 공동체의 관리자는 반드시 개인의 호불호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 공동체라 하는데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는 곳에 새로운 영혼이 깃들이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쓰시고 함께 하시는 공동체가 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16절 상반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밝혀"라는 말은 붙들어 높이 들어 올린다는 뜻과 어둠 속에서 비춘다는 뜻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붙들어 삶으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면 그 삶이 어두운 세상 앞에 빛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고 계속하여 자기 생각과 생활과 삶에 적용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단을 이룰 뿐 아니라 가까운 형제와 공동체 전체를 실제적으로 섬기는 실천적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철학이나 관념으로 담아두기만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등불을 등경에 올려 놓아 방안을 구석구석 밝게 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밝힌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바울은 세 사람의 삶으로 보여 줍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자기 생명을 붓는 것이며, 자기 일을 내려놓는 것이며,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헌신입니다.
II. 전제로 부어지는 종 (16절 하-18절)
1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으려면, 빌립보 성도들이 흠 없는 빛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 생명 전체를 걸고 그 일에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관제"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 완전히 쏟아 버리는 전제, 곧 부어드리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민수기 15장의 전제 규례를 보면, 전제는 그 자체로 독립된 제사가 아니라 번제나 화목제 위에 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된 제물이 먼저 있고, 그 위에 포도주가 부어져 함께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쏟아 버리는 헌신입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가 주된 제물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고 서로 섬긴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바울은 자기 죽음을 그 위에 더해지는 전제로 표현합니다. 그는 자기 생명이 그들의 제사를 더 향기롭게 만드는 데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울 안에서 나타난 방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마땅히 누릴 영광을 붙들지 않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쏟으셨습니다(7절). 바울도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고,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 위에 자기를 쏟아붓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비우심과 같이 바울역시 빌립보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이 부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후에 순교를 눈앞에 둔 디모데후서에서 이 ‘전제’를 다시 사용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빌립보서를 쓸 때는 "만일 ... 드릴지라도"라는 가능성이었던 것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는 "내가 벌써 부어지고" 사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부터 순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명 전체를 하나의 전제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자기가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한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에도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는 전제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전제는 잔의 술 일부만 땅에 흘려보내고 나머지는 자기 몫으로 남겼습니다. 세상의 헌신은 이런 모양입니다. 여유가 있을 때, 손해 보지 않을 만큼만 나누어 줍니다. 바울은 잔의 일부가 아니라 잔 전체를, 자기 생명 전체를 부어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릴 영광 전체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전제는 시간과 물질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붓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몸도, 생각도, 마지막 숨결까지도 성도들의 믿음을 향해 있었습니다. 우리의 헌신도 생명을 다하기까지 다 드리는 것이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죽음 앞에서 기뻐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부탁입니다. 죽음은 상실이고 슬픔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 생명이 부어지는 그 자리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죽음이 슬픔이 아니었던 이유는, 그 죽음이 성도들의 믿음 위에 더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사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III.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종처럼 수고한 아들 (19-24절)
19-2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뜻을 같이하여"라는 말씀은 "같은 영혼을 가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성도들의 사정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자기 일을 구하는 것이 세상의 기본값입니다. 위기가 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리부터 지킵니다. 인정받을 기회 앞에서는 앞서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앞에서는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일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목자와 삯꾼을 말씀하셨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하나니"(요 10:12). 삯꾼은 위기 앞에서 자기 일을 구합니다. 선한 목자는 위기 앞에서도 양의 일을 구합니다. 디모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6-7절). 디모데는 자기의 자리나 유익을 붙들지 않고, 종처럼 성도들의 사정을 살피는 자리를 택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종의 마음을 하루아침에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목자 바울 곁에서 함께 수고하며,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목자의 마음을 배우고 몸에 익혔습니다.
바울이 먼저 그 마음으로 살았고, 디모데는 그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걸으며 그 마음을 물려받았습니다. "연단"이란 시험을 통과하여 검증된 인격을 가리킵니다. 디모데의 종 됨은 이론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함께 수고하고 함께 고난받는 실제 삶의 훈련 속에서 배워온 것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만 유대인인 청년이었습니다(행 16:1-3). 디모데가 본래 소심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런 그가 "이 밖에 내게 없다"고 말할 만큼 신뢰받는 동역자로 서 있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 수고하며 훈련받은 사람은 이렇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맨 처음 Fishing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그 다음단계로 Growing up 합니다. 그런 다음 죄와 죄악된 요소를 털어내는 Training 단계로 갑니다. Training 단계를 마치면 능히 말씀의 샘을 파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말씀의 종이 되는 Discipline 단계로 갑니다. 그런 다음 파송받습니다. Apostle! 우리 학생회에 여러가지로 연단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사하여야 합니다. 젊어서 연단받지 않고 나이들면 그렇게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젊어서 철저하게 연단받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열매 맺을 때 열매를 맺습니다. 연단받지 않은 사람은 열매가 없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여 하나님께서 의미있다고 볼 수 있는 열매가 없는 것은 부끄럽습니다. 그 때 열매맺는 사람을 부러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자신이 연단받지 않고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살아온 것에서 문제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환경에서 문제를 찾고 주변 사람에서 문제를 찾으며 남은 시간과 기회마저 허비해버리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받는 고난, 청년의 때에 받는 연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단을 잘 받으면 디모데와 같이 처음엔 연약했더라도 후에는 그리스도를 닮고 바울 같은 대 목자가 가장 신뢰하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자기 재판의 결과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여전히 디모데를 통해 성도들을 섬길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스도의 종의 마음은 자기 형편이 불확실할 때도 다른 사람의 필요를 향해 있습니다. 바울은 갇힌 자리에서도 디모데를 통하여 빌립보 성도들을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돕고 섬기고자 합니다.
IV. 에바브로디도 -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자 (25-30절)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는 표현의 원어는 제사장이 제단에서 섬기는 일을 가리킬 때도 쓰이던 단어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뒷바라지를 하는 하찮은 심부름으로 보일 수 있어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섬김을 제단에 드리는 예배와 같은 무게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명을 전제로 부어드린 그 제단 위에, 에바브로디도의 섬김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형제요, 함께 수고하는 자요, 함께 군사 된 자요, 빌립보 교회가 보낸 사자입니다. 형제라는 말은 가족 같은 친밀함을, 함께 수고하는 자라는 사역의 동역을, 함께 군사 된 자라는 말은 영적 전쟁을 함께 싸우는 전우 됨을, 사자는 교회의 공식적 파송을 받은 사명자 됨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를 이런 여러 수식어를 사용하여 칭할만큼 깊이 신뢰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섬기라고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그가 너희 무리를 다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바울을 섬기다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근심한 것은 자기 병이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은 빌립보 성도들이 근심할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기보다 형제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예수님의 자원함이었고, 올려지는 길이 하나님의 이루심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도 자기를 낮추어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낮아진 자를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병과 회복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습니다.
27절 하반절,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긍휼은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을 통하여 바울에게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높이심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함께 긍휼을 입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온전한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예수님의 공동체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은 사람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에 속히 보내어 빌립보 형제들이 기뻐하게 하고자 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코멘트 합니다.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죽음까지의 길을, 에바브로디도역시 다시 걸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직접 로마까지 가서 바울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 부족함을 에바브로디도 한 사람이 자기 생명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전체를 대표하여, 교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섬김을 자기 몸으로 짊어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로 보내어 형제들이 기뻐하고 안심하게 하고자 합니다.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이들 안에는 같은 마음 -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워 자기 생명을 부어드렸고(6-7절과 짝), 디모데는 종의 형체를 입어 자기 일을 구하지 않았고(6-7절과 짝), 에바브로디도는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8절과 짝). 6절부터 8절까지 노래로 불렸던 그리스도의 낮아짐이, 12절부터 30절까지 세 사람의 실제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따라 자리를 비워 예수님과 예수님 공동체를 섬긴 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았습니다. 디모데는 후에 에베보 교회의 감독으로 세움받아 이방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역시 빌립보 교회의 초대감독이 되어 많은 양들을 돕는데 쓰임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를 비우는 사람을 그리스도를 높이시듯이 또한 생명역사에 쓰시고 열매를 주셨으며 생명의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최요셉 선교사님 고향동네를 ‘무진장’이라 부릅니다. 무주 진안 장수. 한편, 저의 고향 지역을 ‘김상구’라 부릅니다. 김천시 상주시 구미시. 세 도시는 사용하는 사투리가 같습니다. 구미(원래는 선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일약 18년간 나라를 다스리는 권위적인 시대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상구 지역은 그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닌 김천은 야망의 도시였습니다. 경북 서부지역은 물론 전북 무주, 충북 영동에서까지 인재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많은 소년들이 어려서부터 출세를 지향하고 신분 상승 권력을 지향하며 열심히 공부합니다. 여학생들도 명문대 출신 좋아하고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나를 살리고 나를 위대하게 하고 나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려는 도시,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달리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도태되고 경쟁에서 진 루저에 불과하였습니다.
저의 동기들이 이제 환갑이 되었습니다(저는 내년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된 사람도 모두 한결같이 인생이 빈그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다른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배운 사람은 다릅니다. 지금 우리 동기들을 이끌고 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비워 남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배워 자기를 낮추고 형제를 섬기는 사람을 크게 사용하여 주십니다. 높여 주십니다. 지금에 와서 살펴보니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그리스도를 단지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성경 말씀으로 배우고 말씀의 빛을 밝혀 자기 삶에 적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밝혀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삶을 내 안에 채워 그대로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그 사람의 시대를 밝히는 일에 쓰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제로 품고 살았던 주의 종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생명을 부어드리는 전제로 살았고, 디모데는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종처럼 수고하는 삶으로 살았고, 에바브로디도는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으로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는 헛된 열정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소심하였고 연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배웠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는데 쓰임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 어떤 약점을 가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라 고백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의 종된 섬김을 배운다면 우리도 바울과 같이 디모데와 같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위대한 주의 종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화로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많은 사람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배운 바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밝혀서 나의 생각에 나의 말에 나의 생활에 적용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환하게 밝혀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채워나가야 합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높여주실 수 있는 삶이며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아산UB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