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국호개칭: 800년만에 되찾은 국호 高麗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나라에는 세 나라가 있다. 고구려의 고려,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가 있다.
고구려의 국호가 장수왕 때에 ‘고려’로 개칭되어 이후 나라 이름을 高麗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로의 국호개칭을 숨기고 멸망 시까지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으로 고쳐 놓았다.
고려는 왕건 태조가 건국한 고려왕조의 국호와 일치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려라는 국호 개칭을 고구려의 약칭이라고 얼버무리거나 굳이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의 명칭도 개명을 하면 그 이름이 정식이름이 되듯이 고구려도 고려라고 칭해야 옳다. 고구려의 고려라는 국호개칭은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서술되고 있으며 이는 본인이 처음으로 밝혀 놓은 역사 사실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삼국유사의 연대표인 '왕력'에 신라, 고려, 백제, 가락국이라 했다. 국초부터 고구려를 ‘高麗’로 표기했다. 국초의 고구려라는 명칭도 기이편에 전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기사가 72회 나오는데 69회를 ‘고려’라고 썼다.
이 왕력 조의 ‘고려’라는 국호를 ‘고구려’의 약칭이라 이해하여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병용했다고 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강인구외 "역주삼국유사" 1책 23쪽).
왕력의 다음 페이지부터 신라를 ‘라’ 고려를 ‘려’등으로 표기한 것이 약칭이다. 삼국유사에서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은 고려초에 편찬된 "구삼국사"의 기록에 연유한다.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이 구삼국사를 직접 본 것은 아닌듯하나 이를 이용한 "국사" 등의 서명으로 인용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중국문헌에 나오는 '고려'라는 명칭을 모두 고구려로 고쳤놓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미처 고치지 못하고 '고려'로 기록한 것이 신라본기나 열전 등에 7군데가 있다.
2) 고구려 시대에 당시에 쓴 기록 두 가지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국가에서 세운 세칭 ‘중원 고구려비’에 ‘고려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민간 사찰에서 만든 '연가7년명 불상'의 광배에 ‘고려국’이라 썼다. 이는 고려라는 국호 개칭을 알려주는 당대의 명확한 금석문이다.
3) 당시의 중국 역사서에서 '고려'라고 기록했다.
당시의 중국 역사서로는 남조의 宋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서 宋書'와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를 들 수 있다. 송서는 심약(沈約 ~513)이 488년에 편찬하였고, 위서는 위수(魏收 505~572)가 552년에 편찬했다.
두 사서 모두 기전체로 써졌다. 기전체 중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서술한 동이전이라는 열전이 있다. 이 열전기록은 이전 역사서의 내용을 이용하여 서술하면서 당왕조의 기록을 보충해 넣는다. 따라서 열전의 자료는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신의 왕래 기사와 같은 자료는 본기의 자료가 사료적 신빙성이 훨씬 높다. 송서 본기 권4에는 소제의 景平 원년(423 장수왕 11) 3월에
“고려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고 기록하였고, 2년 2월조에도 “고려국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어 장수왕 11년 전에 국호가 개칭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송서에는 이후 10 차례 이상의 고구려의 사신파견을 모두 ‘고려국’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에서 남조인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적대국인 북위를 통제하려는 외교적 노력이었다. 그리고 송서의 외국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라는 국호와 고려라는 국호를 혼용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이전 역사서의 참조했기 때문이고 이 책의 열전 백제국과 왜국조에서는 모두 고려로 기록하고 있다.
위서에는 삼국 중 고구려 전과 백제 전이 실려 있다. 이 책의 ‘고구려 전’은 초기 국가건국에서부터 다루었다. 고구려 시조를 주몽이라고 표현했고. 그 신화를 소개한 중국 역사서 중 첫 책이다.
이 열전에서 직접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과 위나라 제왕과의 대화내용을 기술한 부분에서는 두 번 ‘高麗’라는 국호가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본기에서 고려 국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본기에서 고려국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첫 기록은 천흥 원년(398년 광개토대왕 8년) 정월조이지만 이 기사는 산동 지방에 있는 사람과 고려의 雜吏 등 36만호를 수도로 옮겼다는 기사이기 때문에 당시의 기록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 위서의 본기에 고구려의 사신 파견에 대한 첫 기록은 장수왕 24년(436)이다. 여기서 ‘고려국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위나라는 강역문제로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신의 파견이 늦었다고 이해된다. 이후 본기에서는 고려라는 국호만이 기술되어 있지 고구려라는 국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서 중 외국열전에서 ‘고려’전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당나라 이연수((570~628)가 편찬한 "북사"에서부터 "수서", "당서" 등이다. 이들 책의 본기에서는 고구려를 모두 ‘고려’로 표기하였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열전에서도 ‘고려전’으로 기록하되 그 초기 건국 기사에서는 고구려라는 국호를 남기고 있고, 고구려 국왕의 책봉 기사도 고려왕으로 기록한 자료가 나오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의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 것은 국가에서 세운 비석과 민간인이 쓴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삼국유사와 당시의 중국 역사서에도 확인된다. 국호개칭의 시기는 장수왕 11년(423) 이전으로 판단된다. 이런 국호의 개칭은 고구려인이 한자 문화에 익숙해지자 국호에서 의미가 없는 ‘句’자를 생략해 버림으로써 높고 아름다운 나라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서라벌을 신라로 개칭한 것과 유사한 개칭이었다.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에는 국호개칭의 기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자료는 왕건 고려에 전해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의 멸망시에 고구려 측의 자료는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이는 소정방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살던 5만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평양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수서, 신·구당서에서는 고구려를 모두 ‘고려’전을 기술되고 본기에서는 물론 고려로 기록되어 고구려라는 국호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발해도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高麗’라고 기록되었는데 이을 고마로 음독하고 왕건 고려는 ‘고라이’로 구분해 읽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을 칭하는 명칭으로 고려라 했음을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 려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해온 실제 기록을 무신집권말기인 고종 대까지 발견할 수 있다. 식자층에서 前高麗와 今高麗로 구분해 쓰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대에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나온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라는 국호는 왕건의 고려왕조를 지칭하고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였음을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성종대에 편찬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그리고 이후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에서도 고려는 왕건 고려만을 지칭했다.
조선시대에는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였던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의 원문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여 썼기 때문에 ‘구려’, ‘고구려’ ‘고려’라는 국호가 그대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에서 그는 ‘고려’라는 국호 뒤에 고구려를 칭한다는 자신의 주를 여러 곳에서 붙였다. 그리고 이들 국호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고구려』 세기(世紀) 제3에서 송(宋)나라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연어(石林燕語)"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국호는 구려인데 왕의 성씨가 고씨이기 때문에 고구려라고 칭했고, 수나라 이후 중국인은 ‘구’자를 제거하여 생략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국인이 생략하여 고려로 썼다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는 당태종의 거대한 제국의 침입을 물리친 바 있는 강한 국가로 인식한 것도 고구려의 고려를 지칭한 것이다. 아마도 서역을 통해 요하이동의 만주대륙과 한반도에 걸쳤던 대국으로서의 ‘고려’라는 고구려 국호가 오늘날 코리아로 불리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나 이는 앞으로 좀 더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에서 시조 주몽 때에 성씨가 '고'씨라는 것은 당시의 고구려의 실정에 맞지 않는 사실이다. 이 당시 중국적인 성씨를 사용했다고 할 수 없다. 그들 왕족은 해씨로 칭했음을 해모수, 해부루, 그리고 고구려 초기 왕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시조를 고주몽이라고 칭함도 잘못이다. 주몽은 중국인이 사용한 명칭이고, 고구려 당시의 이름은 추모였다. 고구려의 국호개칭은 김부식의 삭제와 개서함으로 800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왕건고려왕조가 있기 때문에 고구려라고 칭함은 우리의 편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첫댓글 추모성왕
제가 평소 궁금해하던 내용인데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高麗 =korea =大韓民國=統一 大韓民國(高麗)
추모왕은 동명성왕으로 유리왕은 유리명왕으로 대무왕은 대무신왕으로 聖, 明. 神자를 붙여 추존했습니다. 이는 장수왕의 국호개칭 때에 행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는 시조 추모왕 유라왕이라고 칭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경사에 선조왕에게 아름다운 시호를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몽이란 이름을 쓰지 말고 추모라는 고유이름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두분 모두 깊은 관심을 가져 감사합니다. 통일 후의 국호를 한글로 '코리아'라고 쓰자는 역사학자의 제언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유지할 것인지는 통일 양상에 따라 다를수 있습니다.
동명성왕과 관련해서는 부여의 시조라는 설도 있으나 제가 보기에는 추모의 신화를 부여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서에 검토 없이 마구 쓴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제에서도 동명사당을 짓고 즉위한 군주가 찾아가 참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