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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에스테르기 1장-10장
에스테르기 입문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자신의 겨울 궁전에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잔치를 열었다(에스 1,3-4). 그는 다리우스 임금과 ‘키루스 대왕’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았다. BC 486년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35세였고 이미 1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자 왕비 ‘와스티’도 여인들을 위해 비슷한 연회를 베풀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왕비에게 명령을 내린다. 정장을 갖추고 고관들 앞에 나와 모습을 드러내라는 어명이었다(에스 1,11). 그런데 왕비는 거절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왕비는 폐위되고 새롭게 왕비를 뽑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에스테르는 성경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녀는 엄정한 과정을 거쳐 왕비로 선택되었던 것이다(에스 2,16). 이후 에스테르의 후견인이었던 ‘모르도카이’ 역시 왕궁에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왕을 해치려는 음모를 알게 되자 이를 사전에 차단하게 한다. 이 일로 왕궁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새롭게 재상이 된 ‘하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만은 모르도카이를 없애려 유다인 전체를 몰살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는 왕을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 모르도카이는 위기를 느끼고 왕비의 도움을 청한다. 에스테르는 동족을 구하려다 죽게 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을 다짐하며 왕에게 나아간다(에스 4-5장).
에스테르의 원래 이름은 ‘하다싸’였다(에스 2,7). 부모가 지어준 히브리어 이름이었다. 아마도 왕비가 된 뒤에 이름을 바꾸었던 것 같다. 에스테르의 어원은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쉬타르(Ishtar)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랑과 풍요의 여신으로 밤하늘의 별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훗날 에스테르는 ‘별’을 뜻하는 말이 된다. 라틴어의 ‘스텔라’(stella)와 영어의 ‘스타’(star)도 어원은 ‘에스테르’다.
‘에스테르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 등장한다. 에스테르 왕비가 임금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왕의 영을 부드럽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기록이다(에스 5,1). 하지만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떤 권력도 ‘하느님의 사람’인 이스라엘을 몰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가르침이다.
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잇는 후계자는 그의 아들 ‘아르카크세르크세스’ 임금이다(느헤 2,1). 그는 자신의 유다인 시종이었던 ‘느헤미야’를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기여하도록 했다.
에스테르기는 「메길롯」의 마지막 책으로, 「푸림절」(Purim) 때 낭독되었다. 이 책이 「푸림절」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간주된 때문이었는데, 등장인물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정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장면이 푸림절의 기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푸림절의 「부림」은 「부르」라는 히브리어의 복수형이며 「주사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부르」가 원래 아카디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입장도 있어서, 원래 이방민족의 축제였던 것이 후대에 이스라엘 안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축제였던 푸림절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야훼신앙에 부합하는 축제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에스테르기와 역사
에스테르기가 페르시야 왕국 도성들 중의 하나인 수사 왕성의 지리, 연대, 행정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도 연대와 장소 및 등장 인물들을 명시함으로써 일종의 ‘역사화’를 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전하는 바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보고가 아니다. 사실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 인물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왕국의 왕비는 항상 페르시야 사람이었다. 1,1의 아하스에로스 임금이 그리스식의 이름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10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와스티가 아니라 후타오사(또는 그리스식으로 아토싸;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메스트리스)라는 여인이었다. 자신들에 대한 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유다인들의 조직적 반격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에스테르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소망을 소설의 형태로 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에(비록 에스테르기의 배경보다 후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유다인들의 실제적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여러 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에스테르기에 담긴 말살 시도는 그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사육제적인 경향을 보존하고 있는 푸림절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9,24-26이 설명하고 있듯이, “주사위”를 뜻하는 외래어 “푸림”은 유다인들의 이 축제가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자기네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이교 축제를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 또는 원초적 혼돈에 대한 승리자로서 운명의 신들을 통괄하는 마르둑 신의 축제라 생각하였다. 또는 바빌로니아의 신인 마르둑 및 이쉬타르와 엘람의 신인 후만 및 마스티 사이의 투쟁, 또는 다리우스 임금에 의한 제관들의 학살 등을 이 축제의 배경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가설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영향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화론적 요소들을 지닌 이교도들의 축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은 이러한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자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다른 축제들에서처럼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신화를 받아들여 이를 역사 속으로 삽입시켰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들을 바로 그 속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 성탄 대축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역사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수용하여 탈신화화함으로써 자기네 전설을 정당화한 것이다.
본문의 문제
에스테르기를 읽을 때 항상 부닥치게 되는 문제는 본문의 복잡한 장, 절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희랍어 번역인 칠십인역이 히브리어 본문에 93개의 절을 추가함으로써 초래되었는데, 아마도 칠십인역은, 히브리 본문이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 언급을 뚜렷이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여기에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보충하려고 93개절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종교적 성격 때문에, 칠십인역의 첨가부분만을 전례 중에 봉독하고 있다. 추가된 부분의 배치에도 문제가 있는데, 칠십인역은 첨부한 부분을 히브리어 본문에 적절히 삽입하고 있는 반면, 불가타는 첨가부분만을 따로 발췌하여 뒷부분의 부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성
에스테르기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내포하지 않고 있으며, 이민족의 축제를 토착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고 간주되었기에, 처음에는 경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에스테르기는 신약성경에 단 한번도 인용된 적이 없으며, 모든 성경 사본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된 꿈란 유적에서 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기 100년경 개최된 얌니야 회의에서 히브리어 본문이 유다인들의 경전에 포함되었고,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에스테르기 전체(첨가된 부분까지)를 가톨릭 교회의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역사성
에스테르기는 매우 구체적인 묘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Susa)에 대한 상세한 지리적 설명, 당시의 정치적 상황, 연대기적 표기, 등장인물들의 이름 등은 전달되는 스토리에 매우 생생한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에스테르기가 실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인가 라는 질문에는 쉽게 긍정하기 어렵다. 에스테르의 남편으로 되어있는 아하스에로스왕은 「크세르크세스」(그리스식 이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 기록들에 의하면 그의 왕비는 와스티가 아니라 「후타오사」(그리스식 이름은 아토싸,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그녀를 아메스트리스로 호칭함)로 되어있다.
그런가하면 유다인 여자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다는 언급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페르시아 통치시대에 유다인들에 의해 계획된 조직적 저항이 있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에스테르기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내용에 긴장감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문학유형
에스테르기는 일종의 「역사소설」로 간주되어져 왔다. 푸림절이라는 축제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창작된 소설이라고 이해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을 「미드라쉬 문학」이라고 보기도 한다. 「미드라쉬」란 성경본문에 대한 해설을 이야기식으로 풀어가는 일종의 성경해석 방법론인데, 에스테르기가 창세 37~50장에 등장하고 있는 요셉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줄거리로 되어 있기에 제기된 입장이었다. 즉 에스테르기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각색으로, 요셉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비유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에스테르기를 「교훈문학」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성이 가지는 매력, 상선벌악에 대한 전반적 주제 등은 지혜문학적 주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작 연대와 저자
역사소설은 그 연대를 추정하기 쉬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설은 분명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겠지만, 그 제작은 2005년 현재에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스테르기는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다인들이 받는 박해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다인에게 관대했던 페르시아 시대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는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리아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치정에 더 어울린다. 즉 이야기의 배경은 페르시아 시대이지만, 저술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대인 그리스 대제국시대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에스테르기는 기원전 3세기경 히브리어 본문이,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그리스말 본문(첨가된 부분을 포함한)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에 대하여도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요셉 전승이나 출애굽 전승 같은 유다인들의 고대 전승에 익숙했고 이를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익명의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 1,1①-1⑰ 모르도카이의 환시와 승진
“크세르크세스 대왕 통치 제이년 니산 달 초하룻날 모르도카이가 꿈을 꾸었다. 그는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야이르, 할아버지는 시므이, 증조부는 키스였다”(1).
1,1①-1⑰은 히브리 말 성경에는 없고 그리스 말 번역본에만 들어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우리말 성경에서 절수와 함께 ,로 표기한다. 이 예비단락에 이미 에스테르기의 주제들이 나타난다. 혼란과 탄압, 투쟁과 승리, 상황의 역전(몰락과 승리), 해방과 기쁨(축제) 등이다. 칠십인역에 따르면 이 책은 이렇게 책 이름으로 나오는 에스테르가 아니라 모르도카이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두 인물이 차례차례 주인공이 된다.
이야기의 배경은 바빌론 동쪽에 있는 수사(다니 8,2 참조), 곧 페르시아 임금들의 여름 왕궁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임금의 궁궐 안에서 널리 알려지고 존경받는 모르도카이에 대한 것이다. 그는 여콘야 임금과 함께 유배 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아하스에로스가 크세르크세스 1세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해는 기원전 484년일 것이다. 여콘야가 유배 온 지 백십 년째 되는 해다.
모르도카이의 꿈(환시)은 우리에게 다니엘의 묵시론적 환시들을 상기시킨다(다니 7,1-14 참조). 이 꿈은 악이 엄청난 군대로 지상에 고통과 혼란을 일으키지만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꾼 꿈은 이러하다. 소리와 소음, 천둥과 지진, 소동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거대한 용 두 마리가 서로 싸울 태세를 갖추고 다가오며 크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이 으르렁거리자 모든 민족들이 의로운 민족을 치려고 전쟁을 준비하였다”(1-1).
이어서 모르도카이는 임금에 대한 반역 계획을 입수하고 그것을 임금에게 미리 알려 그의 충실함 덕분에 보상을 받는다(1⑯). 이것은 6,3의 묘사와 대조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만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1⑰).
에스 1,1-22 왕비 와스티의 폐위
1절은 이 이야기가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5~465년) 시대의 사건이었음을 제시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127개의 주를 통치하였다. 에스테르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3년, 「수사」라는 도시의 궁궐에서 모든 장군들과 귀족들을 위한 잔치를 무려 180일 동안 베푼다.
이는 자신의 영화와 경제력,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였다(3~4절). 이렇게 귀족들만의 축제가 끝나자 수사성에 사는 모든 백성을 위한 잔치가 7일간 이어지는데(5~8절), 이때 왕비 와스티는 여자들만을 위한 잔치를 주관한다(9절). 입문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와스티라는 이름의 왕비는 페르시아의 실록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내를 아메스트리스라고 호칭하고 있기에, 와스티라는 인물의 역사성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어쨌든 에스테르기가 제시하는 「사건」은 그 화려했던 잔치 마지막 날 발생한다.
“술로 기분이 좋아진”(10절) 왕은 왕비의 미모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녀를 단장시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와스티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 어전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용모가 어여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백성들과 고관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11). 당시 왕비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왕관만을 쓴 채 자태를 보여야 했다. 그러나 왕비는 자신의 동의 없이 내려진 꽃단장(?) 명령에 마음이 상한 왕비는 왕의 명령에 불복한다. 이에 격분한 왕은 그 잔치에 모여 있던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의논한다.
“그래서 임금은 절기를 아는 현인들에게 문의하였다. 임금의 일은 모두 이렇게 어명과 판례에 관한 전문가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관례였다”(13). 13~22절은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이 여성에게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제시하는데,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와스티의 행위는 왕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무시한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16절).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페르시아의 여인들에게 퍼져 남편들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한 남성 귀족들은 왕비 와스티를 폐위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여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는 극적인 처방을 쓴 셈이었다. “이는 왕비의 일이 모든 부녀자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크세르크세스 임금님이 와스티 왕비를 어전으로 데려오도록 명령하셨는데도 왕비는 나오지 않았다.’ 하면서, 제 남편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에스 2,1-23 새로운 왕비 에스테르
2장은, 모르도카이의 도움으로 왕비에 오른 에스테르와(전반부: 1~18), 왕에 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도카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후반부: 21~23절).
술이 과해 취했던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와스티 왕비를 폐위 시킨 것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와스티가 폐위되자 왕의 시종들은 나라에 있는 모든 아가씨들 중, 용모가 어여쁜 젊은 처녀들을 수소문하여 새 왕비로 삼고자 한다. “그러자 임금을 모시는 젊은 시종들이 여쭈었다. ‘임금님을 위하여 용모가 어여쁜 젊은 처녀들을 찾아내게 하십시오”(2). 이러한 풍습은 고대 궁궐내부 사회가 그곳에서 일할 여성들을 선택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뿐 아니라 유럽의 오래된 동화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역사실록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간택 과정 중, 수사 성에 살고 있던 유다사람 모르도카이(5절)와 「하다사」라고 불리던 에스테르이 등장한다(7절). 「하다사」란 일종의 나무이름으로, 「향기 나는 상록수」를 지칭하는 히브리 이름이었고, 「에스테르」은 바빌론의 여신이었던 이쉬타르(Ishtar)에서 파생된 바빌론-페르시아식 이름이었다. 교포들이 일반적으로 한국이름과 외국이름을 공유하고 있듯이 에스테르은 히브리이름과 페르시아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과 사촌지간이었지만, 부모 없는 고아였던 그녀를 자기 수양딸로 삼아 길러왔다. “그는 자기 삼촌의 딸 하다싸 곧 에스테르를 맡아 키우고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처녀는 모습이 아름답고 용모가 어여뻤다. 에스테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자 모르도카이는 그를 자기 딸로 맞아들였다”(7).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간 에스테르는 거기서 궁녀들의 총관리인이었던 헤개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10절은 그녀가 자신의 「국적」을 밝히지 않았음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유다인이었던 그녀의 국적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무려 12달 동안의 「몸만들기」 과정 후(12~13절), 그녀는 왕을 만나게 되고, 소박한 치장에도 불구하고 왕의 간택을 받게 된다. 왕의 재위 7년 10째 달이었고, 와스티가 폐위된 지 4년만의 일이었다. “임금은 다른 어떤 여자보다도 에스테르를 사랑하게 되어, 그는 모든 처녀들보다 임금의 귀여움과 총애를 더 많이 받았다. 임금은 에스테르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그를 와스티 대신 왕비로 삼았다”(17).
2장의 후반부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도카이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반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전반부에 비해 내용이 매우 빈약하여, 학자들은 이 본문이 많은 부분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빈약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에스테르기 전체의 맥을 이끌어줄 주요 주제, 「모르도카이의 지혜」, 「에스테르의 국적」, 「모르도카이의 충고를 따르는 에스테르」 등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에스 3,1-14 하만의 등장과 모르도카이와의 갈등
3장에서는 아각 사람 하만이 등장한다. 아각은 1사무 15장 따르면 아말렉의 임금으로, 사울은 아각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사울이 배척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타르굼은 하만과 모르도카이 사이의 싸움을 사울과 아각, 이스라엘과 숙적인 아말렉족, 그리고 야곱과 에사우의 싸움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아말렉족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했을 때 광야에서 맨 뒤에 처진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였다. 그래서 맨 뒤에 처진 백성들은 주로 병자들과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말렉족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하만이 재상에 된 것에 대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게 되어, 모든 대신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해야할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갈등의 시작은 유독 모르도카이만이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데서 발생했다. “궁궐 대문에서 근무하는 임금의 모든 시종들이 하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하였으니, 임금이 그렇게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고도 절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2). 모르도카이는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유다인이라 절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임금과 하느님께 절을 할 수 있지만 재상 하만에게 할 수 없는 말이다. 하만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결국 그는 모르도카이와 그의 백성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계획한다(6절). “그러나 모르도카이 하나만 해치우는 것으로는 눈에 차지 않았다. 모르도카이가 어느 민족인지가 자기에게 보고되자, 하만은 크세르크세스 왕국 전역에 있는 유다인들을 모두 몰살하려고 꾀하였다”(6).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만이 단순히 모르도카이 개인에게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저자는 에스테르가 쟁취한 구원이, 비단 모르도카이만을 위한 것이 아닌 유다 민족 전체를 위한 것이었음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몰살계획이 모의된 것은 크세르크세스 재위 12년째였고, 에스테르가 왕비에 간택된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십이년 첫째 달인 니산 달에 하만이 자기 앞에서 푸르 곧 주사위를 각 날과 각 달에 따라 던지게 하니, 열두째 달인 아다르 달이 나왔다”(7).
어떤 경우든 음모는 이제 더욱 복잡해진다. 하만은 모르도카이뿐 아니라 유다 백성 전체에 대해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주사위를 던져 운에 따라 파멸의 날이 결정된다. 저자는 ‘주사위’에 해당하는 푸르(pur, 바빌론 말)에 대해 설명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푸림Purim 축제와 연결한다. 그 임금은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하만이 제기한 유다인들의 죄는 그들이 자기네 법(율법)만을 지킬 뿐, 페르시아 왕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절). 하만은 이러한 고발과 함께 그들을 멸족시키는 것을 허락한다면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왕궁으로 유입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할 것을 명하는 칙령이 내려진다(12~13절). “그런 다음 파발꾼들 편으로 임금의 각 주에 서신이 발송되었다. 아이와 여자 할 것 없이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다인들을 열두째 달인 아다르 달 열사흗날 한날에 파멸시키고 죽여서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것이었다”(13).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잔인한 몰살 명령은, 관용책을 전면에 내세웠던 페르시아의 정치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어서,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에스테르의 활약이다.
에스 4,1-17㉚ 난관에의 봉착
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모르도카이와 전국의 유다인들은 탄식과 통곡을 쏟아낸다(1~3절). “모르도카이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르도카이는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성읍 한가운데로 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1).
모르도카이는 자루옷을 입고 궁궐대문에서 시위를 하고, 그 때까지 영문을 몰랐던 에스테르은 이러한 모르도카이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시급히 옷을 보낸다. 에스테르이 시종을 보내 그 연유를 묻자, 모르도카이는 하만의 음모와 유다인 절멸의 대가로 왕에게 내놓겠다고 한 은전의 액수를 알려준다. 이어 반포된 칙령의 사본까지 보내면서 무엇인가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7~8절). “그리고 그들을 몰살시키도록 수사에 반포된 칙명서의 사본을 그에게 주면서, 에스테르에게 보여 사정을 알리게 하였다. 또한 임금에게 나아가 자비를 간청하고 자기 민족을 위하여 사정하라는 당부를 에스테르에게 전하게 하였다”(8).
특별히 8절의,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에게 전하라고 한 말 중에는 『그녀의 민족을 위해』(8절)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녀가 난관 앞에서 짊어져야할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으로부터 모르도카이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스테르는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을 만날 수 없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법규를 설명한다(11절). “임금님의 모든 시종과 임금님께 속한 모든 주의 백성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부름을 받지 않고 안뜰로 임금님께 나아간 자에게는 남자든 여자든 오직 한 가지 법규만이 있으니, 곧 사형입니다. 오직 임금님이 황금 왕홀을 내밀어 주셔야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삼십 일 동안이나 임금님께 들도록 부름을 받지 못한 형편이랍니다”(11).
이러한 비인격적인 법규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현재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데, 그 어떤 고대 법령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 혹은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에스테르이 이제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모험」을 단행하게 될 것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테르의 곤란한 사정을 듣게 된 모르도카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다인들이 멸절당할 상황에 혼자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일침를 가한다(14절).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일렀다. ‘왕궁에 있다고 모든 유다인들 가운데 왕비만 살아남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절멸하게 될 것이오.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13-14).
이러한 모르도카이의 반응도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에스테르의 곤란한 처지가 뭔가 왜곡되어 이해된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3~14절에 제시된 모르도카이의 날카로운 반응은 에스테르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겨냥한 저자의 직접적인 경고로 이해할 할 수 있겠다. 즉,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에스테르기가 최종적으로 제작될 당시의 유다인 고관들에게, 민족 전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지경 중에, 자신의 이익만을 찾으려는 이기적 계산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4절의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저자의 신학적 관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역사와 인간사를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잘 규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다시 전해들은 에스테르는 모든 유다인들이 함께 삼일간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연대는 「공동기도」를 통해 심화될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민족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비장한 다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으렵니다”(16절).
집중적으로 탄원하고 간청하는 기도 안에서 에스테르는 하느님께 그녀와 그녀의 백성을 도와주시기를 청한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궁정 안에서 매우 중요하고 화려한 공식 의복 대신 ‘고뇌와 슬픔의 의복을 입고 값진 향료 대신 재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하느님께 나아간다(17⑬). “그는 화려한 의복을 벗고 고뇌와 슬픔의 의복을 입었다. 값진 향료 대신 재와 오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자기 몸을 거칠게 다루었으며, 즐겨 치장하던 온몸을 헝클어진 머리칼로 덮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17⑬-17⑮).
그녀는 자신이 “무법자들의 영광과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모든 이민족들의 잠자리를 경멸함을 알고 계십니다”(17㉖)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에스 5,1-14 에스테르가 임금 앞에 나아감
5장은 에스테르가 이제 더 이상 모르도카이에 의존하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책임질 만한 큰 인물이 되었음을 드러내준다. “사흘째 되는 날, 에스테르는 왕비의 정장을 하고서 왕궁을 마주 보고 그 앞뜰에 섰다. 임금은 궁궐 안 왕좌에 대문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1). 삼일간의 기도 끝에 자신을 하느님으로 완전무장한 에스테르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의 뜰에 들어선다. 다행스럽게도 왕은 왕홀을 그녀에게 내밀어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묻는다(1~3절). “그러고는 황금 왕홀을 들어 에스테르의 목에 댄 다음 그를 껴안아 입 맞추고 말하였다. ‘나에게 말해 보오.’ 에스테르가 그에게 말하였다. “임금님, 저에게는 임금님이 하느님의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영광에 대한 두려움으로 저의 마음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임금님은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임금님, 또한 임금님의 얼굴은 인사하심으로 충만합니다”(1⑫-1⑭). 이렇게 말하고 에스테르는 실신하였다. 왕을 홀리게 하는 에스테르의 능력이 보여주는 듯하다. 임금은 깨어난 에스테르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왕국의 반이라도 에스테르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연회에 왕과 하만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4~5절). 갑자기 등장한 하만의 이름은 이 연회가 단순히 남편(임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만을 겨냥한 자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초대에 응한 왕과 하만은, 다음 날에 있을 연회에도 기쁨으로 응하겠다고 말한다(7~8절).
5장의 후반부(9~14절)는 하만과 모르도카이의 갈등으로 주제가 전이된다. “그날 하만은 기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런데 하만이 궁궐 대문에서 모르도카이를 보았는데도, 그가 자기 앞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경의도 표하지 않자, 하만은 모르도카이에 대한 노기로 가득 찼다”(9). 흡족한 마음으로 왕비의 궁을 나온 하만은 우연히 모르도카이를 만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모르도카이를 보자 격분하게 되고(9절), 집에 돌아온 즉시 아내와 친구들에게 모르도카이를 처단할 방법을 논의한다. 막대한 재산과 자식들, 임금의 총애, 거기에 왕후의 호의까지,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장미 빛이지만(12절), 모르도카이 때문에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 하는 하만에게, 아내와 친구들은 해결안을 제시한다.
『높이 쉰자짜리 말뚝을 만들어』 모르도카이를 거기에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쉰자」는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높이로서, 자신을 대적한 모르도카이의 최후를 만인에게 공포하고 다시는 아무도 하만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제레스와 그의 모든 친구들이 말하였다. ‘높이 쉰 자짜리 말뚝을 만들어, 내일 아침에 임금님께 말씀드려서 모르도카이를 거기에 매달게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임금님과 함께 기쁘게 연회에 가십시오.’ 이 제안이 하만의 마음에 들어 말뚝을 만들게 하였다”(14).
에스 6,1-14 반전의 시작
6장에서부터 서서히 이야기의 반전은 시작된다. “그날 밤 임금은 잠이 오지 않아 주요 사건을 기록하는 일지를 가져와서 읽게 하였다”(1). 우연히 옛 기록을 읽다가 모르도카이의 업적을 알게 된 왕은 어떻게든 상을 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때 마침 자신이 세운 말뚝에 모르도카이를 매달 것을 청하러 온 하만(4절)에게 이를 논의한다. 왕이 자신에게 상을 내리려 하는 줄로 착각한 하만은 구구절절 포상의 내용을 제안한다. “하만이 들어서자 임금이 그에게 ‘임금이 영예롭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베풀어야 하겠소?’ 하고 묻자, 하만은 ‘임금님께서 나 말고 누구에게 영예를 베풀고 싶어 하시랴?’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만은 임금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영예롭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임금님께서 입으시던 어의와 임금님께서 타시던 말을 내오게 하시어 그 말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게 하신 다음, 의복과 말을 임금님의 가장 고귀한 대신의 손에 들려 보내시어, 임금님께서 영예롭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입히고 그 말에 태워 성읍 광장을 돌게 하면서, ‘임금님께서 영예롭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하고 그 앞에서 외치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6-9).
10절부터는 이러한 왕과 하만의 「동상이몽」의 결과가 제시되는데 왕은 하만이 제안한 그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모르도카이에게 하사하도록 지시하고, 모르도카이는 그대로 왕의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10~11절).
열세에 몰린 하만은 수치와 고통의 표시인 『머리를 감싼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제스처는 그가 얼마나 수치심과 분노, 슬픔에 빠졌었는지를 묘사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에게 하만의 아내 제레스는 『모르도카이가 유다 출신이라면 이제 그에게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그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충고한다. “하만은 아내 제레스와 자기의 모든 친구들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죄다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의 고문들과 아내 제레스가 말하였다. ‘모르도카이가 유다족 출신이라면, 이제 그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대감은 그에게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그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13).
아내의 예견 중, 모르도카이의 승리를 그의 민족 전체의 승리와 연결시킨 부분, 이미 유다인들의 승리가 계획되었음을 부각시킨 내용 등은 모두 저자의 가치관과 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저자는 유다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신적개입과 구원의지를 제레스의 입을 통해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 7,1-10 하만의 최후
“그리하여 임금과 하만은 에스테르 왕비의 연회에 함께 갔다. 임금은 이 둘째 날에도 술을 마시면서 에스테르에게 말하였다. ‘에스테르 왕비,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오? 그대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 왕국의 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소”(1-2). 왕과 하만은 에스테르의 초대에 응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 왕은 왕비의 소원을 묻는다. 이에 그녀는 자신과 민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3절), 감히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고(5절) 더구나 그가 하만임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밖으로 나간다. 궁지에 몰린 하만은 에스테르에게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6~7절), 물론 아직까지 왕과 하만이 왕비의 국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본문의 설정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만이 이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의 양부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돌아온 왕은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만이 왕비의 침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를 하만이 왕비를 폭행하는 것으로 알고, 격노를 터뜨린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만의 위상을 완전히 추락시켜 놓는다. 결국 하만은 『얼굴을 가리게』 되는데, 이는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행위였다. 하만은 그가 세워놓은 높이 쉰자의 말뚝에 달리는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9~10절).
에스 8,1-16 유다인을 위한 새로운 칙령
이후 왕은 왕비에게 『유다인들의 적』 하만의 집을 하사하고,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의 양아버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1~2절).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하만에 의해 반포된 유다인 학살 칙령은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왕에게 이 칙령을 취소하기를 간청하지만(3~6절), 이미 공포된 칙령은 취소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의 법이 걸림돌이 된다. 결국 왕은 유다인들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을 작성할 것을 모르도카이에게 제안한다(8절). “이제 그대들은 유다인들에 관하여 그대들에게 좋을 대로 임금의 이름으로 조서를 작성하고 임금의 인장 반지로 봉인하시오. 임금의 이름으로 작성되고 임금의 인장 반지로 봉인된 문서는 취소할 수 없소”(8).
이렇게 해서 작성된 두 번째 칙령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세력에 적극 대응하는 것을 윤허하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임금은 각 도시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한데 모여서 자기들의 목숨을 지키도록 봉기하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민족과 각 주의 무장한 무리들을 어린이와 여자 할 것 없이 파멸시키고 죽여서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윤허하였다”(11).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의 칙령이 되는데, 하만의 처형 이후, 페르시아의 실세로 부상한 인물은 모르도카이였고, 그가 유다인인 이상 유다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15~17절). “그리고 모든 주와 모든 도시, 임금의 분부와 어명이 당도한 곳곳에서는 유다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며, 그날은 잔치와 경축의 날이 되었다. 그 땅의 민족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유다인으로 자처하였다.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17).
물론 이러한 일들이 실제 역사적으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위상은 에스테르기 저자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 학자들은 기쁨에 겨워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래적인 에스테르기가 마무리 된다고 본다. 다음에 등장하는 9,1~10,3는 후대 첨가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에스 9,1-32 유다인들의 승리
이제 이야기의 흐름은 완전히 반전된다. 멸절 당하게 될 바로 그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적을 무찌르는 「역전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1~2절). “임금의 분부와 그의 어명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던 열두째 달인 아다르 달 열사흗날, 유다인의 원수들이 그들을 제압하리라 기대하던 그날에, 도리어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압하게 되었다”(1). 아다르 달 열 사흗날이란 하만이 내린 조서에 따르면 유다인을 대량 학살하기로 결정된 날이었으며(3,13), 모르도카이가 내린 조서에 따르면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학살하려고 하는 대적들에게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결정된 날이었다. 따라서 이날에는 유다인들과 그 대적들간의 살상 행위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아다르 달은 바벨론식의 달(月) 이름으로서 종교력으로는 제12월, 민간력으로는 제6월, 그리고 태양력으로는 2-3월에 해당되는 때이다.
여기에서의 '왕의 분부와 그의 어명'은 오직 모르도카이에 의해 작성된 것만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트'는 '왕의 칙령'. '법령'등을 의미하는데 본 구절에서는 이 용어가 단수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사실 하만에 의해 반포된 조서는 페르시아의 관례상 어쩔 수 없이 취소되지 못했을 뿐(8,8), 왕이 그 조서의 효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서 모르도카이에 의해서 반포케 했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사장(死藏)된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자들은 하만이 내린 조서를 근거로 유다인들에 대한 적대행위를 감행할 것이 뻔했다.
하만과 그 추종자들이 왕을 유혹하여 유다인들을 집단 학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물론 음모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적었다. 하지만 그 음모가 조서로 구체화되어 반포됐을 때, 하만의 뜻을 좇아 유다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데 참여할 뜻을 가졌던 자들은 심히 많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모르도카이에 의해 반포된 조서에 따라서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학살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죽일 수 있게 된 상황이다.
왕의 조서에 따른다면,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원수의 생명과 재산을 아울러 빼앗을 수도 있었다(8,11).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이같이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원수들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 행위가 결코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연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원수들에 대한 자신들의 행위가 원수들을 멸하는 그 자체에만 의의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한편, 이렇게 함으로써 하만의 아들들의 재산은, 주인을 잃은 재산 일체는 왕에게 귀속됐던 고대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크레그세스 왕의 것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에스테르는 그 칙령의 시효기간을 다음날까지 연장할 것을 청하였다(13~14절). “그러자 에스테르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수사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오늘 어명에 따라 행한 것처럼 내일도 실행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고, 하만의 열 아들을 말뚝에 매달게 해 주십시오.’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분부하자, 수사에 어명이 공포되고 하만의 열 아들은 나무에 매달렸다”(13-14)
유다인들의 승리가 확실해 지자 모르도카이는 해마다 이날들 즉 아다르 달(2월경) 십사일과 십오일을 축일로 지내기를 공포한다(21~22절). “그들이 해마다 아다르 달 열나흗날과 열닷샛날을 축일로 지내도록 확정하였다. 이날은 유다인들이 원수들에게서 평안을 되찾은 날이고, 이 달에 근심이 기쁨으로, 애도가 경축의 날로 바뀌었으니, 이날을 잔치와 기쁨의 날로 지내면서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에게 선물을 하라고 지시하였다”(21-22).
푸림절에 대해 다시 한번 상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푸림절’은 모세오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다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지키는 민족 축일이다. ’푸림’이란 주사위를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불’(Pur)에서 유래되었다. 에스테르기에 나오는 하만이란 인물이 유다인들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할 때 그의 부하들이 주사위를 던져 날을 정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주사위로 택해진 유다인 멸망의 날이 오히려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되었다. 푸림절은 유다인들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기쁨과 생명으로 바뀌고, 원수 손에서 해방된 축제 날이므로 잔치를 벌이고 선물을 주고받는 축제를 벌인다.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은 에스테르의 용기와 지혜로 얻은 자신들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히브리력으로 마지막 달인 아다르 월(12월) 14, 15일을 ’푸림절’이라 하여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에스테르 왕후에 얽힌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유다인들에게 이 축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악이 멸망하고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탄원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살려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푸림절은 작은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들 마음 속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쁨의 축제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정권에게 탄압받던 유다인들은 히틀러를 하만에 비유하며 푸림절의 의미를 되새겼다고 한다. 푸림절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의식은 에스테르기를 읽는 것이다. 에스테르기를 읽기 전에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낸다. 이때 바치는 감사 기도는 하느님이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조상들을 구해 주시고 자신들을 살아 있게 하심을 감사드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에스테르서의 규정에 따라 푸림절에 유다인들은 친구들에게 먹을 것이나 술 등을 선물하고 적어도 두명 이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선물한다.
그리고 푸림절이 축제와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특별히 마련된 푸림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이날만큼은 유일하게 심하게 취할 정도로 술을 먹도록 허락하고 있다.
푸림절은 유다인 축제이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고 있다. 에스테르가 일생일대 결단을 내려야하는 순간 어떤 태도와 마음 자세를 가졌는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우선 금식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졌다. 연약한 한 여인으로 무섭고 두려웠지만 에스테르는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자신의 소명을 수행했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했던 그녀의 말에서 비장함마저 엿보인다(에스 4,16 참조). 우리 일생은 크고 작은 결단으로 이어져 있다.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에스테르는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에스 10,1-3⑪ 모르도카이가 위한 인물이 되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육지와 바다의 섬들에 조공을 부과하였다. 그의 강력하고 막강한 업적과 임금이 중용한 모르도카이의 위대함에 관한 자세한 사항들은 실제로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1-2).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이 식민지로부터 세금을 받는 일은 항상 계속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가 이와 같은 사실을 새삼 언급한 것은,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세금 징수와 관련한 대규모적인 개편 작업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선대(先代) 왕들이 이루어 놓은 세금제도를 자신이 다스렸던 형편에 맞게 개편하였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그리스와의 전쟁을 통해서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고, 또 그밖의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는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이 같은 영토의 변화에 따라서 그에 맞는 세금 징수 체계를 갖추어야만 했다.
여기서 '육지'(에레츠)는 인도에서부터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127개국'를 가리킬 것이다(1,1). 그리고 '바다의 섬들'(이예이)는 동부 지중해의 섬들과 그 해안 지방과 그 반대쪽 서부 해안 지방을 가리키느는 성서적 표현이다. 즉 '해안 지역'은 주로 팔레스틴의 지중해 연안, 즉 페니키아 사람들이 살던 시돈과 티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러한 1절은 페르시아 제국의 광대함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그리스와의 살라미 전투에서 패배한(기원전 479년) 후부터는 헤로도투스의 역사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행적'중 그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헤로도투스의 역사 기록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비옥한 땅을 일구며 타국에 예속해서 사느니보다 척박한 땅에 살며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었다'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그리스와의 전쟁을 삼가고 오직 그밖의 지역에 대한 정복전만을 펼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비록 그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2절에서 임금이 중요한 모르도카이의 위대함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모르도카이가 페르시아 제국의 제 2인자가 된 것을 강조해서 가리킨다(8,2). 이같이 모르도카이의 존귀케 됨은 곧 유다인들이 존귀케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상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에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언급은 다른 역사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앞에 기록된 내용이 정확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의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는 모르도카이가 역모자들의 음모를 고발했던 사실이 기록됐던 '궁중 일기'와는 전혀 다른 것인 듯하다. 이 '궁중 일기'에 왕실내의 문제들이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의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에는 보다 더 공적인, 그래서 보다 중대한 사실들이 실려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르도카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바로 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에 기록됐다는 것은 그와 유다인들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임금들의 일지'라고 한 것은 페르시아가 메디아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등 두 나라가 갖고 있는 긴밀한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스테르기는, 모르도카이야말로 진정한 유다인이요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종결된다(10,1-3).
에스테르기의 신학
① 여성의 역할: 구약 성경 대부분은 남성 등장인물에 의해 전개된다. 에스테르기도 예외는 아니다. 핵심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이는 모르도카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1경전의 중결부분에서도 확인된다. 모드로카이야말로 진정한 유다인이요 하느님의 모범이었음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테르기는 룻기, 유딧기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여성의 역할이 함께 부상시켜 놓는다. 이는 여성이 단지 남성의 장식물이나 호사품이 아님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가 점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4장부터이다. 단지 착하고 아름다운 왕후였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낼 만큼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구체적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② 하느님의 통치: 에스테르가 민족적 책임을 완수하며 유다 민족을 살려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비는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 에스테르는 임금이 부르기 전에 임금을 만날 수 없고 이를 어길 시 사형을 받는다는 법규를 설명한다. 에스테르는 이제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모험’을 단행한다. 에스테르는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서 그녀 자신과 민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었고, 그것을 위해 죽을 각오로 무장하는 자세였다. 자신을 죽이고 대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활동하시도록 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가장 신학적이며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③ 민족적 정체성: 에스테르는 자신의 신변보다 유다 민족 공동체의 신변을 우선시하고 임금 앞에 나선다. 그렇게 유다인들 각자는 이방인들 틈에 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러한 노력을 전제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직접적으로 보호해 주신다. 이러한 정체성 보존의 노력이야말로 유배와 그 이후의 식민통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성경저자가 피력하고자 했던, 에스테르기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본질적 신앙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