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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방랑 빅토르 위고(1802~1885)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5년 7월 28일 정오. 쿨로미에 사랑하는 아델, 난 지금 쿨로미에에 와 있소. 브레는 몹시 불결한 작은 도시였소. 난 밤중에 잠이 깨어 묵고 있던 숙소의 벽에다 이 사행시를 썼다오. “썩 꺼져버려라! 불결한 여인숙이여! 빈대들의 집이여! 아침마다 온몸을 뒤덮은 붉은 반점들. 악취 나는 주방, 불편한 잠자리. 어중이떠중이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까지 들리는구나!“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5년 8월 1일 정오 라 페르 사랑하는 아델, 이틀 후면 난 아브빌에서 당신 소식을 듣게 될 거요. 그 생각을 하니 기쁘기 그지없구려. 당신이 정말 즐겁게 지내고 있길 바라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훌륭한 친구들이 멋진 사람들이라는 걸아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소. 난 지금 그 어느 때, 그 어떤 곳보다도 더 형편없는 여인숙을 떠돌고 있다오. 사실 아주 힘든 여행을 하고 있소. 무작정 걷다보면 이따금 길 끝에 다다르기도 하고 어쩌다 마차들과 마주치기도 한다오. 하지만 가는 도중에 감탄을 자아내는 광경들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라오. 샤토티에리를 보았고, 또 라퐁텐의 집도 보았는데 이 집은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소. 거기 살고 있는 트리베리 씨라는 노인이 직접 집을 안내하며 나를 맞아주었다오. 수아송에서는 포병대 사령관 드 보노 씨 가족과 함께 성 요한 성당의 아름다운 유적들을 보러 갔었오. 모두들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오. 수아송으로부터 약 팔 킬로미터 정도 가다 보면,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매력적인 계곡이 나오는데, 거기엔 아주 훌륭한 15세기의 작은 성체가 하나 있다오. 셉트몽이라 불리는 이 성은 아직도 충분히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해 보였소. 난 드 보노 씨에게 부탁을 해놓았지. 만약 이 다음에 누군가 이 성을 수만 프랑 정도에 팔겠다면 꼭 내게 알려달라고 말이오. 사랑하는 아델,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에게 이 성을 사주리다. 여기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수아송의 주교들이 머물던 오래된 별장이라오. (.....) 쿠시에서 라옹으로 가는 길에는 드쿠돌이라는 사기꾼 같은 자가 나무들 속에 가려진 고딕식 세계탑으로 여행자들을 유혹한다오. 이 때문에 난 이걸 보여주었던 느쿠틀의 하인에게 어쩔 수 없이 삼십 수(프랑스어의 옛 화폐단위)를 줄 수밖에 없었다오. 정말이지, 귀신은 이런 녀석을 안 잡아가고 뭐 하는지 모르겠소!(......)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5년 8월 10일 아침 여덟시. 몽빌리에 디에프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였소. 다만 물살에 닿는 모든 것을 시처럼 아름답게 만드는 바다만은 정말 멋있었소. 디에프를 거쳐 작고 평범한 항구인 생 발레리앙 코에 들렸다오. 그러나 페캉은 달랐소. 아주 매력적인 도시였다오. 아름답기 그지없는 성당은 엄격한 고딕 양식을 따른 탓에 거의 로마네스크 분위기였고, 성당 안의 잘 다듬어진 보석 같은 작은 예배 실들에는 모두 너무나도 아름다운 15세기의 무덤들이 안치되어 있었소. 대부분의 건물마다 몇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고. 교회 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주랑의 잔해들은 세상에서 가장 감탄할 만한 것들이었소. 이곳에는(무덤가의 마리아)라는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 있는데, 라파엘로의 작품에서처럼 아름다운 조각들이 마리아를 경배한다오. 또한 이곳엔 앵그르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책을 든 남자>와 너무나도 똑같은 채색 조각이 한 점 있었는데 어찌나 닮았는지 판으로 찍어낸 것 같았다오. 어제는 페캉에서부터 차를 발견하지 못해 십육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에트르타까지, 그리고 에트르타에서 또다시 십육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까지 걸어와야만 했다오. 하지만 아주 멋진 하루였소. 저녁 열한시에 몽빌리에에 도착했소. 여인숙 문을 두드리자 부주 양이라는 아리따운 여주인이 문을 열어 주었소. 그녀는 아주 상냥하게 근사한 마호가니 가구들이 갖추어진 자신의 방을 내게 내주고는 푸른색 종이도 가져다주었소. 사랑하는 아텔, 난 지금 그 종이 위에다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오. 에트르타의 경관은 너무나 훌륭했다오. 절벽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커다란 천연의 아치를 만들어놓았고 그 아래로 파도가 몰려와 철썩거리고 있었소. 파도가 좀 잠잠해지기를 기다린 후 난 해초들과 물웅덩이를 지나 미끈거리는 바닷말과 굵은 자갈길을-이 자갈들은 파도에 쓸려 빗겨진 초록색 머리칼 같은 바다풀들로 뒤덮여 있었소― 가로 질러 내가 그렸던 커다란 아치가 있는 곳까지 가보았소. 거기에는 좌우로 어두컴컴한 입구가 나 있었고 수직으로 솟은 거대한 절벽과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아치가 있었소. 하나를 가로질러 가야 두 번째 것이 보이는데, 사방에 펼쳐진 태양이 거칠게 빚어놓은 굵은 기둥머리 같았소. 거대한 건축물이었다오. 불랑제에게 피라네츠의 절벽은 에트르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시오. 멀리 수평선 너머로 배 한척이 떠 있었는데, 돌처럼 차가운 회색 돛들이 마치 바다 위에 나폴레옹의 거대한 형상을 그려놓은 듯 했다오. 모든 것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소. 참, 한 가지 잊고 말하지 않은 게 있구려. 페캉에서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보름달을 보았는데,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소. 바다엔 노르웨이 배 한 척이 탄식처럼 서글픈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흘리며 항구를 막 떠나고 있는 중이었다오. 내 뒤로는 두 언덕 사이로 보이는 도시와 종탑, 앞으로는 드넓은 하늘과 밝은 달빛 아래 사라지다 섞이다를 반복하는 바다, 오른쪽으로는 변함없이 빛을 비추는 등대, 왼쪽으로는 허물어진 절벽이 만들어낸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소. 난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방파제의 비계 위에 서 있었다오.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6년 6월 26일 생 말로 생 말로에 도착하면서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모르겠소. 난 바다를 향해 달렸소. 그리고는 무작정 바위들 속으로 뛰어들었다오. 이 바위들은 방파제를 둘러싼 채 썰물 때가 되면 수많은 화강암 욕조로 변한다오. 바다에 들어가기도 전에 파도가 몰려와 악마같이 뾰족한 바위 위에 나를 내팽개치는 바람에 몇 번이나 나자빠지곤 했소.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마냥 뛰어다녔다오. 아무래도 상관없소. 바다 거품으로 모습을 감추었던 사람들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모습도 순간순간 멋진 광경일 거요. 모두 함께 나흘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십 리를 걸었소.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라 몰골이 말이 아니오. 게다가 난 씻을 물이 정말 필요했다오. 브르타뉴에 머문 이래로 쓰레기 속에서 지낸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브르타뉴를 다 씻어내려면 이 바다 전체가 필요할 것 같소. 아마도 이 거대한 양동이만이 이곳의 엄청난 오물을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거요.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9월 4일 다섯 시 베르네 언덕 위에서 보면 거대한 광경이 펼쳐진다오. 저 멀리 아득히 서로 겹쳐 꿰매어지듯 이어지는 여러 겹의 들판과 초원들, 커다란 다갈색 평원과 초록색 평원들, 종탑들, 작은 마을들, 수없이 다른 모양의 음침하고 거대한 사다리꼴을 보여주는 숲, 그리고 서쪽으로 밑바닥에 마치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바다가 가득 메워버린 언덕들 사이의 틈. 1844년의 여행일지 10월 2일 느무르는 산속에 있진 않지만 작은 언덕과 골짜기들이 있고, 평원에 있진 않지만 도시의 윤곽은 평탄하고 지평선은 고요하다. 또한 결코 숲속에 있지도 않지만 나무들이 있고, 해안가나 호숫가와도 거리가 멀지만 물이 있다. 또한 익소에는 하이델베르크나 탕카르빌과 같은 궁은 없지만 사각 탑과 네 개의 소첨탑이 나란히 붙은 13세기의 오래된 요새가 있다. 이 요새는 오늘날 농부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닭들은 성벽 주위의 외호에서 놀고, 비둘기들은 돌출회랑 안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병사가 농부가 되었듯 큰 탑은 비둘기집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은 누그러지고 완화되는 법이다. 느무르에는 아미앵이나 샤르트르와 같은 대성당은 없다. 그러나 이곳의 교회는 모든 점을 고려해볼 때, 그 나름대로 독특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지방 성당들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거의 대성당들만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느무르에는 뉘른베르크, 루앙, 비트레, 혹은 에르나다처럼 장식된 집들이 즐비한 오래된 거리도 없고, 프랑크푸르트나 브뤼셀처럼 고딕 양식의 진열창들이 나 있는 감탄할 만한 광장도 없다 광장과 집들은 비록 보기에는 좀 흉하고 각종 도료들이 칠해져 있긴 해도 중세 시대의 배치와 크기와 불규칙함과 재치를 간직하고 있다. 느무르를 지나는 루엔 강은 잠든 연못과 생동하는 강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 강엔 송어들이 우글거리고 등심초가 자라며 강가엔 물살이 반짝거린다. 그 어느 배도 다가와 이 물고기들을 잡거나 갈대들을 베거나 이 거울을 깨트리려고 하지 않는다. 느무르에는 퐁텐블로와 같은 암벽, 몽모랑시와 같은 목음, 몽포르라마리와 같은 유적지, 생 드니와 같은 첨탑, 쇼풍텐과 같은 방아들, 루비에와 같은 무두질 공장이 있고, 생 고아르와 같이 하천가에 집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것들이 이곳에 와서 다시 합쳐진 것처럼.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수수하고 온화하고 오래되어 보기에 좋은 것들일 뿐이다. 이 중 어떤 것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탁월하다거나 숭고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욕심과 야망의 시대. 근심거리로 가득 찬 분주한 일상 속에서 느무르는 그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곳은 지나치게 온화하고 고요하며, 너무나도 외지고 고독한 곳이다. 따라서 느무르에는 젊고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와서 마음속에 지극한 기쁨을 안고 나비와 꽃들로 가득한 이 아름다운 잔디 위를 달리거나, 혹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와서 고인 물로 둘러싸인 이 초라한 집 문턱에 앉아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겨야 한다. 느무르는 봄날 햇빛 같은 생기와 마지막 날의 평화로움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곳이 우리가 생을 시작하거나 마감하기 위해 꿈꾸는 장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예전에는 풍텐블로 숲이 느무르에까지 닿아 있었다. 이곳의 어원은 메무르스Nemurs, 즉 숲의 구역Nemoris vicus이다. 오늘날 느무르는 이 숲을 지나 그 너머에 있다. 그러나 매혹적인 풍경만은 계속해서 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들을 베어버렸지만 초목까지 죽일 순 없었던 것이다. 13세기에 시작해서 16세기에 완공된 이곳 성당은 놀라운 규모를 자랑한다. 거대한 박공에 기댄 첨탑이 채광창 달린 포치 위에 솟아 있고, 그 뒤로 대강 윤곽을 잡은 가로 회랑과 더불어 커다란 중앙 홀이 아주 낮고 많은 소 예배 실들로 둘러싸인 채 길게 펼쳐져 있다. 이 예배 실들은 밖에서 보면 소첨탑과 뾰족한 지붕들을 가진 작은 성채들을 이루고, 넓은 간격의 견고한 반아처럼 부벽들이 이 성채들과 중앙 홀을 튼튼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대담하고 간결하며 그러면서도 엄격한 하나의 훌륭한 형체를 이룬다. 색체 또한 형태 못지않게 아름답다. 성벽의 돌들과 첨탑의 점판암에서는 오랜 세월 깎이고 마모 되어 형성된 조화로움이 느껴진다. 금속판으로 된 거대한 시계 문자반은 종탑의 검은 도기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내부는 벗겨져서 다시 덧칠이 되었는데, 여기엔 매우 가치 있는 몇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후미 쪽의 끝이 뾰족한 홍예들은 15세기의 아름답고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다시 살펴보니 이 성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목가적이진 않은 것 같다. 성의 각 공간을 여러 농부들에게 세 주고 여기서 나오는 돈으로 간신히 운영하는 모습이 도시와 다름없어 보인다. 게다가 지하실은 감옥으로, 일층은 댄스홀로, 이층은 극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닭이나 비둘기들이 드나들고 둥지를 트는 것까지 막진 못했다. 이 가련한 짐승들은 밑에서 마구 울어대고, 중이층에선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며, 비들기집 옆에선 브드빌이 공연되는 등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기에다 지붕은 양털 건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실리에 눈이 먼 시의회의 이 어리석은 짓거리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조금도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도대체 누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이 고대의 성을 알록달록한 무늬의 정체 모를 건물로 바꾸어버렸단 말인가? 빅토르 위고가 알프레드 드 비니에게 1825년 4월 28일 나는 지금 새로운 출발을 기다리며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도시들 중 가장 매력적인 한 도시에 와 있네. 비록 거리와 집들은 시커멓고 보기에 추하지만 아름다운 루아르 강변으로 눈을 돌리면 이 모든 것들은 금방 잊혀진다네. 강 한쪽으로는 계단식 정원들과 유적지들이 있고, 또 다른 쪽으로는 초목으로 덮인 평원이 펼쳐지거든, 게다가 이곳은 내게 걸음걸음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지. 내 아버지의 집은 매우 큰 하얀 돌들로 지어졌네. 장자크 루소가 꿈꾸었던 것과 같은 초록색 겉창들이 나 있고. 이 집은 평범한 나무와 생니콜라 성당의 종탑들 사이의 작은 언덕 아래, 아주 근사한 두 정원 사이에 있네. 이 종탑들 중 하나는 완성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너져버렸지. 사람들이 마무리하기도 전에 시간이 먼저 무너뜨린 셈이지. 여행일지 1843년 7월 20일 보르도 파괴를 즐기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고 나쁜 건 없을 것이다. 자기 집을 파괴하는 자는 자기 가족을 파괴하는 자와 같고, 자기 도시를 파괴 하는 자는 자기 조국을 파괴하는 자와 같으며, 자신의 주거를 파괴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자와 같다. 이 낡은 석조 건물 속에는 옛 영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행일지 1843년 7월 27일 보르도 (.....)보르도에서 생 미셸 성당을 방문 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방금 이 성당에서 나왔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특히 현관이 매우 훌륭했다. 또한 이곳에는 루이 12세 시절의 훌륭한 석고상 제작자들이 조각한, 아니 장식했다고 할 만큼 뛰어난 성모 마리아 예배실이 있었다. 교회 옆에 있는 종탑을 바라보니 탑 위로 전신기가 솟아 있었다. 이것은 한때 구십 미터 높이의 멋진 첨탑이었지만 지금은 매우 기이하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1768년 벼락이 이 첨탑에 떨어져 화재가 났었고, 그때 교회의 골조도 함께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거대한 탑에 문제 - 방어 상의 문제와 교회와 관련도니 문제 - 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첨탑은 성의 주루처럼 투박하면서도 마치 종탑처럼 장식이 되어 있다. 일단 위쪽의 뚫린 공간에는 바람막이가 없고, 종들도 종소리도 울림도 없으며, 종을 치는 망치도 큰 시계도 없다. 이 탑은 아직도 여덟 개의 벽면과 여덟 개의 박공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많이 낡았고 꼭대기 부분은 마치 목이 잘려 죽은 사람처럼 일부가 잘려 나간 흔적이 보인다. 창문도 없고 창살대도 없는 긴 첨두아치들 사이로 빛과 바람이 커다란 해골을 가로지르듯 통과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종탑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단지 종탑의 뼈대일 뿐이다. 나는 몇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뜰에 혼자 남아 있었다. 이 뜰은 오래된 묘지로, 여기에는 따로 떨어진 종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햇빛 때문에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난 이 적막하고 멋진 누각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 건축물 안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 겉으로 드러난 상처들 속에서 아픈 과거를 읽어내려고 애썼다. 알다시피 난 사람을 대하듯 건축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든 건축물이든,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그것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 스페인으로의 입성 바욘에서 생 세바스티앙까지 아침이다.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매혹적인 길, 오른쪽은 비아리츠다. 고원 위의 짧은 길, 수평선이 펼쳐진 바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소금기가 느껴지는 초록색 늪도 가까워진다. 벌거벗은 한 아이가 거기서 암소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멋진 경관, 푸른 하는, 푸른 바다와 눈부신 태양, 언덕 위에서 당나귀 한 마리가 목탄을 낭비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글께나 한다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여행일지 1843년 8월 피사주 (…….) 눈부신 하늘 위로 윤곽을 뚜렷이 드러낸 초록빛 산봉우리들, 산기슭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 흰색, 사프란색, 초록색으로 칠한 커다란 발코니가 달린 이층 삼층집들, 적갈색 기와지붕을 길게 늘려 바람을 막도록 한 커다란 발코니, 이 발코니에 나부끼는 온갖 것들 - 말리려고 널어놓은 속옷, 그물망, 붉고 노랗고 파란 남루한 옷가지들 - 이 집들 아래로 펼쳐진 바다. 내 오른쪽의 산 중턱에는 하양 성당이 자리 잡았고, 왼쪽은 다른 산기슭의 발코니 달린 집들이 무너진 탑까지 늘어서 있다. 이 집들 앞에는 각종 형태의 배들과 여러 가지 크기의 보트들이 탑 아래 바다 위에 가지런히 작은 만안에 정박된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이 배들과 탑 위로, 하늘 아래에 삶이 있고 변화가 있고, 태양과 창공과 공기가 있고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바로 내 눈앞에 이 모든 것이 펼쳐져 있었다. 기쁨과 위대함이라는 이중의 특성을 지닌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 근사하고 매력적인 장소는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곳들 중 하나다. 하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방문객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구상의 조그마한 한 모퉁이로, 만약 스위스에 있었더라면 탄성을 자아냈을 것이고, 이탈리아에 있었더라면 당장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아디인지도 모른 채 너무나도 우연히 도착했던 이 작은 환희의 에덴동산은 기푸스코아에 있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페인어로는 ‘Pasages', 프랑스어로는 ’Passage'라고 한다. 썰물 때가 되면 이 작은 만은 반 정도 마른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고는 그 자체로 세상과 담을 쌓은 생 세바스티앙과 이 만을 떼어 놓는다. 그러나 밀물은 ‘이 길’을 다시 복원시켜놓으며, 이 때문에 파사주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파사주만은 사방이 엄폐되어 있고 바람을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항구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나폴레옹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 방면에 뛰어난 기술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공사 도면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16세기 카라카스 사 - 이후 필리핀의 한 회사에 통합된다 ― 는 파사주에 자신의 창고와 상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인들 또한 몇 차례에 걸쳐 파사주를 점령한 적이 있었다. 아주 최근까지도.(.....) 지금 파사주 항은, 몇몇 배들과 어부들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 거의 버려진 상태로 텅 비었다. 이 항구에는 이제 더 이상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다. 협곡 입구에서 산 중턱에 암벽 위에 설치된 작은 성을 제외하고는 군사적인 방어 장치는 없다.(....) 사실 파사주는 거의 스스로 자신을 방어했을 것이다. 자연이 이곳을 탄복할 만큼 훌륭한 천연의 요새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항구의 입구는 낮선 이들이 접근하기에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 이곳의 광장은 특히 눈부시다. 사실 파사주에는 광장이 여기 하나밖에 없으며, 스페인의 다른 모든 광장들처럼 ‘헌법 광장’이라고 불린다.(....) 이 광장은 바다를 향해 열린 길을 넓혀 연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파사주는 (…….) 두 부분으로 나뉜다. 신 파사주와 구 파사주, 신 파사주는 삼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내가 지금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요전 날 아침 나는 바다를 지나 구 파사주에 가보고 싶었다. 이곳은 남쪽의 바하라흐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 구 파사주 거리는 진짜 아랍의 어느 거리처럼 보였다. 이 거리엔 몇 개의 구멍만 겨우 뚫린 하얗고 육중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만약 지붕만 없었더라면 여기가 테투안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송악으로 덮인 이 거리의 바닥엔 포석이 깔려 있는데 커다랗고 얇은 조각들이 뱀의 등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여행일지 1843년 8월 8일 파사주 바닷가에 앉아 살며시 잠이 들면 모든 것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다. 파도 위의 바람소리. 모래 위의 파도소리. 어느새 꿈속에선 멀리 선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여행일지 1843년 8월 11일 팡플륀 난 지금 팡플륀에 와 있다. 여기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전에 이 도시를 결코 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도시의 거리와 집과 문 하나하나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스페인에서 보았던 것들이 이곳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삼십년이라는 세월이 내 인생에서 한순간에 흘러갔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난 다시 어린아이로, 작은 프랑스 꼬마로 되돌아간 것이다. 누군가 날 ‘야, 프랑스 꼬마!’ 라고 불렀을 때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깨어나 기억 속에서 활기차게 북적거렸다. 거의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전보다 더 생생하게 다시 살아날 줄이야! 이곳은 진짜 스페인이다. 아케이드가 있는 광장들, 조약돌로 모자이크된 도로들, 차양이 처진 발코니와 주름 장식이 달린 색칠된 집들. 모두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도다. 여행일지 1843년 8월 12일 팡플륀 주변의 모든 산들은 민둥산이며 평원은 풀이 말라붙어 황량하기만 했다. 조그만 하천인 아르가 강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몇 그루의 포플러가 자라고, 평원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기복들은 푸생의 그림에 나오는 건축물들로 덮여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평원이 아니라 웅장한 경관이었다. 순전히 벽돌로만 지은 멋진 사각 탑은 곧게 솟아 나무들이 심긴 산책로를 굽어보고 있다. 르네상스 풍에 국화꽃 문양과 부드러운 곡선이 첨가된 이 카스틸라식의 로코코 양식에서는 뭔지 모를 고상함과 파격의 미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 웅장한 탑은 하나의 암벽이다. 그런데 이 탑을 포함하던 오래된 성당은 사라져버렸다. 누가 그것을 파괴했을까? 팔플륀이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전투들 중 어느 전투에서 불이 나 타버린 건 아니었을까? 박토르 위고가 레오포르딘에게 8월 25일 생 장 드 루즈 사랑하는 디딘, 사랑하는 내 딸 디딘, 이 산에서 보냈던 하루를 네 엄마에게 편지로 써 보냈단다. 이 편지 뒷면에 조그만 그림을 그려 보낸다. 이걸 보면 이 아빠가 매일 무엇을 보며 지내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사랑하는 디딘. 이 아름다운 것들을 너와 함께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일 텐데. 네가 이 그림을 보고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는데, 산 밑에 폐허처럼 보이는 건 유적이 아니라 그냥 바위란다. 피레네 산맥은 이처럼 무너진 건축물처럼 보이는 이상한 암석 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단다. 사실은 피레네 산맥 자체가 거대한 무너진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지. 산봉우리들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흰 삼각형은 다름 아닌 바로 눈이란다. 피레네 산맥에서도 특히 비뉴말 같은 곳에는 눈이 마치 넓은 대양처럼 펼쳐져 있거든. 나는 온천탕에서 눈眼 치료를 하고 있단다. 하지만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질 않는구나. 사실 내가 일을 많이 하긴 했지. 쉴 새 없이 일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거야. 그러나 그게 바로 내 삶이란다. 나에게 일한다는 건 우리 가족을 돌보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제는 두 명의 샤를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구나. 얼마 있으면 이 아빠 역시 널 기쁘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길 바란다. 사랑하는 디딘. 행복해야 한다. 넌 한창 그럴 나이잖니? 네 엄마한테 르페브르 부인과 레뇨 씨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보다. 샤를과 네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구나. 이제부터는 라 로셸로 편지를 해주렴. 우체국 유치우편으로 말이야. 네 엄마에게도 앞으로는 주소를 라 로셸로 해야 한다고 일러주렴.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좀 건성건성이잖니? 스페인의 추억 [동방시집] 스페인의 이 모든 도시는 벌판이나 산맥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모든 도시는 성체를 갖고 있지만 부정 탄 손들 때문에 어떤 종도 울리지 않았다. 이 도시들의 성당 위엔 나선형 종탑이 솟아 있다……. 여행일지 1843년 새벽 네 시, 마차 안, 안개가 자욱하다. 드넓은 평원에 햇빛이 눈부시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들이 오른쪽에 포 강의 급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정오 무렵 피레네 산맥은 마치 하늘의 푸른색 드레스가 군데군데 헤져 희 씨실만을 남긴 것처럼, 멀리 지평선에 몇 개의 흰 줄무늬로만 구분될 뿐이다.(....) 포와 성. 우리는 이 성에서 조잡하게 복원해놓았지만 근사한 가구들이 갖추어진 서너 개의 방만을 보았을 뿐이다.(....) 즐겁고 명랑하고 깨끗한 도시 포. 그러나 다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탓에 이 도시의 역사적인 멋스러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옛날의 외호가 만들어놓은 긴 구덩이만이 유일하게 앙투안 드 부르봉이 살았던 시절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점판암으로 된 오래된 집들은, 모든 층에 걸쳐 15세기 가옥 석공 술의 기묘한 기법을 보여주듯 울퉁불퉁한 면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불규칙하게 분할되어 있다.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8월 18일 브뤼셸 아델, 난 아직 브뤼셸에 있소. 마차를 기다리면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오. 아마도 루뱅이나 말린에 가서야 마치게 될 것 같소.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생각으로나마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게 내겐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오. 언젠가 당신에게 몽스에 관해 말해주기로 약속했었지. 실제로 이곳은 정말 흥미로운 도시였소. 몽스에는 고딕식 종탑이 없다오. 왜냐하면 참사회급 교회인 생트 워드루에는 평범한 편마암으로 된 소첨탑밖에 없기 때문이오. 반대로 북유럽과 남유럽, 즉 플랑드르와 스페인의 영향으로 장식이 많고 기묘한 취향을 보여주는 세 개의 종루가 이 도시의 실루엣을 꽉 채우고 있다오. 세 종루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17세기 말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성터에 세워져 있는데, 지붕이 정말 이상했다오. 거대한 커피포트가 그보다 작은 네 개의 다기 밑에 붙어 있는 모습을 생상해 보구려. 만약 이 커피포트가 크지 않았더라면 보기가 아주 흉했을 것이오. 그나마 구세주였던 셈이지. 한번 상상해 보구려, 이 종탑들 주위의 여러 광장과 불규칙하고 구불구불하고 빈번히 좁아지는 길들, 이 길가에 늘어선 15세기의 박공들과 16세기의 뒤틀린 파사드들이 있는, 돌과 벽돌로 지은 높은 건물들을 말이오. 이걸 보았다면 당신은 플랑드르의 어떤 도시라고 생각했을 거요. 몽스 시청 광장은 특별한 매력을 지닌 곳으로, 이곳에는 매우 신기한 로코코 양식의 망루와 함께 15세기의 첨두아치로 된 아름다운 창문들이 있다오. 또한 이 광장에서는 또 다른 두 개의 종탑도 보인다오. 새벽 세 시에 떠나야 했기 때문에 달빛 아래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싶은 욕심에 난 일부러 잠을 자지 않았소. 별들이 총총 박힌 맑고 아름다운 하늘 아래, 15세기의 변화무쌍한 취향과 18세기의 기상천외한 천재성이 만들어 낸, 사방이 톱니 모양처럼 삐죽삐죽한 이 광경보다 더 독특하고 더 매력적인 곳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없을 거요. 이 환상적인 시간에 이처럼 공상적인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일이 또 있을까?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8월 22일 저녁 네시 앙베르 (.....) 어제 아침 열 시에 이곳에 도착했소. 도착하자마자 난 이 성당에서 저 성당으로, 이 예배당에서 저 예배당으로,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루벤스에서 반 다이크로 정신없이 쫓아다녔다오. 이젠 감탄사도 다 말라버렸소. 몸도 몹시 피곤하고, 게다가 육백육십 계단에 백사십 미터 높이의 종탑에도 올라갔었는데. 세계에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것 다음으로 높은 첨탑이라오. 이 탑은 거대한 건축물인 동시에 경이로운 보석 같았소. 거인이라도 이곳에서 살 수 있을 것이고, 여자들이 본다면 이걸 목에 걸고 싶어 할 거요. 여기서는 중세풍의 도시 앙베르가 모두 다 보인다오. 에스코 강과 바다, 성채 그리고 그 유명한 생 로랑의 천창까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오. 잔디밭의 끝 부분에 있는 작고 빨간 집 두 채가 시선을 끈다오. 이 도시는 참으로 감탄할 만한 곳이오. 교회 안의 그림들, 집 위에 장식된 조각품들, 예배당 안의 루벤스, 피사드 위의 베르브뤼겐의 조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예술이 넘쳐 난다오. 성당의 현관을 감상하려고 뒤로 물러나다가 뭔가에 부딪혔소. 돌아보니 우물이었소. 조각된 돌과 다듬은 쇠로 만든, 작은 입상들과 조그만 인형들이 놓인 아부 멋진 우물이었다오. 도대체 누가 이 우물을 만들었을까? 바로 캉탱메지스라오. 다시 앞을 바라보았소.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진열창이 돋보이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또 무엇인가? 바로 시청 건물이었소.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보았소. 누가 이토록 로코코 양식의 거대한 파사드를 디자인했을까? 다름 아닌 루벤스였소. 이곳은 도시 전체가 이런 식이라오.(…….) 리에르에서 튀르누까지 가는 동안 마을은 그 모습을 바꾼다오. 이제 더 이상 초록으로 뒤덮인 비옥한 플랑드르의 모습은 볼 수 없다오. 단지 하얀 모래, 재투성이의 거친 도로, 듬성듬성한 풀들, 소나무 숲, 작은 떡갈나무 숲, 히스, 곳곳에 물웅덩이들, 그리고 솔로뉴와 같은 야생의 험한 장소들뿐이라오. 나는 이 황량한 땅을 십육 킬로미터나 걸었지만, 땅을 개간하고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사, 즉 초라한 밭고랑에 붙어 있는 침울한 농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질 못했소. 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 흰 가운에 검은 어깨띠를 두른 수도사가 소 두 마리를 몰고 가는 모습은 좋은 볼거리였다오.(....) 플랑드르풍의 창문 유리에 쓴 시 1837년 8월 19일 말린 - 루뱅 난 네가 내는 옛 도시의 종소리를 좋아한다. 오! 오래된 고장, 풍속의 수호자. 숭고한 플랑드르여! 이곳에서, 마비된 북방은 카스틸라의 햇볕으로 데워져 남프랑스와 짝짓기를 하는구나! 종소리, 놀랍고 황홀한 순간이여. 돌연, 스페인 댄서처럼 옷을 입은 한 여자가 궁중의 문이 열리면서 만들어진 선명하고 밝은 구멍을 통해 나타난다. 그녀는 마비된 지붕 위로, 마법의 음으로 가득 찬 은으로 된 앞치마를 흔들며, 따분해하는 잠꾸러기들을 세차게 깨우고는, 즐거운 새처럼 조그만 발로 세차게 깨우고는, 즐거운 새처럼 조그만 발로 팔짝팔짝 뛰면서, 꼭대기의 창처럼 몸을 떨면서, 보이지 않는 연약한 크리스털 계단을 통해 놀란 듯, 춤추는 듯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눈과 귀의 주인인 정신이라는 이 감시병은 그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울려 퍼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다! 빅토르 위고가 불랑제에게 1837년 8월 22일 앙베르 어제 나는 이 경이로운 대성당의 첨탑 꼭대기에 올랐었네. 그러고는 자네 생각을 했지. 어쩐 일인지 그림이나 사조思潮와 관련된 어떤 것을 볼 때면 항상 자네 생각이 난다네. 나는 똑같은 시선으로 앞에 펼쳐진 바다와 멀리 떨어진 플레생그를 바라보았네. 왼쪽으로는 플랑드르 강Gand의 탑들, 오른쪽으로는 네덜란드와 브레다의 첨탑, 뒤로는 브라반트와 말린 성당의 종탑이 보였다네. 그리고 넓은 에스코 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네. 이 바다와 에스코 강 사이에는 물에 잠긴 간척지들과 호수로 변해버린 약 이십 킬로미터 둘레의 평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초록으로 뒤덮인 또 다른 평원에 하얀 집들이 반짝거렸으며, 바로 발밑에는 물로 가로막힌 북부 플랑드르의 지붕들이 보였네. 그리고 저 아래로 19세기 현재의 앙베르에는 마치 16세기의 파리를 연상시키듯 멋진 교회들과 관공서들, 잘린 지붕들, 뒤틀린 박공들이 보이고, 또한 수많은 소 첨탑들과 파사드들로 이루어진 뾰족한 사각 종탑과 예전에 정육점, 베로네세가 그린 건축물과 유사한 시청 앞, 루벤스의 작품이거나 혹은 루벤스를 모방한 교회 현관도 보였다네. 여기에다 에스코 강 위엔 수많은 범선들이 떠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철길에선 마차 행렬이 사라져 가며, 이 철길 근처의 성채에는 거대한 원형 잔디 광장이 놓여 있다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 위로 하늘엔, 멀리서 떨어지는 아름다운 빗줄기를 표현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에서처럼 들쭉날쭉한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네. 이게 바로 내가 어제 보았던 모든 것일세. 자네도 함께 보았어야 하는 건데, 정말 유감스럽군. 교회에서 내려오는 동안도 걸음걸음마다 루벤스, 마르탱 드 보스, 오토 베니우스, 반 다이크의 그림과 베르브뤼겐, 빌렘센스의 조각품들, 커다란 참나무로 된 고해 실, 대리석으로 된 거대한 예배당, 시처럼 아름다운 설교단이 있었네. 난 여기서 루벤스의 걸작(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을 보았다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이 모든 것이 악용되고 있음을 말해야 할 것 같네. 교회지기들은 가장 좋은 그림들을 몰래 숨겨놓고 이방인들에게 삼십 수의 돈을 받고 보여준다네. 돈을 내지 않으면 이 거장은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루벤스의 묘비가 있는 생 자크 성당에도 이런 종류의 건달이 있었는데 바로 교회의 문지기라네. 이런 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나. 이 파렴치한 자는 루벤스의 그림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했는데, 이것을 어딘가에 숨겨 놓고는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무례하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빌려주기까지 했다네.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 성당의 수석사제인 로웨즈라는 사람은 바케르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최후의 심판>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서지 천으로 가려놓게 했다네. 그런데 이 천을 걷어내는 게 불가능하다지 뭔가. 어리석은 사제 같으니라고,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루이, 난 이곳에 와서 자네 생각을 자주 한다네. 자네도 이곳을 본다면 무척 마음에 들어 할 걸세. 그저께는 북쪽으로 향한 작은 마을 튀르누에 갔었네. 해가 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거닐었다네. 그러다 갑자기 인적 없는 작은 길모퉁이에서 들판에 혼자 선 나 자신을 발견했네.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에 오래된 큰 탑이 하나 있어 그곳으로 걸어가 보았네. 정말 아름답더군. 벽돌로 지은 이 높고 거대하고 육중한 사가 탑은 꼭대기 근처에 비잔틴 양식의 작은 톱니 모양 장식들이 띠처럼 둘러져 있고 오래된 성 -보수를 한 탓에 오히려 미관을 망쳐버린 - 을 등졌는데, 탑의 그림자가 성을 가리고 있었네. 게다가 이 탑은 세련되고 간결한 형태를 잘 간직했고 탑의 밑 부분 외호의 맑은 물에는 두 배로 커진 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네. 창문들은 모두 쇠창살로 막혔고, 이곳은 감옥이었거든. 땅거미가 내려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는 가운데 나는 이 거무칙칙한 덩어리 근처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네. 그때 높은 곳에 위치한 한 창문에서 슬프고도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네. 지난해 몽 생 미셸에서도 이같이 장중하면서도 우수 어린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났네. 그때가 8월의 수호성인 축제였기 때문에 저 멀리 마을에서 웃음수리와 춤곡들이 어우러진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들렸다네. 그런데 죄수의 노랫소리가 이걸 단번에 깨트려버렸지. 냉혹함도 없고 분노도 섞이지 않은 노랫소리였다네. 해가 서쪽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네. 외호의 갈대들은 바람에 바스락거리고 간간히 커다란 쥐가 탑 밑의 돌출부로 잽싸게 지나가곤 했지, 이 풍경은 진정으로 플랑드르의 핵심이었네. 나무들이 짙게 우거진 두세 군데의 수풀, 소용돌이 모양의 박공으로 장식된 붉은 교회, 커다란 지붕과 작은 종탑, 그 옆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주 낮은 조그만 마을, 거대한 검은 평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난 아직까지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감 있는 풍경을 본 적이 없다네. 사랑하는 루이, 그래도 자네를 만나 이야기할 거리는 좀 남겨 두는 게 좋겠지? 오해는 말게, 이 편지를 끝내려고 그냥 해보는 빈말이 아니니까. 누구보다도 자넨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와 나 사이의 오랜 우정을 새삼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않은가? 진심으로 사랑하네.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8월 24일 저녁 여덟시 오드나르드 비가 내렸지만 난 항구에 남아 있었다오. 출항하는 선원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앙베르의 높은 첨탑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소.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8월 26일 투르네 마차를 타는 바람에 편지가 잠시 중단되었소. 사랑하는 아델, 투르네에 와서야 이 편지를 마무리하게 되었구려. 오드나르드에서부터 여기까지는 간혹 초목과 작은 강들이 있긴 하지만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소. 왼쪽으로는 에스코 강줄기를 가리는 멋진 언덕이 보인다오. 난 오랫동안 성당의 우뚝 솟은 다섯 개의 거대한 첨탑들을 바라보며 어두운 거리를 거닐었다오. 첨탑들은 종루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등불의 빛을 받고 있었소. 나는 우리의 루아알 광장과 모든 친구들, 특히 아델 당신과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오. 모두 다 함께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이 벅찬 감동을 다 함께 느끼게 될 날은 언제쯤일까? 그날은 정말 멋진 날이 될 거요. 가련한 나의 천사, 날 믿고 따라 주오. 디딘, 샤를 그리고 토토와 디디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오. 모두들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오. 또한 존경하는 장인어른께도 안부 전해주시오.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1837년 8월 27일 저녁 일곱시 쿠르트레 므넹에서 이프르까지의 여정은 무척 즐거웠소. 플랑드르 화가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울타리가 둘러쳐진 우아하고 아담한 초록색 땅들은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오. 길은 숲을 가로질러 났고, 길가엔 군데군데 아름다운 이탈리아 포플러들이 기둥처럼 늘어섰는데, 이 나무들의 껍질에 파인 울퉁불퉁한 홈들이 커다란 눈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듯했다오. 돌아오는 길에도 난 흔쾌히 똑같은 코스를 되풀이했소. 같은 길이었지만 반대 방향에서 다시 보니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오. 아프르는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도시오. 이곳엔 나무로 지은 집들이 벽돌로 지은 집들과 섞여 있는데, 플랑드르와 노르망디의 뜻밖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빅토르 위고가 아델에게 8월 31일 다섯 시 반 프륀 (…….) 오스탕트에 도착했소. 이곳엔 볼 만한 게 아무것도 없구려. 심지어 굴조차도 없소. 바꿔 말하면 이곳에도 바다가 있다는 뜻이오. 내가 오스탕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면 배은망덕하다고 할 거요. 이곳에서 온갖 종류의 특혜를 다 누리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오. 특히 바다와 하늘이 나를 볼 때는 더욱더 그럴 테지. 처음 오스탕드에 들어서던 날은 아침 내내 비가 내렸소. 그러다가 갑자기 비가 멎더니 구름이 걷히고 해가 솟아올라 재빨리 모래사장이 마르기 시작했소. 나는 썰물 때에 맞춰 두 시산 남짓 바닷가를 거닐었다오 ― 아! 사랑하는 토토야, 네게 줄 볼품없는 조개껍데기 하나 보이질 않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섬세한 모래만이 펼쳐져 있으니, 이를 어쩌나! -. 난 멋진 모래언덕들을 보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오. 이것들은 사실 브르타뉴의 화강암이나 노르망디의 암벽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무척 아름다워 보였소. 바다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고, 다만 우수에 젖어 있었을 뿐이오. 또 다른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오. 저녁이 되면 모래 언덕들은 멀리 지평선에 구불구불하면서도 소박한 실루엣을 만들어낸다오, 마치 끊임없이 동요하는 파도 옆에 영원히 동요하지 않는 파도의 장벽이 있는 것처럼 말이오. 바로 이 모래언덕을 거닐면서 땅의 모양이 대양을 연상시키는 심오한 조화를 느꼈다오. 따지고 보면, 바다는 평원이고 땅은 바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조그만 언덕들과 골짜기들은 출렁거리는 파도일 테고, 산맥은 돌이 되어버린 돌풍이 아니겠소? 여행일지 1864년 8월 17일 도버와 오스탕드를 거쳐 아침 일곱 시 반, 브뤼셀을 향해 출발했다. 지나는 길에 채텀을 보았다. 주루의 멋진 잔해들, 나중에 다시 보아야 할 것들이다. 오늘밤 나는 잠자리에서 프랭클린에 관한 시구를 지었다. 벼락을 탈취했으니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로다. 아홉 시, 도버에 도착했다. 아홉 시 반, 벨기에 기선 뤼비를 타고 오스탕드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바람도 자고 날씨마저 화창하다. 너무도 아름다운 바다. 그 위를 프로펠러 달린 증기선이 지난다. 배 앞쪽에는 객차와, 뒤쪽에는 연통이 달려 있다. 옆의 그림처럼. (8월 1일. 길 위의 숙소에서) 라인 강, 친구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 1842년 8월 1일 지베는 깨끗하고 우아하며, 매우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아담한 도시라네. 뫼즈 강 양 안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大 지배와 소小 지배로 나뉘지. 높고 아름다운 바위산이 병풍처럼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네. 그러나 샤를로몽 요새의 기하학적인 선들이 오히려 산 주위의 경관을 망치는 것 같아. 이곳에는 몽도리라는 대저택이 있는데, 좀 특이하긴 하지만 나그네들에겐 아주 훌륭한 숙소라네. 어떤 처지의 행인이라도 다 받아주고 또 무엇이든 먹을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지. 소 지배의 종탑은 점판암으로 된 단순한 첨탑일세. 그러나 대 지배의 종탑은 더 복잡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지어졌다네. 이 탑의 건축가가 어떻게 이걸 구성했는지를 설명해보자고. 우선 이 정직한 건축가는 성직자나 변호사가 쓰는 사각모를 놓았어. 이 사각모 위에 거꾸로 뒤집힌 샐러드 접시를 올려놓고, 평범한 이 접시 중앙에다 설탕 그릇을 놓았지. 그러고는 이 그릇 위에다 병을, 이 병 위에다 태양의 햇살을 놓았고, 아래로 뻗은 햇살 한 줄기가 병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위로 뻗은 햇살 한 줄기에다 꼬챙이에 꿴 것처럼 수탉을 놓았다네. 아마도 그는 이 모든 아이디어를 찾는데 일주일이 걸렸겠지. 그러고는 일곱째 날, 휴식을 취했을 거야. 포레 누아르에 관한 ‘초록 앨범’ 노트 1840년 라인 강, 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물여덟번째 편지 1842년 10월 하이델베르크 (…….) 네카어 강가에 자리 잡은 하이델베르크는 작은 언덕보다는 더 가파르고 산보다는 덜 험한 두 산등성이 사이에서 숲 안에 피신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네. 이 도시에는 감탄할 만한 유적들과 15세기에 지어진 두 교회와 1595년에 완공된 매력적인 건물 -기사 성 조지의 집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외관은 붉게 칠했고 금도금된 입상들로 장식되었다 -과 강 위에 오래된 탑들과 다리가 있고, 무엇보다도 특히 자신의 강을 가지고 있다네. 투명하고 고요하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강에는 송어들이 넘쳐나고 바위들이 솟아 있으며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네. 암초들 때문에 거세진 물결은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와 물살을 만들고, 황홀한 강의 급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난코스에서는 어떠한 증기선도 결코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여행일지 1865년 오늘 아침, 새벽은 어둡고 비마저 내린다. 모두들 아직 밤이라고 말하겠지. 우리의 동행은 여명을 놓쳐버린,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태양이다. 빅토르 위고가 루테로에게 1852년 8월 15일 저지 (.....)우리는 지금 매혹적인 고장에 와 있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네. 우리는 숲을 지나 바위로, 정원을 지나 암초로, 평원을 지나 바다로 왔네. 이곳 사람들은 나그네들에게 무척 호의적이네. 언덕에 올라서면 프랑스가 보인다네. 빅토르 위고가 마디에 드 몽조에게 1852년 8월 29일 저지 너무도 근사한 바닷가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네. 이 바다는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내일이면 분노로 출렁일 것이고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이네. 마치 백성들 같지 않은가? 기름처럼 미끈한 이 거울을 바라보며 난 속으로 말했다네. 바람아 일어라, 그러면 이 잔잔한 물은 폭풍우가 되고 거품이 되고 분노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 우리 같이 한번 이 바람을 일으켜보지 않겠나? 그러니 저지로 오도록 애써보게나. 고상하고 매력적인 자네 부인과 함께 말일세. 장담하건대 분명히 자넨 여기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걸세. 내 아내는 기꺼이 자네 부인을 환영할 테고, 바닷가엔 자네가 저녁마다 찾게 될 멋진 테라스가 있다네. 우린 거기 앉아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프랑스와 미래의 공화국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네. 우리의 영혼은 이 두 나라를 향해 자유로이 날아오르게 될 걸세. 빅토르 위고가 노엘 파르페에게 1853년 10월 29일 마린 테라스 (…….) 이곳엔 거센 바람이 불고 잇지만 상관없습니다. 우린 깊은 고요 속에서 지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은 울부짖고 바다는 요란스럽게 바위들을 강타하고, 바람은 맹수처럼 포효하고, 언덕 위의 나무들은 휘어 갈피를 못 잡고 있군요. 격노한 자연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에밀 데샤나에게 1855년 1월 14일 마린 테라스 (…….) 바다, 폭풍우, 거대한 모래사장, 슬픔 그리고 밤에 뜬 모든 별들과 난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불 해엽의 군도. 1883년 저지, 오리니, 샤크 바다에 떨어진 프랑스의 조각들인 영불 해협의 섬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모인다. 이로 인해 복잡한 국적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저지 사람들과 건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대로라면 영국인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정서와 습성에 있어서 프랑스인들이다. 만약 이들이 그걸 안다면 이 사실을 잊고 싶어 할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프랑스어에서 그걸 느낄 수 있다. 이 군도는 오르타크, 카스케, 에름, 제트 후와 같은 아주 조그만 섬들을 제외하고라도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개의 큰 섬 저지와 건지와, 두 개의 작은 섬 오리니와 사크, 옛 골Gaule 지방에 자리 잡은 이 조그만 섬들과 암초들은 보통 후Hou라고 불린다. 오리니는 부르 후, 사크는 브레크 후, 건지는 리 후와 제트 후, 저지는 에크르 후, 그랑빌은 피르 후.(....) 사크의 크기는 오리니의 절반 정도이고 오리니는 건지의 4분의 1, 그리고 건지는 저지의 3분의 2 정도다. 저지의 모든 섬들은 정확히 런던만 한 크기다. 따라서 프랑스가 되려면 이천칠백 개의 저지가 필요할 것이다. 뛰어난 실천농학자인 사라생의 계산에 따르면 만약 프랑스를 저지처럼 경작했더라면 이억 칠천만 명의 사람들, 즉 유럽 전체를 먹여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네 섬 중 사크는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섬이고, 저지는 가장 크면서도 가장 깜찍한 섬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경치가 아름다운 건지는 앞선 두 섬을 합쳐놓은 것 같다. 사크에는 은광이 하나 있는데 생산성이 적어서 개발이 안 된 채로 남아 있다. 저지에는 오만 육천 명, 건지에는 삼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또한 오리니에는 사천오백 명, 사크에는 육백 명, 리 후에는 단 한 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이 섬에서 저 섬까지, 오리니에서 건지까지, 그리고 건지에서 저지까지는 한 번에 이십팔 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는 장화를 신는다면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건지와 에름 사이의 해협은 소 루오, 에름과 사크 사이의 해협은 대 루오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곶은 플라망빌 곶이다. 건지에서는 셰르부르에서 쏘는 대포소리가 들리고 셰르부르에서는 건지의 천둥소리가 들릴 정도로 서로 가깝다. 앞서 말했듯이 영불해협의 군도로 몰아치는 폭풍우는 무시무시하다. 이 군도는 말하자면 바람의 고장이다. 각 섬들 사이에는 송풍 장치와 같은 통로가 있다. 그러나 바람은 바다에겐 해로운 것이지만 육지에게는 이로운 것이다. 바람으로 인해 육지의 전염병 독들이 바다로 실려 가고, 대신 난파한 배들이 육지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또 다른 군도와 마찬가지로 영불 해협의 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콜레라가 저지와 건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중세 때도 건지에는 매우 혹독한 전염병이 돌아 이곳의 대법관이 이 병을 없애기 위해 기록보관소를 태워버렸던 적이 있었다. 보통 프랑스에서는 이 섬들을 ‘영국의 섬들’이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는 ‘노르망디의 섬들’ 이라고 부른다. 영불 해협의 섬들은 동전, 즉 동화만을 주조하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도로가 쿠탕스에서 저지까지 통해 있다. 이미 말했듯이 이 대양이 프랑스에서 저지를 빼앗아간 것은 바로 709년이다. 이로서 열두 개의 지방행정구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실제로 노르망디에 사는 가족들은 아직도 이 행정구의 영주권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신수권은 실종되어버렸다. 사실 신권이란 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1859년의 여행일지 1859년 사크 (…….)사크는 두 부분 - 대 사크와 소 사크- 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즉 바다 한가운데 콧방울을 박고 엎드린 거대한 테라멘느의 바다뱀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대 사크는 몸통이고 소 사크는 머리, 그리고 대 사크와 소 사크를 연결하는 라 쿠페는 목에 해당한다. 가늘고 구불구불 휜 목은 마치 구불거리는 촌충 같은 인상을 준다. 오솔길은 거인 파타공이 가로 누우면 머리와 발이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좁다. 이 길 양쪽은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이어서 길이 끝날 때까지 협곡이 계속되었고. 그래서 이 좁은 길은 바다뱀의 움푹 패인 목덜미같이 보였다. 이 길의 좌우에는 깊은 구렁이 있다. 바다의 수심은 백이십 미터이며, 오른쪽으로는 건지, 왼쪽으로는 저지가 보인다. 건지 근처에는 비탈이 하나 있는데 가파르고 험하긴 해도 가시덤불이 엉겨 붙은 불편함을 좀 감수한다면 통행은 가능하다. 저지 쪽으로는 수직 낭떠러지다. 건지 쪽으로 지협이 좁아져 만들어진 조그만 만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저지 쪽은 완전한 오지다.(....) 빅토르 위고가 아델 위고에게 1855년 11월 1일 오후 세 시 건지 친애하는 아델, 우린 드디어 도착을 했다오. 물론 순조롭진 않았소. 바다는 요동치고, 거센 바람에 차가운 비 게다가 짙은 안개까지 방해꾼들이 많았다오. 그런데 저지는 구름 한 점 없구려. 정말 아무것도 없소. 수평선마저 텅 비어 있다오. 내 존재마저 정지되어버린 느낌이오. 당신과 아이들이 모두 이곳으로 와야만 비로소 정지되었던 내 삶이 다시 시작될 것 같소. 이곳 사람들의 접대는 훌륭했다오. 부두엔 많은 군중이 나왔는데, 다들 침묵하고 있었지만 동정 어린 표정들이었소. 적어도 겉보기엔 말이오.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모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오. 난 지금 감탄스런 광경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소. 비와 안개 속에서도 건지로의 입성은 아주 화려했다오. 빅토르는 몹시 놀랐던 모양이오. 이곳은 거의 영국 화 되지 않은 오래된 항구, 진정한 노르망디의 항구라오.(....) 아델 위고가 폴 뫼리스 부인에게 쓴 편지 1855년 11월 25일 (…….) 우리 집은 시내에 있고, 무척 아름답습니다. 집 아래로는 평평한 바다가 펼쳐져 있구요. 창문 너머로는 영불 해협의 모든 섬들이 보이고 바로 발밑에는 항구가 있습니다. 너무도 멋진 광경이지요. 저녁에 달빛 아래 서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합니다. 정원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 있긴 한데 고작 꽃 몇 송이를 키울 정도랍니다. 대신 이곳엔 온실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정원에 비할 바는 못 되죠. 어딘가에 정원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온실은 주거지 안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온실은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답니다. 게다가 여러 꽃과 많은 포도를 위한 선반들도 설치되어 있구요. 이곳엔 프랑스풍의 창문 세 개와 발코니가 달린 아주 큰 응접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지요. 도시는 전체적으로 프랑스풍입니다. 복잡한 우회로, 계단식 거리, 골목길들이 눈에 띄는 노르망디의 옛 도시죠. 인구는 저지보다 훨씬 적지만 더 밀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지보다 더 활기차 보입니다. (…….) 빅토르 위고가 헤젤에게 1855년 11월 27일 (…….) 우리가 어떻게 건지까지 오게 되었지? 꼭 나를 보러 와주게나. 나는 도시의 높은 곳에다 둥지를 틀었다네. 내 창문에서 보면 영불해협의 섬들이 모두 보인다네. 나는 지금 나를 추방했던 프랑스와 저지를 보고 있네. 당신이 이곳으로 오면 나를 내쫓았던 브뤼셀을 보러갈 생각이라네. 이로써 나의 유배지 순례는 끝이 나겠지. 그건 그렇고, 농담이 아니니, 어서 이리로 오게나. 내가 묵고 있는 오트빌 하우스의 모든 식구들은 당신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네. 우리 빨리 만나서 일과 시와 소설과 연극 등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도록 하세.(....) 여행일지 1866년 10월 7일 브뤼셀에서 건지 섬으로 열한 시 반, 안개가 끼어 햇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카스게 근처를 지날 때 한 줄기 햇빛이 안개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카스게에는 두 개의 하얀 쌍둥이 탑밖에 보이지 않는다. 빛을 받으며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이 탑의 모습이 마치 오페라글라스의 상아로 된 두 원통처럼 보인다. (......) 우리 집은 시내에 있고, 무척 아름답다. 집 아래로는 평평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창문 너머로는 영불 해협의 모든 섬들이 보이고 바로 발밑은 항구다. 너무도 멋진 광경이다. 저녁에 달빛 아래 서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 정원이라고 할만 한 게 하나 있긴 한데 고작 꽃 몇 소이를 키울 정도다. 대신 이곳엔 온실이 하나 있다. 물론 정원에 비할 바 못 된다. 어딘가에 정원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온실은 주거지 안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온실은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다. 게다가 여러 꽃과 많은 포도를 위한 선반들도 설치되어 있고, 이곳엔 프랑스풍의 창문 세 개와 발코니가 달린 아주 큰 응접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머무는 곳이다. 영불 해협의 군도 1883년 건지 섬 남쪽엔 화강암 북쪽엔 모래, 이쪽엔 급사면들 저쪽엔 모래언덕들이 펼 펴져 있다. 평원의 사면들은 조그만 언덕과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넘실댄다. 주름 잡힌 초록색 평원의 가장자리를 대양의 거품이 술처럼 장식하고, 해안은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뻗어 있다. 곳곳에 무시무시한 탑들이 솟아 있고, 저지대엔 해변이 펼쳐져 있다. 방어용 요철과 계단으로 가로막힌 육중한 흉벽으로 모래가 휩쓸고 지나가고,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포위군인 파도가 몰아친다. 폭풍우로 마스트가 부러진 제분기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발Valle, 빌오루아, 생 피에르포르, 토르트발에 있는 몇 개는 여전히 빙글빙글 돌아간다. 절벽에는 정박소 들이 있고, 모래언덕에는 무리 지은 양떼들과 이 양들을 지키는 개와 뭔가를 찾는 소몰이꾼의 개도 있다. 마을 상인들의 수레들이 움푹 파인 길 위를 덜컹거리며 뛰어오르고, 집들은 대체로 검은색이며 비 때문에 서쪽엔 타르가 칠해져 있다. 수탉들과 암탉들, 퇴비 더미들도 보인다. 또한 도처에 키클롭스족이 만든 벽들 - 옛 항구의 이 벽들은 불행하게도 부서져 있다 - 은 지금은 울퉁불퉁한 덩어리들과 튼튼한 기둥들, 그리고 무거운 사슬들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감탄을 자아낸다. 농장들은 큰 숲에 둘러싸였고, 가슴 높이의 돌을 쌓아 경계선을 쳐놓은 들판들은 평원 위에 바둑판무늬를 그리고 있다. 곳곳에 엉겅퀴로 둘러싸인 성벽, 화강암으로 지어진 초가집들, 참호용 오두막들, 포탄을 견뎌내기 위한 대피소들이 있다. 야생 상태가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곳에는 이따금 종탑이 우뚝 솟은 조그만 신축 건물이 보이고 - 이곳은 학교다 - 근처의 골짜기엔 두 세 개의 개울이 흐르고 있다. 느릅나무와 참나무도 있고 이곳에만 있는 백합, 즉 건지 백합도 눈에 띈다. 한창 바쁜 농번기에는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쟁기들도 보일 것이다. 집 앞에는 돌로 둥글게 경계를 지어놓은 커다란 건초더미들과 가시양 골 담초 더미가 있으며 때때로 옛 프랑스풍의 정원들도 보인다. 이 정원에는 잘 손질된 주목들과 세심하게 모양을 만든 회양목들, 로카이유 양식의 항아리들이 있고, 과수원과 채소밭이 혼합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농부들의 울타리 안에는 소박한 꽃들이 피었고, 사과나무들 사이로 진달래도 보인다. 여기저기 풀 위엔 해안에서 표류해 온 갈색 해조들이 뒤덮었다. 십자가도 없는 묘지에는 얇은 비석이 놓여 있는데, 달빛 아래서 보면 마치 하얀 피부의 귀부인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평선 위에는 열 개의 고딕식 종이 솟아 있다. 오래된 교회와 새로운 교리가 대조되듯 가톨릭 건물 안에 청교도 의식이 수용 되어 있다. 모래사장이나 여러 곶 위에는 선돌, 고인돌, 긴 돌, 거석 건조물, 흔들리는 돌, 소리 나는 돌, 긴 회랑, 환상 열석 등 켈트 족의 음산한 수수께끼 들이 갖가지 형태로 흩어져 있다. 또한 루시퍼 곶과 미셸 아르캉주성에, 또 다른 이카르 곶과 디카를 갑岬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모든 이들 - 골의 신관들, 다음에 수도원장들, 그 다음에 예수회 학교의 교장들 - 의 자취가 남아 있다. 게다가 겨울에도 거의 여름처럼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곳, 여기가 바로 건지다. 1883년 건지 섬 계속해서 비옥하고 기름지고 효율적인 땅, 더없이 훌륭한 방목장, 밀은 좋기로 소문났고 암소 고기 또한 유명하다. 생 피에르 뒤 부아 목장의 암송아지들은 콩플랑 고원의 공인받은 양들만큼이나 훌륭하다. 영불농업공진회는 건지의 밭과 평원들 중 가장 잘 가꾸어진 곳에 상을 주고 있다. 농업은 잘 관리된 교통로가 뒷받침해주며, 훌륭한 교통망 또한 섬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도로들은 매우 훌륭하다. 두 도로의 분기점에는 돌 판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824년 건지의 초대 대법관은 ‘고티에 드 라 살’ 리스트에 나오는 최초의 인물로서 불공정한 사법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십자가는 ‘대법관의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가 최후로 굴복한 장소이자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표시하고 있다. 해만海灣과 내포內浦의 바다엔 정박 장치들과 큰 바위 모양을 한 얼룩덜룩한 바지선들 - 이 배들은 붉은색과 흰색의 바둑판무늬이거나,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이등분되었거나, 초록색, 푸른색, 오렌지색이 섞여 있거나, 마름모꼴 무늬, 벽옥 무늬, 대리석 무늬로 된 것들 등 다양하다 - 이 수면에 떠 있고, 곳곳에 배를 끌어올리면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뱃사람들의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부들만큼이나 농부들도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다. 정원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돌가루로 가득 찬 땅은 매우 견고하고, 진흙모래와 해초로 이루어진 비료는 화강암에 염분을 더해준다. 여기서 아주 특별한 생명력이 생겨나고 놀랄 만한 활기가 생산된다. 목련, 도금양, 월계수, 협죽도, 푸른 수국, 여기에 수령초까지 넘쳐난다. 세 잎 마편초들이 자라는 아케이드와, 제라늄으로 덮인 벽들도 있다. 오렌지 와 레몬은 땅 한가운데서 자란다.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포도 알들은 온실에서만 익은 것이다. 온실에서 포도 알이 익어가는 모습 또한 아주 근사하다. 동백은 큰 나무로 자랐고, 정원에는 집보다 더 크게 자란 알로에 꽃이 피었다. 이 식물들은 한껏 멋을 부린 별장과 전원주택의 정면을 뒤덮거나 장식하고 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호화롭고 더 풍요로운 것이 또 있을까? 건지는 한쪽은 우아하지만 또 다른 한쪽은 끔찍하다. 서쪽은 황폐하고 어지러운 바다의 입김이 몰아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암초들과 광풍, 위험천만한 내포, 수선된 보트들, 휴경지, 황무지, 허름한 집들, 나지막한 작은 마을, 가볍게 동요하고 있는 빈약한 짐승의 무리, 소금기 있는 풀들 게다가 일반화된 극심한 빈곤까지. 리 후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작은 무인도다. 그러나 썰물 때가 되면 접근이 가능하다. 이 섬은 가시덤불과 작은 짐승들이 파놓은 땅굴들로 가득 차 있다. 리 후의 토끼들은 때를 잘 알아서 마치 인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밀물 때에만 자신의 구멍에서 나온다. 이들의 친구인 대양은 인간들로부터 이들을 떼어 놓는다. 이 위대한 동지애의 근원, 그것은 바로 대자연이다. 만약 바송만의 충적층을 파헤쳐보면 많은 나무들이 발견될 것이다. 이곳의 신비로운 모래층 아래엔 과거에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이 혹독한 서부는 어부들을 모두 유능한 조타수들로 만들어놓았다. 이처럼 영불 해협을 둘러싼 이 바다는 특별한데가 있다. 바로 옆의 캉칼 만은 세계에서 조수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여행일지 1871년 7월 16일 로쉐트로의 나들이 우린 아침 열 시 반에 출발했다. (.....) 두 시에 로쉐트에 도착했다. 인심 좋은 크나프가 우리에게 지붕 없는 커다란 탑이 만들어놓은 멋진 응접실에서 점심을 대접해주었다. 나는 흥분에 휩싸여 모든 것을 -우물, 탑들, 예배당 - 을 다시 보았다. 사랑하는 새를, 너와 함께 처음 이것들을 보았었지. (…….)룩셈부르크 영토를 지키는 근위병을 방문했다. 그는 내게 프러시아 군에 입대한 자기 아들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이 유적지를 그린 다음 다섯 시에 다시 출발 했다. (…….) 내일은 보포르로 갈 것이다. 여행일지 1871년 7월 17일 (.....) 부르샤이트로 나들이를 했다. 어제 그 유람마차를 타고 열두시 반에 출발을 했다. 우린 1865년 여행 때처럼 브란텐부르크를 거치지 않고 디키리쉬를 거쳐 고지대로 길을 잡았다. 둘러싸인 산꼭대기에서 유적지를 바라보니 정말로 감탄스러웠다. 네 시 반,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맥주와 우유를 마셨다. 그런 후에 그 유적지 - 험난한 오래된 성채와 성 안의 작은 마을 - 까지 걸어갔다. 11세기 전체가 자신의 유령들과 더불어 지금은 탑이 되어 남아 있는 듯했다. 난 먼저 이 탑부터 그렸다. 이곳에는 1865년에 두 여자, 즉 어머니와 딸이 두 마리 흰꼬리수리처럼 피신해 살았다. 그런데 이 둥지는 너무 무시무시해서 두 사람은 여기서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문지기가 내게 방명록을 내밀었다. 난 방명록에 폴 뫼리스와 빅토르 옆에다 내 이름을 써놓았다. 저녁 아홉 시 반,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 (…….) 여행일지 1871년 8월 10일 (…….) 산으로 나들이를 갔다. (.....)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팔켄슈타인이 보이는 고원의 정상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 웅장한 경관의 밑그림을 그렸다. 바안덴이 보이는 근처의 고원으로 가보았다. 우리는 걸어서 급사면의 끝까지 올라갔다. 휘황찬란한 광경,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이 또 있을까? 거대한 대자연 속에 자리 잡은 이 유적지, 수많은 언덕들이 솟아 있는 이 주루, 바로 우수 어린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계곡 밑 부분의 도시와 강을 바라보았다. 경치는 더 아름다웠지만 숭고한 느낌은 덜한 것 같았다. 이곳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사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하나님, 그의 존재는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 여행일지 8월 20일 (…….) 어제 (…….) 브란덴부르크를 다시 보았다. 멋진 도로와 두 협곡 - 하나는 완만한 초록빛이고 또 다른 하나는 끔찍하다 - 사이의 훌륭한 유적지였다. 오래된 마을은 경탄을 자아낼 만큼 근사했다. 여기서 세 개의 데생을 했다. 메디치 스타일의 출입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르마네스크 양식의 탑을 지탱하고 있다. 이 문은 접히는 문으로 좌우로 불룩 튀어나와 있다. 이 유적의 중심부에는 10세기의 비극적인 사각 탑 하나가 솟아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는 도기로 된 고대 로마의 저부조가 있다. 이 고장 학자들은 이것이 아피스의 제단으로 어떤 사제가 이 소에게 사과를 바쳤다고 한다. 이것은 성좌다. (…….) 여행일지 8월 21일 (…….) 저녁 식사 후 로트에 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보았는데 불행히도 벽의 칠이 형편없었다. 기둥과 기둥머리들은 훌륭했다. 현관은 18세기 앙드레 드 로트의 할아버지에 의해 엉성하게 보수되어 있었는데, 그럴 의지만 있다면 쉽게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로코코식 회반죽 아래 로마네스크 양식의 반원형 홍예틀이 보인다. 묘지에는 오래된 고딕 양식의 십자가들이 있다. 묘지 한 모퉁이에 이 교회만큼이나 오래된 보리수 한 그루가 있는데, 밑동의 그루터기가 히드라의 입이나 혹은 바다에 사는 거대한 짐승의 입을 연상케 한다. 이런 동물성 괴물이 이런 식물성 괴물로부터 나오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여행일지 1871년 9월 13일 아침 열 시 반, 우리는 유람마차를 타고 아이들은 남겨둔 채 두세 부인과 함께 지에르크 근처에 있는 솅겐을 향해 출발했다. 솅겐은 콜라르 씨의 성이 있는 곳이다. 열두 시 반, 거기에 도착했다.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가족이다. 젊은 아버지와 무척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 손님들 중에는 프러시아 군 출신의 네덜란드 장교가 있었다. 이 장교는 프랑스에 대해 거의 열광적인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점심시간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른다. 점심 식사 후 남자들과 여자들이 모젤 강 위에서 배로 이리저리 유람을 하는 동안 난 아주 희귀하고 아름다운 오래된 탑을 그렸다. 이 탑은 13세기의 것으로 절반 정도가 송악덩굴로 덮여 있었다. 콜라르 부인은 이 크로키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이 그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탑이라도 모두 주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이 그림들 중 하나를 주기로 약속했다.(.....) 여행일지 1869년 9월 23일 9월 20일, 베른에서 발(바젤)로 안내해줄 마부를 한 명 고용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루체른과 콩스탕스를 거쳐 하루씩 천천히 가게 될 것이다. 모든 경비를 포함해서 이동할 땐 하루에 이십오 프랑, 체류할 땐 하루에 이십 프랑을 주기로 했다. 우리는 한 시에 출발했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조각되고 색칠된 거대한 별장들이 모인 곳을 지나쳤다. 너무나도 근사했다. 누구라도 이걸 보았다면 궁궐 마을이라고 했을 것이다. 계곡 밑 부분에는 급류가 있고, 가려진 오래된 목조 다리가 언뜻언뜻 보이기도 한다. 지평선에는 융프라우와 더불어 베른 쪽으로 알프스가 거대한 병풍처럼 솟아 있다. 깨끗하고 세련된 집들, 잘 정돈된 퇴비더미는 마치 단정하게 땋은 여자의 머리를 연상시켰다. 9월 21일, 열 한 시에 루체른을 향해 출발했다. 비가 오고 안개도 끼어 있었다. 네 시에 루체른에 도착했고, 우리는 슈빈젠호프에서 내렸다. 9월 22일, 어제 저녁, 빅토르와 나는 시내 산책을 나갔다. 여기서 1839년 그토록 감탄했던 오래된 두 다리 -색칠된 삼각 면으로 장식된 이 다리들은 가려져 있었다 ― 를 다시 보았다. 이때 난 백조 여관에 머물렀고, 사랑하는 딸 디딘 에게는 이 다리를 그려 보냈었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셋이서 같은 길을 산책했다. 세 시에 추크를 향해 떠났다. 해가 떠 있는데 비가 내렸다. (…….) 열 두 시 반에 취리히를 향해 출발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알비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보니 저물어가는 석양 아래 멋진 호수가 나타났다. 다섯 시에 취리히에 도착했다. 우리는 호숫가에 있는 바우어 호텔로 내려왔고, 저녁 식사 전에 시내를 산책했다. 도시는 이런저런 장식물들 때문에 몹시 흉했다. 호수 입구에 있는 오래된 탑을 둘러싸고 있던 외호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눈 덮인 산 위에 석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이리저리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취리히의 수많은 불빛들이 반사되는 호수 위로 아름답고 우수 어린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 [Review] 위대한 작가의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가족에게만 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내면의 이야기들이기에 진솔함을 더해 준다. 이 책은 빅토르 위고 200주년이 되는 2002년 기념으로 그가 여행을 하며 아내와 딸에게 혹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출신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는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여행을 자주했던 위고의 글은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 특히 감동적이다. 잔잔한 수평선, 파도치는 바위와 절벽, 성당, 성체와 파리의 후미진 골목을 보며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페캉에서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보름달을 보았는데,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소. 바다엔 노르웨이 배 한 척이 탄식처럼 서글픈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흘리며 항구를 막 떠나고 있는 중이었다오. 내 뒤로는 두 언덕 사이로 보이는 도시와 종탑, 앞으로는 드넓은 하늘과 밝은 달빛 아래 사라지다 섞이다를 반복하는 바다, 오른쪽으로는 변함없이 빛을 비추는 등대, 왼쪽으로는 허물어진 절벽이 만들어낸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소. 난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방파제의 비계 위에 서 있었다오.” 어릴 적 친구였던 아델 푸세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수많은 여성과의 애정 행각, 아내의 외도로 가정에 풍파가 많았지만 40년 넘게 가정을 지켰다. 아끼던 딸이 신혼여행에서 남편과 함께 센 강에서 익사하는 사건으로 10년간 문필을 중단하기도 했다. 유명 작가로서, 나폴레옹 3세의 구테타 제정(帝政)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십년 가까이 영국해협의 저지섬과 간디섬에서 망명 생활도 겪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고, 도중에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그의 유명 작 “정관시집”, “레 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 등은 이 기간에 집필된 책들로 알려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너무 지나치리만큼 세밀하면서도 결코 군더더기가 없는 그의 글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여행에 관한 글을 써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본문> “눈부신 하늘 위로 윤곽을 뚜렷이 드러낸 초록빛 산봉우리들, 산기슭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 흰색, 사프란색, 초록색으로 칠한 커다란 발코니가 달린 이층 삼층집들, 적갈색 기와지붕을 길게 늘려 바람을 막도록 한 커다란 발코니, 이 발코니에 나부끼는 온갖 것들 - 말리려고 널어놓은 속옷, 그물망, 붉고 노랗고 파란 남루한 옷가지들 - 이 집들 아래로 펼쳐진 바다.” “내 오른쪽의 산 중턱에는 하양 성당이 자리 잡았고, 왼쪽은 다른 산기슭의 발코니 달린 집들이 무너진 탑까지 늘어서 있다. 이 집들 앞에는 각종 형태의 배들과 여러 가지 크기의 보트들이 탑 아래 바다 위에 가지런히 작은 만안에 정박된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이 배들과 탑 위로, 하늘 아래에 삶이 있고 변화가 있고, 태양과 창공과 공기가 있고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바로 내 눈앞에 이 모든 것이 펼쳐져 있었다.” “언덕 위에서 보면 거대한 광경이 펼쳐진다오. 저 멀리 아득히 서로 겹쳐 꿰매어지듯 이어지는 여러 겹의 들판과 초원들, 커다란 다갈색 평원과 초록색 평원들, 종탑들, 작은 마을들, 수없이 다른 모양의 음침하고 거대한 사다리꼴을 보여주는 숲, 그리고 서쪽으로 밑바닥에 마치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바다가 가득 메워버린 언덕들 사이의 틈.” “새벽 네 시, 마차 안, 안개가 자욱하다. 드넓은 평원에 햇빛이 눈부시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들이 오른쪽에 포 강의 급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정오 무렵 피레네 산맥은 마치 하늘의 푸른색 드레스가 군데군데 헤져 희 씨실만을 남긴 것처럼, 멀리 지평선에 몇 개의 흰 줄무늬로만 구분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