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尸祭)
시제(尸祭)에 관하여 고문헌의 내용과 최근 중국학계의 연구관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제는 하은주(夏商周) 삼대에 성행하였다가 전국시기에 쇠퇴하여 진(秦)나라와 서한시기에 사라지고 시동을 대신하여 신주(神主)을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나라시기에 시제 지내는 광경은 『시경』과 『좌전、襄公28년(기원전 545년』에 기록이 남아있는데 시동(尸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국시기부터 초혼할 때 비단에 죽은 사람의 화상을 그려서 초혼하여 복백(復魄)하여 장례를 치루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한대에는 이후에는 밤나무로 만든 목주(木主)를 신주(神主)로 사용하였습니다.
시제에서 먼저 시(尸)를 선발하는데 천자는 경(卿)으로 삼고 제후는 대부로 삼고 경대부 이하는 손자를 시동(尸童)으로 삼고 제물과 절을 올립니다. 손자를 시동으로 삼는 것은 당시 족외혼과 소목(昭穆)이라는 제도를 반영한 것입니다. 시동은 제사 받는 조상이 남성이면 남자 손자를 삼고 여성이면 부성(父姓)과 성이 다른 여자 손자를 삼았습니다.
시동의 자세도 왕조마다 달랐는데, 하(夏)나라에서는 1명이 서있는 자세이며 제물을 먹을 때에만 앉아서 먹고 은상(殷商)시기에는 1명이 앉아있는 자세이고 주(周)나라에서는 육묘(六廟)의 여섯 명 시동이 태조 후직(后稷)의 묘에 모여 앉아서 서로 술을 권하는 연회처럼 되었습니다.(夏立尸, 殷坐尸, 周旅酬六尸)
시제를 향시(飨尸, 잔치할 향)이라고도 하는데 상례(喪禮) 가운데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상례는 크게 둘로 나누어 기석례(既夕禮:送形而往, 돌아가신 부모님의 시신을 묘지에 묻어 형체를 보내는 절차)와 사우례(士虞禮:迎神而返, 사(士)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정기(精氣) 곧 영혼을 빈공(殯宮)으로 모셔와서 제사를 올리는 절차)가 있습니다. 제사에는 묘지에 묻기 전에 제사 지내는 전(奠:두 손으로 술을 올리는 뜻)과 묻은 뒤에 제사 지내는 우(虞:글자는 安의 뜻이며 영혼을 모셔와서 자리잡게 합니다 곧 安神한다는 뜻)가 있습니다. 다시 우제(虞祭)에는 세 가지 제사가 있는데 음염(陰厭:우제를 시작할 때 실내 가운데 일년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서북쪽에 제물을 차려놓고 지내는 제사)、향시(飨尸)、양염(陽厭:우제를 마칠 때 실내 가운데 햇볕이 잘 드는 서남쪽으로 제물을 옮겨놓고 지내는 제사)이 있었습니다.
향시(飨尸)가 우제(虞祭)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이며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제(擩祭)와 진제(振祭)가 있다. 먼저 시동이 묘문(廟門)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뒤에 제물을 먹기 전에 지내는 제사입니다. 유제는 제물을 간장(醬)이나 소금(鹽)에 담갔다가 꺼내며 먹지는 않는다. 진제는 제물을 간장이나 소금에 담갔다가 많이 묻은 것을 털어내고 한 입을 먹습니다. 둘째는 시동이 밥을 아홉 번 먹는다는 구반(九飯)이며 시동이 밥을 아홉 번 먹을 때마다 국(大羹)을 마시고 반찬을 먹습니다. 셋째는 시동에게 술잔을 올리는 것인데, 상주(喪主)가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 주부(主婦)가 둘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 문상객 가운데 어른이 셋째 술잔을 올리는 삼헌이 있습니다. 술잔을 올린 뒤에는 시동을 되돌려보내드리면서 술잔을 올리는데 앞에서처럼 세 번 술잔을 올립니다. 시동이 술잔을 다 받아 마셨으면 시동 자리에서 내려와 실내에서 나와서 당(堂)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하여 향시를 마칩니다.
시제와 관련하여 인(仁)과 효(孝) 두 글자를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인(仁)은 글자 모양이 시(尸) 글자 아래에 이(二)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시동에게 제사 올리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효(孝)는 시(尸) 글자 아래에 아들(子)가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중국의 고고학자 왕헌당(王獻唐, 1896—1960)은 1930년대에 부사년(傅斯年)、이제(李濟)、동작빈(董作賓) 등 유명한 고고학자와 함께 성자애 용산문화 유적지(城子崖龙山文化遗址)를 발굴하였고 또한 황염배(黃炎培)、유반농(劉半農)、고힐강(顧頡剛) 등 유명한 학자들과 학술을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의 전통문화가 염황(炎帝와 黃帝)의 두 갈래에서 유래하였으며 염제의 종족은 동이족에서 나왔고 동이족의 문화중심은 산동지역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학술저작은 『염황족문화고(炎黄氏族文化考)』가 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이(夷)와 인(仁)이 본래 같은 글자이었으나 나중에 나뉘어 다른 뜻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夷人一字,人仁通用) 뒤에 유문영(劉文英, 1939-현존)은 왕헌당의 주장을 이어받아 인(仁) 글자가 동이족의 상인우(相人偶)에서 유래하여 서로 평등하고 친애하는 뜻이라고 1990년 주장하였습니다. 두 학자는 인(仁) 글자가 동이족에서 유래하여 중국에 도입되었다고 보았는데 당시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仁) 글자의 동이족 외래설을을 부정하고 중국 고유의 시제(尸祭)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