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33> 서장 (書狀)
왕장원(往狀元)에 대한 답서(2)
다를 것도 없고 같을 것도 없다
"대개 학문을 배우고 도를 공부하는 것이 같은 것인데도, 오늘날 학자는 흔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학문을 삼고 격물(格物)과 충서(忠恕)와 일이관지(一以貫之) 등으로 도(道)를 삼으니, 마치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것 같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으로써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경계를 헤아려 보는 것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고 석가세존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와 좋고 나쁘고 손해보고 이익되는 경계에 마주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인은 바로 성(性)의 인이요, 의는 바로 성의 의요, 예는 바로 성의 예요, 지는 바로 성의 지요, 신은 바로 성의 신입니다.... 만약 인의예지신의 성이 일어나는 곳을 알 수 있다면, 격물과 충서와 일이관지도 그 속에 있습니다. 승조(僧肇) 스님이 말했습니다. [하늘을 부리고 사람을 부리는 것이 어찌 하늘과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리요?] 그러므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학을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捨敎入禪] 라고 하여 언어로 된 가르침을 버리고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선(禪)에 들어가는 것이 곧 선공부라고 한다. 또 '선은 교밖에 따로 전한다'[敎外別傳] 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 하여 선수행은 어디까지나 선수행이고 교학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교학의 연구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또 학문은 이론적 관념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선수행과는 그 범주가 달라서, 학문과 선수행은 양립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이제 공부에 입문한 학인(學人)의 입장에서는 일면 타당한 견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학문적 연구란, 관념들을 도구삼아 이리저리 추측하고 맞추어보아서 그럴듯한 관념의 그림을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분명 자신과 세계의 본성(本性)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념의 테두리를 초월하여 마음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것이 선공부이므로, 관념의 테두리 속에서 관념적으로 마음을 그리는 것으로는 선공부를 완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차별적 견해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선이란 다양하게 나타나는 모든 세계의 공통되고 유일한 바탕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공부란 이 공통되고 유일한 바탕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이 공통되고 유일한 바탕에 성(性)이니 도(道)니 선(禪)이니 마음이니 하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다. 즉 여기에 지금 나타나는 일이 내면적이든 외면적이든 관념적이든 실재적이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것이라도 모두 성(性) 혹은 도(道)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과 수행은 별개가 아니라 성(性)일 뿐이며, 교(敎)와 선(禪)이 별개가 아니라 성일 뿐이며, 사교(捨敎)와 입선(入禪)이 별개가 아니라 성일 뿐이며, 문자(文字)와 불립문자가 별개가 아니라 성일 뿐이며, 학문과 수행이 별개가 아니라 성일 뿐이며, 관념과 실재가 별개가 아니라 성일 뿐이며, 선이니 도니 성이니 하고 말하는 것도 성일 뿐이며,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성일 뿐이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성일 뿐이며, 성이니 무어니 하고 생각하는 것도 성일 뿐이며, 성일 뿐이라고 하는 것도 성일 뿐이다. 이렇게 알면 다를 것도 없고 같을 것도 없어서, 다만 이럴 뿐이다.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말을 듣되 그 말의 뜻을 따라가지 않고 말이 나오는 순간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며, 글을 보되 그 글의 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글이 보이는 순간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늘 지금 여기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말과 침묵과 움직임과 고요함과 잠과 깸에 속지 않는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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