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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Ⅶ (삼상 22:6-23)
영적적용 : 육신에 속한 사람
요약
사울이 기브아에서 자기를 높이는 모든 것에서 육신의 악한 속성을, 에돔 인 도엑과 손 잡음에서 육신은 불온한 사상을 따라 행함을,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 85인을 죽임에서 육신은 신령한 행실들을 죽임을, 죽는 자 중에서 아비아달이 피함은 하나님의 붙드심을, 다윗의 자책은 회개의 원리를 보여준다.
설명
사울의 다윗에 대한 조치에서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신령한 것을 용납지 않는다(고전2:14).
6절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2. 그 자체가 교만이다(엡2:3).
6절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3. 신령한 일을 증오한다(갈5:17).
6절 "손에 단창을 들고"
4. 자기 욕망이 신이다(빌3:19).
6절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5. 격정적이요 행동적이다.
6절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6.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엡2:3, 5:6, 골3:5-6 골3:5-6).
7절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7. 영혼까지도 주관한다(창6:3, 5).
7절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선과 악 양면에 사용되어진다.
8절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
9. 불온한 생각과 손을 잡는다.
9절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10. 신령함과 원수이다.
13절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11. 육신으로 주를 위함이 육신도 잘되는 길이다(고전6:13, 요삼 2).
14절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12. 육체에 영성을 강하게 입어야 한다(행2:16).
17절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3. 그 행실을 더럽힌다(롬8:12-14).
18절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14. 내 인생을 저주함이 된다(벧전3:10-12).
19절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15. 그러나 타락치 않도록 붙드신다(사1:8-9, 시37:24).
20절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16. 회개는 다른 방향에서 시작된다.
22절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17. 예수 안에 있으면 실족치 않는다(요일3:6).
23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강해
이 시간에는 사울과 다윗 일곱 번째 시간으로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인 사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도엑의 고발로 다윗을 도운 놉의 제사장 무리들이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22절에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
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한 대로 이 비극은 다윗이 여호와께 묻지 않고 행했다가 무죄한 자들만 당한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 일을 당하고 에돔인 도엑을 생각하며 지은 시가 시편 52편입니다.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이 시편에서 다윗이 도엑에 관하여 얼마나 큰 배신감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 사건을 통해서 육신이 그 생각과 손을 잡고 얼마나 신앙을 죽이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용납지 않습니다.
여기 6절에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했습니다.
즉 사울이 자신의 왕위 보존을 위해 죽이려 했던 다윗이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많은 무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는 사실은 사울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두드러기가 날만큼 싫어합니다. 그래서 고전 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했습니다.
2.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 자체가 교만입니다.
다시 6절에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했습니다.
당시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높은 곳은 왕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높은 곳"이란 '라마'로서 '높이 쌓아 올린'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자신을 신적으로 높이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 자기 왕권 고수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여기에 사울의 교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자기의 삶의 원리로 삼는 사람입니다. 엡 2:3에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한 대로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성령을 좇아 하나님 주관으로 나가면 영에 속한 사람이지만 육을 좇으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왕좌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제는 육신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주관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증오합니다.
다시 6절에 "손에 단창을 들고" 했습니다.
여기 사울이 단창을 든 것은 고대 근동의 왕들이 왕권의 상징으로 홀을 들었지만 사울은 흔히 좀 더 호전적인 단창을 소지하였습니다(삼상 18:10, 26:7, 삼하 6:1). 그런데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때 평소에는 그가 홀을 사용했으나 다윗과 관련하여 만은 단창을 가지고 나타났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적의감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신은 신령한 일을 싫어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증오합니다. 그래서 갈 5:17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 사건과 같은 많은 투쟁사처럼 육신은 신령한 일을 파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4.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 욕망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다시 6절에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했습니다.
여기 에셀나무는 본래 수분이 많은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고지였던 기브아에 에셀나무가 있다는 것은 사울이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된 왕임을 알리기 위해 즉 자기를 신성시하기 위해 에셀나무가 갖고 있는 그 상징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은 자기의 본능적인 욕망을 우상처럼 숭배합니다. 그래서 빌 3:19에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잇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라"했습니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이런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응답이 없을 뿐더러 속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5. 육신에 속한 사람은 격정적이요 행동적입니다.
다시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했습니다.
이는 마치 동양의 절대 군주가 자신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해 신하들을 기립시킨 것을 연상시킨다. 학자들은 당시 사울은 흥분상태였고 그 부하들을 질책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전회의를 이끌기 위해 이런 상태를 유지 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처럼 육신의 감정은 매우 격정적이고 행동적입니다. 마치 영혼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하고 안정된다면 육신은 정 반대로 매우 격정적입니다. 비유로 하면 유비와 장비, 혹은 인자한 형과 그렇지 않는 동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감을 받기 위해서는 잔잔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대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왕상 19:11-13).
6.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7절에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 자기 지파로 측근들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이지만 본래는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이 이 아들을 낳고 산고로 죽어가면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베냐민은 흔히 육체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육체란 양면성의 존재입니다. 즉 육체를 주를 위해 사용할 때는 오른손 즉 권능의 요인이 되지만 욕심을 위해 사용하면 슬픔의 요인이 됩니다. 여기 슬픔이란 하나님의 노여우심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용어가 나오면 꼭 육체의 탐욕과 관계가 있습니다(엡 2:3, 5:6, 골 3:5-6). 그래서 골 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했습니다.
7.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혼까지도 주관해 버립니다.
7절에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했습니다.
사울은 대부분 베냐민 사람들로 자기 신하를 삼고 그들에게 절대의 충성을 요구하기 위해 포도원과 밭을 주었는데 그것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었습니다(삼상 8:10-18).
그런데 여기 포도원과 밭은 좁은 의미에서는 영혼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육신이 영혼과 마음을 정복하는 육신에 속한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즉 육신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영혼의 요구는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마음이 육신의 시중을 드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육에 속한 자로 타락한 것을 성경은 "육체가 됨이라"(창 6:3) 했고 그러한 사람에 대하여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이라고 했습니다.
8. 육신은 선과 악 양면에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8절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여기 베냐민 지파의 측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선한 의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나단의 의중을 살펴서 다윗을 잡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의 측근들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 선과 악 양면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육신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영성을 입혀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십니다.
9. 육신에 속한 사람은 불온한 생각과 손을 잡고 일합니다.
9-10절에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했습니다.
여기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을 사실과는 다르게 부풀려서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럼 에돔인 도엑은 무엇일까요?
에돔은 '붉다'는 뜻으로 조상 에서는 몸의 털이 붉었고 그가 살던 에돔 땅도 온통 붉은 흙입니다. 그리고 에돔에는 붉은 포도주로 유명합니다. 그러므로 에돔은 불온한 생각이나 사상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도엑은 잘못된 정보 제공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울로 하여금 다시 정권욕으로 불타게 할 정보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사울의 목자장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짐승을 맡아 짐승의 수를 늘려주고 늘려주는 일을 했습니다. 짐승이란 육체의 본능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악한 생각은 온갖 상상과 계획을 심어주어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육신적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두 가지의 공식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선한 의지인 요나단의 정보를 들으면 사울은 좋은 사람이 되지만(삼상 19:4-7) 악한 생각인 도엑의 정보를 들으면 나쁜 사람이 된다는 공식입니다.
그런데 육신은 특별히 영성을 덧입히지 않으면 정욕적이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성향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도엑은 에돔의 이방인이었어도 그를 신임하여 재산까지 맡겼지만 요나단은 그의 친 아들이었지만 다윗과 모반을 꾀할 의심과 노여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10. 육신적인 사람은 신령한 일을 원수로 압니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울의 오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예배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떡과 칼은 말씀을 대표한 은혜의 상징합니다. 즉 그들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것처럼 예배하면 우리 심령이 은혜를 받아 육신적인 욕망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했던 것입니다.
11. 육신으로 주를 위하는 것이 육신도 잘되는 길입니다.
14절에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했습니다.
여기 사울이 최고의 후원자인 다윗을 죽이려는 어리석음이 나타납니다. 아히멜렉의 말대로 다윗이야 말로 사울의 최고의 충신이요 사위요 모신이요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지만 않는다면 도리어 골리앗을 죽이던 때와 같이 다윗의 큰 도움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하기를 고전 6:13에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했고 또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몸이 잘되는 길은 주를 위해 살고 주를 핍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육신을 건강하게 해 주실 것이고 하는 모든 일을 형통케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주님보다 자기 탐욕을 더 추구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육신의 성향인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어지고 영의 성향인 다윗의 왕권이 강화되어가는 것이 바로 성화요 영성인 것입니다.
12. 육체에 성령을 입어야 아주 저지할 수 있습니다.
17절에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했습니다.
이들은 사울의 시위병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기에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손 대기 싫어함은 마땅한 일입니다. 비유적인 측면에서 사울의 말을 듣지 않는 이 호위병들은 육체 입혀주신 영성 즉 은사입니다.
영성을 육체에 입혀 주신다란 행 2:16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에서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한 예언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든 자들이듯이 은사란 육체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여러 방향에서 도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는 영적인 도구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주의 일을 수행하는 귀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영성이 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은사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온한 사상인 도엑이 나서서 설치게 됩니다.
13.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 행실을 더럽힙니다.
18절에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했습니다.
본절의 문자적인 의미는 사울이 제사장 아히멜렉 뿐 아니라 놉의 모든 제사장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구약 성소에서는 일반 제사장들은 흰 세마포 에봇을 입고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측면에서 보면 흰 세마포 에봇을 입은 제사장이란 성도의 거룩한 행실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육신이 발동하게 되면 양심의 저지선은 있으나 마나 수월하게 넘어 성도의 거룩한 행실을 짓밟아 버립니다.
그런데 그 죽인 수효가 팔십오 인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숫자가 정확하게 나타나면 여기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85는 고난과 시련의 수 40에 갑절을 한 수에다 고통 혹은 수치의 수 5를 더한 수입니다.
그런데 여기 갑절이란 영육 간 그러니까 인격 전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5를 더한 것은 인격 전체가 더럽혀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를 당하실 때 머리에 가시관 두 손에 못, 두 발에도 못, 옆구리에 창, 등에는 채찍 등 5 종류의 부분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또 10은 환난의 수인데 5는 그 환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은 그것을 역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8:12-14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육적인 행실은 죽고 영적인 성도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14. 육신에 속하면 내 인생을 저주함이 됩니다.
19절에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했습니다.
사울은 아히멜렉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놉으로 도엑의 군대를 보내 제사장들의 가족과 짐승들까지 진멸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다 내 안에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육신에 속하면 내 인생을 저주함이 됨을 보여줍니다. 즉 귀한 능력도 은사도 축복도 마음의 보물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을 내어도 해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0-12) 했던 것입니다.
15. 그러나 남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20-21절에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아무리 육신적으로 타락한다 할지라도 완전히는 타락치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이다. 그래서 시 37:24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했고, 사 1:8-9에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했습니다.
여기 남은 자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요 구속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신령한 의미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의 은총입니다.
16. 육신에 속한 사람은 회개의 영이 필요합니다.
22절에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했습니다.
분명히 사울이 사람을 죽였지만 다윗은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엑이 거기 있는 것을 보았으면 지혜롭게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급한 나머지 그렇지 못하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것은 육에 이끌림을 좇아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범죄는 전 인격적인 사항입니다. 성경이 육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신령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지주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육신의 성향에게 회개를 맡겨 놓으면 할까요? 그 쪽에서 먼저 회개할 리가 없습니다. 범죄는 육신이 주체가 되어 하지만 회개의 원리는 먼저 영혼이 주체가 되어 합니다. 이 역시 전 인격적인 회개여야 합니다. 먼저 중생한 내 영혼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서 탄식하며 회개합니다. 이 회개는 결국 죄의 길을 가는 육신까지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되 성령의 도우심 즉 회개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17. 예수 안에 있으면 실족치 않습니다.
23절에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그러니까 그 역시 제사장입니다. 즉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나와 함께 있으면 생명이 보전될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그렇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고 나아가 자신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왕권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진리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언제나 새로우며 넘어지지 않으며 범죄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그래서 요일 3:6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엄밀한 차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이나 성령 안이나 같은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안에 있는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구태여 구분하자면 그리스도 안이란 복음을 강조한 말로서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서 구원받은 승리자
입니다. 이것은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라면 누구나 다 되겠지만 좀 더 기억할 점은 또 성령충만 안에 있어야 그 복음의 실재를 누리
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부족하거나 교만하거나 육신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는 실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성도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다는 조건만 충족하다면 성도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왕권을 위해 격동하는 사울을 통하여 육신의 정체를 배웠습니다.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십시다. 이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 안과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