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하나님께 3”, 한재욱, 규장
발표자: 이동기목사
p. 88- p.164
올리브 하우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진실은 한 걸음 한 조각으로도 충분하다.
세상에는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아는 듯이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단의 교주들이 그러하다. 이는 바다와 하늘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다. 교만한 그릇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과 같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크게 믿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겸손히 걸어갈 때, 마침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도착함을 믿는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성경은 본질과 진짜 행복을 보여준다.
성경과 인문학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모든 본질은 창세기 1장 1절에 명확히 나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천지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요 행복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창세기 1장 1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문학과 성경의 차이는 마치 밤하늘의 천체를 어린아이의 장난감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우주 공간에 설치한 허블망원경으로 보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하다. 성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의 기원, 죄와 죄 용서, 죽음과 죽음 후의 세계 등 인문학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말해주는 생명과 책이다. 영원을 보여주는 책이다. 진짜 행복을 보여주는 책이다.
나무를 분석하고,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사람을 ‘과학자’라고 한다.
나무를 보고 시를 쓰고 노래하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한다.
나무를 보고 나무를 존재케 한 이, 나무를 만든 자를 찬양하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준다.
시인들은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게 해준다.
신앙인은 존재의 근원을 제시해주며 가짜 신세계를 벗어나 생명의 삶으로 인도해준다.
2.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있는 삶
롤프 옌센 교수는 정보화 시대 이후의 도래할 시대를 ‘드림 소사이어티’라고 불렀다. 지금이 바로 그 시대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꿈과 감성 그리고 아야기가 주도하는 사회다. 인간은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투자왕 워런 버핏이 “하버드 대학의 졸업장은 입사 후 3일까지만 효력이 있다”라는 말을 했다. 스펙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탁월함을 원한다. 탁월함은 자기 만의 스토리가 있느냐로 결정된다. 참 초라한 사람이 있다면, 스펙은 많으나 스토리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높이를 가진 듯하나 깊이가 없는 사람이다. 위로는 길게 자랐으나 뿌리가 얕아 위태로운 나무와 같다.
스펙과 스토리는 다르다.
스펙은 얼마나 기능이 뛰어난지를 의미하고, 스토리(이야기)는 독특한 경험을 의미한다.
스펙은 ‘최초’, ‘최대’, ‘최고’라는 말을 좋아하고, 스토리는 ‘유일한’, ‘독특한’, ‘특별한’같은 말을 좋아한다.
스펙은 숫자로 표현되고, 스토리는 가슴으로 표현된다.
스펙은 편안함을 주고, 스토리는 평안함을 준다.
스펙은 자랑하려 하고, 스토리는 사랑하려 한다.
스펙에는 ‘올라온 높이가 보이지만, 스토리에는 ’헤쳐나온 깊이‘가 보인다.
스펙에는 나의 성공만이 나열되지만, 스토리에서는 나의 약점이 오히려 경쟁력이 된다.
스펙은 사람을 상품처럼 순위를 메기고, 스토리는 사람을 작품처럼 존중한다.
그리하여 스펙은 자신만 1등이 되려하고, 스토리는 모두를 1등이 되게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이다. 고난의 정도가 클수록 감동도 크다.
나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을 넘어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사랑 이야기를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였다!”
“하나님!”하고 부르면 깊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 삶! 하나님을 향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동행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가장 멋지고 행복하다.
신앙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동행했다는 말은 단지 만났다는 정도가 아니다. 끝없이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며 산 것이다.
이대흠/ 동그라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중략)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중략)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중략)
어머니는 한사코
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통로‘로 살라고 부르셨다. 복의 통로란 중간에서 잘하여 둥글게 둥글게 화평하는 사람이다.
달력에 동그라미 친 날은 신나는 날이다. 빨간 동그라미를 친 날은 축제의 날이다. 시험지에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쳐주고 “침 잘했어요!”라고 말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봄이 피어난다. 동그란 말을 하는 동그란 사람이 만들어가는 동그란 세상, 동그란 사람을 만나면 나도 축제처럼 밤 하늘의 둥근 달처럼 떠올라 사람의 강물에 화평의 빛을 비추고 싶다.
요나스 요나손/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뽀빠이 이상용씨가 어느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에 전남 곡성에 사시는 107세 된 할아버지를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할아버지, 이렇게 오래산 비결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가 뭐야? 내가 형님이지.”
“아, 죄송합니다. 형님. 오래 산 비결이 뭐죠?”
“비결은 무슨.... 안 죽으니까 오래 살았지!”
이상용씨가 웃으면서 계속해서 질문했다.
“형님, 그 동안 살다가 미운 사람도 많았을 텐데 스트레스도 없이 어떻게 그런 걸 다 참고 사셨어요?”
“응, 미운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랬더니 지들이 알아서, 80, 90살이 되더니 다 죽던데 뭘. 미운 사람 있어도 그냥 즐겁게 오래 살면 돼! 절대 화내지마, 그래도 화날 때는 웃어버려!”
주목받은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슨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유쾌함과 엉뚱함이 어우러진 소설이다. 작가는 100세 노인 알란이 창문을 넘는 순간 자기 앞에 존재했던 모든 장벽과 사회적 시선을 극복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늙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 길은 온 영혼을 바쳐 달려간 사람의 마지막 고백, ’눈크 디미티스‘젊음은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뜻을 좋아 살아왔던 노년은 찬란하다.
황인숙/ 말의 힘
좋은 말 믿음의 말부터 시작하면 된다.
마음이 말이 되고, 말은 내가 된다.
믿음의 말은 믿음의 씨를 심어주고, 소망의 말은 소망을 꽃피우고, 사랑의 말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파트리크 쥐스칸트/ 문학의 건망증
평상시의 경건이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다.
우리는 독서를 할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책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읽으면 무엇하나?”
사실 그렇다. 어제 읽은 책도 그 내용이 가물가물할 경우가 많다. 잊지 않으려고 밑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색칠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엊그제 같은 책도 그러니 옛 날에 읽은 책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또 책을 읽는가? 이것이 ’문학의 건망증‘의 주제다.
쥐스칸트는 독서의 이러한 매력에 대해 말했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어가기는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듯해도, 독서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우리가 읽은 책들은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삶의 듬직한 토대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하루 하루 독서를 하였더니 어느새 내 존재가 어제보다 자라 있다”
마찬가지다. 평상시에 우리가 쌓아온 경건의 연습은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다.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려준 시간은 그가 나를 사랑한 크기(p. 157)
기다림이란 기다리는 ’너‘의 ’직전‘까지 ’나‘의 마음을 지켜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너에게 가“는 것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기다림이다. 기다려준 시간은 그가 나를 사랑한 크기였다.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기다림의 정을 통해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사랑이 깊어지게 된다.
고난이 와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 기다림은 가장 창조적인 사랑의 시간이다. 그가 나를 기다려준 시간은 그분이 나를 사랑한 크기이다. 내가 그분을 기다린 시간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