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인간’은 헨리 나우웬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알게 된 개념이다. 널리 쓰이는 ‘핵가족’이라는 용어에서 핵의 의미를 차용하여 주변으로부터 단절된 현대인들을 지칭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여기(the here and now)’만을 중시하며,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단절된 채,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살아가는 뿌리 없는 세대가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이 저서의 서두 부분에서 설명되는 이 개념이 내게는 단번에 각인되었다. 스스로도 분명히 이름 짓지 못해왔던 나름의 열등감 같은 것을 이 용어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규정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 이 단어는 나만의 의미를 지닌 것이 되어갔다. 그 결과 ‘핵인간으로서의 나’는 최종적으로 ‘대표적 핵인류 세대인 현대인들로부터까지도 소외된 존재, 가깝고 먼 모두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되어 오직 홀로인 존재’로 결론지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내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되었다.
차남으로서 차별대우를 받고 자란 아버지는 공부 욕심에 고교시절 가출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와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전형적인 핵가족을 이루었다. 가풍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만들어지기에는 생계에 급급한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일년에 24번 제사를 지내던 외가뿐 아니라 친가 역시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었지만, 가출 청소년 출신 가장으로부터 비롯된 우리 가족은 애초에 제사 한 번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이 점에 대해 개인적으로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으나 덕분에 조상이라는 단어가 매우 소원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다. 동향 출신인 친가와 외가 양쪽 할아버지들께서는 서울에 올라오시면 나도 모르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 앉히고는 본과 족보를 아는지 물어보시거나 서당 훈장 같은 질문들을 던지곤 하셨지만 이 경험들 역시 나를 어떠한 가풍이나 집안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주기에는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정작 나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을 만들어 낸 것은 성장기에 그저 생래적인 지루함을 해소하고자 닥치는 대로 읽어댄 삼중당 문고서적들이나, 여기저기에서 빌린 추리소설들, 야매로 미용실을 하던 엄마의 동전통에서 몰래 집어온 동전들로 수집한 순정만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인지 물리적 나이는, 386세대에 속하면서도, 개인적 성향은 훗날 X세대니 N세대니 하는 말로 불린 세대들의 개인주의적 특질에 가까웠다. 흔히 386세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발전에 가장 충실한 역할을 해낸 세대라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라는 뜻이다. 이러한 성향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문학, 그것도 소설을 전공한 입장으로서는 결격사유와도 같았다. 87년 6월의 그 뜨겁고 거대했던 민주 항쟁의 물결 속에서도, 집회가 열리는 중앙도서관의 제일 높고 먼 계단 끝에 서서 저 혼자 주먹을 부르쥐고 가슴 먹먹해 했을 뿐, 끝내 광화문으로 몰려가는 행렬의 끝자락조차 붙잡지 못했다. 거대한 하나의 사회·역사적 흐름에서 도태된, 한낱 개인주의적 자아의 한계였을까?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던 것은 분명하다.
여대생의 취업이 여상고 (女商高) 졸업생들보다도 훨씬 어려워 신문기사화 되기도 했던 시절, 아버지의 강요로 따낸 중등교사자격증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되기 싫었던 나는 변변한 직장을 다녀보지 못했고, 과외교사부터 자르고 보던 IMF 시절엔 뒤늦게 학원 강사 경력조차 없이 나이만 먹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서른이 훌쩍 넘도록, 회사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하디 흔한 회식 한 번을 경험해볼 기회가 없었다. 숯불갈비집을 처음 가본 것도 서른 다섯 넘어 동생과 결혼할 사람에게 밥을 사주러 갔을 때였다. 주문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대면서야 그제껏 갈비집에서 밥을 사본 적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양가 부모의 반대로 대학시절 사귀던 사람과 결혼하는 데에 실패한 후, 결혼도, 자녀 출산도, 기록을 경신할 만큼 늦은 나이에서야 하게 되었고, 젊디 젊은 아이 엄마들 속에서 나는 아이 엄마로서 내가 있어 마땅한 자리를 찾아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한국 사회는 나처럼 어떤 단체나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첨단의 핵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곳이어서 호주로의 이민은 탈출이나 다름 없었다. 사실 초기 이민 생활은 이러한 소외감? 혹은 패배적 자의식 과잉 같은 것에서 오는 상처를 망각하기에는 썩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호주 온 지도 꽤 여러 해가 지난 무렵, 생애 처음으로 문인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동안 잊고 있던 내 자신의 동떨어짐을 다시 자각하게 해주는 뜻밖의 계기가 되었다. 한인 문인회 특성상 주로 수필과 시를 다루다 보니 생전 써본 적 없는 수필이나, 어려서부터 써오면서도 한 번도 내 분야라고 여겨 본 적 없는 시들을 만져야 했고, 그 와중에 묵혀두었던 기억 속의 열등감이 스멀스멀 살아나기 시작했다. 잘 떠오르지 않는 모국어들을 고르며 시를 쓰는 늦은 밤이나 어줍잖은 글로 합평을 받는 날에는, 글을 놓고 살아 온 오랜 시간에 대한 따가운 자책의 연기가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 눈이 맵도록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공모전에 보낸 작품들이 방주에서 날려보낸 까마귀처럼 무소식일 때, 국내에서도 한국문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경쟁을 뚫고 입상한 재외동포들의 수상소식을 들을 때, 그들의 작품과 내가 쓴 글의 거리를 보게 될 때, 오래 전부터 어루만지고 고르던 내 시어들에 염증이 날 때, 나를 이룬 모든 말들은 다 누추해졌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소설을 쓰기에는 밑천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로부터 도태된 한 조각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정답 없는 회한만 웅성웅성 서리는 마음 속이 한참 심란했다. 나란 사람은 그때까지처럼 늘 그럴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내 속으로만, 자신의 내면으로만 향하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본래의 함의는 배제하고 문자 그대로의 뜻만으로)의 서글픈 시선이 조금씩 이웃과 주변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깨닫고 보니 분명 나는 달라져 있었다. 해를 달리 하며 우여곡절 끝에 속하게 된 몇몇 문인회 활동 중에 이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처음 문인회에 참여를 권유 받았을 때만 해도 나라는 사람이 늘 그랬듯이 몇 번 나가고 말 거라고, 꾸준히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고는 절대 장담 못한다고 미리부터 거듭 양해를 구했었다. 그런 내가 지금껏 문인회 모임에 빠져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언제부턴가 문인회 내의 문제에 한정되긴 하지만 타인이 겪는 문제라도 말이 안 된다 싶으면 나서기도 하고,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마음을 그닥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닌 회원들에게 털어놓으며 함께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그토록 귀찮아했던 단체장을 맡아 이익 한 푼 안 나는 일에 며칠을 밤새워가며 골몰하기도 했다. 아직 밤이면 쌀쌀하던 봄, 힐스 지역에 있는 어느 시인의 서재였을 것이다. 마당에서 따온 목련 꽃잎을 찻물에 띄워 마시며, 담요를 같이 덮고 둘러 앉아 밤 늦도록 글에 대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밤에 느꼈던 희열과 향기는 형언할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텅 비어서 아무 반향도 없는 진공의 우주를 혼자 유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재미있게도 이민사회에서는 나처럼 주변과 세류에서 단절된 듯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자주 발견된다. 개개인의 구체적 경위나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딘지 남다르고 그래서 소외된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간다. 문인회 안에서는 종종 나와 닮은 열등감 같은 그 무엇마저 발견하게 된다. 그들도 나처럼 핵인간일 것만 같다. 나처럼은 아니어도, 나 만큼은 아니라도… 나의 일생에 걸친 게으름과 소심함, 실천력 결핍, 매사에 걸친 만성적 지각 등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이 동질감에 기대 잠시 헐벗음을 면한다. 비록 궁극적인 해소는 아닐지라도 여기에서 우러나는 동병상련의 온기가 마음을 덥히고 자신에 대한 눈길도 다소 누그러뜨린다. 세상으로부터, 고향으로부터,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동떨어진 외톨이 중의 외톨이들이라도, 모이면 하나의 맥락이 될 수 있고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허황된 상상도 해본다.
먼 이국 땅, 섬 나라에서 늦어도 많이 늦은 나이에 도모해보는 일생일대의 반전에 함께 하는 핵인간들이 있다. 삶의 오랜 배반에 익숙해진 관성은 여전히 낙관을 경계하게 하지만, 새로이 발견한 나와 그들의 섬 생활은 자꾸 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기대를 몽우리 짓게 한다. 그들과 함께 하는 나날이 때때로 즐거운 목소리를 내며 화창한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