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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수필은 신변잡기에서 출발한다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기웃거려 볼 배짱이 없다. 누군가 문을 활짝 열고 두 팔 벌려 반겨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힘을 가하지 않는 문은 열리지 않음을 알면서도 늘 문 앞에서 문고리만 잡았다 놓았다 한다.
남쪽으로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일기예보는 정확히 맞았고 아침부터 제법 세찬 빗줄기가 땅으로 땅으로 고공낙하 중이다.
늘 언저리에만 서 있는 나를 위로하고픈 날이다.
글을 쓰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강의만 듣는다고 글이 나오지 않는 줄 알면서도 문학, 그 깊은 중독에 빠진 나는 헤어 나오질 못하고 또 이렇게 우중(雨中)의 만남을 위하여 길을 나선다.
작은 연못 안에서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
녹음(綠陰)이 짙어진 초여름의 흥을 이기진 못한 수련 두어 송이가 내리는 비에 저항한다. 얼마나 날을 기다려 첫 봉오리를 올렸는데 봐 주는 이 없는 것도 슬픈데 이 비가 웬 말이냐.
넓은 연잎이 연못의 면을 가득 채운다.
보여주지 못할 그 무엇을 감추기 위함인가. 같은 색으로 대동단결의 비장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 다리를 지나고 마흔다섯 계단을 오르고 나면 신기루를 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지나친 패기였음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한다.
세차게 내리던 비도 잠시 주춤한다.
이제 저기 저 문을 밀고 다시 들어가 내 삶의 위안이 될 문학적 처방전을 받아와야 할까 보다.
수필은 신변잡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단순한 잡기가 되면 그것은 문학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한 나의 이야기는 습관, 사회, 세상, 우주를 철학적 통찰의 깊이로 확장해야만이 진정한 수필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경험과 기억, 서사적 고백을 통한 자기 고백을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공감으로 끌어올려 인문학적 향기로 환생이 되어야만 수필의 탄생이라 칭할 수 있다.
기억에도 화소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일 것이다.
어릴 때의 기억은 언어로 치환되지 않아 저장이 되지 않으니 우리는 기억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서 들쑤시고 집적거려 끊임없이 자극을 주어 몸 밖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사람은 다 다르다에서 사람은 다 똑같다의 과정으로 가는 길목 언저리에 문학이 있다. 수필은 멋있는 정장을 입고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잘 차려진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 골목을 돌고 돌아서 어딘가에서 본 듯한 허접하고도 평이한 식당, 캐주얼이나 편한 복장을 입고 들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골목식당의 비빔밥 같은 것이다.
실의에 빠지고 삶의 길에서 허우적거려 마지막으로 돌아간 내 어머니의 품 안과 같은 글, 거칠지만 마주한 손에서 전해져오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급하게 차려온 어머니의 온 정성 가득한 늦은 밥상처럼 수필은 그렇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고.
- 최민자 수필특강에서
내게 있어 수필은 무엇인가?
- 수필은 나에게 있어 존재의 동력이다. 삶의 날숨과 같은 것이다. 내 이름을 찾아준 도반이다. 내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을 소통시키는 매개체이다.
- 수필을 쓴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보석 같은 기억들을 엮어내고 그리움과 같은 내면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 곧 수필이다. 나의 내면은 또 하나의 소우주다.
- 수필쓰기는 묵묵히 파 들어가야 하는 수작업이다. 자동화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를 위한 노력은 곧 독서와 메모(적바림)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 수필가는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를 보태주는 사람이다. 고로 통찰력을 깊 게 해주는 독서에 열중해야, 즉 활자를 가까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결국 생 산라인의 최종 상품이 좋으려면 원료가 좋아야 한다. 다방면의 원료(지식)을 풍부하 게 확보해야 한다.
- 기억이란 게 비누 거품 같아서 그때그때 포획해 두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즉 적바림을 해둬야 한다. 메모의 종착역은 자기 자신이다. 잉태기간이 필요하듯이 작품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 수필은 신변잡기가 돼 버릴 수가 있다.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감동이라고 볼 때 수필을 쓴다는 것은 독자에 대한 서비스다. 내면의 한(恨)을 퍼내는 것은 스스로를 구제하는 수단은 되겠지만 적어도 독자에게 느낌표 하나, 물음표 하나라도 쥐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구체적인 사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나가거나, 추상적인 사유로 시작해서 구체적인 사례로 나가야 한다. 가볍다 싶으면 어딘가에 추(錘)를 달아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다 읽고 난 후에 남는 향기 같은 게 있어야겠다. 모든 수필이 다 관념적일 수는 없다. 초밥 같은 수필, 곰국 같은 수필도 있어야 한다.
- 나는 대상(對象)수필을 많이 쓴 편이다. 대상수필은 몇 문장 쓰고 나면 막혀 버릴 수도 있다. 큰 재능은 축복이지만, 작은 재능은 올무인 것과 같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석수(石手)가 큰 바위 앞에 앉아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미소를 건져 올린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코 유산(流産)은 안 되겠다. 사산(死産)은 더욱 안 되겠다.” 싶 은 단계일 때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퇴고에서 차이가 난다. 결국 명품은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나에게 있어 역점을 두는 것은 ‘덜어내기’다. 다이어트(부사, 형용사 등)를 많이 해 야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가차 없이 덜어내야 통풍이 잘되고 결국 독자에게 어필 할 수 있다.
- 단어의 적확(的確)한 사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문장이 덜거덕거리지 않는다. 토씨 하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글의 맛이 전혀 달라진다.
- 문장의 리듬에도 신경을 쓴다. 리듬이 있으면 마음에 잘 스며든다. 노골적이기보다는 은연중에 리듬을 타도록 해야 한다.
- 수필은 말맛과 진정성으로 읽는다. 언외(言外)의 의미를 길어 올려야 한다.
너무 죽여 놓으면 간이 안 맞는다. 한두 군데쯤은 에스프리, 위트, 삽화 등 엑 센트를 넣어줘야 맛이 난다.
- 마지막으로 하는 작업은 ‘글 화장시키기’다.
작품 초안이 완성되면 한동안 뜸을 들인다 - 유연한 글이나 시를 읽는다.
한참 후에 다시 들여다보고 단어 하나라도 바꿈으로써 글에 생기가 돌게도 한다. ‘열정과 정열’ ‘방해와 훼방’이 다르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다 잊어버려도 좋다. 만사는 테크닉이 아니라 마인드가 문제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된다.
-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딴짓거리를 해왔 다.
- 수필에 있어서 허구성의 수용 여부 문제는, 수필의 정체성(진정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래전 옛 체험에 보탠 추체험의 정도는 수용 가능하다.
- 최민자 강의 요약
달빛과 나비
최 민 자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에서는 달빛냄새가 난다. 청아한 그의 가야금 연주는 댓잎에 듣는 빗방울이었다가, 빠르게 일어나는 구름이었다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가, 이윽고는 고요한 달빛이 되어 천지간에 흐뭇이 내려앉는다. 잦아지는가 싶다가 사뿐 살아나는 산조의 선율은 천상의 궁궐에 사는 요정이 서둘러 은하수를 건너가는 작고 날랜 걸음새도 같고, 그 요정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열사흘 달빛 같기도 하다.
흰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 무대 위에 앉아 있던 선생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조용한 카리스마라고 할까. 옷고름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개키고 정좌를 하고 앉은 모습에서 긴 세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기품이 넉넉하게 배어나는듯 하였다. 그가 악기를 받드는 손길은 첫날 밤 새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앞섶을 풀 듯, 조심스럽고도 경건하였다. 어떤 무대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대가다운 풍모라 할까.
선생의 가야금소리에서 나는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만나고, 결 고운 비단치마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른 봄, 꽃들이 벙글어 터지는 소리와 늦가을 들녘의 바람소리를 만난다.
명기(名器)도 명기(名技)를 만나야 빛을 발하는 법. 좋은 연주가를 만나지 못한 악기란 나무토막에 불과할 뿐이다. 벙어리 나무통에 혼을 불어넣어 감추어진 소리를 길어 올리는 일이 훌륭한 연주가의 몫인 것이다. 그가 아껴 연주하는 가야금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자고동이란 바위틈 같은 데서 자라다 스스로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일컫는데, 악기 중에서도 가야금은 자고동으로 만든 것을 최상으로 친다. 밭둑에서 쉽게 자란 오동은 소리가 잘 나지 않고 힘들게 자란 오동일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 하니, 맑고 야무진 소리를 내는 대금이 쌍골죽과 같은, 돌연변이성 병죽(病竹)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시련과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듯이, 한이 한없이 안으로 잦아들어 죽을 고비에 이르러야만 심금을 뒤흔드는 절창의 가락을 쏟아놓게 되는 것일까.
선생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유려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잠든 가얏고를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성애를 알지 못하는 신부의 관능을 지극한 사랑으로 일깨워 가는 남정네의 손길만큼이나 정성스러워 보였다.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로 풀어내는 산조가락의 흥취는 켜켜이 쌓인 여인의 정한이 주춤주춤 불씨를 머금다 마침내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아 휘황한 불꽃으로 산화해버리는, 한바탕 육체의 향연과도 같았다.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樂而不流 哀而不悲), 선계의 가락이 달빛처럼 충만하다. 나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신 새벽 호숫가. 이제 막 번데기에서 깨어난 나비가 달빛에 젖은 날개를 턴다. 조금씩, 조금씩 푸드덕거리며 서툰 날갯짓을 시작한다. 달빛 사이로, 나비가 날아오른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노랑 바탕에 까만 무늬가 찍힌 호랑나비, 보랏빛 작은 날개를 가진 부전나비, 모시나비, 제비나비, 배추흰나비, 꼬리명주나비...... 하늘은 오색 날개로 눈부시고, 날갯짓 소리로 세상이 현란하다. 연주가와 악기가 혼연일체로 어우러지는 신비스런 법열의 춤사위. 도도한 악흥이 빛의 꽃가루가 되어 칠흑의 세상 위에 쏟아져 내린다.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나비들이 하나둘 내려앉는다. 술렁이는 축제도 막을 내리고 호수에는 달빛만 교교하다. 제의를 치르듯 숙연하게 줄을 뜯던 선생의 손길도 멈추어 있다. 지악무성(至樂無聲) - 소리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다.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 온다.
구두와 나
최 민 자
구두를 샀다. 빨간 단화다. 강렬한 원색이 낮은 굽을 보완해 주어서인지 처음 신은 단화가 어색하지 않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줄기차게 7센티 굽을 고수했다. 무릎이 아프다고, 발목이 좋지 않다고, 진즉 편한 신발로 갈아탄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한사코 하이힐을 고집했다. 젊은 시절부터 습관화되어선지 신발이 낮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굽 낮은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땅으로 푹 꺼지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들어와 버린 적도 있다.
구두 굽이 높아지면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다르다. 턱을 치켜들고 등뼈를 곧추세워 또각또각 걷다 보면 마음 복판에도 철심이 박혀 자세가 한결 당당해진다.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아랫배에 힘이 쏠려 저물어 가는 여자의 곤고한 심신이 일시 탄성을 되찾기도 한다. 쭉쭉빵빵인 젊은 여인들처럼 뭇 남자의 시선을 거느리진 못해도 왜소해진 자존감을 들어 올리는 소도구로 하이힐은 내게 간간이 유효했다.
지지난해인가, 파리에 잠시 머물 기회가 생겼다. 아침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을 사고 저녁에는 까르푸에서 산 싸구려 와인을 땄다. 비 내리는 센 강가를 걷고 샹젤리제의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 일이 좋았다. 얼추 팔십은 넘어 보이는 노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후들거리는 걸음새로 신호대기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늙음을 빌미로 긴장의 끈을 늦추거나 매무시를 흐트러뜨리려 하지 않는 원조 파리지엔느의 결기가 멋져 보였다.
다음날 나도 여행객티가 줄줄 흐르는 아웃도어를 벗어던졌다. 키 높이 운동화도 밀어 두었다. 살랑거리는 스카프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고서점과 그림엽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골목들을 천천히 헤집고 다녔다. 주눅 들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주었던가? 발목이 그만 삐그닥, 꺾였다. 발목이 꺾이면서 무릎도 꺾였다.
동행한 친구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케토 뭣인가 하는 관절 파스를 붙여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수다스런 중년 탤런트의 광고 카피가 아직 나랑은 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돌아와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순례했다. 구두 굽이 낮아지고 구두코도 점차 펑퍼짐해졌다. 발목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우지직 찢겨 나간 내 자존의 인대 하나는 끝내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한때, 오래 서서 일해야 하는 외국의 간호사들이 주로 신는다는 수입 캐주얼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께 큰맘 먹고 사 드렸던 그 효도 신발을 우리는 그때 여포신이라 불렀다. 여자이기를 포기한 신발이란 뜻이었다. 뒤늦게 편한 맛을 보기 시작한 내 발가락들이 날렵한 정장 구두에 구겨 넣어질 때마다 뒤꿈치와 발바닥이 합종연횡으로 몽니를 부리며 칭얼거릴 때, 그 뭉툭한 신발 생각이 났다. 친한 척 슬그머니 다가앉은 노경(老境), 그 불청객에게 무릎을 꿇고 나도 이제 여포신에게 굴종해야 하는가. 착잡했다. 씁쓸했다. 여자의 뒤꿈치와 구두 높이 사이에 어떤 친연성(親緣性)이 작동하기에 신발 하나에 성 정체성마저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해, 남프랑스의 마르세유 항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잡아챈 것은 광장 복판에 놓여 있는 엄청나게 큰 진홍빛 하이힐 모형이었다. 바람 부는 갑판, 흔들리는 잠결 속에서도 거칠고 울룩불룩한 이두박근의 사내들은 항구의 여자처럼 알짱거리는 핑크빛 하이힐을 꿈에 그리며 시퍼런 벼랑과 맞서 싸우고 구멍 난 그물을 당겨 올렸을 것이다. 신데렐라에게 구두가 왕자의 옆자리 티켓이었고 샤론 스톤에게 구두가 섹시 아이템이었듯이, 되똑 들어 올린 여자의 발꿈치에는 삶의 하중을 떠받치는 마법의 지렛대 하나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욕망의 바코드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산악인 오은선의 키는 155센티미터, 그가 오른 안나푸르나의 정상은 8,091미터였다. 그는 왜 자기 키보다 5220배나 높은 산을 그토록 목숨 걸고 올랐던 것일까.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대한 동경으로, 짓눌린 꿈을 향한 도발의지로, 어떤 여자는 히말라야에 오르고 어떤 여자는 코를 높이고 또 다른 여자는 무시무시한 킬힐을 신고 밤거리를 아슬아슬 누비기도 한다. 한 치라도 더 높이, 더 위로 솟으려고 제각기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산다. 콧대도 못 높이고 히말라야에도 못 간 나는 구두 굽이나 겨우 높이며 살았다. 이제 그마저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살아 보니 인생은 잡았다 놓치는 것, 주었다 빼앗는 것,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쪼그라져 내려앉는 거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사십 년 동안 내 인생은 기껏 7센티미터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 최민자 : 피천득 선생으로부터 “어떤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는 칭찬을 들었던 주목 받는 수필가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에세이 문학」으로 등단했다(1988). 현대수필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흰꽃향기』, 『열정과 냉정 사이』, 『흰꽃향기』 등이 있다.
첫댓글 지난 한 해 졸강을 읽어주신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새해도 가슴 따뜻한 글로 만나뵙겠습니다.
'수필은 신변잡기에서 출발한다'는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동안 우리 회원들을 위하여 알찬 수필강좌를 펼쳐주시어 매우 감사합니다.
계속 올려주시는 강좌를 열심히 읽으면서 수필 이론의 기틀을 정립해 나가겠습니다.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기는 치매 예방에 아주 좋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