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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반경환의 명언집 제2권으로 기획되었으며, 몽테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등까지 한 권의 책을 다 썼지만, 발표지면을 얻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고,열심히 공부하며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다듬었던 사상가들의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소개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짓말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범죄자보다도 이 거짓말쟁이를 마땅히 화형火刑에 처해야 될 줄을 믿는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1533년 프랑스 페리고르주州(몽테뉴)의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고, 파리고등법원의 판사와 보르도의 시장을 지냈으며, 1592년에 사망을 했다. 몽테뉴는 1571년 38세의 나이에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건강에 이로운 숲속을 거닐면서 천하 제일의 사상가의 삶을 살다가 갔다고 할 수가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상서이며,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가 있다. 몽테뉴와 {수상록}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그의 {수상록}과 함께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수정란 세포를 줄기세포라고 전세계를 향하여 공갈포를 쏘아댔던 황우석 서울대 교수, 1조원 대의 비자금을 은닉해놓고도 자기 자신의 재산이 단 돈 29만원 뿐이라던 전두환 대통령, 세계적인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서 월 평균 1조원 이상의 수익을 창출해내고 있는 오바마의 현자인 워런 버핏(워런 버핏은 더욱더 가증스럽게도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을 운영하는 투자의 달인이고, 그가 투자하는 회사는 다 전도가 유망한 우량 회사인 것이다), 이밖에도 조지 소로스, 빌 케이츠 같은 세계적인 갑부들은 모두가 다 같이 천하에 제일가는 거짓말쟁이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거짓말쟁이들이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학자들과 로마 교황의 말을 비웃으면서, 소수 1%의 부자들의 지상낙원만을 연출해놓고 있는 것이다.
‘유전무죄--무전유죄’인 세상에서는 도둑이 매체를 드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예법禮法’만이 난무하게 된다.
행幸, 불행不幸은 대체로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꿈이 있으면 행복하고, 꿈이 없으면 불행하다.
반 고호, 폴 고갱, 모차르트, 베토벤 등은 배우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갔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던 것이다.
꿈이 있는 자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꿈이 있는 자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나 천하의 대로를 걸어가면서, 온몸으로 꿈을 추구해나가는 것, 비록, 그 길이 온갖 가시밭길과 실패 뿐인 삶일지라도 결코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모든 행복은 마치, 예수처럼 순교자의 행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에 의해 괴로움을 당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황금은 가장 소중한 것이며, 모든 인간이 가장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황금은 그 자체로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쓰임새 때문에 부귀영화의 상징이 되고, 따라서 이 황금 때문에 수많은 다툼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황금은 음식물도 아니고, 더, 더군다나 불로장생의 의약품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나 이 황금은 부귀영화의 상징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면종복배시킬 수 있는 권력의 대들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황금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황금이 의미하고 있는 부귀영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애, 국가, 천황폐하, 부모형제, 아내, 자식, 자유, 평화, 사랑, 종교에 대한 상징 조작(의미부여)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다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가난과 고통을 우리의 중요한 적수敵手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죽음을 어떤 사람들은 “두려운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지주支柱”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연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이요, 우리의 자유의 유일한 지주요, 모든 불행에 대하여 가장 잘 듣는 약방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가난에 대한 만병통치약도 죽음이고,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도 죽음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연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이요, 우리의 자유의 유일한 지주요, 모든 불행에 대하여 가장 잘 듣는 약방문”인 것이다.
나는 이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을 위하여, 그 어떠한 가난과 고통도 참고 살아왔던 것이다.
당신도, 당신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에서, 그 일인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아갈 만한 용기가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행복의 연주자인 것이다.
나는 천재생산의 교수법을 지닌 낙천주의의 사상가이며,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해나갈 능력을 갖고 있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킬 능력과 함께, 소위 주변의 4대 강대국들을 설득시키고, 남북통일의 대위업을 달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오오, 그러나 나는 오직 5천만 명 중의 단 하나 뿐인 낙천주의의 사상가일 뿐이다.
오오, ‘피론의 돼지’만도 못한 우리 한국인들이여!!
어떤 사상을 막론하고 그 힘은 대단히 강하여 사람들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좀처럼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사상이며, 이 사상의 힘은 그 어떠한 원자폭탄이나 쓰나미의 힘보다도 더욱더 강력하고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스의 법률을 페르시아의 법률로 바꾸는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그리스인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기 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선택했던 수많은 유태인들, 일제의 창씨 개명과 내선일체 운동에 반대하고 끝끝내 비명횡사를 선택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끝끝내 미전향의 장기수로서 가장 처절하고 장렬한 옥사獄死를 선택했던 한국전쟁 후의 공산주의자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기독교사상, 불교사상, 공산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염세주의, 낙천주의 등의 사상은 마치 지상낙원처럼 더없이 아름답고 휘황찬란하며, 우리 인간들은 이 사상의 불꽃을 쫓아서 살아가는 소위 불나비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만이 아름답고, 사상만이 위대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이 사상(제국주의)을 선점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혈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상가가 아닌 학자는 다만 기생충이거나 바보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비옥한 문전옥답이며,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보금자리인 것이다.
돈은 그 무게만큼 소중히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돈 쓴 값어치를 헛된 비용으로 하지 않는다. 사들인 값이 다이아몬드를 귀하게 만들고 덕은 그 수도의 어려움으로, 신앙은 그 고행으로, 그리고 약은 그 쓴맛이 가치를 결정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고 가장 희귀한 것이 가장 값비싼 재화(보물)가 되는 것이고, 가장 쓰임새가 많고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천하 제일의 명장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 값이 그것의 가치를 결정하고, 덕은 수도의 어려움으로 그것의 가치를 결정한다. 신앙은 수도의 어려움으로 그것의 가치를 결정하고, 약은 쓴맛으로 그것의 가치를 결정한다.
인생은 예술이다.
우리는 더없이 비천하고 어리석은 광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나 이 광대라는 천역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예술가의 그것으로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어깨에서 금강송이 자라나고, 구렛나루에서 새들이 둥지를 틀 때까지, 오직 고행을 하고, 또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으른 자에게는 학문 연구가, 술꾼에게는 금주가 큰 고통인 것 같이 사치를 즐기는 자에게는 검소한 생활이 고행이며, 연약한 자에게는 노동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나는 일찍이 고통의 주인이며, 죽음의 신의 맏형님이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고통을 다스리고 죽음의 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무엇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나는 고통에게, 죽음의 신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게으른 학자들과 술꾼들과 사치를 즐기는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불행의 몽둥이로 다스리라”고 명령을 해둔 적이 있었다.
고통을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하는 낙천주의자이고, 죽음의 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는 그 죽음마저도 행복하게 생각하는 낙천주의자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죽음은 산소와도 같고, 이 세상의 숨구멍과도 같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숨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삶의 숨구멍인 것이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모른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그의 나이 30대 때, 그 명문귀족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매일매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해두었다고 한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까, 그의 마음이 더없이 맑고 깨끗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고,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까, 그의 행동이 더없이 거침없고 자유분방하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유인의 수상록이며, 언제, 어느 때나 비굴한 굴종을 몰랐던 사상가의 행복론이다.
사람들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자는 곧 사는 법을 가르쳐 주게 되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옛 그리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은 죽어가는 첫 걸음이다/ 사망은 탄생의 결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하의 뱃사공인 카론은 그의 아버지인 사투르누스에게 ‘영생불사의 조건’을 듣고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이며, 자유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이 수용소 군도와도 같다는 것을 뜻한다.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은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연출해낸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나는 말한다.
빨리 죽는 것은 애국하는 것이며, 모든 자식들을 다 효자로 만드는 것이고, 단 하나뿐인 지구를 더욱더 푸르게 살리는 것이다.
내게 이로운 것은 남에게 해롭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대영주의 아들이자 명문귀족의 신분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진정한 사상가였다. 사상가란 지적 자산의 대가이며, 이 지적 자산의 대가가 그야말로 세속적인 돈과 명예와 권력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게 이로운 것은 남에게 해롭다.”
이 말은 정치 경제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명문귀족의 출신이면서도 그 명문귀족의 사악한 탐욕을 고발하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최고의 이윤법칙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간 관계를 가장 날카롭게 예리하게 고발하고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농부에게는 곡식값이 비싸야 하고, 건축가는 집이 쉬 무너져야 하며, 재판소 관리들은 사람들이 소송을 하며 다투어야 하고, 성직자들의 영광과 직무까지도 우리들의 죽음과 악덕이 없이는 안 될 말이다. 의사는 친구의 건강도 달가워 하지 않으며, 군인은 자기 나라의 평화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옛 그리스의 희극 작가는 말하였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언짢은 것은 우리네 각자가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 소망은 거의 다른 사람의 손해가 되는 데서 비롯되는 일들이다.(몽테뉴)”
그렇다.
나의 이익만이 전지전능한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시대에, “내게 이로운 것은 남에게 해롭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는 그 어떠한 이익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텅 비운 삶의 태도가 세속적인 몽테뉴를 세계적인 사상가로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습관은 우리의 판단력과 신념까지도 좌우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습관은 철두철미하게 노예민족의 습관이지, 고귀한 민족의 습관이 아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하고 가장 예리하게 발달한 감각은 권력에 대한 감각이지만, 그러나 이 권력에 대한 감각은 스스로 권력을 창출해내고 세계적인 대제국을 창출해내겠다는 민족주의적인 꿈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요컨대 우리 한국인들의 권력에 대한 감각은 어느 나라가 가장 힘이 세냐라는 것과 함께, 그 강대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주를 정복하고, 대중국을 정복하고, 그리하여 세계적인 고려제국을 건설했어야 할 이성계가 자기 자신의 주군인 우왕과 최영 장군을 살해했던 대역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자기 자신의 조국을 명나라에게 가져다가 바쳤던 이성계는 그야 말로 사대주의의 화신이며, 대명제국의 총독부의 수괴----조선의 태조가 아니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는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 지나쳐서 병자호란의 화를 자초를 했고, 또다시 그야말로 오랑캐에 불과했던 청나라에 대한 충성이 지나쳐서 대일본제국에 예속되는 화를 자초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다가 갖다 바친 노예국가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 땅의 지배계급의 인사들은 아직도 사대주의를 최고의 국시國是로 여기며, 미제국주의의 품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를 않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의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반환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시킨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가 다 죽는다는 위기의식으로 사대주의라는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일본, 미국을 그처럼 섬겨왔고, 그때마다 그 ‘사대주의의 허망함과 치욕’을 겪어왔으면서도,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한국인들 스스로가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할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이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한다면, 마치, 오늘날의 유태인들처럼 세계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해내고, 대한제국의 언어인 한국어로 전세계를 호령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에게, 더럽고 추한 것은 더럽고 추한 민족에게......!!’
우리 한국인들은 ‘지혜 싸움의 대투쟁’, 즉,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에서 영원히 승리할 수 없는 민족이고, 즉, 사대주의를 향하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복종하는 습관을 지닌 더럽고 추한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의 공창公娼이 있는가 하면 남자들끼리 결혼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 전장에 나가면 지휘권도 갖는 곳이 있다. 반지를 코에 낄 뿐만 아니라, 입술이나 뺨에나 발가락에도 끼며, 금으로 된 링을 젖꼭지나 볼기짝에 끼우는 곳도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손을 허벅다리나 불알이나 발바닥에 문대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리고 상속권이 아들 딸에게 있지 않고 형제나 조카에게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임금의 상속권만 제외하고 조카에게만 이를 인정하는 곳도 있다.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는데 어떤 고급관리는 토지 경작에 대한 일과 각자의 소요에 따라서 생산품을 나누는 직무를 맡는다. 어린 아이가 죽으면 슬퍼하고 늙은이가 죽으면 잔치를 하는 곳도 있으며, 열 내지 열두 쌍의 부부가 함께 취침하는 곳도 있다.(몽테뉴)”
“어느 고장에서는 사람을 잡아먹고, 어떤 고장에서는 아버지가 늙으면 죽여버리는 것이 효도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아직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 가운데서 아버지가 어떤 아이는 기르고 어떤 아이는 죽이라고 명령한다. 어떤 데서는 늙은이들이 자기 아내를 젊은이들에게 빌려준다. 또 어떤 곳에서는 여자를 공동으로 소유하여도 죄가 되지를 않는다. 여자들은 관계한 남자들의 수만큼 털실로 된 방울을 옷깃에 달고 있는데, 많이 달릴수록 영광이 된다. 심지어 습관은 여인의 나라를 따로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군대를 편성하여 손에 무기를 들고 전쟁도 하였던 것이다.(몽테뉴)”
무사들은 모욕을 참는 자는 명예와 귀족의 지위를 반드시 빼앗기게 되어 있으며, 서민 가 운데에는 원수를 갚는 자는 반드시 목베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그 옛날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인간평등’이라는 말이 없었고, 그 모든 것이 주인(귀족)과 노예(천민)라는 신분 속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노예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던 것이다. 주인과 노예 사이는 전쟁에 의하여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신분 이동이 없었던 사이이고, 한 번 주인(또는 노예)은 영원한 주인(또는 노예)이 되었던 것이다.
무사는 모욕을 참으면 그 명예와 귀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 말은 최고의 지배계급의 인사로서 그 품격을 유지하고 장차 국가를 이끌고 나갈 문화적 영웅이 되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고, 그 결과, 사생결단식의 ‘최후의 결투’가 합법화되었던 것이다. ‘오점 없는 명예’가 최고의 미덕이며, 모든 무사의 훈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사회적 천민이 원한 맺힌 복수감정을 갖게 되면, 그것은 계급사회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대역죄인의 씨앗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천민은 가차없이 목을 베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예는 생명이 있는 도구요, 도구는 생명이 없는 노예이다(아리스토텔레스).
오늘날의 만인평등 사회는 그 계급사회가 해체된 문화적 무질서의 사회----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사회----를 거쳐서, 이제는 부자(주인)와 가난한 자(노예)의 계급사회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모든 싸움은 계급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적이던 너에게 명령하듯이 반역자인 너에게 나는 명령한다. 오늘부터 우리 사이에 우애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너에게 명령을 내리는 나와 이 명령을 내게서 받는 너와 어느 쪽이 더 진실한가 시험해 보자꾸나.”
----몽테뉴, {수상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와 로마의 집정관인 신나는 일란성 쌍생아이자 원수형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꿈은 모두가 다같이 최고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지극히 애석하게도 동일한 국가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대역죄인인 신나를 그의 아내의 말에 따라서 용서를 해주었고, 그 신나에게 대집정관의 지위를 부여해주었던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이러한 관용의 미덕이 하나님의 마음도 감동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남의 지식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의 분별력이 맥을 못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을 정신적 곱사등이라고 부른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곱사등이는 척추가 기형인 곱추이며, 대부분이 얼굴이 못생긴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우생학적인 입장에서는 하루바삐 소멸되어야 할 불구자이지만, 그러나 이 곱사등이보다는 기생 오래비같은 우리 학자들이 더 큰 불구자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버드 박사, 프린스턴 박사, 예일대 박사, 파리 제일대학의 박사, 베를린 대학의 박사, 옥스퍼드의 박사 등, 해외 명문대학교의 박사들이 양어장의 미꾸라지처럼 득시글대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박사들은 모두들 다같이 불임의 환관들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미셸 푸코, 데리다, 아인시타인, 스티븐 호킹 등----, 우리 학자들은 말끝마다 이 세계적인 석학들을 들먹이지만, 그러나 좀처럼 자기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는 못한다.
모든 학문의 성과는 사상과 이론으로 열매를 맺게 되고, 자기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명함도 내밀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 학자들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치욕적인 입시지옥으로 이 땅의 백만 두뇌들을 모조리 거세시켜 놓고도, 왜, 그처럼 잘 났는지, 여기 저기서 자기 찬양의 말들만을 뱉어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학문은 환관들을 위한 환관들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온 거와 같은 교육법으로는 선생도 학생도 점점 박식하게 될 뿐 조금도 유능한 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학부형들의 배려와 비용은 오직 우리들의 머릿속에 학문을 쑤셔넣는 데만 쏟고 있으며, 사물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나 덕행은 전혀 도외시하고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우리 학자들 중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모르는 학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 학자들 역시도 입만 열면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비록, 입에 발린 말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강조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사상과 이론의 중요성을 결코 역설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사상과 이론을 정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학자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모든 대학사회와 교육제도를 움켜쥐고서, 미셸 푸코, 데리다, 들뢰즈,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결코 나올 수가 없도록,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주입식 교육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부 시간을 자랑하는 우리 한국인들이 사교육비가 전혀 들지 않는 문화선진국보다도 수천 배나 뒤떨어진 열등생들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우리 학자들의 희생양이며, 대한민국 교육제도는 이 학자라는 탈을 쓴 밀렵사냥꾼들의 사냥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학자들은 결코 학부형들의 피눈물 나는 희생과 그 비용은 결코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미래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여 대한제국의 신화를 창출해내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모든 가치들을 창출해낼 수 없는 표절의 대가들만을 양산해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대한민국 학문의 최대의 성과는 표절이며, 이 표절의 대가들이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한, 영원히 이민족에 의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식의 세계적인 교육제도는 사교육비가 하나도 들지 않고, 그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제도를 통하여 세계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해내는데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은 사교육비가 하나도 들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 한국인들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노벨상 수상의 잔치쇼로 그 대미를 장식하게 해줄 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교육비가 하나도 들지 않으면 출산율이 늘어나고, 출산율이 늘어나면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도 어느 정도 해소된다.
우리는 현재의 산 지식을 지닐 때 비로소 지식 계급이 될 수 있다. 과거의 지식이나 미래의 지식으로 지식 계급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동남아의 싱가폴이 해외명문대학을 유치하여 명실공히 아시아의 교육중심국가를 꿈꾸고 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중국인 학자대회’를 개최하고, 그 석학들을 모셔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위대한 중화민국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대학들도 세계적인 석학들을 그 대학의 총장으로 모셔 오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카타르와 아랍에미레이트마저도 이제는 세계적인 명문대학교를 유치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사활적인 운명을 걸고 있는 것이다.
오오, 우리 한국인들이여,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전자 역시도 애플사의 특허권 침해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듯이, 더 이상 조립식 완제품의 생산으로는 가망이 없는 것이다.
우리 학자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하지 않는 한, 우리 한국인들은 짝퉁 제조업자의 신세를 결코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자의 경쟁력은 국가의 경쟁력이고, 국가의 경쟁력은 학자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키케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플라톤의 견해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하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대관절 우리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문제삼지 않는다. 말은 앵무새도 할 줄 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우리 학자들이 글을 쓸 때, 타인의 생각을 빌어오는 세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처럼 그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인용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고 상호 경쟁적인 관계에 있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용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없으니까, 마구잡이로 타인의 생각을 인용하는 것이다.
몽테뉴가 “키케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플라톤의 견해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고 조롱하고 있듯이, 우리 학자들은 대부분이 이 마지막 세 번째의 부류에 해당된다.
자기 자신의 말과 사유로 글을 쓰고 있으면 그 문장이 싱싱하게 살아 있으며, 그의 사유(사상)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덧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의 문장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독서삼매란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는 아주 황홀한 몰입의 상태를 말하게 된다.
모든 고전은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으로 되어 있고, 그 붉디 붉은 피는 모든 인류의 생명의 피가 된다.
오오, 우리 한국인들이여! 소크라테스, 플라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쇼펜하우어의 추종자가 되지를 말고, 부디 부디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거라!
나는 때묻은 마음보다 남루한 옷에 더욱 신경을 쓰는 자를 싫어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꿈은 크게, 생활은 검소하게!’가 나의 일상생활의 신조이다.
나는 특별히 문단행사에 참여하거나 결혼식이나 상갓집을 갈 때 이외에는 대부분이 등산복을 입거나 작업복을 입고 지낸다.
나는 머리, 의복, 얼굴, 구두, 모자, 화장품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나의 눈빛이며, 이 눈빛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낙천주의 사상을 정립한 내가 그 따위 외관 때문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이다. 이병철이든, 정주영이든, 이건희이든, 그 어느 누구이든지간에 모든 한국인들은 나의 충복忠僕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가란 인간 중의 인간이며, 그 거룩함이 하나님과도 같은 인물을 말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인도해가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란 선용善用되지 않으면 악용惡用되기 쉬우며,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이러한 학문에서 이들을 얻게끔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아리스티포스(그리스 철학자. 쾌락설의 주창자)의 학교에서 불량아가 나오고, 제논(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금욕주의자)의 학교에서 야만인이 나왔던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학문이 선용善用되면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도 있지만, 학문이 악용惡用되면 미리부터 암을 걱정하여 유방을 절제하게 된다.
학문이 선용되면 자유와 행복으로 충만한 사회를 건설할 수도 있지만, 학문이 악용되면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을 초래해 놓고, 모든 국가의 비용을 그 산송장들을 먹여 살리는데 쓰게 된다.
사교의 극치는 우정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에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형제와 형제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참다운 친구 사이란 이 언어의 장벽이 없는 사이를 말한다.
우정에는 손해가 없다.
친구를 믿고 신뢰했던 만큼 그 어떤 손해도 참다운 우정으로 꽃 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비겁한 삶을 거절하고 그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고 죽어간 아킬레스처럼----.
우정은 ‘오점 없는 명예’를 위해 존재한다.
나의 의사를 친구의 의사로 삼고, 친구의 의사를 나의 의사로 삼는다.
이 ‘이체동심異體同心의 세계’는 ‘일체동심一體同心’이라는 부부 사이보다도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하다.
야심은 우리에게 고독을 맛보게 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데카르트도, 스피노자도, 라이프니츠도,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반 고호도, 폴 고갱도, 보들레르도, 랭보도, 살아 생전 단 한 사람의 친구도 사귀지를 못했다.
동시대를 앞서가고, 머나먼 미래에서 되돌아올 줄 알았던 예언자의 운명은 대부분이 비극적이고, 고독은 그 비극의 진수가 되었던 것이다.
야심이 있다는 것은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고,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그가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쇠사슬을 언제나 지고 다닌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니고, 전 세계의 모든 인사들을 다 사귀었어도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민족이라는 것, 어떤 종교인이라는 것, 어느 정당이나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누구누구의 자손이며, 누구누구의 아버지라는 것, 자기 자신의 업적은 무엇이며 미완의 과제는 무엇이냐는 것, 어떠한 상을 받고 어떠한 죄를 지었느냐는 것----.
그는 한평생 자기 자신의 짐만을 지고 다닌 수형자受刑者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고독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참된 고독이다. 이러한 고독은 네거리에서도 궁정안에서도 한결같이 즐길 수 있다. 다만 혼자 있을 때에는 더욱 쉽게 즐길 수 있을 뿐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거의 30년 동안을 살았던 다니엘 디포의 소설적 인물이다.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천만 평의 문전옥답도 필요가 없었고,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했던 다이아몬드의 광산도 필요가 없었다.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최소한도의 음식물과 오직 비바람을 막아 줄 보금자리만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위대성은 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인간이 그토록 가혹하고 혹독했던 최악의 생존조건을 극복해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독에 질식하거나 압사壓死를 당하지 않는다면 고독처럼 더욱더 아름답고 생산적인 여신도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고독, 천재를 낳고 천재를 젖 먹여 길러주는 고독, 생살이 타는 아픔과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마저도 참고 견디게 해주는 고독----.
고독은 모든 위대함의 어머니인 것이다.
만인들로부터 달아나 오직 단 하나뿐인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자는 이 고독 속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오, 과연 그대는 이 ‘반경환’이처럼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단 하나뿐인 생명을 걸고, 수십 년 동안이나 수행할 능력이 있단 말인가?
오오, 대한민국이 아닌 추한민국의 국민들이여!
왜, 그대들은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배가 그토록 고맙고 하늘이 베풀어준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대일본제국을 정복할 수 있는 한국정신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한 번의 패배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며, 모든 제국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이민족에 의한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놀라시市 야만 민족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그곳 주교이던 파울리누스는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이런 손실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여 주소서. 주님도 아시다시피 그들이 저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나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를 부자로 만든 마음의 재산과 그를 선량하게 한 의義는 여전히 그의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도저히 손해를 볼 수 없는 재보를 그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감히 발길을 들여놓을 수 없는, 따라서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엿볼 수 없는 곳에 그것을 감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아내도 있어야 한다. 자식도 있어야 한다. 재물도 있어야 한다. 특히 건강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이 오직 그런 데만 있다고 이에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완전히 우리의 것이며 무엇으로도 빼앗길 염려가 없는 골방을 하나 장만해 놓고 거기에 참된 자유, 즉, 참된 고독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들 자신과 이야기해야 한다. 어떤 친구도 참견하지 않는 깊은 마음 속의 밀어를 이야기하여 아내도, 자식도, 재물도, 공물도, 하인도 없는 외톨이가 되어 방언대소放言大笑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처자나 재물이 다 없어지는 경우에 봉착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은 자기를 반성할 수 있다. 자기를 친구로 삼을 수도 있다. 심령은 공격할 것, 방어할 것, 줄 것, 받을 것 등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고독 속에서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배우는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나는 너무나도 뒤늦게 나이 삼십이 다 되어서 문학공부를 시작했지만, 지난 30여년 동안은 그야말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도 아까워하면서 공부를 했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 낙천주의의 사상과 이론을 대한민국 최초로 정립했지만, 이제는 어느덧 이 ‘반경환이의 시대’도 그 종말을 고할 때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덧 내 나이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의 환갑의 나이가 되었고, 이제는 그 옛날처럼 무한한 열정으로 자기 자신의 꿈만을 쫓아갈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적어도 3년 동안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대한제국의 신민으로서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리고 플라톤보다도 더 뛰어난 ‘국가론’을 쓰기 위하여 정치 경제학과 서양의 민주주의와 근대사상을 공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의 가난 앞에 두 손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보훈병원의 간호사로서 백수건달과도 같았던 남편을 이렇다 할 잔소리 하나 없이 뒷바라지 해왔던 아내의 노후와 이제 마악 대학생이 된 두 아이들의 장래와, 그리고 나의 분신과도 같은 {애지}의 안정적인 발간과 자립을 위하여 그 ‘국가론’의 고귀하고 웅대한 꿈을 접고, ‘도서출판 지혜’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시정잡배와도 같은 장사꾼이 아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오전에만 잠깐 사무실에 나갔다가 곧바로 유성도서관으로 출근을 한다. 유성도서관의 정기간행물실은 나의 이상적인 천국이며, 그 모든 번민이 사라지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문장들} 1, 2권과 {반경환 명구산책} 1, 2, 3권을 썼고, 이제는 이 {반경환 명언집}을 쓰고 있다.
나는 날마다 잠깐씩 외출을 했다가 이처럼 언제, 어느 때나 내 자리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나의 꿈은 이제 ‘애지문화재단’을 설립----한 여름밤의 잠꼬대 같은 헛소리이기는 하지만----하는 것이고, ‘애지문화재단’을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 우리 한국인들과 우리 한국어의 영광을 위하여 그 초석礎石을 마련해보고 싶은 것이다.
어느 날 강신용 시인이 나의 사무실에 들렸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멋진 글을 쓰고 있는 반경환이가 이처럼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네.”
오오,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낙천주의 사상가의 길이여!!
“낙천주의자는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인간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천주의자에게 있어서 세계는 범죄의 표상이며, 그는 신성모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낙천주의자는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낙천주의자의 제일의 법칙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해나가는 방법인 것이다({행복의 깊이 2}).”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인간과 짐승 사이보다 더 멀다고 할 수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민주주의 사상은 만인평등이며, 그것은 정치체제의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생존경쟁은 자연의 법칙이며, 자연의 법칙은 우생학에 맞닿아 있다.
우월한 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소멸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몽테뉴의 이 말을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보다도 더 크다”라고 해석하고, 그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광신적인 민족주의와 그 제국주의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가공할 만한 인구의 증가와 함께 생태환경의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쟁과 가난은 자연의 인구법칙이라는 맬서스의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반사회적인 정치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하기보다는 복종하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복종을 하는 일은 서, 너 살의 어린 아이도 할 수가 있지만, 지배를 하는 일은 적어도 3, 4십 년 동안은 공부를 하고, 그가 소속된 집단이나 정당의 생활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권력의 힘인 것이다.
지배를 하는 자는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나야 하고, 타인의 말을 들어야 할 때와 자기 자신의 말을 해야 할 때, 타협을 해야 할 때와 타협을 하지 않아야 할 때, 용서를 해야 할 때와 용서를 하지 말아야 할 때, 전쟁을 해야 할 때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너무나도 잘 알고, 그 실천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배자는 궁극적으로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 한국인들은 궁극적으로 이 철학자(지배자)가 필요한 것이다.
적어도 오마바도, 아베도, 푸틴도, 시진핑도 우리 한국인들의 철학자 앞에서 정중하게 예의와 존경을 표하게 만들지 못하는 한 우리 한국인들은 이 풍전등화 속의 조국을 구하기는 커녕, 영원한 분단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배하는 자는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며, 인간 중의 최고의 인간(천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어느 면에서는 각자 자기 자신의 작품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매우 온건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친절한 인물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 심지가 깊었으며 자기 자신의 신념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던 대쪽같은 선비였다.
몽테뉴는 최초의 서사시인이자 최후의 서사시인인 호머의 열광적인 찬양자였고, 따라서 그는 “아내와 관계하여 훌륭한 아들을 얻는 것보다도 시신詩神과 관계하여 훌륭한 작품 하나를 더 얻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이다.
몽테뉴의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였고, 그의 60평생도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도 같았다.
몽테뉴의 시는 그의 삶과도 같았고, 그의 삶은 그의 시(사상)와도 같았다.
시와 삶의 완벽한 일치였다.
이 세상에서 몽테뉴보다 더욱더 아름답고 뛰어난 한 편의 작품이 과연, 어디에 그렇게 흔하단 말인가?
도덕은 험한 가시밭길을 더듬기 마련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일찍이 그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상당한 곤경을 겪기도 했었고, 부모님의 재산을 상속받자 마자 돈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투덜댈 만큼 자기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데에 혈안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자신의 속물됨과 그 영악함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재산관리인에게 맡기고 수입과 지출에 대한 균형만을 따졌을 뿐, 그 어떠한 돈벌이와 이권에도 개입하지를 않았다고 한다.
보르도 시장을 지낼 때는 몽테뉴의 반대파 진영의 사람들까지도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그러나 보르도 시장을 한 번 더 연임하고, 그 어떠한 미련도 없이 그의 나이 30대 때, 그 모든 공직을 떠났던 것이다.
몽테뉴는 호머를 사랑했고, 알렉산더 대왕을 사랑했다. 몽테뉴는 아킬레스를 사랑했고, 카이사르를 사랑했다. 그 결과, 몽테뉴는 그의 친구가 죽었을 때는 몹시 슬퍼했지만, 너무나도 일찍이 그의 세 아들을 잃었을 때는 적어도 슬퍼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참회록이며,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그의 반성과 성찰의 깊이가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모든 도덕은 험하디 험한 가시밭길이며, 그 가시밭길을 통과해야만이 새로운 도덕(사상)으로 탄생하게 된다.
모든 도덕은 가시가 있고, 그 가시는 도덕의 역사(역경)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반성이 없는 도덕군자이지만, 그러나 그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미화하고 성화시킨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몽테뉴는 이 사실을 모르고 플라톤이 미화하고 성화시킨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브라만, 시바, 제우스도 후세의 인간들이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심령은 남에게 본받으라고 별로 권장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이 인물에게는 악덕과 싸우려는 노력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행위의 앞길에는 아무런 장애도 강제도 생각해 볼 수 없다. 그의 이성은 너무나 강하게 작용하여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쁜 의욕이 생겨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도덕은 개가를 부르며 당당히 대로를 진행하여 나갈 뿐이다(몽테뉴.)”
세상은 영원한 동요에 불과하다. 만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대지도, 코카서스의 바윗돌도, 이집트의 피라밋도 흔들리고 있다. 항존성 자체도 좀 완만한 동요에 불과하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모든 것은 변하고 만물은 흐른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동요는 어린 아이의 노래이지만, 그러나 그 동요의 세계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도, 당신도,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말없이, 욕심없이,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그 아름다운 동요를 부르면서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에 제일 가는 학자
일찍이 아무도 다루기 좋아하지 않는 테마를 나처럼 유감없이 서술한 사람은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나도 천하에 제일 가는 학자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아주 하찮게 생각했고, 따라서 그는 그의 피붙이들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표시하지를 않았다.
몽테뉴는 자기 자신의 재산에 대하여 아무런 집착도 하지를 않았고, 따라서 그는 그 어떠한 인간들과도 이전투구를 벌이지도 않았다.
몽테뉴는 자기 자신의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그는 그 슬픔과 고통마저도 그의 행복한 삶의 세목들로만 받아 들였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몽테뉴는 날이면 날마다 이 세상을 떠나갈 준비를 하면서,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행복을 연주해나갔던 것이다.
‘내게 이로운 것은 남에게 해롭다’고 말할 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것’이라고 말할 때, 또, 그리고, 고통과 비애와 절도와 우정과 욕망과 순수성과 위대한 인물에 대하여 말할 때, 그의 펜은 천하에 제일 가는 학자의 비범함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날이면 날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기 자신의 생명마저도 먼지와 티끌처럼 가볍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 바로 여기에 낙천주의자의 위대함----내가 내식으로 불러 본다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법률과 법정을 갖고 자기를 재판한다. 나는 다른 어디보다도 여기에 호소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모든 훌륭한 인물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법정을 갖고, 자기 자신을 재판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도덕과 스피노자의 도덕, 라이프니츠의 도덕과 헤겔의 도덕, 마르크스의 도덕과 쇼펜하우어의 도덕, 칸트의 도덕과 몽테뉴의 도덕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만의 언어로 최초의 사물과 최초의 사건들을 명명하고, 그 사상과 이론이란 법명으로 그 가치들을 창출해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언어의 창시자였고, 모든 가치의 창시자였다.
‘네 스스로 네 입법원리에 따라서 행동하라!’
자기 자신만의 법률과 자기 자신만의 법정을 갖고 있지 못한 자는 영원히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 집에서나 자기 고향에서는 예언자 노릇을 못하였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고향에서는 참다운 예언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이 말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가 있다.
고향은 그가 태어난 곳이지만, 그러나 그 위대함보다는 그의 더럽고 추한 치부가 더욱더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다.
타인의 잘됨을 볼 수가 없다는 것, 한없이 깎고, 또 깎아내려서 그 예언자의 등에 올라타고 싶다는 것----.
모든 예언자는 이 우중愚衆들의 조롱과 조소를 마치, 독화살을 피하듯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몽테뉴의 때 이른 은퇴와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는 이미 한물이 지나간 인간으로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반대하여 나를 일깨워 주는 자를 환영한다. 진리의 탐구가 피차의 공통의 목적이라야 한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우리 인간들은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인데 반하여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전지전능하고 영생불사인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상대적 완전성과 상대적 절대성을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회의와 의심은 비판의 전제 조건이며, 비판은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다.
비판이 없으면 그 어떤 학문도 존재할 수가 없고, 비판이 없으면 그 어떤 성자도 탄생할 수가 없다.
비판철학의 선구자인 칸트 역시도 이처럼 몽테뉴의 후예였던 것이다.
나는 나의 {행복의 깊이} 제4권에서 이렇게 역설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일찍이 비평의 기능을 정화기능과 강화기능, 그리고 성화기능으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정화기능은 그 주체자의 더럽고 추한 때를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기능이며, 강화기능은 그 더럽고 추한 때를 씻고 새로운 장점을 구축해 주는 기능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화기능은 그 장점이 극대화된 결과, 언제, 어느 때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영웅(부처, 예수, 대서사시인 등)으로 수직 상승시켜주는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가령, 예컨대, 나의 플라톤 비판은 플라톤의 약점을 씻어주는 정화기능이며, 그리고 만일, 플라톤이 그 약점들을 극복하게 된다면, 그를 더욱더 강하고 튼튼하게 단련시켜주는 강화기능이 될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더욱더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비판의 정신으로 그 모든 논쟁의 무대에서 언제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사상의 신전을 우러러보면서, 언제, 어느 때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찬송을 하게 될 것이다.
아아, 플라톤이여, 소크라테스여! 이제는 수천 년의 역사와 그 시간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그대들의 무덤 속에서 뛰쳐나와, 그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이 반경환이를 단 칼에 베어버리고, 또 베어버려 보려므나!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더욱더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칼날을 더욱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대들의 심장에다가 들이대게 될 것이다. 논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그 논쟁의 핏줄로 살아가고 있다. 아아, 반경환이여, 비판을 받고 또 비판을 받아 보아라! 그러면 그대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아, 반경환이여, 비판을 하고 또 비판을 해보아라! 그러면 그대는 더욱더 낙천주의 사상의 주인공이 되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
세계는 진리탐구의 학교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세계는 진리탐구의 학교이다”라는 말은 천하에 제일 가는 학자로서의 몽테뉴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해준다.
오늘날은 자연과학이 모든 믿음을 대청소해버렸고, 이 세계는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아직도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질문조차도 던지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이 세상의 참된 이치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오류는 어떻게 바로 잡을 수가 있는 것일까? 우리 인간들의 탐욕은 어떻게 제어하고,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은 어떻게 해소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은 그것이 쓰나미이든지, 폭우와 폭설이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천연자원의 고갈과 원자력발전소의 대폭발이든지간에, 아마도 언젠가, 어느 때는 자연의 분노로써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의 소멸까지도 감내해야 할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진리탐구의 학교이다.
그러나 이 진리탐구는 우리 인간들의 탐욕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의 생명 속에 섞여 있다. 노쇠는 죽음의 도래에 앞서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나는 25세 때의 초상화와 35세 때의 초상화를 갖고 있는데 양자를 비교해보면 그 변화에 놀랄 정도이다. 현재의 나는 그때의 모습에서 멀리 떠나 죽음 편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우리가 자연을 너무 학대한 나머지 자연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지도권을 포기하고, 우리와 어깨동무하는 일에 지쳐서 외부의 원조, 즉 의술의 손에 넘겨준 채 우리를 버리게 하다니, 그것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는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젊은이는 어리석고 늙은이는 현명하다.
이 세상의 모든 현자는 늙은이, 즉, 백발의 노인들이지만, 그러나 곧 그 백발의 노인들마저도 이 세상을 하직해주는 것이 최고의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젊은이의 미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열고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이지, 늙은이들이 부당하게 간섭하고 늙은이들의 입맛에 맛도록 열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은 부자연사이며, 그것은 자연을 학대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몽테뉴는 자연주의자로서 이처럼 4~5백년 전에,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