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순교자 103위시성 기념성당 ,성모당,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가는 길 입구에는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맞이하신다. 대좌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자는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마태오 11장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안내도에는 이곳을 성지 입구라고 하는 것을 보아 이제 가는 세 곳이 성지의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냥 가지 말고 기도하고 가라는 뜻으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엄청난 크기로 만든 십자가의 길 14처와 묵주기도의 조각들이다.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
1991년에 봉헌된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은 성당과 종탑의 2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이 3천45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성당은 피라미드처럼 윗부분으로 갈수록 경사진 기하학적 외형으로 이는 순례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위쪽으로 유도함으로써 순교로 인한 성인의 자리에 오른 이들을 향한 경모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그에 비해 종탑은 칼날처럼 수직으로 공간을 단절하고 내려서 있어 매서운 순교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준다.
성당 내부는 전형적인 서양식 성당의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 라틴십자가 형태로 가운데 정랑(正廊)과 양 측랑의 구별이 뚜렷한 점, 천장의 교차형 리브(뼈대), 성당 내부를 두르고 있는 반원의 줄창 등이 서울 명동성당과 닮았다.
성당 내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종아리뼈)가 안치되어 있으며, 그 제대 위쪽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돋보인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의 모습을 정교하게 표현한 순교 성인화이다. 1976년 문학진 화백이 그린 원화(서울 혜화동성당 소장)를 바탕으로 했다. 빛으로 장엄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림과는 또 다른 성스러움이 발산된다. 제대 뒤 감실 앞 양쪽에도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성광이 좌우에 안치되어 있어 유해 안치의 숫자를 더하고 있다. 미리내 성지가 김대건 신부의 묘소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왼쪽 벽면에는 한국화로 그린 순교성인화가 그려져 있고 오른편 벽면에는 독특한 모자이크 십자가의 길 14처가 모아져 있다.
▲갈매못 순교자 오성(五聖)인 성 오메트르 베드로, 성 위앵 루까, 성 다불뤼 안토니오(뒷줄), 성 황석두 루까, 성 장주기 요셉(앞줄)
▲ 기해박해 때 순교한 좌로부터 성녀 권희 바르바라, 성녀 이 아가다, 성 이광렬 요한,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갈매못 순교자 오성 성녀 권성희, 성녀 이 아가다 등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성 정하상 바오로(가운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우), 성 조신철 까를로(좌)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녀 이 바르바라, 성녀 이매임 데레사,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뒷줄),
성녀 이계임 막달레나,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앞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성녀 이바르바라, 성녀 이매임등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형구와 순교 참상의 모형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날의 교난을 순례인들에게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성녀 골롬바 김효임의 수형 - 26세의 동정녀로 1939년 9월 26일 서소문밖에서 참수당하던 때의 모습이다.
▲박해시대의 사제 복장 - 사제, 특히 외국인 사제는 말을 하지 않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상주의 모습으로 다녔다.
▲주리(가위주리) - 두 개의 나무막대기를 정강이 사이에 끼워 양끝을 반대로 튼다.
▲군문효수 - 벤 목을 군문에 매달았다.
▲사형장으로 가는 모습 - 사형직전 군중에게 죄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죄수는 얼굴에 회칠을 하고 두 귀에 화살이 꽂혔다.
▲팔주리 - 팔울 뒤로 묶은 다음 나무를 팔 사이에 끼운 후 반대로 돌려 튼다
▲성 유대철 베드로의 수형 - 13세의 어린 나이로 14차례의 형벌과 100여 대의 태장, 40도의 치도곤을 맞았다. 그래도 배교하지 않자 형리는 그를 교살했다.
▲학춤 - 양팔을 뒤로 엇갈리게 묶어 매달고 양쪽에서 때리는 형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수형 - 1939년 9월 21일 순교하시는 모습으로 기둥에 걸린 죄목은 전사분토(傳邪敃土). 전사분토란 요사스러운 것을 전파하고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뜻이다.
밖에 나오자 건물 뒤쪽으로 십자가의 길은 다시 이어진다. 성모당 뒤를 지나 계속 오르면 성지 맨 꼭대기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이른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김 대건 안드레아 묘)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 교구에서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하자 초대 주임 강도영 신부는 불과 몇 시간 계시다가 치명한 새남터보다는 긴 세월 묻히고 살이 썩어 진토가 된 미리내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성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와 척추뼈 등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성당 앞마당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선종할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최문식 신부는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냈다.
성당 밖 왼편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성당 안은 교우석보다 한 단 높은 마루에 정면 벽의 십자고상을 향한 옛날식 제대가 있고 그 옆에 십자가를 높이 든 성 김대건 신부상이 서 있다. 창문은 전통 문살 유리창으로 아치모양을 하고 있다.
제대 감실에는 가운데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와 널의 목재 일부, 그리고 좌우에는 유해 일부인데 오른편은 척추뼈의 일부라고 안내되어 있다.
성당 바로 옆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김대건 신부를 미리내에 모신 이 빈첸시오의 묘가 있다.
성당 참배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길옆에는 팔을 벌리신 예수성심상과 제대가 있고, 성 김대건 길 안내판과 초입구가 있다. 그리고 맨 안쪽에 김대건 상이 높이 서 있다.
내려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성모당이다.
성모당
미리내 성지의 성모당은 성모님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신심을 기억하고자 지어졌으며, 김대건 신부의 성모신심을 반영하여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성상을 2011년 8월에 모셨다. 그리고 좌우 벽에는 성경에 기록된 성모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성모칠락)을 벽화에 담았다.
김대건 신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졌으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성모마리아의 상본을 보이며 선원들을 격려하였다.
성모당 내부는 제단 위 중심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는 양떼와 천사 그림이 지붕 모양처럼 날개처럼 벌려져 있다. 제단 위 성모상 좌우 감실에는 성 김대건 신부상과 성 이윤일 요한 회장상이 있다. 그리고 성모당 벽면에는 성모칠락(聖母七樂) 모자이크 화가 그려져 있다.
성모칠락
미리내 순례는 이 정도로 마친다. 참 대단한 공력으로 성지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성지 관리가 교구로 이첩될 때까지 이 성지를 개발하여 조성해온 천주 성삼수도회와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정행만 신부님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다. 수도회 본원은 떠났지만 아직도 수도회 일부가 남아 성지를 관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후 6시라 오늘 순례는 이것으로 마치고 내일을 위해 이천시내에 가서 숙박하고 내일 일정을 시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