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별, 어머니의 시학
―유혜영의 시
1.
유혜영은 2001년 등단한 이후 시집 풀잎처럼 나는, 통증 클리닉을 상재하는 등 꾸준한 시작(詩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이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 살필 다섯 편의 신작(新作)은 유혜영 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글은 한국시의 새로운 전진을 위한 낯선 동력으로서 시인 유혜영을 주목해 볼 것을 제안한다.
2.
사랑의 안쪽은 불같이 뜨겁고 바깥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그 경계에는 자연현상으로 늘 곰팡이가 덕지덕지 피어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켜켜이 쌓인 곰팡이들의 퀴퀴하고 눅눅한 침묵을 뚫고, 사랑으로 돌진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찬란한 것.
―「606호」 부분
이 시는 ‘사랑’을 다룬다. 규정할 수 없는 마음을, 아니 너무나 다양한 규정이 가능한 감정을 다루는 시가 여기에 있다. 유혜영에 따르면 사랑의 ‘내부’는 ‘불’을 닮았고, 사랑의 ‘외부’는 ‘얼음’에 가깝다. 불같이 뜨겁던 사랑이 어느 순간 얼음처럼 차가워진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시인의 판단은 정확하다.
유혜영이 바라보는 사랑이 개성적일 수 있는 대목은 사랑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사랑의 경계에서 ‘곰팡이’를 발견한다. ‘어둠’ 또는 ‘침묵’과 결속한 ‘곰팡이’를 극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별’과 악수하는 ‘사랑’의 하모니를 체험할 수 있다는 시인의 전언은 소중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온전히 견딘 자만이 만날 수 있는 사랑의 별이 더욱 찬란하게 솟아오를 것임을 믿는다.
별들이 저마다 고유번호를 반짝거리며 돌고
빙글빙글, 별빛 따라 세상이 돈다.
시계바늘이 돌고 술잔이 돌고 TV 채널이 돌고
피자 먹고 맴맴 치킨 먹고 맴맴
아버지 찦차 타고 맴맴 돌아오신다.
시작이 끝을 잡고 돌아 끝이 시작을 잡고 돌아
돌아돌아, 씽씽 돌아 눈알이 핑핑 돌아
순간 속도가 로켓을 따라잡았을까
별이 닥지닥지 붙은 코스모스가
활짝, 방대한 꽃잎을 열고 있다
꽃샘바람에 두 겹 세 겹 눈부심을 껴입는 꽃잎
한 아름 꺾어들면 우주가 들락날락
반짝반짝, 두 손에 별이 뜬다
―「복권 먹고 맴맴」 부분
‘맴’은 “제자리에서 서서 뱅뱅 도는 장난”을 가리키고 ‘맴맴’은 “아이들이 맴을 돌 때에 부르는 소리나 모양”을 뜻한다. 시인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이 돌고 있음을 발견한다. 유혜영은 이 세상을 “시계바늘이 돌고 술잔이 돌고 TV 채널이 돌고”, “시작이 끝을 잡고 돌아 끝이 시작을 잡고 돌아”가는 곳으로 파악한다.
독자는 이 모든 회전(回轉)의 배후에 ‘별’이 도사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의 고유번호를 반짝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은 ‘코스모스’로 연결되는데, 코스모스(cosmos)에 담긴 두 개의 개념이 긴요하다. 곧 코스모스는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인 동시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를 의미한다. 식물을 바라보며 세계를 생각하고 우주를 느끼는 시인이 바로 유혜영이다. 더불어 앞의 시 「606호」에도 등장한 바 있는 ‘별’은 그녀의 시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생살을 쭉쭉 찢어 밥숟가락에 얹어주는 여자
애인의 혀처럼 한번 맛보면 자꾸자꾸 떠오르는
그리운 입속에서 뜨거운 태양으로 뜨는 여자
화무십일홍 여린 꽃잎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 뿌려 쓰리고 아린 사랑
수 천 년 꽃피우는 여자
비결이라면 그저 맛있게 먹어주는 게 행복인 여자
주물럭주물럭 변덕스런 그대의 입맛대로
지지고 볶고 끓여 천의 맛으로 행복을 차린다
있다고 더 곱고 없다고 덜 고운 그런 사랑 아닌
그녀의 꽃말은
묵을수록 잘 우러나는 참 평등이다
오늘도 그녀를 맛있게 드시는 당신은
안녕하십니다
오매불망 진시황의 불로초를 훔친 저 여자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맨 처음 어머니다
어머니가 치마폭으로 간도 안치고
지구를 보쌈 한다
―「김치 사모곡」 전문
이 시는 ‘김치’를 사모(思慕)하는 곧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김치’를 ‘여자’ 또는 ‘그녀’ 또는 ‘어머니’에 비유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크고 간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모곡(思母曲)이 된다.
1연의 “생살을 쭉쭉 찢어”라는 표현에는 김치의 맛과 어머니의 사랑이 동시적으로 들어있다. 2연의 “애인의 혀”나 “뜨거운 태양” 같은 감각적인 어구 역시 김치의 맛과 어머니의 사랑을 아우른다. 김치를 맛있게 먹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행복하다.
유혜영에 따르면 어머니의 사랑은 “있다고 더 곱고 없다고 덜 고운 그런 사랑”이 아니다. ‘여자’의 사랑은 “참 평등”이기 때문이다. 이해타산을 떠난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특히 4연 4행의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맨 처음 어머니다”와 4연 6행의 “지구를 보쌈 한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빛나는 진술임에 틀림없다.
단풍잎 건네주고 이별이라네
울긋불긋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캄캄해지던 눈앞이 꽃등처럼 환하네
우리의 꽃등이 불을 밝히는 순간
불꽃처럼 타오르는 황홀한 이야기가 있네
다가가면 데일 줄 알면서 멈출 수가 없네
붉은 이야기에 구워진 붉은 이별
노란 이야기에 구워진 노란 이별
꽃등을 밝혀든 숲으로 이별이 찬란하네
만날 때는 꺼질세라 심지를 돋우지만
떠날 때는 미련 없이 심지를 내리네
만남과 이별이 한 끈인 것을 모르네
이별이 무르익어 오색찬란한 가을 산으로
단풍 구경을 가네 꽃등을 밝혀드네
―「이별법」 전문
당신과 나의 일상은 늘 바쁘다. 분주한 일상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우리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망각한다. 가령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예외적인 상황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동료를 만나고, 지인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자식을 만난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만남은 영원히 지속될 수가 없다. 이별 또는 소멸을 맞이하는 일은 모든 유기체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유혜영의 시 「이별법」은 만남과 이별의 생리(生理)를 묘파한 수작(秀作)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이별은 ‘단풍(잎)’, ‘울긋불긋’, ‘꽃등’, ‘붉은’, ‘노란’, ‘오색찬란한’ 등의 표현과 긴밀하게 결속한다. 그녀는 ‘단풍’ 또는 ‘꽃등’으로 물든 ‘가을 산’의 정경을 이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배경으로 선택한다. 화려한 단풍은 꺼지기 직전의 등불과 같아서 이별의 아픔을 심화시킨다. 이 작품의 1연 2행에는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가수 정훈희가 부른 노래 <꽃밭에서>의 가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점검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꽃밭에서>의 가사 중에는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 ‘이렇게 좋은 날’에 현재 화자 곁에 없는 ‘그 님’이 오신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겠다. 곧 정훈희의 노래 <꽃밭에서>와 유혜영의 시 「이별법」의 관계는 ‘노래’와 ‘시’의 생산적인 대화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시의 1연 10행~1연 12행인 “만날 때는 꺼질세라 심지를 돋우지만/ 떠날 때는 미련 없이 심지를 내리네/ 만남과 이별이 한 끈인 것을 모르네”라는 진술은 한용운 시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곧 시 「님의 침묵」의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와 시 「알 수 없어요」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등의 진술은 유혜영 시인이 한용운 시의 창조적인 계승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내려다보며 위로를 받지
저 아래
한 치 두 치를 다투며 한 뼘 웃음을 경작하는
하나쯤 없어도 그만인 장미꽃을 내려다보며
자세히 보아야 눈에 띄는 작은 등을 쓸어주며
나를 높은 가슴을 내밀고 한바탕 크게 웃어보지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위로가 따라붙지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힘겹게 오르는 군상들
허둥허둥 마음이 발보다 앞서가는 거기
거룩하게 올려다보는 거기에 부끄러운 구원이 있지
아찔, 꽃잎이 한순간에 허당을 짚지
누구도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지 않아
허당에 빠지는 웃음이 진화한 헛웃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하게 웃음을 사기 치지
맨 꼭대기여서 생산도 소비도 떨어질밖에
크게 쥐어봤자 콩알만 한 웃음이지만
콩알도 반쪽씩 나누면서 배로 배로 영역을 늘여 가면
세상에 모든 땅 위에 흐드러지는 웃음, 웃음소리
하늘 아래 제일 높은 달동네는 바람도 높아
솔솔, 아래 동네로 위로의 웃음을 실어 보내지
―「윗동네에서 살기」 전문
전 5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관심사는 ‘윗동네’이다. ‘윗동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동네’를 파악해야 한다. ‘아래 동네’의 속성은 3연에 제시되는 ‘부끄러운 구원’, ‘허당’, ‘헛웃음’, ‘사기’ 등 일련의 표현에 잘 담겨있다. ‘군상들’이 활보하는 ‘아래 동네’에서는 ‘정상’을 향하는 길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곳에는 진정(眞情)이 없다. 세속의 관점에서 출세(出世)와 영달(榮達)을 꿈꾸는 장소가 ‘아래 동네’인 것이다.
‘아래 동네’와는 다른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이 바로 ‘윗동네’이다. 시인에 따르면 ‘윗동네’는 “하늘 아래 제일 높은 달동네”이다. ‘달동네’ 곧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아래 동네’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윗동네 또는 달동네에는 “콩알만 한 웃음”이 있다. 이곳의 ‘웃음’은 아래 동네의 ‘헛웃음’과는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기에 콩알만 한 웃음이, 아주 작은 웃음이 있을 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콩알도 반쪽씩 나누면서” 서로를 배려할 줄 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인 윗동네 또는 달동네는 진정한 ‘위로’가 가능한 공간이다. 유혜영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이 천국(天國)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3.
이 글은 유혜영의 시 다섯 편을 검토함으로써 시인의 시 세계를 고찰하였다. 유혜영 시의 개성을 담당하는 요소 중 하나는 ‘사랑’이다. 어둠’ 또는 ‘침묵’과 결속한 ‘곰팡이’를 극복할 때, 비로소 ‘별’과 악수하는 ‘사랑’의 하모니를 체험할 수 있다는 유혜영의 시적 전언은 소중하다.
‘별’은 그녀의 시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별은 ‘코스모스’로 연결되는데, 코스모스(cosmos)에 담긴 두 개의 개념이 긴요하다. 곧 코스모스는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인 동시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를 의미한다. 식물을 바라보며 우주를 느끼는 시인이 바로 유혜영이다.
시 「김치 사모곡」은 ‘김치’를 사모(思慕)하는 곧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김치’를 ‘어머니’에 비유한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크고 간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모곡(思母曲)이 된다.
유혜영의 시 「이별법」과 정훈희의 노래 <꽃밭에서>의 관계는 ‘시’와 ‘노래’의 생산적인 대화이다. 시인은 또한 한용운 시의 창조적인 계승자이다. 유혜영은 한용운의 절창(絶唱)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와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실천한다.
시 「윗동네에서 살기」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인 윗동네 또는 달동네가 진정한 ‘위로’의 공간임을 알려준다. 유혜영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이 천국(天國)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필자 : 권 온(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약력 : 2008년 계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비평)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