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Lana del rey
유럽 황실 이야기는 파고들수록 꿀잼 흥미돋이지만, 워낙 인물관계도가 얽혀있고 이름이 어려워서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그런 게녀들을 위해 눈높이형 해설과 함께 유럽 황실 썰을 풀어볼까 해.
이번 편의 주인공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일가인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이야. 비극적으로 처형 당한 황제 일가는 사후 100년간 생존설에 끊임 없이 휘말리며 인기를 끌었는데, 대체 황제 일가는 어떤 사람들이고 왜 처형 당해야 했는지 알아보Za......(스압주의....아임 투머치토커)
1613년부터 약 300년간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지배 하에 전제왕정 체제를 유지했왔어. 가운데 앉은 중년 남녀가 바로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부부. 부부를 둘러싼 이들이 큰딸 올가, 둘째 타티아나, 셋째 마리아, 넷째 아나스타샤, 막내이자 외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야. 이 가족 사진을 찍고 몇 년 후인 1918년 7월 17일 새벽, 황제 일가는 저택 지하실에서 모조리 총살 당해. 당시 큰딸 올가 공주가 22살, 막내인 알렉세이 황태자는 겨우 13살었어.
러시아 제국을 지배했던 황제 일가는 왜 비참하게 처형 당했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1800년대의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해!
혼인서약을 나누는 이 흑백 사진의 주인공은 유럽 왕실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뺄 수 없는 인물이야. 1837년부터 60년 넘게 영국을 통치하며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인 앨버트 공이거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원칙을 만든 영국왕실의 상징이지.
독일의 귀족 출신인 앨버트 공은 교양과 지식이 풍부한 신사였고,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 공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했어. 앨버트 공도 엄청난 사랑꾼이어서 늘 여왕을 자신의 품에 안아 침실에서 집무실로, 집무실에서 침실로 옮겨줬다고 해.
두 사람의 금슬이 얼마나 좋았는지 20년간 무려 9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어. 이 아이들은 모두 유럽 전역의 왕가로 시집을 갔고, 빅토리아 여왕은 무려 42명의 손자 손녀를 둬서 "유럽의 할머니" 라는 호칭을 얻게 됐지.
여왕은 딸들을 영국에 두고 싶어했지만, 평생 고향인 독일을 그리워한 앨버트 공의 뜻을 존중해 큰딸과 둘째딸은 독일 왕가로 시집 보냈어. 독일 헤센공국의 왕비가 된 둘째 앨리스 공주는 7남매를 낳았는데, 여섯번째 아이가 바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알렉산드라 황후야. 즉 알렉산드라 황후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고, 5남매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이 되는 거지.
여담으로 유럽의 할머니답게 빅토리아 여왕의 자식사랑은 엄청 나서, 다른 공주들은 모두 사위가 영국에 거주하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야 결혼시켰다고 해.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순애보는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유명한 이야기니, 잠시 옆길로 새서 알아보자.
맏아들 에드워드 황태자의 가출을 말리려 비 오는 날 외출을 한 앨버트 공은 폐렴에 걸려 42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여왕은 깊은 슬픔에 빠져 정치에서 손을 떼고 잠적해버렸어. 당시 숙부에게 보낸 편지에 여왕은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라고 썼고, 실제로 그랬어.
대신들의 성화에 떠밀려 공무로 복귀했지만 여왕은 죽을 때까지 40년간 위의 사진처럼 검은 드레스만 입었어. 원인제공자인 아들도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아서 에드워드는 황태자임에도 정치에 관여하지 못 했어. 여왕은 상복을 입을 때 쓰는 베일에 방해된다며(...) 제국왕관을 거부한 대신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달고다녔는데, 죽은 이의 머리카락을 지니는 유행의 시초가 이거야.
빅토리아 여왕이 러시아 황가의 몰락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바로 여왕이 가지고 있던 '혈우병' 유전인자가 원인이야.
혈우병은 혈액이 응고되지 못하는 불치병이야. 혈우병은 유전병이라 대부분 부모에게서 유전되지만, 드물게 자연발생 돌연변이가 생기기도 해. 빅토리아 여왕이 바로 돌연변이였어. 여왕은 혈우병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보인자였는데 여왕의 딸들이 본인이 혈우병 보인자인걸 모르고 유럽 왕실 전역으로 시집을 가면서 혈우병 유전인자도 함께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혈우병은 성염색체 중 X 염색체 결함으로 발생되는 유전병이기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면 문송할 게녀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설명고자)
인간의 23번째 염색체가 성별을 결정짓는 성염색체야. 어머니에게서는 X 염색체를, 아버지에게서는 X 염색체나 Y 염색체 중 하나를 무작위로 받아. XX면 여성, XY면 남성으로 태어나지. X 염색체에 있어야할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해서 출혈이 발생하는게 혈우병이야. 남성의 경우 XY 염색체라 X 염색체에 결함이 있으면 바로 혈우병 증상이 나타나. 반대로 여성은 XX 염색체라 X 염색체 하나가 결함이 있어도 다른 X 염색체의 혈액응고인자가 보완해주기 때문에 혈우병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X 염색체 두 개 모두 결함이 있는 여아는 대부분 원인 불명으로 사산 되거든. 발병하지는 않아도 혈우병 유전인자는 가지고 있으니 보인자로 분류 돼. 이런 성염색체 결함 유전 형태를 반성 유전이라고 불러.
200년 전 시대에는 염색체나 유전형태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으니, 여왕의 딸과 손녀들은 본인이 혈우병 보인자인지도 몰랐던 거야. 의학이 발달해 뒤늦게 혈우병 유전에 대해 알려졌을 때는 이미 사진처럼 유럽 전역에 혈우병 유전인자가 퍼진 후였지. 러시아 황실까지 말이야. 이제 본격적으로 황실 가족들을 살펴보자.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 알렉산드라 황후야.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 앨리스 공주는 독일 헤센공국의 왕비가 된 후에도 본인이 영국의 공주임을 자랑스러워해서, 아이들을 모두 영국식으로 가르쳤어. 알렉산드라가 6살 되던 해 전염병이 돌았고, 어머니 앨리스 공주와 여동생 마리가 사망했어. 밝고 활달한 소녀였던 알렉산드라는 이후 침울하고 내성적으로 변해버렸어.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잃은 외손녀들을 안타까워해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어. 외할머니와 모녀 지간처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알렉산드라는 정서적으로 독일인보다는 영국인에 가까웠어. 또한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앨리스 공주에게로 이어진 혈우병 유전인자까지 물려받았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야.
니콜라이 2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성과 군주로서의 자질은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완벽히 증명해낸 암군" 이라고 할 수 있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차분하고 선량한 청년이었거든. 특사 자격으로 대관식에 참석했던 민영익도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아주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기록했어. 한 개인으로서는 선량한 인품에 교양까지 갖춘, 만점짜리 인간인 거지. 안타깝게도, 군주로서 니콜라이 2세는 0점짜리 암군이었어. 이제 그 이유를 찾아서,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 시대를 둘러봐야해.
러시아 12대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 큰아들 니콜라이, 둘째아들 알렉산드르 3세. 큰아들이자 황태자인 니콜라이는 자유주의자에다 똑똑하고 교양 넘치는 청년이었고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자인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를 사랑했어. 그야말로 완벽한 군주감인 니콜라이 황태자를 백성들은 '러시아의 희망' 이라고 칭송했지. 둘째 알렉산드르 3세는 군대를 좋아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어. 황위에 대한 욕심은 커녕, 정치는 형에게 맡긴 채 좋아하는 군대에 열중할 수 있다며 기뻐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어. 모든게 순조로워보였어. 니콜라이 황태자가 결핵으로 어이 없이 요절하기 전까지는.
알렉산드르 3세는 얼떨결에 황태자가 됐어. 아버지는 형의 약혼녀였던 다그마르 공주와 약혼할 것을 명령했지. 어머니의 시녀중 하나인 두셴카 공작영애와 사랑하는 사이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다면 차르 자리 따위 버리겠다고 반항했지만, 분노한 아버지는 두셴카를 러시아 밖으로 쫓아냈어. 알렉산드르 3세는 그 날 일기에 '안녕, 나의 두셴카' 라고 쓰며 울었다고 해.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형과 반대되는 길을 걸었어. 즉위 직후 자유주의를 탄압하며 억압적인 정치를 했어.
알렉산드르 3세는 차르가 될 위인은 아니었지만, 인간성은 훌륭했어. 당시 러시아 황제들은 암암리에 수많은 첩을 뒀지만 알렉산드르 3세는 강제로 결혼한 다그마르 공주 한 사람에게 평생 충실했거든. 당시 러시아는 체벌이 당연시되는 풍조였음에도 한 번도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는 다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기도 했어. 190이 넘는 키에 체구가 건장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자신이 장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키는 대신 자유로운 유년기를 보내게 해줬어. 안타깝게도, 그는 형과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어. 49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거든.
26살의 니콜라이 2세는 갑작스럽게 황제가 됐어. 제대로 된 제왕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말이야.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가 30살이 되면 본격적인 후계교육에 들어갈 생각이었다고 해. 어쨌든 그는 아버지를 닮아 선량한 인간이었지만, 군주로서는 유약하고 무능했어. 스스로도 나는 황제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 할 정도로. 또한 아버지의 정치 성향까지 빼닮아 자유주의자들을 비난하고 독선적인 정책을 펼쳤어. (모르면 시키는대로라도 하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인간이랄까.....)
아마 니콜라이 2세가 영국의 황태자였다면 그는 국민에게 사랑 받는 군주로 남았을 거야. 사교술, 인품, 교양 등 입헌 군주제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갖췄으니까. 하지만 러시아는 황제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전제군주제였지.
조금 달달한 이야기를 해볼까? 대부분 왕족들은 정략결혼을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아주 드문 연애결혼 케이스거든.
1884년, 알렉산드라의 둘째 언니였던 엘리자베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했어. 니콜라이 2세의 삼촌이지.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한 12살의 알렉산드라와 16살의 니콜라이 2세는 서로 첫 눈에 반했어. 서로에게 반한 소년과 소녀는 동화처럼 10년간 연애를 했고, 1894년 5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어.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정치가 불안정한 러시아 제국과의 혼담을 반대했어. (여왕님 통찰력....) 하지만 사랑에 빠진 알렉산드라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어.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바꾸고, 러시아어를 공부했지. 그 시대에 종교를 바꾸는 건 대단한 결심이었지만 모든 걸 감내할만큼 열렬한 사랑이었던 거야. 니콜라이 2세 또한 대단한 사랑꾼이었어.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했던 로마노프 왕조의 황족들은 문란한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는데, 니콜라이 2세는 죽는 순간까지 알렉산드라 외의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순정을 바쳤다고 해.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
큰 딸 올가 공주야. 이 이야기에서 제일 안타까운 사람 중 한명이지. 올가는 러시아어로 신성하다는 뜻인데, 올가 공주는 이름처럼 완벽하고 신성한 사람이었거든.
17살의 나이에 기마대장을 할만큼 무술도 잘했고, 아주 영특해서 어려운 러시아 문법을 능숙하게 설명할 만큼 공부도 잘했어. 아버지 니콜라이 2세를 존경했던 올가는 아버지처럼 점잖고 다정한 성격이었고,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어. 또한 5남매의 맏이로서 동생들을 포용하는 자애로운 큰 언니였지. 아래 이야기는 올가가 고작 15살 때의 일화야.
병약했던 알렉세이 황태자는 종종 신경질을 부렸는데, 6살 때 공식석상에서 떼를 써 주변을 난처하게 했어. 올가가 점잖게 만류하자 알렉세이는 9살이나 위인 큰 누나의 뺨을 힘껏 때렸어. 모두가 놀라 어쩔 줄 몰라했지만, 올가는 맞기 전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알렉세이 황태자를 바라봤다고 해.
이렇듯 어른스러운 1황녀를 황제의 재목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러시아 황실은 오직 남성황족에게만 황위계승권을 인정하고 있었어. 영국 문화에게 익숙했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시집 와 올가를 낳은 후에야 러시아에서는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없단 사실을 알았다고 해(......)
둘째 타티아나. 니콜라이 2세는 '예브기니 오네긴'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올가-타티아나 자매처럼 딸들이 자라길 원해 똑같이 이름을 타티아나라고 지었대. 뭔 책인지 모르겠는데 책 속에서 자매가 사이가 좋나봐.....어쨌든 2살 차이인 올가와 타티아나는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였고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옷을 입었어.
알렉산드라 황후의 적갈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를 물려받은 5남매는 모두 외모가 준수했는데, 타티아나는 그 중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워서 조각 같았대. 기록을 보면 황족은 물론이고 러시아 제국을 통 틀어서 손 꼽히는 미녀여서 무도회에 가면 타티아나와 춤을 추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고, 유골감식 결과 166cm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 180cm에 가까운 장신이기도 해. 2018년 시각으로 보면 모델 급 키에 존예 공주님인 거지.
왼쪽이 셋째 마리아야. 가장 덜 알려진 황녀라 독사진이 없어서 단체 사진 가져왔어. 참고로 마리아-타티아나-아나스타샤-올가 순이야.
올가가 어른스러운 큰딸, 타티아나가 아름다운 둘째라면 마리아는 수줍음 많고 사랑스러운 셋째였어.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에 헤매자 밤마다 방에서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며 울었고, 개구쟁이인 동생 아나스타샤의 장난을 알면서도 매번 속아줬어. 알렉산드라 황후는 황족으로선 드물게 아이들에게 모유수유를 할 만큼 애착이 깊었고, 니콜라이 2세도 다정한 아버지였고 남매들의 우애도 돈독했지. 이런 화목한 가정 속에서 자라난 영향인지, 부모님처럼 낭만적인 연애를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게 마리아의 소원이었어.
유배 당시 군인이 성적인 농담을 했는데, 귀하게 자라면서 그런 농담을 들어본 적 없던 타티아나가 충격을 받고 울며 뛰쳐나가는 사건이 있었어. 얌전한 성격의 마리아였지만 그 군인을 향해 큰 소리로 내며 꾸짖었어. 유배 중인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황녀로서 자존심과 위엄을 잃지 않았던 거지.
참고로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 마리아가 살아남아 남편과 일본으로 망명해 살다가 죽은 걸로 나와. 마리아의 유해가 발견된 2008년 이전에 제작되서 그런가봐.
넷째 아나스타샤. 아마 대중적으로 제일 잘 알려진 공주일 거야. 아나스타샤가 살아남았다는 루머도 많았고, 본인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거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DNA 감식 결과 황제 일가는 그 날 전부 사망했어.
5남매 중 제일 장난기 많고 발랄한 성격의 아나스타샤는 2살 위의 언니 마리아와 단짝이었어. 어린 시절부터 아팠던 알렉세이는 종종 우울에 빠졌는데 이런 알렉세이를 달래서 웃게 해줄 수 있는건 아나스타샤 뿐이었다고 하니 귀여운 동생이자 따뜻한 누나였던 거 같아. 사실 온 국민들이 아들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태어난 넷째 딸이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뻔 했지만,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자식들을 공평하게 사랑해서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어.
(니콜라이 2세 인간성은 진짜 완벽해. 인간성 만)
충공깽이지만 당시에는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인식이 전햐 없을 때라 황제 부부는 물론 황녀들과 알렉세이 황태자도 담배를 피웠다고 해.
막내이자 외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 온 나라가 10년간 기다려온 귀한 황태자였고, 측근들에 따르면 동화 속 왕자님이 현실로 나온 듯한 미소년이었대.
위에서 나왔던 덴마크의 두그마르 공주 기억 나니? 알렉산드르 3세와 결혼해 황후가 된 두그마르는 아들인 니콜라이 2세가 황제가 되자 황태후 자리에 올랐어. 밝고 쾌활한 성격의 두그마르는 내성적인 며느리를 내심 못마땅해했어. 또 당시 홀스타인 전쟁의 여파로 덴마크는 독일을 경멸했는데, 알렉산드라의 친정이 바로 독일이었어. 가뜩이나 안 좋은 고부 사이에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10년을 보냈으니,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겠어. 알렉세이는 '햇님'이라고 불리며 극진한 사랑을 받았어. 딱 한 가지 문제가 빼고.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인자가 외증손자인 알렉세이에게서 발병한 거야. 혈우병은 황제일가를 고통에 빠뜨렸어.
감기에 걸려 재채기만 해도 코 점막이 헐어 피가 쏟아졌어. 야외활동은 금지 됐고, 어린 알렉세이는 늘 친구들이 노는 것을 구경해야했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은 알렉세이는 신경질적이고 우울한 성향을 보였지만, 누나들은 그런 알렉세이의 무례를 이해하고 포용해줬어.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조금씩 철이 든 알렉세이는 장차 훌륭한 황제가 되고 싶다는 포부도 가졌어. 혈우병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은 환자인 알렉세이 본인이 아닌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였어.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알렉세이의 병이 황후의 발목을 잡았어. 내로라하는 명의들을 찾아가 매달렸지만 현대에도 완치시킬 수 없는 혈우병을 100년 전의 의학이 해결할 리가. 원래 침울한 성격이었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온갖 종교와 미신을 동원하기 시작했어. 그런 며느리에게 실망한 두그마르 황태후와 갈등은 더더욱 깊어졌어. 미쳐가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출신도 모를 떠돌이 요승까지 불러들이게 돼.
그리고리 라스푸틴. 수도승을 자처하던 떠돌이야. 서양사에 길이 빛날 간신의 으뜸이지. 전적이 아주 화려한 인간이야.
황궁에 들어온 라스푸틴은 기도를 통해 알렉세이 황태자의 증상을 완화시켜. 당시 상용화가 시작되던 아스피린을 썼다는 설도 있고, 최면술를 이용해 알렉세이에게 안정을 줬다는 설도 있어. 난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병약+우울하던 알렉세이는 사무적인 의사들보다 정체 모를 떠돌이가 해주는 바깥 세상 이야기가 훨씬 즐거웠을 거야. 안정을 취하고 푹 쉬었으니 증세가 호전 될 수 밖에 없겠지. 어쨌거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어. 안 그래도 정치가 적성에 맞지 않던 니콜라이 2세도 아내가 신뢰하는 라스푸틴에게 모든 걸 맡겼지.
라스푸틴의 권력은 상상 이상이었어. 수상과 장관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었어. 당시 러시아는 세계 1차 대전에서 독일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라스푸틴은 남부 전선에서 공격을 하면 승리한다는 계시를 내렸어. 모든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의 계시를 따랐고, 러시아의 전선은 개박살나고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땅까지 독일에게 빼앗겨.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황제 부부를 말리지 않았을까?
올가 공주는 라스푸틴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내치라고 어머니에게 조언했어. 올가가 얼마나 통찰력이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러시아로 시집왔던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같은 조언을 하지만, 아들에게 혈우병을 물려줬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들리는 건 없었어. 라스푸틴이 공주의 가정교사를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올가는 라스푸틴을 참수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황후는 라스푸틴이 하는 일은 모두 신성하다며 되려 가정교사를 해고했고, 오히려 올가 공주와 엘리자베트 대공비를 멀리했어. 러시아 제국은 돌아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야.
+)) 라스푸틴은 성기가 큰 것으로도 유명해서 잘라내 박물관에 보관 중이야. 네이버에 치면 나와. 백 년간 알코올에 담겨져 쪼그라들고 비발기 상태에서 23cm인 거고, 살아있을 당시 발기하면 40cm 정도였다고 해. 라스푸틴의 딸은 1977년 사망할 때까지 아버지의 성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무시했대. 덕분에 라스푸틴이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루머도 퍼졌다고 해.
1916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라스푸틴의 천하가 끝났어. 대부분의 황족&귀족들은 황제 부부를 믿고 날뛰는 라스푸틴을 증오했는데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이 총대를 메고 나섰어. 일방적인 재판을 진행한 귀족들은 라스푸틴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펠릭스 공작이 권총으로 라스푸틴을 죽였어.
사진이 바로 펠릭스 공작과 아내 이리나야. 라스푸틴이 이리나에게 추파를 던졌고, 아내에게 집적거리는 꼴을 보고 눈이 뒤집힌 펠릭스 공작이 총대를 멨다고 해. 라스푸틴은 죽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고, 펠릭스 공작도 러시아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 세계 2차 대전 때 나치가 펠릭스 공작에게 고위직을 제안하며 소련을 공격하자고 꼬드겼는데, 쿨하게 걷어차고 이리나와 함께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어.
1917년 2월, 분노한 민중들은 결국 혁명을 일으켰어. 혁명의 불길은 빠르게 러시아 전역으로 퍼졌고, 3월 4일 공화국이 선포되며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퇴위당한 니콜라이 2세는 가족들과 함께 유배 당했어. 혈우병이 악화된 알렉세이를 황제가 직접 업고 가야할 만큼 비참한 몰락이었지. 하지만 황제 일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 특히 타티아나 공주는 영국으로 망명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해.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어.
(사진은 죽기 며칠 전 알렉세이 황태자와 올가 공주)
쌍둥이처럼 닮았지? 왼쪽의 여자가 바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다그마르 공주야. 오른쪽은 다그마르 공주의 친언니인 알렉산드라야. 어린 시절 방을 같이 쓰며 자란 두 공주는 우애가 돈독했어. 두 공주의 어머니이자 덴마크의 왕비인 헤센의 루이제가 자식들의 결혼에 엄청 신경을 쓴 덕에,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 7세와 결혼해 영국의 왕비가 되고 다그마르는 러시아의 황후가 됐어. 빅토리아 여왕이 평생 용서하지 않았던 장남 에드워드가 바로 에드워드 7세야.
1917년 당시 에드워드 7세는 사망한 상태였고, 에드워드 7세의 장남인 조지 5세가 영국을 다스리고 있었어. 이종사촌인 니콜라이 2세와도 친한 사이였던 조지 5세는 유배된 러시아 황제일가를 구출하고 싶어했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어.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해 독일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증오는 엄청난 수준이었거든. 독일 출신인 알렉산드라 황후를 영국으로 망명시키려는 조지 5세의 시도는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어. 결국 조지 5세는 니콜라이 황제 일가에 대한 구출을 포기해. 진짜 저게 이유야...? 싶겠지만 리얼임.
(ㅅㅂ 유럽 왕실 인간들은 이름 지을게 더럽게 없는지 여자는 죄다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빅토리아고 남자는 다 조지 에드워드 헨리야)
1917년 2월 혁명 직후 권력을 잡았던 사회혁명당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야.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인데,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난 후 세워진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자리를 맡고 있었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황제 일가를 영국으로 망명 시키려했지만 영국 정부에게 거절 당했어. 황제 일가를 재판하자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케렌스키는 황제 일가를 보호했고, 이 때까지만 해도 황제일가가 처형 당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케렌스키가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하자 상황이 급변했어. 케렌스키는 외교적인 책무를 위해 영국-프랑스를 도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하지만 오랜 전쟁과 굶주림에 지친 국민들에게 외교적 책무 따위 들릴 리 없었고, 평화를 원하던 민심은 빠르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
많이 본 얼굴이지?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이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 레닌이 내세운 표어는 단순했어. '빵, 토지, 평화' 세 가지를 약속하며 굶주림에 지친 국민들의 민심을 얻어나갔고 마침내 1917년 10월, 쿠데타에 성공해 카렌스키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았어. 러시아의 상황만큼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입지도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어. 볼셰비키의 감시자들은 황녀들의 침실은 물론 욕실까지 따라 들어왔어.
레닌은 소련을 설립하며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과 불평등 휴전 조약을 맺고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땅을 포기했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하고 황제 일가를 지지하는 이들이 하나 둘씩 봉기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 됐어. 붉은 색을 상징으로 쓰는 볼셰비키의 적군과 백군의 전쟁이라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러. 볼셰비키는 백군에게 황제 일가가 구출 될 것을 우려해 황제 일가의 은신처를 옮겨댔어. 몇 번의 이동 후, 볼셰비키는 후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황제 일가의 처형을 결정해.
1918년 7월 17일 새벽 2시, 잠을 자던 황제 일가는 이동할테니 지하실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고 지하실로 모여. 볼셰비키 소속 비밀 경찰이던 유로프스키는 "백군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 실패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당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소" 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군인들은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어. 모두 죽었어. 황제, 황후, 황태자, 황녀들, 황제 일가를 마지막까지 보필하던 시종들, 아나스타샤 공주가 힘든 유배 생활에도 데리고다니며 애지중지 보살폈던 애완견까지 모두.
공주들은 총알이 보석에 튕겨져나가 살았다는 루머가 퍼졌는데, 실제로 마리아 공주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깨어나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곧바로 죽임을 당했어. 총검으로 찔러 확인사살까지 마친 군인들은 시체에 황산과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구덩이에 파묻었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참한 최후였지. 큰딸이었던 올가가 22살, 막내인 알렉세이가 13살이었어.
올가와 타티아나는 결혼을 했을 나이였고 실제로 여러번 혼담을 받았어. 올가는 나는 러시아인이니 러시아에 남겠다며 혼담을 거부했고, 타티아나는 가족들과 떨어질 수 없다며 역시 혼담을 거부했어. 자식들이 정략결혼보단 본인들처럼 연애결혼을 하길 원했던 황제는 딸들의 의견을 존중했지. 아마 이 때 결혼을 했다면 올가와 타티아나라도 살 수 있었겠지.
황제 일가를 처형했던 유로프스키는 처형 전 2주 정도를 황제 일가와 함께 지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평범한 신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했어. 유로프스키는 알렉산드라 황후를 제외하면 황제 일가가 모두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했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황제 일가를 처형한 것을 후회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죽었어.
(솔직히 알렉산드라 황후가 95프로는 말아먹은듯. 라스푸틴부터 시작해서 영국이 망명 거부한 것도 따지고 보면 황후 탓...)
소련이 무너진 후 비참하게 죽은 황제 일가에 대해 동정여론이 일어났어. 2001년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적백내전 당시 죽은 종교인들과 함께 성인으로 시성했는데 나라 말아먹은게 퍽도 성스럽다(.....) 라고 비꼬는 시각도 많았다고 해.
2008년 러시아 대법원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이 정치적 탄압으로 부당하게 희생됐다고 선언해 정치적으로도 복권 됐어. 사실 러시아 현 정부가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복권하려는 건 황제 일가의 삶이 불쌍해서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더 큰 편이야.
러시아 연방 내 소수민족들을 통합 시킬 빌미가 필요하거든. 소련 체제에서는 강력한 공산주의 이념 아래 통합이 가능했지만 현재 그 이념은 붕괴 됐으니 소수민족들의 열기를 억누를 상징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로마노프 왕조야. "우리는 소련 이전부터 로마노프 왕조 아래 함께 뭉쳤었다" (......) 라는 민족 통합의 구심점으로 이용해먹으려는 목적이래. 통할지는 의문인게,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영미권에서 인기가 많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존재도 잘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거든.
황제 일가의 생존설은 다양했는데, 제일 핫했던게 아나스타샤였고 알렉세이도 종종 등장했어. 결론적으로 2007년 마리아와 알렉세이의 유해까지 찾아냈으며 DNA 감식 결과 황제 일가는 1918년 모두 사망했으며,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어.
황실 일가 이야기는 끝났고, 아래는 관련된 소소한 TMI들
니콜라이 2세는 알렉세이가 다치지 않도록 해군을 뽑아 늘 곁을 지키도록 했어. 이름이 러시아어로 적혀 있어서 못 읽었어 미안.....여튼 저 해군은 황제일가가 쫓겨난 후에도 유배지를 따라다니며 알렉세이의 곁을 지켜줬어.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던 알렉세이의 방에는 십자가와 성물들이 많았는데, 이 해군은 볼셰비키 군인들이 황태자가 알렉세이가 소중히 여기는 성물들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려다가 살해 당했어.
위에서 종종 나왔던 엘리자베타 대공비와 알렉산드라 황후. 8살 차이 친자매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니콜라이 2세가 처음 만난 곳도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결혼식이었어.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언니의 조언을 듣기는 커녕, 라스푸틴이 암살 당하자 언니를 의심하며 화를 냈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안 그래도 화난 민심을 자극했어.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니콜라이 2세의 삼촌인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해 러시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세르게이 대공은 엄청난 바람둥이라 결혼생활은 불행했어. 세르게이 대공은 폭탄테러로 사망했는데 시신이 너무 심하게 조각 나 수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어. 비록 부부사이는 안 좋았지만 세르게이 대공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슬퍼하며 수녀가 됐어.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해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데, 황제 일가가 처형 된 바로 다음 날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볼셰비키에게 처형 당했어. 남편이 죽었던 것처럼 수류탄으로. (올가와 맞먹는 인생 짠내 배틀 ㅠ^ㅠ)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다그마르 공주. 우애가 돈독한 친언니이자 당시 영국의 왕대비였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아들 조지 5세를 시켜 군함을 보냈어. 아들 일가의 사망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진 다그마르 공주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1919년 영국으로 망명했어. 이후 고향 덴마크에 정착한 다그마르는 아들인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믿지 않았고, 아들 일가가 무사히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대.
남편 알렉산드르 3세와 정략결혼을 한 것치고 금슬은 괜찮은 편이어서, 알렉산드르 3세는 평생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고 다그마르에게 헌신했고 다그마르 공주 또한 자신의 시신을 러시아 땅으로 돌려보내 남편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어. 2006년 다그마르 공주의 유해는 소원대로 러시아로 건너가 남편 옆에 묻혔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다그마르 공주는 쌍둥이 수준으로 닮았는데, 이종사촌 지간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도 쌍둥이 수준으로 닮아서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어. 워낙 닮은 탓에 말년의 다그마르 공주는 영국을 방문했다가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곤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했대(ㅠㅠㅠ)
조지 5세는 자신과 닮은 사촌 니콜라이 2세를 아꼈으며, 그를 구출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어. 이후 1922년 그리스 왕조가 망하자 그리스로 시집간 조지 5세의 조카 앨리스 공녀가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니콜라이 2세 일가를 구하지 못한 것을 속죄하려는 듯 곧바로 영국 군함에 앨리스 공녀를 숨겨 영국으로 탈출시켰어.
이 분은 영국 귀족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이야. 키 크고 몸 좋고 귀족에 잘 생기고 돈 많은 인생의 승리자(.....)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인 앨리스 공주는 큰딸을 낳자 어머니의 이름을 붙여 빅토리아라고 불렀어. 빅토리아 공주 - 엘리자베타 대공비 - 알렉산드라 황후 모두 앨리스 공주의 딸이니 친자매관계지. 빅토리아 공주의 큰 딸이 조지 5세가 구출한 앨리스 공녀고, 막내 아들이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이야.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부부는 루이스에게 이모와 이모부가 되는 거지. 루이스의 세례식 당시 마침 영국을 방문해있던 니콜라이 2세가 루이스의 대부가 되주기도 했어.
루이스는 어린 시절 러시아의 친척 집에 놀러갔다가, 1살 위의 이종사촌 누나인 마리아를 만난 후 마음을 뺏겨. 루이스는 마리아 황녀를 짝사랑하며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루이스가 18살 때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 당해버려. 이후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서재에 마리아의 사진을 간직하고 살았다고 해.
잘생겨서 두 장....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의 큰누나 앨리스 공녀는 그리스에 시집 갔다가 쿠데타에 휘말려. 조지 5세의 도움으로 망명에는 성공했지만 신경쇠약을 호소하며 요양원을 전전하게 돼. 자식이 없던 루이스는 큰누나 앨리스 공녀의 아들인 필립을 데려다가 친아들처럼 키웠고, 필립은 삼촌인 루이스의 집에서 해군학교에 다녔어. 이 필립이 바로
.
.
.
.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가 공주 시절 해군학교 시찰을 갔다가 필립 공에게 첫눈에 반해 7년 연애하고 결혼했어. 아직 살아계심 98세...
참고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현재 생존한 왕족 중 알렉산드라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누군가 계산했는데, 그게 필립 공. 필립 공의 DNA 샘플로 검사를 해서 유해가 마리아 황녀와 알렉세이 황태자임을 확인했대.
미토콘드리아는 모계 유전으로 전달 되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 -> 앨리스 공주 - > 빅토리아 공주 -> 앨리스 공녀 -> 필립 공
빅토리아 여왕 -> 앨리스 공주 -> 알렉산드라 황후 ->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이 루트로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와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한대.
TMI까지 끝....!
유럽 왕실사를 읽다 보면 헷갈리는 이유가 이름이 다들 똑같아서도 한 몫 하는 거 같은데, 서양에서는 이름을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물려주는 개념으로 생각해서 그렇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부모나 조부모 세대 친척어른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더라고. 설명고자라....알아들었다면....다행.....
옴뇸....올가 공주랑 엘리자베트 대공비 불쌍해 ㅠ^ㅠ 루이스도...(사심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