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링, 영어사전을 보면 ‘치유’라고 해석한다. 서로 보듬고 나누면서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요즘 사람들은 다 나름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그 치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물론 가장 크게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자본과 권력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탄압과 억압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노동조합,노동운동과 같은 큰 것에만 상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들에게도 쉽게 치유할 수 없는 큰 상흔을 남긴다. 이제부터 얘기하는 것은 그 얘기이다. 봄비님이 보내주는 노동자들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그것에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또 조금씩 서로 보듬고 나누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상처가 완치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 상처의 원인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한. 그래서 우리는 나누고 보듬고 함께 가야만 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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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 ‘힐링이야기’, 이제 시작합니다.
요즘 대세는 ‘힐링’인가보다. 연예프로그램인 ‘힐링캠프’도 인기가 많고 ‘힐링 음식’, ‘힐링 음악’도 뜨고 있다. 대형 서점에 가보면 가장 중앙에 위치한 코너도 ‘힐링코너’이다. 나이별로 유형별로 마음을 치유하는 책들이 매일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그 대세에 한 발 살그머니 담그려고 이제부터 나는 내가 만난 ‘힐링’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알 수 없으나 가능하면 진솔하고 소박하게 담아냈으면 한다. 내 글 때문에 마음 아픈 사람이 없어야 하고 그 누구에게도 내 글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첫 직장은 ‘홀트아동복지회’였다. 지금은 사회복지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기관이지만 내가 입사했던 1984년도 홀트아동복지회는 해외입양이 주 업무였다. 나는 그 곳에서 ‘국내입양상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국내입양은 거의 다 비밀입양이었다. 결혼을 하고 기다리던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고 부부간의 다양한 갈등을 겪고 그리고 찾아와 입양을 하고자 하는 내담자 앞에서 대학을 막 졸업한 나는 인생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부지였다.
이런 날 지도하고 감독해 줄 슈퍼바이저가 정말 필요했는데 그 당시 내 상급자는 나를 지도 감독해 줄 의지가 전혀 없었다. 내가 머리가 복잡해 상급자를 찾아가 ‘이 부부에게 아이를 줘도 괜찮을까요?’ 라고 물어보면 ‘돈 있어? 경제력만 있으면 되지, 뭐가 그렇게 고민이냐’ 고 한심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곤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나 스스로 내 슈퍼바이저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만난 곳이 지금의 아리랑풀이 연구소, 이전에는 ‘성장상담연구소’ 라고 불리던 상담기관 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상담을 공부했다. 그리고 ‘아리랑풀이연구소 그룹 상담가’가 되었다.
막힌 감정을 풀어내고 상한 감정을 보듬어주며 사람이 갖고 있는 자신의 힘을 만나게 하는 과정,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뒹굴며 어린아이 같은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하는 일, 그 일이 재밌고 신이 나 그룹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상담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숨통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버겁고 하루하루가 치열한 사람들에게 상담은 너무 뽀사로운 접근이었다.
상담이, 치유가, 힐링이 이렇게 대세가 될 줄은 이전에 나는 몰랐다.
어느 날 한겨레신문에서 기사를 읽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박사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위해 집단치유모임을 만든다는 기사였다. ‘치유하세요. 그래야 더 잘 투쟁합니다.’
그냥 달려가고 싶었다. 토요일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울산에서 평택으로 매주 올라갔다. 아침에는 해고 노동자들의 치유 그룹, 아주 가벼운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는 연이어 가족들을 위한 치유 그룹, 매 주 두 과정씩 진행되는 쌍용자동차의 집단 치유를 참관했다. 되돌아오는 기차를 타고 울산에 내려올 때면 매번 깜깜한 밤중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나 귀하고 고마웠다. 온 몸에 꽉 차 있는 피곤함이 오히려 감미롭게도 느껴졌다. 치유 과정이 당장 눈앞에 가로막힌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아도 매 주 더 가벼워지고 더 단단해지는 쌍용 동지들의 얼굴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치유 과정이 진행되던 어느 회기 도중 쌍차에서는 또 한명의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그 주 토요일,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느냐는 정혜신 박사의 물음에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공기마저 무겁고 둔탁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생각 안하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영정을 들고 정문에서 싸울 때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저 담을 넘어가려면 내가 죽어야 되겠구나, 내 목숨이 필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큰 덩치, 왕방울만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곤 이어지는 고백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노란 이야기들, 죽음이 내 곁에 있다는 걸 내어놓으며 펑펑 흘리던 눈물들. 그 이야기를 뒤에서 들으며 같이 울고 아파하던 아내들의 모습. 막막함, 암담함, 억울함,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곤 과정이 막 깊어지기 시작했다. 자기 속 이야기들을 내어 놓으며, 내어놓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광경이 매번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 속에서 오고 가고 있었다.
나도 그 힘을 주고받고 싶었다. 같이 나눌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있으면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첫 노동 그룹이 구미의 ‘KEC 노동조합’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오랜 기간 투쟁하고 있는 ‘대우자판’동지들과도 2박3일간 마음을 나눴다. 그리고 2012년 1월부터 7월까지 부산의 한진 노동조합 동지들과 집단 상담을 시작했다. 한 그룹이 8번씩, 3그룹과 반년을 함께 보냈다.
같이 기대어 울 수 있다면, 잘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무거운 어깨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 시간들을 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얼마나 치유가 되었는지 여전히 삶은 암담하고 답답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 서로의 마음을 만나고 보듬고 도닥이던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 순간 속에 오고 가던 힘을 다시 만나보려고 한다.
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은 ‘별칭’으로 불린다. 내 별칭은 ‘봄비’다. 나는 둔탁한 내 글 솜씨 밑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희망한다.
봄비처럼 새 생명을 싹틔우는 힘으로, 살랑살랑 봄바람을 몰고 오는 설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