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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 가옥, 낯설고도 친숙한] 오랜 전통 도시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구도심이나 소읍에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어 적산 가옥은 낯설고도 친숙한 존재다. 특히 군산, 목포, 강경, 구룡포 등 일제 강점기에 도시로 성장한 전국의 주요 항구 도시들에는 예외 없이 적산 가옥이 밀집하여 마치 100년 전 쯤으로 돌아간 듯한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관문이자 철저한 일본인의 도시 부산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도심인 중구와 영도구·서구 일대에 즐비하였던 일본인들의 주택과 상점은 그동안 많이 철거되었으나, 현재도 다수가 남아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 풍광을 보여 준다. 또 부도심인 동구와 진구·연제구 일대에도 일본인들의 별장 및 산업 시설과 관련된 적산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동구 수정동의 ‘부산 정란각(貞蘭閣)[등록 문화재 제330호]’, ‘부산 초량동 일식 가옥[일명 다나카 주택, 등록 문화재 제349호]’은 대표적 별장 건축물이다. 또 연제구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는 1930년대 동해 남부선 개통과 함께 철도국 직원들을 위한 연립형 관사가 다수 건축되어 현재까지 일부 남아 있다. 한편, 강서구 대저동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업 이민 정책에 따라 이주한 일본인 지주들의 대저택들이 멸실과 퇴락 속에서도 아직 41채나 현존하고 있다. 해방 후 적산 가옥은 그대로 미군정의 소유가 되어 대부분 일반인들에게 불하되었는데, 이를 둘러싸고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연히 해외에서 돌아온 전재민이나 독립 유공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기회주의자와 친일 모리배의 수중으로 흘러들어 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적산 가옥이란 그저 ‘주인 없는 떡’에 불과했고, 먼저 차지하면 임자였다. 대저동의 경우 인근의 소작인들이 이들 주택과 농지를 분배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황을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불하 이후 적산 가옥은 대부분 주거 기능을 유지하였지만, 일부는 식당, 사무실, 공장 등과 같은 용도로 활용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개보수를 겪었다. 또 주거용이라 하더라도 일본인의 생활 방식에 맞게 설계된 터라 우리 식으로의 구조 변경은 필수였다. 우선 방에 있는 다다미부터 걷어 내고 온돌을 깔았다. 또 우리 전통 가옥에는 없는 북쪽 현관을 막고 남쪽으로 다시 문을 내거나, 입식 부엌과 마루를 뜯어내 연탄아궁이를 놓기도 하였다. 겉모습만 ‘적산 가옥’일뿐, 속은 철저히 한국화가 진행된 것이다. 부산 최대의 섬 가덕도에도 대표적인 적산 가옥 마을이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외양포 마을이 그곳이다. 외양포 역시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그 집과 땅에 우리네 이웃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살아왔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사연이 있다. ‘적산 가옥이지만, 적산은 아니라’고 말하는 주민들의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적산이라기보다는, 우리 선조들이 살다가 일본군에게 쫓겨났다가, 해방되고 되찾은 거지예. 집이 다들 일본집이니까 적산 가옥이지만, 사실은 적산이 아니라. 우리도 선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커 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지예. 전해들은 이야기.” 김일환[75], 허순옥[72], 김광복[68] 세 분이 전하는 외양포 적산 가옥의 사연은 먼 기억 저편을 더듬으며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