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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7:1-43) 서서 당하는 KO패, 몹쓸 정신력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서서 당하는 KO패, 몹쓸 정신력>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서 격투기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백인 선수와 흑인 선수가 맞붙어서 싸우는데, 요새는 격투기의 종류도 다양해서 어떤 경기였는지 모르겠어요. 시작 얼마 되지 않아서 백인 선수의 강펀치를 맞고, 흑인 선수가 완전히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서 링을 도는데, 충격을 받아서 밸런스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도록 달팽이관이 혼돈상태에 있는 것 같았어요. 사람이 평형감각을 유지해서 똑바로 걸을 수도 있고 행동을 바르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귓속의 전정기관이 충격을 받았는지 계속해서 마치 술 먹은 사람이 갈 지(之)자로 움직이는데, 술 먹은 사람의 행동은 느리잖아요. 술 먹은 사람의 행동을 카메라로 찍었다가 한 1.5배속이나 2배속으로 돌리면 빨리빨리 움직일 것 아닙니까? 링 위를 게걸음으로 막 걸으면서 카운터 10을 셀 동안 계속 움직이면서 끝까지 드러눕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로 비치는데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어요. 참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 정도면 우리가 떡을 철퍼덕하고 바닥에 내칠 때 떡이 납작하게 쫙 뻗는 떡실신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신력으로 일어나서 갈 지(之)자로 걷고 그러는데 마음이 안됐어요. 저런 정신력을 칭찬을 해주기도 민망하게 마음이 안타깝고 참 몹쓸 정신력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냥 질 때는 지는 것이지요. 한방 맞고 쓰러졌으면 자기가 느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 정도 펀치면 내가 져주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하고 질 때는 깨끗하게 져야지, 그거 일어나서 갈 지(之)자로 걸으면서 모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망함을 느끼도록 하면 그게 뭡니까? 하여간 우리가 이 몹쓸 정신력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KO패를 이미 당한 사람들이 많아요. KO패를 당했는데 좀 드러누우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KO패를 서서 당하면서 갈 지(之)자로 걷고, 이놈의 몹쓸 정신력 때문에 생의 고통스러운 기간을 한없이 연장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시편 107편은 시편을 5권으로 나눴을 때, 제5권의 첫 번째 시로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B.C. 586~538년까지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포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그 상황, 포로로 잡혀가기 전의 상황,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반복해서 노래하고 있는데 소재를 바꿔가면서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쉽게 아시려면 6절과 13절과 19절과 28절을 보면 아실 수 있어요.
뭘 반복하는가 하면,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라는 구절이 6절, 13절, 19절, 28절에 반복됩니다. 그 앞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되는 것이 고통을 준다고 했어요. 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느냐? 낮추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보면 1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시는데 마음을 낮추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하는데 우리 삶에서 이런 것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당하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이 이런 일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을 많이 봅니다. 수고로운 삶을 주시므로 마음을 낮추시는 거예요. 그럴 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하지요.
우리 인생의 고통이 다 뭐예요? 현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고통이 주어지고 고통이 주어지는데도 눈을 돌리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 때에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하는데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돼요.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라는 이 말은 '여호와 자신을 갖겠다'라는 말입니다.
돈 문제 때문에 환란이 임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께 부르짖으면서 돈 달라고 하면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내게 돈 주세요. 내가 돈이 있어야 살겠습니다.'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기도하면 여호와께 부르짖는 게 아니라 돈께 부르짖는 거예요. 돈께 부르짖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돈께 부르짖는 거예요. 내가 자식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 자식 문제를 잘 해결해 주세요.'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부르짖으면 여호와께 부르짖는 게 아니라 자식께 부르짖는 겁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얘기는 '그 부르짖는 대상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이해해야 돼요.
돈 원하고, 건강 원하고, 성공 원하면서 여호와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이 시편 기자가 하는 이야기가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비로소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에야 하나님이 내 기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드디어 마음속에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나라를 찾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갖고 싶습니다, 나라를 주세요.’라고 했으면 나라께 부르짖는 거예요. 진짜 갖고 싶어 하는 그것을 우리는 그것에게(그것께) 부르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고통을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그냥 마음이 KO패를 당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넣어준 인간의 주체적 노력, 책임감, 성실성 이런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될 몹쓸 정신력을 가지고,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겨나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수고로움과 시간과 정력과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입하면서 소진이 돼서 육체적으로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될때까지도 계속 밀어 붙이는 겁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예요. 내가 고통을 끌어안고 씨름하고 어떻게 해보려고 갈 지(之)자로 걷는 거예요. 하나님께 한 번 펀치 맞아서 평형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뒤뚱뒤뚱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자세로 뭘 할 수 있다고.
'그래도 나는 KO 안 당한다.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서서 당하는 KO패를 당하고 있는데 좀 편안하게 누워요. 요만큼만 펀치를 맞고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실제로 때리지도 않으셨고 때리려고 얼른 폼만 잡으셔도 KO 당하는 것이 이기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정신력을 발동할 필요가 없어요. 하여간 내 삶에서 너무너무 작은 일이 주어져도 크게 내가 얻어맞는 거예요. 내가 얻어 맞아버려요. 하나님이 눈곱만한 일이라도 좀 어려운 일, 힘든 일을 주시려고 몸짓을 하려고 하면 그 때 아예 드러누워 버려요. '아이고 하나님! 나는 죽었습니다.'하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두드려 맞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벌떡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눈은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걸어요. 카운트하고 있는데도 그냥 링 위를 갈지자로 걷고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살아요?
10절에 보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라고 하십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이 '쇠사슬'이 뭡니까?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그런 속박이 있는 거예요. 자식, 말썽 피우는 남편, 못돼먹은 아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업 등 이게 다 쇠사슬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매입니까?
1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지존자'라는 것은 제일 높은 분입니다. 그 높은 분이 그냥 높은 분으로 계셔서 마치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으시고, 나와 대통령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대통령이 명령을 하시면, 간접적으로 공무원들 몇 단계를 거치고 거쳐서 나한테 임하는 그런 관계라면 내 마음에 대통령을 무시하든 어쩌든 상관없이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이 지존자, 가장 높으신 분, 모든 나라의 대통령보다 높으시고, 대통령을 다 모아 놓은 것보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 지존자를 멸시한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 분의 뜻을 멸시한다'는 것은 '그 분을 멸시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가장 높으신 분을 멸시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말이 그게 성립이 돼요? 그런데 멸시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합니까? 대놓고 물어보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당신, 하나님 멸시하고 있어.'라고 하면 '천만의 말씀! 하나님을 어떻게 내가 멸시하냐? 벌써 이름을 부를 때도 '님'자를 붙이고 있지 않냐?'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이 계신 것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멸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흑암의 그늘, 사망의 그늘에 집어넣고 쇠사슬에 얽매이게 내버려뒀다는 겁니다. 멸시하니 고통 가운데 처하게 했다는 것이에요.
그럼 어떻게 멸시할 수 있어요? 대통령 앞에서 대통령을 멸시할 수 있어요? 그럼 왜 멸시해요? 못 돼먹은 것이지. 대통령 앞에 있으면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해드리고 그 분을 높여야지 왜 그 분을 멸시합니까? 가정교육이 안 된 것이고 사람이 꼬여버린 거예요. 높은 분은 높다고 인정을 해드려야죠.
어떻게 우리가 인정하고 있지 않죠? 하나님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할 일을 내가 하면서 멸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게 됩니다.
어떤 넌센스를 우리가 날마다 연출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할 일을 내가 하면서 내 일로 채택한 뒤에, 내가 그 일을 경영해 나가면서 그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고 있어요.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어요? 내 일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는 '이 일이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는 식으로 뜻을 묻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라는 이 말은 여러분, 사실은 믿는 사람 중에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사람이 많아요. 지존자를 멸시하면서 지존자의 일을 자기 일로 자기가 채택해 놓고는, 그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지존자에게 뜻을 묻는, 지존자를 전문가나 고용인이나 자문인 쯤으로 생각하는 그런 신앙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존자 자신을 멸시하므로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지존자가 하시는 일이 뭡니까? 참으로 우습게도 지존자의 하시는 일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을 다 지존자가 지존자의 일로 삼고 계신 겁니다. 이 땅의 일들을 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일로 채택해 버리는 거예요. 내가 돈 벌고 사는 것, 내가 공부하는 것,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것, 내가 결혼하는 것,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사는 것, 자식 기르는 것 모든 일들이 원래 다 지존자의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태어나게 하신 곳이 에덴동산, 낙원이었습니다.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과제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일들을 자기가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의 일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경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거예요. 땅에 살면서 위엣 것을 찾는 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연의 잡이라는 겁니다. 주업이에요. 이 땅에서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백성 된 모습이라는 거예요.
하늘에서 살면서 하늘 것을 찾는 건 누가 못해요. 땅에 살면서 하늘을 찾는 게 하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전부 하나님을 멸시해요. 가장 높으신 분의 일을 빼앗아가면서.
제가 제 자식 키우는 것이 제 일이 아니에요. 내가 하늘의 하나님을 찾으면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길러 주시는 것이고, 내가 그 아이에게 말하고 내가 그 아이에게 행동할 지라도, 내가 지존자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해서 그 지존자가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 지존자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대행할 수 있고 시키는 대로 행할 수는 있지만, 내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십니다. 이 땅의 일들, 하나님의 일들을 내 일인 양 뺏어서 지존자를 멸시하면서 이 땅의 일들을 해나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고 일을 막으세요. 이때 깨닫는 사람은 좋은 거예요.
뭘 깨달아요? '아 내가 하나님으로 나 자신을 채워야 할 것을 내가 자식 걱정하며, 남편 걱정하며, 직장 걱정하며, 사업 걱정하며,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이 땅의 일들을, 내가 마음속에 채우고 있었고 내가 지존자를 멸시하고 있었고 내가 그 분이 해야 될 일을 뺏어서 내가 하면 더 잘할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알고 얼른 KO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넙죽 엎드러져 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영원한 KO장소가 주님의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너는 언제나 KO다. 자식 앞에서 KO패 당해요. 왜 되지도 않을 몹쓸 정신력을 가지고 그 자식을 내가 길러보겠다고 갈 지자로 걸으면서 눈동자의 흰자위를 보이면서 버티는 겁니까?
왜 이 세상의 사업을 하면서 몹쓸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KO패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동서남북도 못 가리면서 갈 지자로 걷고 있는 겁니까? 얼른 엎드려요.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KO패다. 자식 앞에서 KO, 남편 앞에서 KO. 남편을 어떻게 마음대로 합니까? 아내를 어떻게 마음대로 합니까? 사업을 어떻게 마음대로 해요? 내 건강을 어떻게 마음대로 해요? 내 얼굴 모습을 어떻게 마음대로 합니까? 마음대로 하려다 보니까 성형부작용으로 말미암아 멀쩡한 얼굴을 다 망가뜨려 놓고 왜 그 짓들을 하고 다녀요? 안 돼요.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내 소원으로 이 세상의 일들을 어떻게 해보자고 하는 이 몹쓸 정신력은 마귀가 불어 넣어주는 힘이에요. 더 이상 사탄의 놀이감이 되지 마세요. 서서 KO 당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일은 안 되는데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고 환란을 주셔도 이걸 이겨내야 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그래요. 이걸 이겨내야 된다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완전히 정말 똘아이들을 만들고 있어요.
여러분! 서서 KO를 당하지 마세요. 그냥 납작 엎드리세요.
오늘 본문에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나옵니다. 완전히 엎드러져서 더 이상 세상에서 소망의 줄이 끊어졌을 때 이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어서 '하나님만 주세요.'라고 하는 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고 본연의 일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이 아래 사는 자들로서 위엣 것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이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위에 계신 지존자께서 당신의 일로 삼고 해나가시려고 계획을 갖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늘 사랑, 하늘은 땅 사랑이 어긋나서 우리가 땅을 사랑해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데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얼만큼 높아졌어요? 지존자가 하셔야 될 자식 키우기, 사업하기, 이 세상 모든 일들을 내 일로 내가 채택해서 내가 지존자보다 잘났다고 할 만큼 높아졌으므로 내가 하려고 하는 이 세상 모든 일들에 고통을 주십니다. 이 때에 몹쓸 정신력을 가지고 버티지 마시고 '하나님 내가 뭘 할 줄 압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KO 당한 자가 나인데, 저 십자가의 KO패가 내 마음에 느껴지게 하시고 실감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KO 당했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당신의 일로 삼으시고 나는 하나님 만나서 영원한 행복의 세계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의 일은 너무너무 사소한 일도 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이 땅에 살면서 내가 24시간 경주해야 될 나의 일은, 위에 계신 지존자 되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자신을 갖는 것임을 기억하게 해 주시고, 이 땅에 대해서 끊임없이 내가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이 사탄이 준 몹쓸 정신력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임을 내가 깨닫고 사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품에 안기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몹쓸 정신력으로 체력 낭비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콱 죽어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제파악했으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몰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이렇게 단순명료한 진리의 말씀이 있는데 사탄의 몹쓸 정신력으로 인생낭비하며 끙끙대고 살았지요.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시고 마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새로운 삶, 아버지가 실제되시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하시는 이 귀한 말씀, 만방에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