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개신교 교회 생활을 최소 몇년 이상 해본 사람치고 "칼빈"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로교 신학자 한 명에 불과한 "존 칼빈"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형식적으로는 "親칼빈"과 "反칼빈"으로 두 진영이 나뉘는 모양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진영 다 차이가 없다. '형식적으로' 말해서 감리교와 성결교, 오순절 계파들은 '구원의 보장'을 믿지 않는(소위 웨슬리안 신학) 반칼빈주의이고 장로교가 칼빈주의의 본산이다. 침례교는 원래 구원의 보장을 믿는데 칼빈주의와는 믿는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위 대립 구도에 집어넣기가 애매하다. 한국에서 침례교회의 입지가 여타 교단들에 비해 약한 관계로, 또 한국식 침례교는 신학이 왜곡된 부분도 있어서 비교하기 곤란하다.
어쨌든 이렇게 통틀어서 개신교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신앙의 기초를 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칼빈, 아니면 그 반대편. 그 반대편의 인사로 거명되는 인물은 "아르미니우스"라는 칼빈보다 유명하지 않은 옛날 신학자인데 칼빈주의만큼이나 알미니안주의도 한국 교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의 TULIP 5대 강령의 제5강령을 반대하기 때문에 "죽일 놈의 이단 역적"으로 비판하는 것 외에 알미니우스에 대해 제대로 소개한 책자조차 한국에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렇기에 무슨 도깨비 복마전 마냥, 혹은 빨갱이 때려잡자는 식의 마녀 사냥 마냥 한쪽이 다른 쪽을 마녀라고 까대는 거친 논란만 있을 뿐 한국 개신교인들은 칼빈주의가 뭔지 그 반대파인 알미니안이 뭔지 제대로 모른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안다 말인가? 독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필자는 칼빈주의를 (신학적으로) 전공한 적 없으며, 전공하지 않았다 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며 기본 핵심 사항들은 알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보다는 5대 강령의 독소에 대해 분석할 수 있다. 이 글이 TULIP을 비평하기 위한 글은 아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한다.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는 필자도 몇몇 간접 정보로만 알고 있지만 이 글에 그 내용을 써서 여러분들이 크게 도움받을 내용은 없다. 왜냐하니 그 이야기는 수백년 전 신학자들이 논쟁하는, 물론 그 이슈는 사람의 구원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첨예한 오늘날의 이슈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독자는 흥미가 없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분은 칼빈주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혹은 질문을 알미니안주의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모른다. 지독히도 모른다. 여러분들 가운데 신학을 배운 사람도 있겠고 목사님도 있겠지만 그분들조차도 잘 모른다. 왜? "빨갱이 사냥 논리" 하에서 배웠기 때문에 한쪽의 시각 밖에 없다. 알미니안은 칼빈주의자들에게 빨갱이고 칼빈주의자는 알미니안에게 있어 빨갱이다.
오늘날에는 시대 풍조가 "라오디케아"(차지도 덥지도 않은 말세 교회)로 바뀌어서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불구대천 원수였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이 손잡는 희안한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일이 바로 한국 개신교에서 앞장서서 일어난다. 이제 순수한 칼빈주의도 없고 순수한 알미니안도 없다. 그들은 서로 교리를 공유하고 있고 차이점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여전히 "선택"의 대상과 시점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들이 거의 공감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구원은 한번 받고 영원히 보장되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장로교 목사들이 집단 배교라도 했단 말인가? 칼빈주의의 철칙인 제5 강령, 성도의 견인을 잊어버리고 적에게 가서 붙었는가? 그게 아니라 원래 칼빈주의는 구원의 보장을 믿은 적이 없다. 앞서 빨갱이, 파랭이 논리를 전제로 깔았지만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빨갱이는 못된 짓만 하고 파랭이는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빨갱이나 파랭이나 속은 다 시커멓더라, 사람들이 교훈을 배운다. 사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모두 성경적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길을 흐리고 혼돈시키고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말 교리였다. 사람들이 속아서 한편 논리로 기울면 성경적이고 다른 편으로 기울면 마귀적이라고 상대주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마귀는 중요한 이득을 취한 것이다. 간단한 논리다. 어쨌든 마귀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혹시 어쩌다가 정말 구원받더라도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면 더 좋다. '자기 구원에 관해 의심에 찬'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재생산'(구령, 전도)하기에 적합치 않다. 그들은 거의 쓸모없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영적 전쟁에서 '패잔병'으로 분류된다. 구원의 강한 확신을 가진 성도만이 영적 전쟁에 나설 수 있다.
알미니안을 믿는 사람들,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 아니라 현재 시점으로 말하는 것인데 그들에게 가서 "알미니안"이 뭐요? 물어보기 바란다. 감리교나 성결교 목사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유감이지만 그들도 모른다. 단지 그들이 아는 것은 "구원은 영원한 게 아니니까 두려워하는" 게 성경적이라고 가르친다는 것 밖에 없다.
칼빈주의자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칼빈주의의 핵심이 무엇이요? 그러면 횡설수설한다. 그것만이 우주에서 하나님을 지존 최고, 울트라 캡숑의 대단한 초월적 존재로 만들어준다 설명할지 모른다. 모든 사람을 독재적으로 임의로 판단해서 천국도 지옥도 보내버리는 통 큰 하나님, 멋지다. 그 얘기를 하고 나서 별로 할 얘기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견인"은 어떤 것인지 한번 물어보라. 장로교 교인들과 장로들과 목사들, 전도사들에게 "당신, 견인하고 있습니까?" 물어보라.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다. 죽을 때까지 "견인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한번 물어보라. 결코, 그들은 정답을 말해줄 수 없다. 어느 정도 견인해야 되는지, 카톨릭 신부 정도의 극도의 고행에 이르러야 되는지, 성공회 신부 정도 하면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그들은 알려줄 수 없다.
칼빈주의자들이 아는 사실은 단 하나, 구원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기에' 평생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되며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보장'을 전혀 믿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서 칼빈주의 제5강령이 구원의 보장이라고 잘못 알려졌는지 모르겠다. 그 교리는 구원의 보장과 구만리쯤 떨어진 지옥에서 나온 마귀의 행위 구원 교리다.
이제, 여러분은 사태를 아실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무슨 무슨 주의고 신학이고 상관없이 마귀적인 행위 구원을 여러 이름으로 나열된 것 중 하나 집어서 자기 것으로 삼고 평생 노력하다가 지옥에 간다. 그것을 "개신교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평생 노력하면서 얻지 못하는 그 '구원'을 어떤 사람들, 즉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이미 받았다"고 하니 허파가 뒤집힐 지경이 된다. 그래서 "구원파다"고 모함하거나 카톨릭 신부들이 복음전도자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측은하게 우리를 보는 것이다. 그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쯧쯧, 나는 평생동안 이루어가려고 애쓰는 그것을 저 철부지들은 단번에 믿고 얻었다고 좋아하네. 쯧쯧. 나도 저런 시절 있었지. 하지만 나는 더 고차원의 믿음을 얻었어. 이제 조금 더 노력하면 나는 진짜, 진진짜 구원을 얻을 거야"
이게 어떤 이미지와 겹쳐지는지 여러분 아시겠는가? 바리새인이다. 지독한 교만이다. 행위를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자들이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은 시작부터 끝까지 바리새인적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바리새인을 지워버리고 순수한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다 결정해 버린다.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칼빈주의(혹은 알미니안도 상관없다)자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