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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0장 24-29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난 뒤 사흘 째 되는 날, 즉 안식 후 첫날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을 본 여자들의 말을 믿지도 않았고(막16:10-11), 허탄한 말로 여겼습니다(눅24:1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그때도 믿지 않았습니다(막16:12-13). 심지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는데도 부활하셨다는 생각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본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눅24:37).
이런 그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막16:14). 왜냐하면 죽으실 것과 부활하신 것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활 이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자들의 말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망만 하시지 않고 위로의 말씀도 주시는데,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신 배경 속에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 특히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들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행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부활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자세를 보면 죽음은 더욱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증명하시는데, 예수님은 그런 방식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완악함을 누그러뜨리시고 다시금 말씀을 떠올리게 하심으로 믿음 가운데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재차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주시는데, 그들의 사명은 사도로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을 증거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과 어려움, 그리고 박해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강을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요, 그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 마음을 주장하시어 여러 가지 힘든 일과 어려움, 박해 속에서도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도 말씀하시는데, 복음 사역은 분명 힘들고 어렵습니다.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넘어졌다 할지라도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서, 아니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너희로 하여금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사역의 핵심은 죄 사함인데,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것도 죄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죄 사함이 선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던 겁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사람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 혹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선포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면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모든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님을 밝혀줍니다. 오늘 본문 24절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자요 완악한 자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더욱 강퍅한 불신앙의 면모를 보이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고, 본 것으로 인해 믿는 자가 되지 말고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으로 책망하시는 것은 그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붙들어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에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서들처럼 굳이 이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내용만으로도 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믿지 않았고, 믿지 않았든 만큼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심각성에 있어서는 도마 쪽이 더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말에 도토리 키 재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처럼 오십보백보일 뿐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자신의 동료인 도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과 그런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일하신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고히, 재차 반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더딘 정도가 아니라 고집불통일 때가 많습니다.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더뎌도 이렇게 더딜 수가 없습니다. 분명 신앙고백을 합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너무나도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넘어진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말씀을 주고 또 주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나더라도 더디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너무나도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굳은 마음이라면 그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더한 열심으로 그를 대하십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친히 와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끊임없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신앙으로 나타낼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불신앙을 교정하고 고치셔서 더욱 견고한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도마에 대한 기록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마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단지 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의 이 강퍅한 마음은 사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지만 연 마음을 곧장 닫아 버리는 것이 우리의 강퍅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강퍅함을 제거하시고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도마의 강퍅한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25절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기 전 여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말도 들었습니다. 이때 도마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마의 강퍅함은 단지 자신의 동료인 제자들의 말을 한 번 듣고 믿지 않은 것으로 보기보다는 계속해서 믿지 않고 있다는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이 있던 그 자리에 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도마가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도마에게 증거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 없음을 어떻게까지 표현하는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죽기 전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었고, 그의 죽음 이후 부활하셨음을 친히 본 자들의 증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나타낸 적은 없었지만, 도마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도마가 믿겠다고 말하는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마는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일단 보아야 하고, 본 것을 내가 직접 만져 봐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이런 감각적인 것을 통해 확인하기도 합니다. 눈으로 보고, 만져 보는 것 등을 통해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에 있어 눈으로 보고 만져 보는 것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만 해도 가시광선 영역에서만 보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가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은 기계를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보고 만진다고 해서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합신 교단에 계셨던 김성수 교수는 본문에 대한 그의 책에서 비록 인간이 감각적 경험에 크게 의존하기는 하나 그것이 절대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육적 감각의 범위와 한계에 대하여 항상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적 감각으로 감각할 수 없는 존재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설사 내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본 것이, 내가 들은 것이, 내가 만진 것이 확실하다거나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간혹 사람들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처럼 자신의 감각적인 경험만을 의지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창조 세계만 하더라도 감각적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게 분명한 사실로 있는데, 창조 세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8-10)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에 대하여 이 세대의 통치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알았던 사람이 있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알았다면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신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9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 함과 같다고 증거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주 제자들의 믿음은 여자들의 말을 들어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의 손의 못 자국도 보았고, 그의 옆구리의 창 자국도 보았습니다. 여기에 도마가 말한 것처럼 만져 보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듣는다고 해서, 본다고 해서, 직접 만져보는 어떤 경험을 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롬10:17).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도 있습니까?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7-18) 분명 눈이 있어 보았습니다. 귀가 있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다는 것으로 책망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지만, 이 말씀만으로 믿음이 주어지는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2장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지만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말씀을 본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은 이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보았다는 경험이 아니라 본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기에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런 참된 믿음으로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도마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판단할 때 늘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가지고 옵니다. 내가 보아야 한다. 내가 만져 봐야 한다. 그래야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진다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29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1-4)
사람들이 착각하는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았다, 경험했다는 것으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허락하시지 않으면 정작 보고도, 들어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지한 도마에서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26절을 보시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지난주의 말씀과 같습니다. 여드레를 지났다는 것은 안식 후 첫날을 포함한 날로 계산하면 안식 후 첫날입니다. 그때 다시 제자들이 모였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문은 그때처럼 닫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의 능력으로 닫혀 있던 문을 여시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확신하면서 기뻐하였지만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믿음이란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효력이 있어서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지없이 근심이요, 걱정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기뻐했지만 그런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현실 앞에만 서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사라진 것처럼 나타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한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책망으로 경성케 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위로로 격려하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세우십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다시금 나타나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도마가 없었던 것도 염두 해 두고서 도마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저들에게 주시고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런 평강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화목이요, 화목하게 된 자로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고후5: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고자 특별히 사도로 불렀는데, 그런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그렇게 화목하게 된 자로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 중에 있는 도마에게 친히 말씀하시는데,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가 말한 그대로 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놀라운 정도로 자신을 낮추시고 도마의 연약함에 맞추어 그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한 그대로 응답하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의 작은 기도에도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항상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초보에 불과합니다. 이런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닌 거짓 신앙에서도 볼 수 있는 믿음의 형태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데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내 뜻대로 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죄 외에는 우리와 똑같은 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신성으로서의 성자께 시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대로 사셨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율법을 주신 분이시지만, 인성으로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으실 때 이런 기도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다는 것은 단지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기도가 진실 된 마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말함과 동시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여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단지 내 소원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이미 알리신 말씀을 통해 확인하면서 거기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단지 생명만 얻은 자로 있어서는 안 되고 더 풍성히 얻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내가 말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말한 그대로 들어주시더라. 내가 기도했더니 기도한 그대로 들어주시더라. 물론 신앙의 초보가 아닌 좀 더 성숙한 자의 기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 이렇게 말할 때는 세상적인 것과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도마가 말한 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은 어떤 면에서 도마가 수치를 느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놀라운 일을 친히 본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정도가 보아야만 믿겠다, 만져 봐야지만 믿겠다는 신앙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어쨌든 도마의 무지함, 도마의 불신앙, 도마의 완악함이 나타나고 있는 반면, 그런 그에게조차 예수님은 연약함에 맞추어 응답하시는데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그때서야 비로소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마16:17). 때문에 결코 거짓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연약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신 믿음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 혹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을 수는 있으나 소멸하여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실 때 잠들어 있던 믿음은 다시금 일어나게 됩니다. 비몽사몽인 상태에 있다가 깨닫게 하시면 그때서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누가 깨닫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지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지난 수요일 다윗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행동을 보십시오.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밧세바와의 간음도 그러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는 더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 동침하도록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충신인 우리아를 죽음으로까지 내몰게 됩니다. 그래서 죽게 됩니다.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하여 선지자 나단이 와서 책망합니다. 비유를 들어 책망할 때는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노를 발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라고 말할 때 그때서야 눈을 뜨게 됩니다.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죄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었지만 그런 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롬3:10-11)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면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잠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잠든 그 상태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백성이 죄를 향해 곤두박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자신의 자녀들을 여러 시험들과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에 일시적으로 놔두실 때가 있지만, 그것은 다른 여러 공의롭고 거룩하신 목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유기하신 자들처럼 내버려두시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십니다. 깨우셔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고백만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도마의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마는 먼저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에게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를 통치자가 되도록 하셨다, 만사를 그의 지배 아래 두도록 임명하셔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조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마28:18).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라는 명칭은 그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중보자요, 특별히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셨지만(계17:14), 그래서 만물 가운데 있는 어느 것도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라는 말과 함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인성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겁니다.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예수님은 성자로 불리시지만 성부와 동일 본체로 있으신 분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우리는 두 가지 신분을 말합니다. 하나는 낮아지신 신분이고, 다른 하나는 높아지신 신분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부터 그의 죽음과 장사까지가 낮아지신 신분, 즉 비하의 신분이라면, 그의 부활부터가 높아지신 신분, 즉 승귀의 신분입니다. 인성은 이렇게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신분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높이셔야만 높아지시는 분이 아니라, 본래부터 가장 높으신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가장 높으신 분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 인간이 되시는 거기에도 왜 낮아지시고 높아지시는 일이 필요했는가? 그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서요, 높여주시는 정도가 피조물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의 낮아짐까지 낮아지셨다가 우리와 함께 높아지시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지금 도마를 통해 이 고백을 하도록 하신 것은 이런 목적으로 이끌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고, 도마는 그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인의 종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레11:45, 벧전1:6). 이미 이 말 안에 우리의 수준을 어디까지 올리고자 하시는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준까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신다고 말하기도 하고(벧후1:4),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롬8:29). 그러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 그리고 성자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수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단호히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중요한 겁니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가 모든 만물의 주인이요, 특별히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 그러나 인성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수준에 이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가운데 성자를 중보자로 보내시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에 대한 지식 없이는 영생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귀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를 더욱 세우기 위한 책망도 아끼지 않으시는데,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본 것으로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본 것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본 사람들은 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들으면서도, 보면서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고전2:9).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고전2:10). 그러므로 보았다는 감각적인 경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말할 때는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말씀과 함께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도마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의 고백을 했다고 할 때 단지 보았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험에 의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칼빈은 그가 깨우침을 받고서 거의 잊고 있었던 가르침을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이란 단순한 체험에서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는 말씀은 단순힌 경험한 것, 체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런 과정 속에서 주께서 말씀에 대하여 깨닫게 하신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도 분명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복된 것이 있는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욱 복되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실제로 본다고 해서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지상에 오실 동안 실제로 그를 본 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씀을 듣고, 실제로 그가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본 자들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았고, 심지어 그의 부활까지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깨닫게 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믿었습니다. 그것도 분명 복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복된 것은 실제로 예수님을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고, 그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보지 않을지라도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 그가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보았다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걷어 내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가장 복된 시대는 예수님이 계실 때요, 그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의 놀라운 이적을 직접 볼 때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실제적인 어떤 경험에 대하여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꿈을 통해 예수님을 직접 봤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 신학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이 더 복된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봄으로 확인하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봄으로 확인하는 방식으로 깨닫는 것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만으로 믿는 것, 이것이 가장 복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적도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어떤 경험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계시된 말씀이면,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면 족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구약 시대도 복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신약 시대 백성이 가장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는 아직 계시가 종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시의 종결과 함께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경우 희미한 상태로 보는 것이라면 신약은 그런 희미한 모든 것을 걷어 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희미하다면 구약은 얼마나 더 희미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더하거나 덜한 말씀이 아니라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성령까지 약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 은혜의 역사를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이것보다 복된 것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주어지고, 또한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는 것, 나아가 믿음 안에서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 여기에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말씀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의 대상으로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쓴 서신을 받아보던 그 당시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적인 어떤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는 내리고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이 있어서 올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이 가장 복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 복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는데, 도리어 본 것으로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셔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는데(히11:1), 이런 믿음을 가진 것이 복으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