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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 45 마리아에게 하신 일 - 요 11: 50 백성을 위하여
7. 한 사람의 죽음 ( 11: 45-52 )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다.
* 요 20: 30-31 –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요 11: 45 마리아에게 하신 일 -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 가지를 말한다.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1]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무엇보다도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를 통한 부활의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직접 목격한 유대인 중에는 두 가지로 반응이 나타났다.
(1) 긍정적인 반응
시각장애인을 고치는 일과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세상에서 나타냄을 인정한 점이다.
(2) 부정적인 점
예수의 하는 일을 통하여 민심이 예수에게로 쏠려 기득권을 누려왔던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신분이 위태로워짐을 깨닫고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2] 그를 믿었으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 엡 2: 8-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 살후 3: 2 -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이끄시는 자들만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
* 요 6: 37, 44 –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요 10: 26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요 11: 46 예수께서 하신 일 -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
마리아와 예수의 근처에서 발생하는 일을 목격한 유대인 중 불안을 감지한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1]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 일은 앞에서 서술한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신 일과 나사로를 부활시킨 일로 그 전후 과정을 낱낱이 보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에서 예수를 비방하여 제게할 명분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2] 살아난 나사로 (요 11: 28-46)
마르다의 전갈을 듣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를 맞았던 그곳에 계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모습과 그녀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사 자신도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인간의 죽음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깃들여 있어 이처럼 죄인을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
* 롬 5: 7-8 –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예수님의 눈물은 잠시 후에 죽음의 권세를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로 인하여 큰 기쁨을 가져오게 되었다.
(1) 비통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는 마르다가 왜 집으로 돌아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달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 일은 기록된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볼 때 자명해진다.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힌트를 받았다.
이에 마르다는 이 일을 마리아에게 전하여 더욱 간절하게 주님께 부탁하기 위하여 평소에 지극히 주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 마리아를 예수님께 보냈다.
과연 마르다의 예상했던 것처럼 마리아의 말에는 더욱 큰 호소력이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간청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무덤에 따라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간구에는 호소력이 있다.
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일은 그의 온전한 인성을 드러내신 일이다.
예수님은 어떤 면으로 생각하면 우실 필요가 없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후에 죽은 나사로를 자신이 살려내실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살리심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지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일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일이다.
② 예수님의 눈물은 죄로 죽게 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의 표시이다.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음을 근심하시고 한탄하셨다.
* 창 6: 5-7 –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 결과가 세상의 참혹함과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망 권세에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③ 예수님의 비통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탄에 대한 공의의 분노셨다.
예수님은 사망 앞에서 죽음의 슬픔과 이 권세를 휘두르는 사탄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셨다.
(2)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안내로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가셨다. 예수님은 돌로 막아놓은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다.
이때 뒤를 따라온 마르다가 주님을 향하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확실히 믿었다가도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태를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의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인자하신 예수님은 그의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나무라셨다.
마르다는 즉시 불신앙을 뉘우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무덤의 돌을 옮겼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셨다.
① 주님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그의 최상의 목표로 삼고 계시는 예수님은 이미 주님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시면서 감사하셨다.
② 예수님은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간구였기 때문에 항상 들어주셨고 주님은 그같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③ 예수님은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다.
지금 하시려는 일도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심을 나타내셨는데 그곳에 둘러선 무리들로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며 영생을 얻는 비결이다.
* 요 6: 28-29 –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결론 :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예수님의 음성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나타내셨던 그 창조적인 선언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거늘 어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왔다. 이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와서 죽은 많은 심령들을 살려내고 있다.
* 요 5: 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 음성이 들려올 때가 올 것이다.
* 요 5: 28-29 –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11: 47 공회를 모으고 -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는 내막이 나타났다.
1]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염려였다.
그러므로 공회를 열어 예수에 대책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2]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객관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들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심령이 굳어서 그를 믿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아지면 로마인들이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여 다시 그 땅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왕이 아니셨다. 그의 왕권은 영적이고 도덕적이다.
요 11: 48 이대로 두면 -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됨을 염려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반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돌 것으로 보았다.
이를 빌미로 로마 당국이 유대를 침략하여 땅과 민족을 탈취할 것으로 선동하였다.
1]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대로 둔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치료로 부각된 예수에 대한 여론이 나사로의 부활로 확산되어 기득권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여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심산이었다.
2]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예수로 인한 여론의 향방이 사회의 불안으로 이어져 로마 정부로부터 불신을 받아 로마의 직접 통치로 이어진다면 그들은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의 기득권을 몰수하여 결국 나라와 민족을 빼앗기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요 11: 49 그 해의 대제사장 -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
그 당시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구나.
1]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그 해"라고 밝힌 것이다(Jos. Antiq. 18, 2, 2).
2]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가야바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에게 닥처 올 우려를 부각시키며 그들의 심중을 지적하였다.
요 11: 50 백성을 위하여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의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1]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은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
* 민 24: 17 -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또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
* 삼상 26: 25 –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