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5. 중국불교 제일 성지 오대산 ②
문수신앙의 고향…생동하는 중국불교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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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대산의 구도자 > |
사진설명: 2002년 10월11일 ‘문수신앙의 원천’인 오대산 중대로 올라가다 만난 구도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수행자의 모습에서 중국불교가 생동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
2002년 10월11일 아침, 오대산 은도산장 1209호. 뜨거운 차를 마시며 ‘자장율사와 오대산 고사’를 떠올렸다. 〈삼국유사〉 권제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636년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문수보살 석상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기도를 드렸다.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네 구절의 게를 주었다. 꿈을 깨서도 글귀는 기억했으나, 범어(梵語)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문득 한 노승이 나타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자장율사 곁에 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근심하시오.” “꿈에 받은 네 구절의 범어 게송(偈頌)을 해석할 수 없어 그러합니다.”
노승이 설명했다. “‘가라파좌낭’은 ‘일체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는 ‘자성(自性)은 무소유’란 말이요, ‘낭가사가낭’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알았다’는 말이요, ‘달예로사나’는 ‘노사나불을 곧 본다’는 뜻이외다.”
말을 마친 노승은 가져온 가사 등을 자장율사에게 주었다. 그리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溟州) 지경에 오대산이 있고, 일만(一萬)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순식간에 노승은 사라졌다. 바야흐로 고국 신라로 돌아오려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 지내주기를 청했다.
재가 끝나던 날 용이 다시 나와 “전날 게송을 전수한 노승이 바로 문수보살”이라며, 절을 창건하고 탑 세우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643년 귀국한 자장율사는 명주 오대산에 이르러 초막(후일의 월정사)을 짓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원령사(元寧寺. 자장율사가 태어난 집에 세웠던 사찰)에 머물렀다. 이에 문수보살을 뵈니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
‘대산오만진신’조에 나오는 ‘중국 오대산과 자장율사’의 일화는 여기서 끝나고 범일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침을 먹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해발 2936m의 중대(中臺) 금수봉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무척 쌀쌀했다. 차안에 히터를 틀고 있었는데도 추위가 느껴졌다. 쌩쌩 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몸이 오싹거렸다. 중대까지는 차가 올라 갈 수 있다고 안내인 오승화씨가 설명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인 오대산 허리와 능선을 타고 차는 중대로 나아갔다. 1시간 정도 달려가니 풀에 덮인 오래된 전탑 한 기(基)가 나타났다. 태화지의 용이 자장율사에게 “절을 창건하고 탑을 세우라”고 부탁했다는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中臺 올라가다 萬行하는 구도자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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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오대산 중대로 올라가다 만난 오래된 탑. 풀에 뒤덮혀 있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다. |
탑은 오대산의 깊은 역사를 말해주듯, 아니 온 몸으로 보여주듯, 전신(全身)이 풀에 쌓여있었다. 차에서 내려 탑에 예를 표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산 능선의 추운 곳에 서있는 탑! 그 앞에 서니 수많은 영감이 머리 속에서 구름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오대산을 지켜온 구도자, 오대산과 명운(命運)을 함께 할 신심 깊은 수행자, 진리를 위해 자신을 버린 출가자…” 등등.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겠는가. 때때로 바람과 비, 눈(雪)과 구름이 지나갔겠지만, 그들은 잠시 지나가는 손님일 뿐, 탑은 미동(微動)도 않고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거리며 귓전을 때리고 온 몸을 휘감아 왔지만, 탑 앞을 쉬이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전탑의 맨 위층은 이미 상당히 파손된 상태였다. 비와 바람과 세월이 탑 상층부에 풀을 자라게 했고, 자란 풀은 서서히 탑을 균열시켰으리라.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는 어느 날 탑신(塔身)의 윗부분이 무너졌을 것이다. 추측에 신빙성을 보태듯, 탑 주변엔 벽돌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탑은 굳건했다. 보는 이를 감탄에 빠뜨릴 만큼 당당한 모습이었다.
탑 앞에 서서 감상에 빠져있는데, 마침 한 중국인 스님이 저 멀리 오고 있었다. 중국 스님들이 입는 노란색 장삼을 입은 젊은 스님이었다. 어깨엔 바랑을 짊어지고, 사색에 잠긴 표정이었다. 탑 가까이 오자 합장하고 탑에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예배인데, 오대산에서 그것도 훼손된 탑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니 새삼 새로웠다. 안내인에게 부탁해 “가는 곳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목적지까지 걸어가겠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차를 타고 중대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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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오대산 중대에 있는 대웅전(사진 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주존인 문수동자. |
은도호텔을 떠난지 1시간 30분 만에 중대에 도착했다. 대웅전은 마침 불사(佛事)중이었다. 문수보살을 모신 전각에 들어가 깊은 예를 올렸다.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에 와, 오대산의 주인인 문수보살에게 인사를 드리니 감회가 남달랐다.
노인으로 변신한 문수보살이 아니고, 조각한 문수보살이지만, 마치 어떤 게송을 줄 것처럼 보였다. 문수보살상(像)의 초롱초롱한 눈매, 무엇인가 암시하는 듯한 수인(手印) 등을 보며 의미를 찾으려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신심이 부족해 그런지 아무런 뜻도 알아낼 수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문수보살은 문수사리(文殊師利).만수시리(滿殊尸利).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 음역된다. 문수와 만수는 ‘묘(妙)’, 사리.실리는 ‘두(頭).덕(德).길상(吉祥)’ 등의 뜻. 따라서 문수사리는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말.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인도에 태어나 ‘반야(지혜)’의 도리를 선양했기에, 항상 반야지혜의 권화(權化)처럼 표현된다.
〈반야경〉을 결집하고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진 문수보살은 이로 인해 ‘사자를 탄 채 경권(經卷)을 손에 쥔 자세’로 많이 조각된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 ‘코끼리 타고 있는’ 보현보살과 함께 주요한 등장인물이다. 보현보살이 원력을 실천하는 구도자로 상징된다면, 문수보살은 중생들의 지혜의 좌표로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바로 ‘무명(無名)을 타파한 지혜’로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돕는 보살인 것이다. 문수보살은 중국 오대산과 우리나라 강원도 오대산에 상주하는 보살인데, 특히 평창 오대산 상원사는 문수동자를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중대의 차가운 바람을 뒤로한 채 내려왔다. 금각사(金閣寺)에 들렀다.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신라 혜초스님(700~780)의 스승인 불공삼장(705~774)이 창건한 사찰이 바로 오대산 금각사. 그러나 지금의 금각사는 새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현 금각사가 옛날의 금각사 자리에 복원될 것인지도 정확하게 모른다. 금각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께 물어봐도 신통한 답을 주지 않았다. 어찌됐던 불공삼장이 오대산에 금각사(金閣寺)를 세웠고, 첫 제자인 함광스님은 여기서 수행했다.
대라정에서 바라본 오대산은 감동 자체
지금의 금각사도 멋지지만, 옛날의 금각사도 훌륭한 사찰이었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중국을 순례한 일본 엔닌(圓仁)스님(794~864)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사찰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금각(金閣)을 열고 대성(大聖)인 문수보살께 참배했다. 보살은 푸른 털의 사자를 타고 있었는데, 얼굴은 금빛이며 단정하고 근엄하기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중략)…. 2층으로 올라가 〈금강정유가〉의 다섯 불상에 예배했다. 이는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중국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인도 나란다사의 모양을 본 뜬 것이다.”
금각사 이곳저곳을 보고, 웅장한 천수천안이 관음전에 모셔진 용천사(龍泉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천사엔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보제선사의 육신탑이 훌륭하게 복원돼 있었다. 오대산 대회진에 들러 점심을 해결한 뒤 현통사로 갔다. 현통사엔 선당(禪堂. 우리나라 선방 같은 곳)이 유명한데, 때마침 70여 명의 중국 스님들이 참선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입승인 듯한 스님이 “저리 가라”며 손사레를 쳤다. “중국불교는 죽었고, 사찰은 관광 상품으로 변했다”는 지적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을 오대산 현통사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현통사를 참배하고 옆에 있는 탑원사로 건너갔다. 거대한 백탑이 유명한 탑원사는 모택동.주은래.주덕 등 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주역들이 국민당과 싸울 때 머물렀던 사찰. 그들이 잤던 방은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한 클린턴 전(前)미국대통령은 모택동 주석이 잤던 방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혁명시절 모택동 주석의 심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탑원사 옆에 있는 수상사(殊像寺)를 둘러보고 대라정(大螺頂)에 올랐다.
대라정에 서니 오대산 대회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이 아니다. 중대 동대 서대 북대 남대에 모셔진 문수보살과 똑같은 다섯 분의 문수보살도 봉안돼 있었다. “대라정에 오르면 오대를 참배한 것과 똑같다”고 안내인이 강조했다. 대라정에서 바라본 오대산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오대산이 중국불교 제일의 성지로 군림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이해됐다. 오대산엔 과연 불교가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물론 중국 오대산만 제일의 성지는 아니고, 평창 오대산 역시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천하제일의 성지임이 분명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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