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 이야기는 집안 인터넷 족보와 2020년3월에 발행한 대종가(大宗家)627 및 수은집 풍암임공의 행장
그리고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신문기사 등을 기초로 하여 추정한 것이므로
옛날 옛적의 실체적 사실과는 조금은 다른 사실이 있을 수 있슴을 글머리에 밝힌다
조선 중엽에 목판 인쇄기술의 발전으로 각 집안의 족보는 그 무렵부터 기록이 넓어지고 상세해 진다
족보 기록은 아버지들 중심이고 어머님들은 본관에 성(姓)만 기록되어 있고 어머니의 부친
과 어머니 조부의 벼슬이 높은 경우는 조부의 관직과 성함이 기록되어 있다.
딸 들은 사위의 성명과 사위 집안에 대한 최소의 기록이 있다.그러므로 딸들의 기록은 당대로 그치고.
시댁의 족보에서 세계(世系)를 이어간다.
근세에 들어 어머니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저희 나주 임씨 인터넷 족보의 경우는 가능한 한글로 기재하고
학력 경력을 남녀 차별없이 등재한다 물론 따님들의 경우도 동일하다.
인터넷 족보는 큰 변곡점이고 혁명이다. 검색기능이 간결하여 나 같은 문외한도 관심을 가지면
자신의 뿌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계획하고 실행한 인터넷 대동보 편찬위원님들께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족보는 더욱 진화되어 갈 것이다
족보의 기록은 부모는 누구이고 언제 나서 언제 누구랑 혼인하여 자식은 누구를 두었고 무엇을 하다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가? 에 대한 기록이다
무언가 더 기록되어야할 것이 있을 것같아 섭섭해 생각해보았지만 한 인간의 일생을 요약하면 그것이 전부이다.
나주임씨 정자공파는 16세 풍암 임복할아버자 부터 시작한다
어느 집안이든 수백년간의 세계(世系)를 이어 갈때 어머니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을 것이리라
정자공 복 -柳湖公 협 - 夢村公 타 의 후손인 나의 경우에서 보면 더욱 그러함을 느낀다
유호공 협의 어머니 남평 서씨 이야기
정자공 복 할아버지는 4명의 아들과 한명의 따님을 두고 1576년 4월에 56세로 졸(卒) 하셨다
4명의 부인을 두셨는데 첫째 부인 죽산 박씨 와 둘째 부인 남평서씨 에게는 자손이 없으셨다
셋째 부인 남평서씨가 2남 1녀를 낳으셨으니 큰 아드님이 서 두째 아드님이 협이다
(이 기록은 수은집 풍암임공행장의 기록도 동일하다 )
넷쩨 부인은 문화 유씨이다
셋째 아드님 계와 넷째 아드님 오 의 어머니로 셍각된다
큰 아들 서 1570년생 둘째 협 1573년생 셋째 계 1574년생 넷째 오 1576.7월생
정자공이 56세의 나이로 돌아가실때 7살 ,4살,3살 넷째는 유복자인 셈이다 .
공은 자식이 없어 40대 후반에 세번째 네번쩨 부인을 서둘러 들이신 것으로 여겨진다
아래는 수은 강항의 1608년 즈음 기록이다
나주임씨 최초의 족보 기해보(필사본 1659년 간행자 임장유 임환)보다 약 50년 앞선기록이다
공은 초취 재취가 자식이 없이 일찍 죽고 세번째 (三室) 로 진사 서모 (徐某)의 따님을 맞아 두 아들을 낳았다
공이 임종하실때 큰 아드님 서는 일곱살 둘째 협은 겨우 네살이었다.
큰 아들은 서는 경인년 (159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해년(1599)에 올라 은대(銀臺 승정원) 춘관(春官(예조)
,하관(夏官벙조 )의 낭(郎)을 지내고 지금 무장현감 (茂長縣監) 을 맡고 있으며
서는 전 부사(前府使) 임 식 (林植)의 따님과 혼인하여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큰 아들은 연이니 전별좌 홍서익의 따남과
혼인하였고 딸은 전병조좌랑의 제에게 시집갔다.그 다음은 해인데 아직어리다
둘째 아드님은 협 은 전목사 (前牧使) 박광옥(朴光玉)의 따님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일찍 졸(卒)하었다
협의 두 아들은 아직 어리다
위 수은의 기록에서 계와 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석촌공 서께서 어머니가 다른 계와 오에 대해서는 강항선생께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자공파 시작 첫 대는 임서, 임협, 임계, 임오로 네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을 훌륭히 키운 두 어머니가 계셨다
남평서씨 (1547 ~ 1617)께서는 30세에 홀로되시고
7살 서와 4살 협을 키우셨다 어머니 춘추 52세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해에 두째 협이 졸하었으나 큰 아들 서가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 정자공 시기는 물론이러니와 서와 협의 시기도 가계는 여유가 있고 넉넉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촌공 서 의 신도비(神道碑)銘등의 내용이나 수은집 풍림임공행장의 기록 으로 미루어).
석촌공 서는 무장현감 시절 (1604~1609)에 수은 강항을 만나 아버지 풍암 임공행장에 기록을 협조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에 있으면서 부침을 겪는다 함경도 관찰사 재임 중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동지중추부사 시기에 풍질로 서울에서 졸(卒)하신다
아버지 정자공이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어머니 남평서씨 외 세분의 어머니가 정부인(貞婦人)으로 추증된 것은
큰 아드님 석촌(石村)공 서의 공적때문이다.
나의 직계 할아버지 유호공 협께서는 어머니 보다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는 길게 하시지 못하고
남평 서싸 어머니깨서 가슴에 묻은 자식이 되었을 것 같다 .
그러나 유호공 협에게는 후대에 걸출한 인물로 자란 효자 타와 위가 있었으니 이는 타와 위의 어머니 !
음성 박씨 할머니의 노고와 헌신 때문이리라!!.
사진 : 유호공 협의 어머니 남평서씨 족보기록
후기 :
1.계와 오의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추정된다 허나 족보의 기록으로는 명확치 못하다.이에 관한 다른 기록이 있는지?
종중유적관리위원과 정보위원인 학우이자 족형 유택 님께 청하여 두었다
2. 정자공의 첫번째 부인 죽산 박씨 묘지 (부평 옥산면)구역이 근래에 도로가 생겨 적지않은 보상이 있었다한다
2023.6.12 井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