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2: 10 다윗의 집 - 슥 12: 11 큰 애통
3.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 12: 10-14. )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슥 12: 10 다윗의 집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찔러 죽인 자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들이 자기들이 찔러 죽은 자를 마치 자신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통곡하듯이 그렇게 애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렇게 자기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자에게 주께서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
1]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고난받으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신다.
또 메시아께서는 독자(獨子)이시며 장자(長子)이심을 암시한다.
2]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 요 1: 14, 18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3: 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리아의 맏아들이시며(전통본문; 눅 2:7) 또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시다.
* 마 1: 25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롬 8: 29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메시아께서는 찔림을 받으실 것이 예언되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찌른 자를 바라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창으로 옆구리에 찔림을 받으셨다.
* 요 19: 37 -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성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며, 다윗 집과 예루살렘 성 거민은 메시아를 인해 애통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의 회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서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다(행 2: 37).
이것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 후에 일어난 회개 운동으로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 행 2: 37-41 –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거기 말하기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겪으셨던 일을 생각하고 애통해하는 것은,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혹 잘못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기뻐할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라는 생각으로 죄를 아프게 여겨야 한다.
자기 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길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하였다(약 4: 9).
본문에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했으니, 이는 진정한 슬픔과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자기 죄가 메시야를 죽인 일에 대하여 이런 진정한 슬픔을 가진 자들은 진정한 영적 희열을 가진다.
슥 12: 11 큰 애통 -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
‘그 날’ 곧 메시아께서 찔림을 받으시는 날에 ‘큰 애통’ 곧 메시아를 찌른 죄의 회개를 비롯한 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유대인들이 추앙하던 왕의 죽음은 그들의 큰 슬픔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신자들이 슬퍼할 일이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 슬픔이 아니고 회개의 슬픔이니 신령한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눈물을 소유한다.
눈물 없이는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눈물은 부드러운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부드럽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음이니 어찌 십자가를 깨달으랴?
2]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은 요시야 왕이 거기서 전사한 때에 유대인들이 슬퍼하였음을 의미한다.
* 대하 35: 22-25 –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그러므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남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실망, 낙담, 응답되지 않는 기도, 이것이 있고서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실망, 낙담할 만한 때에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