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에서는 남자답다. 그에 비해 야곱은 여성스럽다. 에서는 때어날 때부터, 마치 털로 갑옷을 입은 듯했다. 훌륭한 사냥꾼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익숙하다’는 말은 이론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주 잘 안다는 말이다.
에서의 익숙한 사냥 솜씨는 아버지 이삭을 더 기쁘게 했다. 이삭이 에서를 특히 더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삭은 성격이 유하다. 원래 부드럽기는 하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도 한 몫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삭은 착한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모리아산에 가자고 하니, 그저 따라나섰다. 땔감을 지라 했더니, 그저 순종하였다. 더 이상 묻지 말라니, 아무것도 묻지도 않았다. 제단 위에 누우라 하니, 그저 누웠다.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했더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항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착한 아들이니까.
어디 가냐고 물을 수 있었다. 왜 내가 땔감을 짊어져야 하냐고 물을 수 있었다. 제단 위에 누우라 할 때, 왜 그러냐고 물을 수 있었다. 자신을 결박할 때, 칼이 자신을 향했을 때,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착한 아들이니까.
‘착한 아이 증후군’또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버린 증상’이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은 곪아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물론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사회에 아주 적응을 잘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만 신경쓰다보면, 정작 자신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 자신을 발전시킬 힘도 없고, 대인관계도 갈수록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다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은 점점 망가지게 된다.
착한 아이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①자신의 안 좋은 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잘 표현하지 못한다. ②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며, 어렵게 거절하더라도 곧 후회한다. ③쉽게 상처를 받으며, 동시에 오래 간다. ④표현을 잘하지 못하며, 말을 하기 보단 듣기를 더 편하게 느낀다.
착한 아이의 대표적인 부작용이 있다. 세월호 사건이다. 죽을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기다리라는 어른의 명령에 무조건 따랐다. 그래서 476명 중 295명 사망, 9명 실종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
왜 이삭이 아버지한테 반항을 못했을까? 아버지가 100세에 자신을 낳았음을, 그래서 아버지의 큰 기대가 자기에게 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은 늘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삭은 더 착했어야 한다. 말 잘 듣는. 혹 아버지의 말을 어기게 되면 심한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버지가 칼을 들었어도, 그 순간에도, 이삭은 착한 아들이어야만 한다. 착한 아들은 절대로 반항하지 않는다.
화가 나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다 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늘 다른 사람의 눈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이삭의 눈에 비친 에서의 모습은 어땠을까? 말을 타고 온 땅을 누빈다. 활만 들고 있으면 천하무적이다. 자신이 평생 닮고 싶은,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습이 에서에게는 있다. 이삭이 에서만 사랑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이삭과 또 다르다. 어머니의 사랑은 약한 아들을, 못난 아들을 향한다. 이삭의 사랑이 전폭적으로 에서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으니, 당연히 리브가의 사랑은 야곱에게 향했다. 똑같은 자식인데, 희한하게도 야곱은 에서와 너무 다르다. 마치 남편 이삭을 보는 것 같다. 너무 약하다. 남성적인 이미지보다는, 여성적인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저렇게 연약해서야, 어떻게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갈는지…….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부모의 편애로 인해 가장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다. 罪는 罒+ 非의 조합이다. 새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려다, 그물에 걸린 형국이다. 남편과 아내가, 에서와 야곱이 각각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부모의 편애는 죄다.
이삭에게서 찾을 수 없는 강인한 남성상이 에서에게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삭이 에서를 편애한다고?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잘난 자식은 잘나서 예쁘다. 못난 자식은 못나서 예쁘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의 마음이어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다고?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물론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 그러나 더 아픈 손가락은 분명히 있다.
공황장애로 고생하는 여고생이 있다. 좁은 공간에 혼자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다가, 숨이 안 쉬어져,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한다. 표면적으론, 엄마의 말처럼, 전학 뒤, 성적이 하락한 것이 원인이다. 그러나 사실은 남동생과의 차별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근본 원인이었다.
편애한 기억이 없다는 엄마와, 늘 차별했다고 느끼는 딸의 인식 차는 컸다. 여고생은 “엄마를 닮고, 똑똑했던 남동생만 늘 예뻐했다”고 원망했다. 관심 받고 싶어 보채던 여고생을 향해, 엄마가 과자봉투를 던지며, 좁은 창고에 들어가 벌을 서게 한 오랜 기억까지 떠올렸다. 엄마는 남동생만 안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 뒤 들려오는 웃음소리 또한 생생히 기억했다.
엄마의 기억엔 없지만, 여고생의 가슴속엔 응어리가 깊었다. 갑작스러운 호흡곤란도, 남동생의 특목고 진학이 결정될 무렵, 처음 생겼다. 부모의 관심 유발과 엄마에 대한 우회적 공격이다. 그동안 억눌렸던 응어리를 조금씩 해소한 뒤에야, 증상이 사라졌다.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70대 할머니가 있다. “허리수술 뒤, 체력이 떨어지면서, 그냥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역시 자식편애가 숨겨진 원인이었다. 성공한 큰아들과 함께 살고 싶었지만, 작은 아들이 대신 모시는 상황이었다. 불면증의 시작도 “성공했다는 큰아들이 왜 안 모시느냐”는 이웃 노인의 말에 울컥하여 크게 싸운 뒤부터다.
강력한 수면제로도 호전이 없는 불면증은 할머니의 큰아들에 대한 무의식적 애착 때문에 생겼다. 이를 우회적으로 해소한 뒤에야, 병은 차도를 보였다.
‘반지 끼우는 손가락, 콧구멍 파는 손가락 따로 있다’는 말처럼, 늙어서도 받고 싶은 자식이 있는가 하면, 늘 퍼주고 싶은 자식도 따로 있는 게 인지상정이다.
최근 미국에선 ‘부모 768명을 조사한 결과, 아버지의 70%, 어머니의 65%가 자녀를 편애한다’는 연구결과가 타임지를 통해 소개됐다. 부모 자녀간 유착이 훨씬 심한 국내 부모들이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에서와 야곱을 각각 이렇게 표현한다. “그아이들이장성하매, 에서는익숙한사냥꾼이었으므로들사람이되고, 야곱은조용한사람이었으므로장막에거주하니”(27절)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허무함과 비참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같은 ‘사람’이지만, 본문에서의 ‘사람’(‘이쉬’)는 다르다. 능력을 지닌 존재를 말한다. 에서에게 사용되어, 야성적인 늠름한 사람임을 표현한다. 익숙한 사냥꾼, 즉 넓은 초원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삭은에서가사냥한고기를좋아하므로그를사랑하고, 리브가는야곱을사랑하였더라.”(28절) 이삭은 에서가 잡아오는 고기를 좋아했다. ‘사냥한’은 ‘그의 입 안에 있는 사냥물’이다. 이삭은 에서가 잡아오는 고기를 입에서 떼어놓지를 않았다. 늘 고기만 먹으려 하였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는 만큼, 그 고기를 좋아했다. 에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고기만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기록한다.도덕적으로 ‘완전’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에서의 강한 성격과 비교되어, 평온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에서는 초원을 지배하는 사람, 그러나 야곱은 조용히 집에 있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사실, 이삭을 닮은 아들은 야곱이다. 그런데 이삭은 야곱이 자기를 닮았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야곱을 바라보면서, 왜 형처럼 초원을 지배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저렇게 집에만 들어앉아 있어야 하나? 남자가 집에만 있으면, 뭘 어쩌자는 건지…….
생각해보면, 두 아들이 있음으로 이삭은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에서는 밖의 활동을 더 충실히 하고, 야곱은 안의 활동을 더 충실히 하면 된다. 둘 다 밖의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한 아들은 안의 활동을 돌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두 아들이 얼마나 감사한가? 집안의 안팎을 책임지니, 얼마나 좋은가?
당시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힘 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정복한다. 그것이 당연하고, 별로 문제시 되지 않는다. 당연히 힘 있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시대이다. 가진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다. 에서 같은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야곱 같은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이다. 이삭도 에서를 자랑스레 여긴다. 그런데 집안에 있기를 좋아하는 야곱은 그 마음이 아니다.
부모의 편애로 상처 받은 자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 수치심이 많다. 이삭은 자기가 야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았을까?
나중에 일어날 일을 이야기하자. 편애로 인한 상처가 많은 야곱은, 자신 역시 요셉과 베냐민만 편애한다. 그 중에서도 요셉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작당을 하고, 이 일로 인해 야곱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다시 받는다. 편애가 대물림 되고, 그 편애로 인해 한 가정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명수이시다.편애로 인해, 형제들의 따돌림으로 인해, 요셉은 애굽의 노예가 되어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 놀라운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요셉을 애굽 총리 요셉으로 바꿔주신다. 사람들의 계획은 악하지만, 그 악함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선함으로 축복하신다. “우리가알거니와, 하나님을사랑하는자, 곧그의뜻대로부르심을입은자들에게는, 모든것이합력하여선을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악한 일들을 선함으로 바꾸신다.
편애로 상처를 받았다고? 그래서?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날 사랑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 사랑하셨던 사람이 ‘나’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축복하시는지…….
모든 악한 것을 선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아신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나의 억울함은 오직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 문제는 수천 가지이지만, 해답은 하나다.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