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구현(AIAM 미술 경영연구소 대표)
ADAGP 글로벌저작권자 연합회 공식사이트에 게재된 베르나르 뷔페 등록 페이지
뷔페는 피카소와 견줄 만큼 명성이 드높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억대 이상의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고 그의 그림은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현금과 같은 작가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과 인생에 관한 극도의 평가는 늘 찬반양론이었다. 그만의 독특한 작품경향과 걸맞는 ‘인지도 확보’ 과정을 살펴본다. 뷔페의 작품 전반에 감도는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와는 달리 그는 이른 나이부터 작가로서 더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세에 첫 개인전을 가졌고, 곧바로 20세에 최고 권위의 <비평가 상>을 수상하며 파리 최고의 갤러리 중 하나인≪드루앙-다비드≫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후 해마다 개인전을 열었고 30대 초반에는 이미 구상회화의 대표 주자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구체적으로1950년대 중반 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이탈리아까지 이름을 날렸다. 1955년에는 미술잡지 『꼬네상스데자르』에서 뷔페를 전후의 최고의 화가 10인중 1위로 선정했다. 소설가 조르주심농을 만나 그의 작품 『라 샹브르』의 무대와 의상 작업을 했다. 이렇게 돈과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파리 외곽 도몽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가 다음 해에 보다 쾌적한 환경의 저택으로 이사를 단행한다. 1958년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정점을 찍은 중요한 일들이 벌어진다. 당대의 파리 3대 현대 화랑인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그의 첫 회고전이 열렸다. 그의 나이 30세에 불과했을 때에 잡은 행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황을 이룬데 이어, 3월 30일 자『뉴욕타임즈』에는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영화감독 로제바딤,영화배우 브리지트바르도, 소설가•극작가 프랑수아즈사강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 다섯중 하나’로 뷔페가 언급되었다. 뷔페는 특히 사강과 절친한 사이였다. 뷔페는 그녀의 발레『이뤄지지 않은 만남』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한다. 또한사강이교통사고를 당해, 사고 후유증 때문에 처방받은 모르핀 중독으로 전문 의료 시설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기간 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
자신의 소유인 아르크 성에서 한창 작업중인 베르나르 뷔페
『독약: 사강의 환각일기』의 삽화 작업도 하였다.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그의 삽화 또한 사강의 글만큼이나 찬사를 받는다. 뷔페는 다작을 쏟아내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순수 회화외에도 카뮈의『이방인』과 ≪롤랑쁘띠 발레단≫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초연하게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동료 화가 자비에르제바코의 소개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린, ‘영원한 뮤즈’아나벨슈웝과 결혼에 골인한다. 이와 같은 브랜드 인지도의 상승세에 힘입어 1961년 프랑스 남부 액상프로방스의 고성 ≪아르크 성≫을구입한 후1964년까지 거주한다. 그도 모자라는지, 전용차로롤스로이스를구입하면서 운전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운전기사까지고용하는 등 극도의 사치를 일삼는다. 화가치고는 너무 화려한 성을 구입한 것을 두고 주변에서 말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작가로서의 초심을 버리고 호화생활을 하는 등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다. 결국 뷔페의 시대는 그의 나이에 비해 일찍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과 부를 얻은 뷔페가 롤스로이스와 300년 된 고성을 구입하자 평단이 예술성을 의심했다. 가난하고 우울한 작품세계가 전부이기를 바랐던 대중들은 화가의 삶에 의문을 나타내고 돈과 결탁한 화가라는 비난을 한 것이다. 무엇보다 뷔페의 명예에 상처를 입힌 사건은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류는 추상표현주의의 하나인 <앵포르멜> 운동이 주류였다는 점이다.뷔페가 잠시 추상회화에 맞서 구상회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줬지만, 1960년대에는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미술운동인<누보레알리즘>이 유럽과 미국의 화단을 지배한 추상미술에 도전하였다. 뷔페는 매우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손재주가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작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모두 영감이 아니고 손의 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런 그가 자살 했다는 것은 더 의미가 깊게 다가온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예술가에게 있어 어디든 있을 수 있다. 1971년에는 프랑스 문화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레지옹도뇌르>를 수여 받았다. [ADAGP글로벌저작권자]로써의 베르나르 뷔페는, 글로벌 미술시장에서 꾸준하게 선두 그룹에 속하는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다. 1992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미술지 『보자르』의 100호 기념 여론 조사에서, ‘앤디워홀’과 ‘베르메르’를 뛰어넘어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위대한 예술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는 전후시대를 대표하는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랑스 예술가’로알려진다. 흔히들 떠올리는 ‘예술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 평단의 공격에 자주 노출됐다. 구상회화가 저물어 가던 당대의 흐름에 따라 철저하게 외면 받은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다. 궁극적으로 파격적인 양태를 몸소 실천한 베르나르 뷔페는, 눈에 보이는 성공에 열광하는 현대의 작가들에게, 진정한 예술과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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