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수행모델을 비판한다>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는 힌두 수행자 마하르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호준이 번역한 책과 대성스님의 '진아여여'를 참고) 유행시킨 수행법이다. 한국 불교에서 기존에 수행하던 이뭣고? 화두가 이것의 영향을 받아 ‘나는 누구인가?’ 소위 참나-찾기 라는 마음공부가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의 수행모델이 되는 환등기, 영사기(혹은 빔 프로젝터)와 같은 도구로는 주객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수행모델로는 끊임없는 주객근접과 주객합일을 향한 점진적 수행만 있을 뿐이다. 점진적 주객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근접삼매와 본삼매라 한다. 베단타철학에서 유분별삼매 vikalpa-samadhi, 무분별삼매nirvikalpa-samadhi, 투리야띠따 turyatita(각성위, 몽위, 숙면위, 제4 초월위) 라는 것들이다. 요가체계에서도 언급하는 4선정, 4무색정이 모두 끊임없는 주객근접, 주객수렴의 과정이다. 결코 주객쌍망에 이르지 못한다. 설사 주객쌍망에 이르렀다 해도 깨달음이 아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4무색정도 버리고 정념정지를 밝혀서 곧바로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
주객근접: 근접삼매 approximate samadhi
주객수렴: 일념집중 onepointed-ness
주객쌍망(주관과 객관의 소멸)은 의식이 끊어진 기절상태와 비슷하기에 泯絶無記민절무기라 한다. 마하르쉬의 제자들 가운데 일상생활을 하던 가운데 갑자기 몸이 굳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거나, 산채로 기절상태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의식이 끊어지는 걸 목표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몰입을 無記定무기정 혹은 邪定(빗나간 선정)이라 하여 경계하였다. 이는 주관과 객관이 연기관계라는 걸 모르는 채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이란 독립된 자체성이 없이, 서로 조건지워져 상호연관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연기-무자성-공성을 이해한 다음에 수행하라고 권장한다.
能由境能, 境由能境; 欲知兩端, 元是一空;
능유경능 경유능경 욕지양단 원시일공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淨麤, 寧有偏當.
일공동양 제함만상 불견정추 녕유편당
대상이 있음으로 의식이 작용하고,
의식이 있음으로 대상이 나타난다
의식과 대상, 이 둘은 본래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이 두 가지가
삼라만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의식은 정미로우며 대상은 거칠다고 보지 말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 -<신심명>에서
결론: 나는 누구인가? 를 찾는 것이 아닌 정념정지가 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 正念정념과 正智정지는 sati-sampajana를 한역한 것으로 인지심리학적인 용어로 주목과 해석이다. 의식은 1찰나씩 생멸한다. 그래서 의식은 아날로그가 아니고 디지털적이다. 의식이 대상을 지각하기 위해서 주목에 1찰나, 해석에 1찰나가 소요된다. 찰나의 차이가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정념정지기 상속된다. 그러면 유가안온yoga-khema하니 선종에서는 寂照圓明적조원명이라 하여 수행의 끝이다. 그런데 이때의 정념정지는 위빠사나 초보자가 하는 생멸심 알아차리기 수준이 아니라, 虛明自照, 허명자조 不勞心力불노심력이다. 텅 비어 밝아 저절로 비춤이라,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水淸徹底兮, 魚行遲遲; 수청철저혜, 어행지지;
空豁莫涯兮, 鳥飛杳渺. 공활막애혜, 조비묘묘
물이 맑아 바닥까지 드러나니
고기가 천천히 움직이고
하늘이 넓어 끝이 없으니
새가 아득히 날아가네 <천동정각의 게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