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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 이은희
│대표 작품│
버선코 외 4편
이 은 희
버스가 승객들을 불국사 근처 공원에 쏟아 놓았다. 동행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삼삼오오 총총히 사라졌다. 할애된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엔 주어진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애초 답사 일정에 불국사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것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래된 이미지, 예스러운 풍취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잠시라도 그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아니, 내 무뎌진 감성에 재충전의 기회 주기였다. 우리 문화에 해박한 지인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안내를 자청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학기 말 고사가 닥친 학생에게 핵심 문제를 쏙쏙 뽑아 주듯, 드넓은 절의 경내를 잰걸음으로 옮기면서 골자를 짚어 해설을 덧붙였다. 그의 곁에서 나는 연방 탄성을 질렀다.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들을 삽시간에 훑고 난 후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적 안내였다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곤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샛길 쪽으로 빠졌다.
극락전 계단 앞에 이르렀다. 거무스름한 낡고 닳은 돌계단, 층층다리를 오르기 위한 돌층계였다. 그는 무감각하게 보아 넘기는 내게 소맷돌을 살펴보라고 했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대체 그는 내게 무엇을 보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층층다리의 좌우 측면에는 곡선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밋밋한 면이 아니었다. 보통의 소맷돌처럼 선각으로 장식하여 뾰족한 채로 두지 않았다. 앞 부리 쪽을 살짝 궁굴려 은근하게 감아 올린 부드러운 선의 유형은 마치 할머니가 즐겨 신던 광목 버선의 앞코,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면 저리도 버선코의 모습을 닮았던가.
불국사에는 마음이 쏠리는 석조 건축물이 많았다. 그렝이질로 울퉁불퉁한 자연석과 인공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돌축대와 자하문 앞이 연못이었다는 설을 가지게 하는 돌빗물받이. 그리고 극락전 영역을 받치고 있는 석단이 특별했다. 모서리를 부드럽게 돌린 선과 몸통에 두른 띠하며, 2층에서 1층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을 눈여겨본다면, 그곳을 횡하니 스쳐 가기 어려울 것이었다.
순간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걸작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내 머릿속엔 소맷돌에 새겨진 버선코만 압흔처럼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선각(線刻)에 얽힌 상념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필경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포목점에서 광목을 떠 손수 버선을 만들던 모습과 할머니가 버선목을 잡아당기던 자태가 떠올라 괜스레 슬퍼졌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기 두려운 장면, 병풍 뒤에 누워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새벽녘, 할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황황히 부모님에게 알렸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할머니가 오늘을 못 넘길 것 같다며 침울해 하셨다. 그리곤 친척들에게 할머니의 상황을 일일이 알렸다. 어머니는 다른 날과 똑같이 아침 상을 차려 주었고 나를 학교로 보냈다. 할머니가 걱정되어 머뭇거리는 발길을,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당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잔칫날처럼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느라 소란스러웠다. 자주 보지 못했던 친척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내가 사용했던 방이었다. 벽 쪽으로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다. 할머니는 주무시는 듯 누워 계셨다. 돌아가신 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할머니의 발에 신겨진 버선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할머니의 버선코가 유난스레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 발은 아버지의 유전형질을 닮았다. 열 개의 발가락이 볼품없이 좍 벌어진다. 아버지는 무좀에 걸릴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난 할머니의 발을 부러워했다. 내 발은 버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복을 자주 입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부모님에게 폐백을 드릴 때만은 버선과 하얀 꽃고무신을 신어야 되지 않겠는가. 버선 앞코 부분에서 발이 들어가지 않아, 진땀을 흘리다 낭패를 본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지금도 싫다. 결국 그날 흰 양말로 대신했다.
하늘로 향한 맵시 나는 버선코. 잊고 지냈던 할머니의 자태를 더듬는다. 할머니는 평생 한복 차림이었다. 새하얀 고무신에 약간 누런 광목버선은 어울리지 않는 빛깔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발을 복제한 광목버선에는 부드러운 선이 존재했다. 치맛자락 밑으로 살짝 스치며 보이는 궁중의 버선은 아니어도, 할머니는 버선을 신을 때나 벗어 놓을 때나 소중히 다루었다. 밋밋한 돌에 날렵하게 올라간 소맷돌의 선각은 그냥 곡선이 아니었다. 내게 있어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내 손을 이끌고 알려 주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었다. 짬을 내 발품을 판 결과였다.
선인들은 허투루 지나가는 것이 없었다. 곳곳마다 솜씨와 깔색이 품위가 있었다. 장인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 불국사 전각(殿閣)마다 불국을 원하는 사람들이 오르던 층층대 좌우 측면에, 버선코는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 살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장소에 있었다. 돌아보면 오래된 물상 중,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버선코의 아름다움은 하늘에서도 빛이 났다. 팔작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도 있었다. 동남아의 궁궐을 돌아본 외국인들이 한국의 궁궐이 제일 아름답다고 한 것은, 버선코 마냥 날아갈 듯 오른 추녀 선이었다고 하지 않던가.
옛것들이 고유명사화가 되어 가는 지금, 일상을 벗어나 그것들과 교감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가 모두 직선의 질주와 변화만을 원한다. 그러나 난 버선코 마냥 곡선의 숨 쉴 공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전화로 나의 행방을 묻는 이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감쪽같이 다녀온 답사는 제3의 공간을 넘나든 것은 아니었을까. 삶의 속도를 조금씩 조절하며 묵은 체증을 지우는 일은 계속되리라. 아마도 그 일은 내가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시작이며, ‘기억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마무리일지도 모른다.
은어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파드득, 파드득’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탄력 있게 두어 번 솟아올랐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녀석의 힘찬 꼬리 짓은 주기적으로 두 시간째 계속되고 있다. 아이가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탈출을 꾀하려는가. 달아나 봐야 물속도 아닌 차 안, 양동이 안에서의 몸짓이다.
얼마 후, 은어의 몸부림은 허망한 몸짓임을 알렸다. 첫 번째 휴게소에서 한 마리가 허연 배를 뒤집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녀석의 사체를 거두었다. 이제 남은 은어는 세 마리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아는가. 아니 살아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양 물고기들은 양동이 벽을 꼬리로 치며 솟아올랐다.
아침에 양동이를 들고 나서는 아이의 마음을 읽었어야 했다. 얼마 전부터 물고기를 키우기 시작한 아이는 딴에 섬진강이 좋은 기회였으리라. 그러나 하루 코스로 하동 일대의 최 참판 댁과 화계장터, 쌍계사까지 두루 관람하기엔 빠듯한 일정이었다. 어른들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섬진강은 눈도장만 찍고 스칠 요량이었다.
아이는 일정을 챙기며 검질기게 고집을 부렸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빠가 시간이 되면 물고기를 잡자고 했지 않느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함께 온 어린 사촌들도 한통속이 되었다. 만약 그냥 간다면 에둘러 댄 말이 자드락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어른으로 남을 순 없었다. 할 수 없이 돌아가려던 차를 돌려 강가로 향했다.
주변에서 급히 일회용 줄낚시를 샀다. 아들은 웃통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낚시꾼처럼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무시로 튀어 오르는 은어란 놈은 한 마리도 아이에게 걸려들지 않았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놈을 쫓기라도 할 양 아이는 강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럴수록 내 목소리는 커지고 불안한 가슴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산 그림자가 길게 물 위에 늘어졌다. 물살에 투영된 반짝이는 은빛물살도 점점 스러지고, 따끈따끈하던 강 돌의 온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떠나도 청주에 도착하려면 밤 11시가 훌쩍 넘을 것이다. 마음이 조급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고 소리쳐 보지만, 물고기를 손에 쥐지 못한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은어 낚시꾼들도 집에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물고기에 목을 매는 아이의 꼴을 보다 못한 난 낚시꾼에게 다가갔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아들을 가리키며 사정 설명을 하며, 물고기를 두어 마리 팔면 안 되느냐 물었다. 그는 맘씨 좋은 아저씨였다. 그물 속에서 파닥대는 은어 네 마리를 선뜻 내게 건네주었다.
은어는 몹시 예민하고 까다로운 놈이었다. 잠시도 가만있질 않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파닥거렸다. 큰 물에서 살던 물고기라 작은 양동이가 몹시 답답했으리라. 성미가 까다로운 놈이라 산 채로 가져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낚시꾼 아저씨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결국 은어의 먹이사슬의 최종 소비자는 낚시꾼이지 않겠느냐고 자족의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얄팍한 판단으로 은어를 가지고 올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것이 탈이었다. 좀 늦은 귀가면 어떠하랴. 주위가 어둑어둑하여 아이가 지쳐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았으리라. 그러면 은어의 죽음으로 아들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은 보진 않았을 게 아닌가. 나의 안일한 태도는 열대어종 구피의 출산 시에도 이어졌다.
배불뚝이 구피가 움직이기 힘겨운지 수조의 벽면에 머리를 기대고 끙끙거렸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뜬 두 눈과 온몸에 힘을 주는 듯 부르르 떨었다. 모든 출산이 그러하듯 창조의 시간은 고통이 따르는 듯했다. 드디어 꽁지 아래에서 검은 꼬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새끼가 툭, 힘차게 헤엄쳐 나갔다. 한 시간여 바라본 작디작은 생명의 탄생은 신비스런 광경이었다.
밤새 셀 수 없이 많은 새끼를 낳았던가 보다. 수조 안에는 치어들이 고물고물, 까만 점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몇 마리를 낳았는지 궁금하여 세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셀 수가 없었다. 수십 마리의 치어들은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녔다. 치어는 물고기의 형체를 닮았으나, 너무나 작아 어미만큼 크려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난 갑자기 부자가 된 듯 흐뭇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구피 어미는 새끼를 낳은 후, 자신의 분신을 단숨에 꿀꺽하는 게 아닌가. 눈으로 보는 이 장면이 실제가 아니길 바랐다. 섬뜩한 행위는 계속되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그런다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자신이 낳은 분신을 먹이로 삼는 아이러니한 구피의 생태(生態)라니. 틀에 박힌 수조가 아닌 자연이었다면, 과연 치어들은 어찌되었을까. 아무리 약육강식의 세계라지만, 적어도 잔인한 먹이사슬은 아니었으리라 믿고 싶다. 비로소 난 아들에게 ‘남들이 알고 있는’야박한 주문을 한다. 구피 출산 시에는 큰 물고기들과 분리하고, 치어와 어미를 가차 없이 떼어 놓으라고.
그날, 겨우 생명을 부지한 은어 두 마리가 아들의 수조에 들었다. 그러나 역시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섬진강에서 네 시간을 달려온 보람도, 애지중지 키워 보겠다는 아들의 살뜰한 마음도 소용이 없었다. 그건 다만 욕심이었다.
은어의 고향은 섬진강이다. 내 집의 수조가 아닌 끼리끼리 어울려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은어의 희생이 말하고 있잖은가. 강 밑바닥에는 먹고 먹히는 비애와 평화가 있다. 시원의 순결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작은 생명을 도외시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격이 된다. 상대가 먼저 생명을 포기하기 전에는, 내 안에 들어온 이유만으로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걸 잊고 산다. 은어의 기질과 구피의 생태를 진작 알았더라면, 이런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이제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내 귀에는 아직도 은어의 파닥거리는 소리가 쟁쟁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 곁엔 한 마리도 없다. 그러나 아들이 고집을 부려 머물었던 곳, 은어가 활개 치던 눈부신 섬진강! 해 지는 줄 모르고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물장난과 가댁질하던 강, 그 아름다운 강물은 내 안에 고요히 흐르고 있다. 나와 은어를 품은 섬진강은 끝없이 길고 넓다.
괘릉
능 주인 왈(曰) :
능의 주인을 모른다.
누구일 거라는 설만 있을 뿐이다.
찾는 이 없는 게 당연하다.
그들끼리 재롱떨다, 춤추다, 호령하다, 지쳐 버린 괘릉아!
마침내 울분을 터트린다.
답답하다. 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하는가. 시방 이 땅을 밟고 있는 후인들은 들어 보라. 자네는 현실에 자족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사는 거니. 내로라하는 사학자들 또한 이름만 내걸고 있는 거니. 누구일 거라는 추정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속이 탄다. 왕릉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물들이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었지 않는가. 석조물의 조각 수법이 신라인의 예술적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며, 후대 능묘의 중요한 본보기 자료가 된다면서…….
그런데 날 왜 이리 홀대하고 있는 거니.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겠구나. 치국을 제대로 못한 어떤 자도, 갖은 언어와 유려한 문자로 포장을 하여, 정보의 바다를 누비고 있잖니. 무엇이 모자라서 문화재청 인터넷 홈에 오른 조선 왕릉처럼, 선대의 신라 왕릉은 체계적 정비를 못하고 있잖니. 내 입으로 말하기 낯간지러운 얘기지만 나도 한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왕 중의 왕, 설움에 겨워 울분을 토하노라.
후인들아, 캄보디아의 북서부 앙코르와트의 역사는 줄줄 외며 감동하면서, 유가 폭등에도 비행기 타고 날아가 관광하면서, 날 바라볼 기회는 짬을 낼 시간은 정녕 없는 거니.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라. 그 유적과 날 비교하는 건 아니다. 죽음의 사원이라고 불리었던 그곳의 베일을 벗겨낸 후인의 끈기가 부러울 뿐이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내 영혼을 수호하는 내 앞에 서 있는 저 석물들을 보라. 어깻죽지에 세월의 두께가 눌러앉아 훼손되었을지라도, 덕지덕지 붙은 검푸른 이끼와 풍파에 닳고 닳아도 나를 알리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의 수호사자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찌 나라를 다스렸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 나를 알려면 그들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의 괘릉과 까마득한 후손 고종이 묻힌 홍릉과 무엇이 다르랴.
나그네 왈(曰) :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물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천 년의 고풍과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껴 보려면, 아무래도 무덤이 제격이지 싶다. 능 밖에 조각된 석물들의 특징과 생김새를 주변 풍경과 엮어 살펴본다. 홀로 무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침 기회가 주어졌으니 능의 주인을 상상해 보는, 천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화표석·무인석·문인석·사자석 두 쌍을 지나자 발밑이 질척거린다. 며칠 전에 내렸던 빗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연못이었다는 설이 맞는가 보다.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있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괘릉’이란 칭호가 붙었단다. 거대한 봉분 앞에 서 본다. 제대로 된 능호가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거나 괘릉을 에워싸고 있는 풍경과 수호사자와의 소통을 꾀하자.
경주소나무 - 먼발치서 바라본 안개 낀 소나무 숲은, 꼭 날개옷을 입은 선녀들의 군무처럼 보인다. 등허리가 너울너울 나긋나긋 유연하게 휘어진다. 고수의 추임새로 흥에 겨워 나그네의 어깨도 들썩거린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무리가 흩어질까 봐 두려워서다.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굽은 소나무들의 자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가 걷히자 딱 그 풍경이다. 누군가가 ‘동작 그만’을 외쳤을 때 부동의 자세라면 이러할까. 소나무들은 등허리가 구불구불, 서로 엉키지 않은 채 자연스런 곡선을 연출한다. 그러나 위험이 닥쳐오면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소나무들도 터벅터벅 살아 움직이는 나무로 변신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괘릉의 수호사자들은 어마어마한 군단이 아닌가.
괘릉을 에워싸고 있는 건 소나무 숲이다. 능의 주인 또한 소나무를 무척이나 아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7대 임금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세우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런 남다른 관리로 광릉수목원은 후인들에게 도심 속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세조만큼 몸소 실천을 보인 환경론자도 없으리라. 군무를 추는 양 서 있는 경주소나무. 주인의 명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마법이 풀려 성대한 연회가 벌어질 것만 같다.
무인석 - 능 초입에서 만난 수호사자다. 그 자태가 역시 무인답다. 험상궂은 인상에 불똥이 떨어질 듯 부리부리한 두 눈, 성난 듯 올라간 굵은 눈썹, 덥수룩한 구레나룻. 그리고 가슴께로 불끈 쥔 왼손과 금방이라도 힘줄이 튀어나올 듯 장칼을 쥔 우람한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적군을 때려눕힐 자세다. 또 굽실굽실 어깨까지 치렁한 머리칼은 선조의 모습이 아니다. 낯선 서역인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도 국적을 넘나든 용병 선수처럼 무인을 채용한 것일까. 어쨌거나 무인은 용감무쌍해 보인다. 자신이 수호하는 주인을 욕보이거나, 무덤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자 감히 없을 것 같다. 그에게선 애초부터 그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할 기운이 넘친다. 표정과 투지의 자태에서 당대의 무인 정신을 엿본다.
사자석 - 동서남북, 방향을 달리한 석사자의 표정과 모습이 제각각이다. 동물 왕국의 왕답게 근엄한 모습의 사자, 아마도 사자석 중 대장임에 틀림없다. 무에 그리 좋은지 해맑은 미소를 짓는 사자에 눈을 부릅뜬 사자석도 있다. 사자들의 앞발과 뒷발은 정면을 향해 모으고, 뒷모습은 앳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느라 앉아 있는 형상이랄까. 그러나 꼬리는 탄력 있게 등허리 위로 쳐든 것이 수호자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자세인 것 같다.
그런데 유독 한 놈의 자태가 불량하다. 무엇을 보았는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리는 듯 게슴츠레한 표정이다. 석사자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지, 주인이 누워 있는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시선은 무덤을 보지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무덤 뒤편에 서 있는 경주소나무, 무희에게 반한 성싶다. 살짝 왼발을 쳐든 모습은 맘에 품은 그녀를 반기는 손짓일까, 아님 함께 춤을 추고 싶다는 신호일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그의 자태는 가히 해학적이다.
12지신석 - 봉분 주위를 탑돌이 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돌아본다. 석주, 호석, 탱석… 무덤에 관한 문외한이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내 깜냥에 제주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자석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영혼의 교류자로, 왕릉의 석물들은 능의 수호자로 보아 넘긴 게 전부다.
괘릉에도 신라 특유의 양식인 둘레돌이 무지의 눈에도 돋보인다. 호석에 양각으로 새긴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든 12지신상, 바로 그것이다. 봉분 정면(남쪽)에 오(午)상을 중심으로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唇巳) 6상이 오른쪽을 향하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 5상이 왼쪽을 향하고 있다. 양쪽의 상들이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다.
둘레돌에 양각된 석물 하나하나의 부드러운 선의 흐름이 이채롭다. 천 년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도록 재료를 선정한 선인의 혜안과 사실적 표현이 놀랍다. 무복이 어깨선 아래로 자연스레 물 흐르듯 묘사한 자(子)상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내 앞에 쏜살같이 튀어나올 성싶다. 무장한 왜구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겁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하리라.
‘능 주인이여, 너무 서운히 생각 마소.’ 후인이 당신을 몰라봤어도 괘릉 주변에 치장된 조각과 석물들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예술품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당대 후인은 생전에 치국의 업적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모신 게 분명하다. 변명 같지만 능의 주인을 모르는 건, 역사적 어떤 연유로, 어느 대에서 분별없이 흐려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그네의 가슴에 불붙듯 일어나는 이 엄청난 힘,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꿰뚫고픈 의욕과 의문이 솟구칩니다. 그러나…….’
다음을 기약하며, 나그네는 돌아서야만 한다.
수호하는 석물들을 본 후 가슴에 뜨거운 것이 와 박혔다.
능 주인은 재덕겸비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임에 틀림없다.
까마득한 후인이 그의 울분에 어설픈 답변을 한다.
그의 마음에 들었을 리 만무하다.
몸시(詩)
아이들이 후미에서 와글거렸다. 달려가 보니 말라 죽은 나무 앞이다. 뭉툭하게 잘린 표면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한 아이가 다가가 손가락으로 왼쪽 구멍을 후벼 댄다. 마치 자신의 콧구멍을 후비는 양 얼굴도 찌푸린다. 지켜보던 애들이 까르르거린다. 나무의 돌기가 돼지코를 쏙 빼닮았다. 사진기를 들여대는 내게도 콧김을 내뿜을 태세다. 나무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며 자지러질 수밖에 없는 동물의 형상이었다.
방금 내가 아무 의식 없이 그 옆을 스쳐 간 고사목이다. 평생 난쟁이로 키운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될까. 그 흔한 푸른 바늘잎 한 잎도 없다. 몸태가 미끈하게 뻗은 나무도 아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허옇게 메말라 길목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무가 뿌리내린 곳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니 거치적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지를 어느 정도 잘라낸 모양이다. 뭉뚝하게 드러난 표면이 돼지의 들창코와 흡사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았던가 보다.
무주 설천봉 주위에는 말라 죽은 주목이 군데군데 서 있다. 생명이 없다고 해서 밑동이 뚝 꺾어져 누워 있는 나무는 아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고 하였던가. 몸통은 여러 갈래로 터져 갈라졌지만, 잔가지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힘이 있어 보인다. 봄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가지를 살랑이며 산바람을 실어 나를 것 같다. 나무에 여기저기 박힌 옹이가 대변하듯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여 내 앞에 토해 낼 것만 같다.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죽어서 천 년을 사는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삶이란 이런 거다. 이렇게 살아내면 된다.’라고 나무에게서 나는 어떤 해답이라도 얻고 싶었다. 천 년을 살고, 또 천 년을 산다고 하니,’삶’에 관해선 도통하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나이를 먹을수록 사리를 분별하는 일이 어려워지니, 그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탄탄대로겠지.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며 억지를 쓰는 나의 상념에 헛웃음이 터지고 만다. 일전에 보았던 거목, 전나무가 밑동이 문드러져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게도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걷는 호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사진 속에서 본 그 길이었다. 올곧게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면서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늘 상상 속에서만 걸어 본 길이었다. ‘나무들이 어쩜 이리 유려할 수 있을까’라며 감탄을 거듭하였다. 숲길이 끝나는 약수터까지 어찌 그 길을 걸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였다. 방아다리 약수터에서 약수로 입가심을 한 후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산으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방책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아래에는 크나큰 전나무가 맥없이 누런 속살을 내놓고 쓰러져 있었다. 살펴보아도 누군가 나무를 가해한 흔적은 없었다.
나에게 쓰러진 나무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곳을 벗어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내 모습을 꼭 보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주위에 사,오십대 돌연사가 유행병처럼 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악바리처럼 고생하여 가정도 안정이 되었고, 여유가 생겨 햇빛을 볼 즈음인데… 가뭇없이 쓰러져 사회 활동을 못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종종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질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가 보다. 어느 쯤에선 멈춰 서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재충전할 기회를 만들며, 생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했지. “늦었다고 느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사람의 외양과 속내가 다르듯 나무들도 마찬가지인 성싶다. 내가 보았던 고사목도 쓰러진 전나무와 비슷한 환경인 고산 지대에서 자란다. 물론 자라다가 비바람에 쓰러지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력을 읽어내듯, 나무의 몸피를 둘러보며 생의 내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목은 모든 것을 안으로 품어 감내하는 부류처럼, 볼썽사납게 툭툭 불거져 나온 옹이들과 어른 허벅지만큼 굵은 곁가지를 달고 있다. 그리고 죽어서도 숨김없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전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 중 하나이다. 내가 본 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부유층, 자싯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고 곱게만 자라 온 생처럼 보인다. 줄기에 군더더기가 없듯 곁가지는 작거나 많지 않고, 굵기도 얇디얇다. 상처 한 번 입지 않은 사람으로 키운 듯 움푹 박힌 옹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고요하고 그윽한 풍경을 자아내는 사찰 등지에서 풍치수로 흔히 심는다니 가히 그럴 만하다. 남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웃자란 나무라서 그런지, 생을 다할 때도 가뭇없이 쓰러지고 마는가.
향적봉을 내려와 다시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내가 던졌던 질문의 답은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고사목은 묵언수행 중인가 보다. 나무는 아무리 봐도 들창코다. 이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아이들의 장난이 떠올라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 온몸으로 자신의 생을 어필하는 고목이다. 나무의 몸은 바람의 집인 양 구멍이 뚫린 곳으로 바람이 무시로 통하고, 작은 동물들이 더부살이해도 말이 없다. 그 품성은 꼭 몸으로 시(詩)를 쓰는 나무를 닮았다.
내 주위에도 나무처럼 치열하게 몸시(詩)를 쓰며 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 시를 세상에 발표하지 않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난 그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는다. 밥 먹는 일에만 쫓겨 종종대며 살았다고 남기고 싶진 않다. 누구처럼 “일생, 둥글둥글 잘 살았다고” 말하며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처럼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남길 수 있으면 좋으리라. 내 남은 생애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詩)보단, 울퉁불퉁하지만 앞품이 넉넉한 나무를 닮은 몸시(詩)를 쓰며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겠다.
등대지기
바람이 불자 들녘은 초록 물결로 일렁거린다. 제 그림자를 못자리에 투영한 가녀린 볏모도 어린잎을 흔들고, 드넓은 밭을 점령한 초록 이파리 군단도 일제히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진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한 점의 파란 섬이 있다.
초록 물결 위에 외로이 떠 있는 파란 지붕의 집은 꼭 들녘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 가로등이 보이지 않는 저 들녘에 어둠이 찾아오면 어디가 길인지, 이랑인지, 두둑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면 나그네도 어둠 속에서 길 잃은 한 마리 짐승이 되리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 파란 집에 구원의 등불이 켜지면, 내 집인 양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리라.
칠흑 같은 밤길에 빛이 되는 집, 어둠과 두려움을 일순간에 거두어 간 그 집은 파수꾼이 아닌 등대가 아닌가. 검은 바다를 홀로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그는 파란 집에 머무는 외로운 등대지기일 거다. 그는 분명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세상만사 넌더리가 나 잠적한 은자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파란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지만, 주인의 무심한 눈빛을 읽고 그도 말없이 잠시 쉬었다 가리라.
하루가 다르게 산야에 번지는 그놈의 흰 꽃 때문에 심란해 있던 때였다. 흰 꽃은 옥토나 박토를 가리지 않는가 보다. 한 줌의 흙이 있는 곳이면 땅심을 받아 거침없이 피어나 군락을 이루는 꽃, 개망초다. 그 무리가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면 그날이 다가온 것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 계절이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열병, 말문을 닫고 간섭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일시에 접어 둔 채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 당신의 짧은 생이 내게 가르쳐 준 무언의 암시가 두려웠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 당신의 명징한 생애가 종종대는 나에게 무시로 잠계로 다가왔다. 내 안의 쉼터가 필요했지만, 그럴 수 없는 내 처지가 못내 괴로울 뿐이었다. 마침 지인의 블로그를 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문을 열자 내가 원하던 풍경이 펼쳐졌다. 나만을 위하여 걸어 놓은 사진인 양. 오로지 초록의 물결이 일렁이는 들녘에 외따로 떠 있는 파란 집. 그 집에 내가 머무는 양 일상의 번뇌를 떨쳐 버린 듯 호젓함과 평화가 전이되었다. 한 장의 사진은 그리움에 애타는 가슴을 위로하며 달래 주었고, 잠시나마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파란 집의 저물 녘 풍경을 무시로 그려 본다. 그 풍경 속에서 서녘을 향하여 서 있는 날 발견한다. 한낮의 쨍쨍했던 태양도 사위어 가고, 빛나던 초록 물결도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시간이다. 거기에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곡 ‘저녁의 노래’가 검은 벨벳처럼 깔리면 더욱 금상첨화일 게다. 그렇게 나도 한 점의 편안하고 익숙한 풍경처럼 오래된 사진이 되고 싶은 거다.
내 삶에, 나를 지켜 준 등대가 있기나 한 것일까? 돌아보니 나의 등대지기는 친정 어머니였다. 그러나 든든한 등대지기는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 등대가 되어 준 실체는 아마도 자연과 문학이 아닐까 싶다. 무시로 자연으로 달려가고, 산야에 피어난 개망초 무리에 그리움을 토하며, 한유한 시골 풍경 사진에 흠뻑 빠져 이렇듯 글을 짓고 있지 않은가.
그래, 나처럼 둔감한 사람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사유의 창을 열어 준 것은 문학이다. 치열한 삶터에서 자투리 시간을 내 조금씩 알아 가는 문학 세계, 또 다른 내 목숨 줄인 양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내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끊이지 않는 갈등 속에 서 있게 한다. 이해(利害)와 따짐 없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 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파란 집의 그가 어떤 연유로 등대지기가 되었는지 알 리 없다. 그의 이력을 알고 싶지도 않다. 노인의 말수가 적다느니, 왜 식구가 없는지 그런 의문도 필요 없으리라. 그저 사진은 핑계고, 난 일상의 숨 고르기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던 길에 흐드러진 꽃 ‘개·망·초‘, 이름마저 서럽게 느껴지는 꽃이다. 그러나 내 우울한 마음에 등대가 되어 준 시골 풍경처럼, 내 심상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겐 개망초가 위안이 될지도 모르리라. 나도 그렇게 되길 기대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사진을 올려 준 그녀처럼 누군가의 등대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아직 도시의 섬을 떠나지 못하는 용기가 없는 파수꾼이다. 그러나 나도 등대처럼 한 줄기 빛이 되고 싶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일상에서 지은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힘이 되고 위안이 되길 원한다. 더불어 난 소망한다, 세파에 꺾이지 않는 문사(文士)가 되기를.
│이은희 작품론│
사유와 해석을 통한
미로 찾기 그리고 허물 벗기
―이은희의 신작 수필
한 상 렬
1. 들어가며
움베르토 마투라나(H. R. Maturana)는 생물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인식의 나무」에서 색그림자 실험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똑같은 회색 고리라도 녹색 바탕에 놓이면 흰색 바탕에 놓은 것에 비해 담홍색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 색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구성한 색채를 지각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또 있다. 마루투나 역시 공간을 본다는 것은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들의 시계(視界)’를 체험할 뿐이라고 했다. 이들의 언술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자연 세계의 색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색채 공간’을 체험할 뿐이라는 말이겠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감각은 시각적 관습에 사로잡힌 이들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동일하게 느껴진다. 구름에서 구름을 보고 바위에서 바위를 보며, 풍경에서 풍경을 보게 한다. 그렇기에 지각의 상투성에 사로잡히면 사물을 제대로 인식해 낼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때로는 어린이와 같은 시선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일종의 문학적 상상일 것이다. 이는 에코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과 같이 도서관을 미로로 형상화하게 했다. 하여 미로 찾기는 일종의 암호를 푸는 것과 흡사하다. 에드거 앨런 포는 날카로운 추리력과 논리를 바탕으로 현대 탐정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반면, 비정상적인 심리와 초현실적인 현상을 묘사하기를 즐기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거대한 숨은 그림이라면, 그 안에 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작가는 마땅히 이런 세계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한 미로 찾기와 허물 벗기의 시선을 가져야 할 일이겠다.
이은희의 수필을 살펴보면 다분히 이런 상상의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감지하게 한다. 그의 수필 쓰기는 그저 자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뭔가 새로움을 찾아 나선 예리한 촉수를 체감하게 한다. 대상에 대한 뒤틀기라 할까, 역지사지의 사고, 현미경으로 대상을 살펴보듯 미시적인 안목을 발견하는 것은 그의 수필 읽기의 재미일 것이다. 한마디로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의 변화를 보이는 시계(視界))의 확대라 할까. 아니 수필을 위한 개안(開眼)이지 싶다.
이은희는 「검댕이」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의 대상을 거머쥐고 찬란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동서커피문학상 제정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그의 수상은 소설이나 시 부문을 제치고, 최초로 수필로써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데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한국의 수필문학이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입증할 만한 수작”이라는 평가가 그렇다. 70년대 이후 중앙지의 신춘문예에서 수필 부문이 사라진 이후, 그는 가장 영예롭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처녀 수필집 『검댕이』를 상재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냈으며, 곧이어 『망새』를 펴냄으로써 입문과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그의 창작 열망은 활화산을 능가한다. 마라톤을 하듯 그는 수필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평가가 주례사식인가. 아니다. 최근에 창작된 작품들만을 보아도 이는 헛말이 아님을 증명한다.
2. 미로 찾기 그리고 허물 벗기
이은희가 취택하고 있는 수필의 소재는 다분히 일상적이다. 그저 어디서든 보았음 직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그게 아니다. 그의 착상은 일상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사뭇 그 발상이 낯설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시선의 변화, 착상의 변화가 돋보인다. 그의 수필은 전통적 문법이나 통상적인 언술의 구조를 뒤틀어 보거나 아니면 미시적 관찰을 통한 해석과 의미화로 존재 파악에 천착하고 있다. 사유의 깊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진지함이다. 이는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철학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 그의 수필은 현 존재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현 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래적 자신’으로서 실존할 수도 있고, ‘비본래적 자신’으로서 실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단히 의미 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삶의 해석과 존재 파악의 문제는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항로일 것이 분명하다.
수필 「버선코」를 보자. 이 정도의 소재라면 그리 낯설지 않다. ‘한국의 미’를 진술하면서 버선코의 ‘선’의 미를 진술한 이도 있다. 독자는 아마도 여인의 버선코쯤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다. 이 수필은 경주 불국사 기행이다. 평범한 담론이려니 싶지만, 예사 기행수필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여정과 견문이라는 도식에서 자유롭다. 바로 시선의 변화가 이 수필의 핵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쉽게 창작된 작품일 수 없다. 이렇게 동일한 사물이라도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작품의 성패는 갈린다.
극락전 계단 앞이다. 무감각한 그에게 지인은 소맷돌을 살펴보라 한다. “선의 유형은 마치 할머니가 즐겨 신던 광목 버선의 앞코, 바로 그것이었다.”이는 경이로운 발견의 장면이다. 화자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한 동인. 착상의 동기는 여기서 단서를 떠올리게 한다.
“순간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걸작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내 머릿속엔 소맷돌에 새겨진 버선코만 압흔처럼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선각(線刻)에 얽힌 상념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필경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포목점에서 광목을 떠 손수 버선을 만들던 모습과 할머니가 버선목을 잡아당기던 자태가 떠올라 괜스레 슬퍼졌다. 그리고 ……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기 두려운 장면, 병풍 뒤에 누워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었다.”(「버선코」에서)
화자는 여기서 잊고 지내던 할머니의 버선코를 떠올리고 소맷돌의 선각이 바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었음을 자각한다.
이렇게 인생과 삶의 진실에 대한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유의 깊이에 따라 그 모습이 사뭇 변용되게 마련이다. 작가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삶의 해석을 위한 실존적 의미 해석에 따라 삶은 얼마든 달리 진술된다. 이 수필은 일단 소재 선택에서 성공하고 있다. 소재에 따라 그 의미화와 주제 구현이 가능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그저 산만한 정서의 나열에 그치는 경우도 있는 바, 그가 취택한 소재는 일상성을 벗어나 미로를 찾듯, 생경하고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인도함으로써 그만의 발상과 기법으로 작품을 소화해 냈다는 데 있다. 그의 탁월한 창작 기법을 보게 한다. 아무리 소재가 남다르다 하여도 이를 부리고 내적 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작가적 소양이나 장인 정신이 결여될 때에는 작가가 소망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움에도 그가 탁월한 작가임은 이런 소재의 부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에코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과 같이 도서관을 미로로 형상화한 것과 같이 작가는 마치 미로를 찾아가듯, 일상의 허물을 벗듯, 불국사를 기행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이은희의 작품의 원천은 미상불 어머니이다. 앞서의 「버선코」가 소맷돌에서 할머니의 버선을 상상하였다면, 「등대지기」는 그의 문학의 지주요, 반석인 어머니이다.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독자라면 쉽게 그의 수필의 중심 인자인 어머니와 만나게 된다. 모성(母性)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창작의 샘이 된다.
화자는 파란 집을 찾아간다. 초록 물결 위에 외로이 떠 있는 파란 지붕의 집이다. 마치 들녘을 지키는 파수꾼과도 같은 그런 집. 화자는 파란 집의 저물 녘 풍경을 무시로 그려 본다. 화자의 상상이 시작된다. “칠흑 같은 밤길에 빛이 되는 집, 어둠과 두려움을 일순간에 거두어 간 그 집은 파수꾼이 아닌 등대가 아닌가. 검은 바다를 홀로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그는 파란 집에 머무는 외로운 등대지기일 거다. 그는 분명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세상만사 넌더리가 나 잠적한 은자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파란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지만, 주인의 무심한 눈빛을 읽고 그도 말없이 잠시 쉬었다 가리라.”(「등대지기」에서)라고. 은자는 다름 아닌 화자가 된다. 이런 동일시는 수필 창작의 단초가 된다. 여기서 그는 “내 삶에, 나를 지켜 준 등대가 있기나 한 것일까?”라고 자문한다. 답변은 쉬 이루어진다. “돌아보니 나의 등대지기는 친정 어머니였다.”라는 자각이다.
칠흑 같은 밤길에 빛이 되는 집 그게 파란 집이라면, 그 집은 바로 등대다. 등대는 화자에게 있어 어머니의 비유적 상징이다. 그런 어머니의 상실감은 등대의 소멸이요, 흔적 지우기다. 하지만 이로써 끝이 아니다. 이은희의 등대지기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서듯 “그러나 든든한 등대지기는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 등대가 되어 준 실체는 아마도 자연과 문학이 아닐까 싶다. 무시로 자연으로 달려가고, 산야에 피어난 개망초 무리에 그리움을 토하며, 한유한 시골 풍경 사진에 흠뻑 빠져 이렇듯 글을 짓고 있지 않은가.”라는 자각은 바로 존재의 확인이다. 미로에서 벗어남이요, 허물 벗기일 것이다. 그래 “대문을 열자 내가 원하던 풍경이 펼쳐졌다. 나만을 위하여 걸어 놓은 사진인 양. 오로지 초록의 물결이 일렁이는 들녘에 외따로 떠 있는 파란 집. 그 집에 내가 머무는 양 일상의 번뇌를 떨쳐 버린 듯 호젓함과 평화가 전이되었다.”라는 존재의 해석과 각성이 이루어진다. 비로소 등대지기는 생명을 얻게 된다.
이렇게 이은희의 수필은 그가 바라보는 ‘눈’을 통해 피사체의 다양한 특성을 조감하고 있다. 문학은 모름지기 이런 일상에 대하여 타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사물에 예민한 촉수를 가하여 내재한 진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로부터 받은 정서와 지성 그리고 상상을 직조하여 삶의 진실에 눈떠야 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이런 상상력의 동원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이은희의 창작 태도는 비약하면 문학적 낯설게 하기에 가깝다.
자, 다음의 수필 「은어」를 보자. 그의 수필에서의 낯설게 하기의 예를 보게 한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파드득, 파드득’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탄력 있게 두어 번 솟아올랐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녀석의 힘찬 꼬리 짓은 주기적으로 두 시간째 계속되고 있다. 아이가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탈출을 꾀하려는가. 달아나 봐야 물속도 아닌 차 안, 양동이 안에서의 몸짓이다.” 이 수필의 서두이다. 서두부터 이 수필은 독자를 낯설게 한다. 이어서 섬진강에서 살고 있는 은어가 하필 양동이에서 탈출하려 하는지에 대한 연유를 서술하고 있다. 은어의 생태를 적당히 알고 있는 화자는 아이의 욕망을 잠재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 “아이는 일정을 챙기며 검질기게 고집을 부렸다.” 그래 화자는 “에둘러 댄 말이 거짓말로 탄로”날까 하여 그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한다. 서사적으로 서술한 이 수필의 전개는 아들아이의 소망에 따라 은어가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비극적이다. 은어의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한 편의 삽화. 배불뚝이 구피가 산란 후 자신의 분신을 꿀꺽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이 수필은 주제로 보아 자연 친화, 환경 보호를 일깨우고 있지만 그 구조가 사뭇 낯설다. “은어의 고향은 섬진강이다. 내 집의 수조가 아닌 끼리끼리 어울려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은어의 희생이 말하고 있잖은가. 강 밑바닥에는 먹고 먹히는 비애와 평화가 있다. 시원의 순결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작은 생명을 도외시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있잖은가. 상대가 먼저 생명을 포기하기 전에는, 내 안에 들어온 이유만으로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은어의 기질과 구피의 생태를 진작 알았더라면, 이런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이제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이렇게 이 수필은 생명 공경의 사상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일상적인 수필의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대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의 차이다. 수필 「몸시(詩)」에서 설천봉 고사목과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만난 고사목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추적하려 한 발상과 흡사하다. 고사목을 통한 삶의 해석, “내 남은 생애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詩)보단, 울퉁불퉁하지만 앞 품이 넉넉한 나무를 닮은 몸시(詩)를 쓰며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화자의 언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은희의 미로 찾기와 허물 벗기는 수필 「괘릉」에서 구체화된다. 이 수필은 발화자가 능 주인, 나그네, 경주소나무, 무인석, 사자석, 12지신석으로 되어 있다. 이름 없는 능과의 대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왜곡된 세태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이 수필은 전통적 분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보여 준다. 구조나 기법이 주제 발현을 위해 마치 미로를 찾아가듯 독자를 낯설게 하면서 습관화된 시선에서 허물을 벗듯 자유롭게 전개되고 있다.
기행수필을 닮았으면서도 전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새로운 시선, 정물화된 무생물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유의미화하고 있다. “답답하다. 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하는가. 시방 이 땅을 밟고 있는 후인들은 들어 보라. 자네는 현실에 자족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사는 거니. 내로라는 사학자들 또한 이름만 내걸고 있는 거니. 누구일 거라는 추측만 있으니 참으로 속이 탄다. 왕릉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 둘레돌·십이지신 상·난간·석물들이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었지 않는가. 석조물의 조각 수법이 신라인의 예술적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며, 후대 능묘의 중요한 본보기 자료가 된다면서…….”(수필 「괘릉」에서) 창작의 단초는 이렇게 능의 주인의 언술에서 찾게 한다.
이어서 해석을 위한 대화가 서두의 능 주인의 대사―일종의 시놉시스―발제를 중심으로 나그네, 경주소나무, 무인석, 12지신석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그 얼굴을 드러낸다. 언어적 낯설게 하기의 방법일 것이다. 기하학의 도입이다. 중심적인 개념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난점을 벗어나기 위한 미로 찾기와도 같은 무한소 개념의 도입은 일견 독자를 당황하게 하지만, 고정화된 식상한 시선에서 사유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결미의 해석을 통한 의미화, “능 주인이여, 너무 서운히 생각 마소.” 후인이 당신을 몰라봤어도 괘릉 주변에 치장된 조각과 석물들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예술품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당대 후인은 생전에 치국의 업적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모신 게 분명하다. 변명 같지만 능의 주인을 모르는 건, 역사적 어떤 연유로, 어느 대에서 분별없이 흐려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그네의 가슴에 불붙듯 일어나는 이 엄청난 힘,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꿰뚫고픈 의욕과 의문이 솟구칩니다. 그러나……”(수필 「괘릉」에서)의 기교는 통상적인 문법에서의 정형화된 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한다.
3. 나가면서
어떤 측면에서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고 무료하다. 하지만 엔디 워홀이 허섭스레기에 불과할 재료들을 이용하여 일상의 미학이나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었듯이, 일상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상을 바라보게 되며, 삶 자체에 대한 경이를 맛보게 되는 경험을 문학을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은희의 수필은 다분히 새롭다. 그 새로움은 바로 해석과 낯선 기교에 있다. 같은 대상이라도 대상과 사물을 뒤틀어 보거나 새로운 상(안티테제)으로 바라보는 미로 찾기와 허물 벗기에서 변화된 의식과 새로운 미적 감각에 예술적 감흥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에서 이런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수필의 일상성을 뒤집기 위한 시도로 보아 일련의 그의 창작적 시도가 변화에 민감해야 할 수필작단에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고 있지 않나 싶다.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인식의 나무」,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보여 준 미로 찾기의 형상화를 그의 작품에서 보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인간 존재의 규명이라는 수필문학의 절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면 그건 공염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한 것은 이은희의 수필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수필문학의 본질인 사유와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게 한다.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학적 자전│
굴레를 벗어난 검댕이처럼
이 은 희
1. 글쓰기 모체(母體),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만 6년이 흘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그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의식 중 ‘어머니’란 단어가 먼저 입에서 튀어나온다. 스쳐 가는 물상 중에도 그것과 얽힌 기억이 있다면 시시때때로 어머니가 나타난다. 나의 글 「망새」, 「등대지기」의 화두가 그러하다. 그리움도 중독인가 보다. 아직도 난 누구도 못 말릴 그리움을 앓고 있다. 아니 평생 지병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던 그날, 어찌 그날의 장면을 아프지 않고 회상할 수 있으랴. 중환자실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아버지, 훌쩍거리는 여동생들을 달래며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어머니를 이렇게 무작정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지푸라기라도 움켜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담당 의사를 찾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몇 달이라도 좋으니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내 모습이 안되었던지, 의사는 밤을 새워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며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내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아니 나에게 기회를 주려는가. 어머니는 기적같이 깨어나셨으나 반신불수의 상태였다. 그 후 만 4년, 어머니에게나 딸들에게나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이 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으론 병원에서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드려야 했다. 나의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만 조절되는 혈당치와 인공투석은 보기에도 힘겨운 과정이었다. 어머니는 그리 고통스럽게 우리들 곁에 머물다 떠나가셨다. 생전에 주문처럼 외던 반야용선(般若龍船)에 올라 극락정토로 건너가셨으리라.
그 즈음 내 나이 32살, 나이만 먹었지 정신연령은 열아홉이었다. 돌아보면 19살부터 난 오로지 나밖에 몰랐다.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일과 학문, 주경야독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앞엔 그저 질주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신세타령, 기분 타령은 나와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런 날 보고 어머니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애”라고 놀리셨다. 그러니 어머니가 어떤 병으로 고생하는지 안중에나 있었겠는가.
부모의 자식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자애는 남다르셨다. 내 위로 어린 아들 둘을 잃고 내리 딸 여섯을 낳았다. 그 중 맏이인 내가 잘되길 바라며 날 위하여 기도하셨다. 딸도 아들 못지않게 당당히 제 몫을 하라는 바람이셨으리라. 그리고 베풂의 삶이셨다. 늘 남모르게 어려운 독거노인을 위하여 국수를 삶아 보시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랐다. 또 틈나면 산사에 들어 이 땅의 중생들이 그저 무사(無事)하기를 무릎이 닳도록 빌었다.
회갑의 짧은 생을 마감하신 내 어머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그리움으로 온몸에 통증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계실 때 좀 더 잘할걸’이라고 뼈에 사무치는 후회도 여러 번이었다. 부모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꼭 맞는 성싶다. 그걸 느끼고 행동으로 옮길 땐 ‘때는 이미 늦으리오.’가 아닐까. 의학이 발달하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직위와 편안하게 모실 형편이 되었는데…….
이런 나의 심정을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었다. 돈도, 명예도, 학문도 모든 것이 시들해져 갔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강제적으로 멈추게 하려고 이런 시련을 주는가. 가장 소중한 걸 잃고야 인생의 가치관이 바뀐다. 그래, 지금껏 난 가장 소중한 가족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눈 뜬 장님처럼 살아온 것이다. 이렇듯 용서를 빌 듯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 놓으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난 지금 어머니의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어머니의 삶과는 견줄 수 없는 미약한 생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어찌 감히 거룩한 어머니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할 수 있으랴. 지나온 내 삶의 순간들을 조용히 더듬어 간다. 그것이 슬픔이든, 아픔이든, 기쁨이든, 그리움이든. 분명한 것은 어머니는 나의 영원한 사랑의 수호신인 ‘망새’이며, ‘등대’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이 되고 싶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일상에서 지은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힘이 되고 위안이 되길 원한다.
2. 무모한 열정의 결실(結實), 검댕이
지금까지 난 열정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설령 그 열정이 무모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잘하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잘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신의 갈증, 결핍에서 오는 걸 무엇으로든 해결하려고 했던 것일까. 남들이 말하는 그 흔한 ‘백’도 없고 내세울 배경도 없으니, 스스로 앞길을 터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위무하면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그 조건을 꿰맞추며 힘겹게 달려왔다. 학창 시절 동경했던 사회의 이미지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세계였다. 학교에서 느꼈던 선의의 경쟁과는 다른 냉정과 살벌함뿐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을수록 더욱 오기로 똘똘 뭉쳐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감옥에 갇힌 듯 현실이 답답해 왔다. 창살 없는 감옥을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고 읊조리던 그 즈음, 철망을 탈출하려고 사투하는 ‘검댕이’를 보게 된 것이다. 꼭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 주위에 열린 문은 수없이 많은데,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였기에. 철망에 갇힌 ‘검댕이’에게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에 다름없었다.
그래,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도중하차는 할 수 없었다. 오기가 발동하여 무작정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두드리고 두드리면 열리는지, 아님 긍정의 힘인지. 수필창작이론을 보다가 내로라하는 한 선생님을 만나 문학의 까막눈을 면하게 되었다. 마음의 감옥, 이제 난 이 문을 나서니 수필 속’검댕이’처럼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입문하자마자 첫 수필집 『검댕이』를 출간했다. 이어 2년 만에 두 번째 수필집 『망새』를 세상에 내놓았다. 무모한 열정의 결실이다. 아무래도 수필에 미쳤던 게다. 그 많은 말들을 어찌 참아내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내가 용기 없는 겁쟁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문명이 원하는 부품처럼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느라 내 삶의 주체를 망각하며 살았다는 걸 깨우침이 천만다행이었다.
3. 글쓰기 모토
정신이 번쩍 드는 자극제, 이윤기의 「탱자나무 도둑」을 읽고 있으면 잃어버렸던 열정이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만 같다. 태만해진 작가 정신에 일침을 가한다. 이윤기 선생은 번역에 몰두한 이유를 묻자, “사유의 연습 같은 것에 대한 집착 ……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정독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 …… 번역을 통하여 저는 더할 나위 없는 정독의 방법을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짬이 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마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이제야 고백하건대, 수필가를 꿈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상을 졸업하기도 전에 기업에 취직되었고, 어머니를 보내고 동생들을 보살피며 생활하는 일이 맏이인 내 임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내 삶을, 다가올 미래를 순순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 문학이니, 작가가 어찌 나에게 해당이나 되겠는가. 그러다 우연히 백일장에 참가한 것이 입상되면서, 나에게도 잘하는 일 하나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도전은 계속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아하면 자주 하게 되고, 자주 하게 되면 전문가가 된다……”고 이윤기 선생도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등단 전, 난 글쓰기에 미쳤었다. 힘든 줄도 몰랐다. 하루 네 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해도, 생활에 찌들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목숨 줄인 양 매달렸다. 그 결과로, 운 좋게 동서커피문학상 공모전 만7천여 편 중에서 수필 「검댕이」로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화려한 입문과 두 권의 수필집 출간 뒤에 밀려오는 허무, 그리고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남모르게 펑펑 울었다. 나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라도 할 양 대학 문과에 편입하였고, 이제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이다.
아직도 문학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끝 간 데 없는 속에서 예술가는 적어도 이러해야 한다고 몸소 실체를 보여 준 「탱자나무 도둑」을 접하면서, 난 아직도 멀었다는 걸 다시금 절감한다. 이윤기 선생처럼 “용을 쓰며 노래를 부르다 새끼발가락이 까지는 열정을 보인 적”있던가. 나의 글이 독자들에게 북 치는 고수처럼 ‘박과 박 사이를, 머리카락 올 째는 듯이 치고 들어가’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정의 기미를 째고 들어가야 하는데’말이다. 이 선생의 독백처럼 그런 범주에 들려면, 먼 길을 가야 함을 안다.
하여 나는 망각의 강을 넘나들 때마다, 북채로 세게 얻어맞고 싶다. 그럼에 「탱자나무 도둑」을 곁에 두고 정신을 바로잡는 지침서로 삼는다. 더도 덜도 말고 생활 그 자체가 수필이라 여기며 몸시(詩)를 쓰련다. 전업 작가가 아니어서 더디겠지만, 나의 길을 내며 내 보폭으로 나아가리라. 오늘도 늘품을 위하여 글쓰기 모토인 시인 두보의 문장을 힘차게 읊조린다. “내 글이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
* 반야용선(般若龍船) : 진리를 깨닫는 지혜(반야)의 세계로 가는 용이 이끄는 배(용선).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고통스런 이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