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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순의 수필세계
- 눈물, 소박 그리고 진실이 던지는 감동의 힘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이길순의 수필은 초코파이다. 오리온 초코파이 봉지에 있는 ‘정’이란 글자는 바로 이 작가의 향기를 의미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이길순 수필에 있어서 진솔함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이길순의 수필은 소박하면서 진실된 기저를 유지하면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길순은 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 전 문학신문사 선정 우수잡지인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부천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본격수필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이번에 첫 수필집 <몸을 퇴고하다>(도서출판 세종문화사)를 내려고 한다.
이길순은 1) 수필이 희망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수필가다. 2)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다. 3)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가 빛나는 문필가다. 4)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면서 흘러가는 들판의 강물처럼 다감하고 유려한 정감이 서려있는 여자다. 5) 자기 자신의 의식변화를 통해 문학가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수필집은 이런 다섯 가지의 작가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이길순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체험 공간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이다. 정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관점에서 이길순의 <몸을 퇴고하다>는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글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길순은 깊은 고뇌의 사유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터득해내는 작가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의 문제를 마주한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진실 그것을 어떻게 깨닫는지 살펴보자. 뜨거운 인생의 열기를 부둥켜안고 수필의 숲을 열심히 가꾸고자 하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문학가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겠는가. 이길순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음의 글밭을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을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작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학관’이라는 것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송나라 구양수가 말한 삼다 중에서도 그녀는 다상량을 강조한다.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이유는 늘 좋은 수필을 써야 한다는 각오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되기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오늘 이 수필집의 출판을 가져 왔다고 하겠다.
작가는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받는다. 작가에게 문학관과 작가정신이 없으면, 일반 작가는 될 수 있을 런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작가는 될 수가 없다. 유대인의 정신문화 원천으로 일컬어지는 탈무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나온다. 그것은 즉 ‘만일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면 세계는 어느새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이길순은 수필을 쓰면서도 늘 좋은 수필을 썼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하고자 한다. 여기에 더하여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좋은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담아내기에 그녀의 꿈은 언제나 푸르디푸르다.
군살빼기를 글의 퇴고와 견주어 본다. 글의 군살을 빼느라 퇴고라는 작업을 한다. 초고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이다. 완성된 듯하나 불완전하여 읽을 때마다 수정을 한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퇴고는 평생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수십 수백 번의 퇴고를 통해서 군더더기를 빼고 다듬으면 창조적이고 감동을 주는 글로 탄생되는 것이리라. 우리 몸도 퇴고를 하듯 꾸준한 운동과 식사량의 조절로 필요 없는 군살을 빼면, 균형 잡히고 건강한 몸이 만들어지지 않겠나. 우리 삶에서도 불필요한 탐욕의 군살을 퇴고를 하듯 정리하면 좀 더 개운하고 신선한 인생이 되지 않을까. 내 탐욕의 군살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짚어 볼 일이다.
<몸을 퇴고하다>에서 -
그녀는 늘 글을 쓰면서도 좋은 글을 생각하는 대단한 작가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작가는 탐욕의 군살을 빼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그것을 퇴고에 견준다. 이길순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수필가-되기에 대한 강한 욕망 드러내기라 하겠다. 모든 작가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창작과정에서도 늘 퇴고를 생각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녀의 상당수 작품들은 이런 작가-되기의 비원을 담고 있다. 그녀야말로 퇴고를 평생의 작업으로 인식한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이길순은 수필이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수십 수백 번의 퇴고를 통해서 군더더기를 빼고 다듬으면 창조적이고 감동을 주는 글로 탄생되는 것이리라.’는 작가정신이 녹아든 어구를 적재적소에 놓을 때까지 그녀는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 몸도 퇴고를 하듯 꾸준한 운동과 식사량의 조절로 필요 없는 군살을 빼면, 균형 잡히고 건강한 몸이 만들어지지 않겠나.’라는 표현은 그녀의 수필가적 자세를 보여주는 멘트로 공감을 자아낸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그 향기는 솔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불필요한 탐욕의 군살을 퇴고를 하듯 정리하면 좀 더 개운하고 신선한 인생이 되지 않을까. 내 탐욕의 군살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짚어 볼 일이다.’는 대목은 이길순에게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수필 <몸을 퇴고하다>를 보면, 그녀는 늘 훌륭한 작가-되기를 추구하는 그런 수필가임을 알 수 있다.
요즘 글쓰기가 숨차다. 헐떡이며 산을 오르는 것이 원고지 칸을 채워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신변잡기만 쓰던 이야기 거리가 떨어졌다. 어디서 무엇을 찾아 써야 할지 글감이 오리무중이다. 삼다의 교훈을 따라 책을 많이 읽어서 저축을 해놓으면 글감이 쉽게 찾아지려나. 글감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여러 종류의 책들을 사들인다. 공부방에서 수필 공부하면서 내 딴엔 열심히 썼지만 문장에 비문이 발생하기도 하고, 기대에 못 미쳐 자괴감을 갖기도 한다. 때로 칭찬이라도 들으면 내 마음은 기뻐서 춤을 춘다. 글쓰기가 쉬운 길이 아님을 알기에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해 보리라.
- <어승생악>에서 -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이길순은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본격수필가의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이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길순은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이길순의 ‘수필가-되기’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연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되기의 정신으로 수필을 쓰기 때문에, 들뢰즈의 철학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군 속에 언젠가 이길순도 들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어승생악>은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시궁이후공론’에 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한 발짝 떼기도 힘들다고 느낄 때, 궁의 상황을 겪고 난 이후에 글이 잘된다는 ‘시궁이후공’의 원리를 직감한다. 제주도에 있는 어승생악에 올라가는 중이다. 산을 오르면서도 그녀는 문학원리를 되내고 있는 것이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어승생악>에서 작가는 ‘궁’의 상황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글쓰기의 힘든 길을 오름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어승생악에서 말을 길러서 임금님께 받치는 선조들은 온 정성을 다 했을 거라고 본다. 내 글쓰기도 임금님께 드리는 상소문 쓰듯 정성을 다 해야 하지 않을까. 때로는 문맥에 맞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서 난감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한 단어가 떠오르면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일어나서 끼적여 놓고 잔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다.
양지쪽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곧잘 식곤증을 느낀다. 이때는 영락없이 책은 밥이다.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는데도 꾸벅꾸벅 졸 때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가는 봄을 잡아볼까. 조팝나무 하얀 꽃송이 몽글몽글 달고 있는 것처럼 내 글쓰기에도 한 단어 한 문장들이 달려서 큰 문단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책은 도끼라는 말이 있다. 책에서 발견해낸 것이 얼어붙은 우리의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짧은 단어 한 줄로도 수필 한 편을 쓸 수 있는 감성을 찾기 때문이리라. 책의 내용을 통해서 감정이 펴졌다 접혀졌다 한다. 내 마음에 무슨 잘못된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감성이 무뎌진 것도 느끼게 해주니 책을 읽으면서 얻는 이득은 많고도 많다. 무엇보다도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니, 더없이 고맙다.
- <무소유에 대한 단상> -
작가는 이 수필에서도 좋은 작가=되기에 대한 소망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문장가의 소망을 잘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하는 작가다. 자기 자신의 의식변화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작가가 아름답지 않는가. ‘조팝나무 하얀 꽃송이 몽글몽글 달고 있는 것처럼 내 글쓰기에도 한 단어 한 문장들이 달려서 큰 문단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는 데에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문학적 광기를 표백한다. 작가는 책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수필가가 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이기에 독서를 통해 짙은 공감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책을 통해 성장하는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책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수필가적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작가가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자신의 삶을 책읽기를 통해 길어 올리고 있기에 이 글은 감동을 준다.
2. 투명하고 지고한 삶의 양태
이길순은 순수한 동심의 빛살로 가득 찬 인정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이런 특성은 이길순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다. 근원적 뿌리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가족애로의 지향성이다. 그 애타는 그리움의 귀착지는 어머니의 앞치마 냄새고 오래된 유물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이 수필의 제목을 <어머니의 앞치마 냄새>라고 정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투명하고 지고한 작가의 순수 지극한 정성, 가족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광복옥편>과 <낙화암> 이 입증한다. <광복옥편>에는 작가를 끔찍이 사랑했던 자애로운 아버지 모습이 드러나 있다.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길순의 수필에서 가장 빛나는 정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하룻밤 자고나니 허리 등 옆구리가 한꺼번에 아프기 시작하는데 손가락 베인 것보다 더 아프다. 그래도 집에 가야해서 차에 김치통을 싣기 시작했다. 우리 것 열한 통 며느리 것 다섯 통 김장봉투에 담은 것도 다섯 봉지가 되었다. 차가 무거우니 브레이크를 밟으면 밀리기도 한다. 김치통 하나가 뚜껑이 열렸는지 김치 국물이 차 시트에 흥건히 흘렀다. 집에 와서 세차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냄새가 완전히는 없어지지 않았다. 김치냄새는 어머니의 광목 앞치마에서 나던 액젓과 새우젓 파 마늘 고춧가루 냄새가 난다. 아궁이 앞에서 불 뗄 때 구수한 장작불 냄새도 난다. 어머니 앞치마는 어린 자녀들 콧물 닦아주는 수건 역할도 했다. 숨바꼭질 할 때 술래에게 쫓기면 앞치마 뒤에 숨기도 했다. 그때 나던 앞치마 냄새의 추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 <어머니의 앞치마 냄새>에서 -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건 사랑받은 추억이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자각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작가가 친정에 가서 느꼈던 어머니의 정을 애타게 가슴 속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가슴 아프게 읽힌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인간사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잘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사모의 정이라는 것을 이 수필의 마지막 한 줄, ‘그때 나던 앞치마 냄새의 추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라고 하는 이 진술이 증명하고 있다. 향기나는 사모의 정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머니 앞치마는 어린 자녀들 콧물 닦아주는 수건 역할도 했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빼뚤어지지 않고 곱게 자라서 제 갈 길 찾아서 떠나간 자식들이 아버지 눈에는 대견하게 보였던가보다. 자상하게 이야기도 나누며 무엇인지 모를 마음을 자꾸 내어 주려고 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지병을 얻으셔서 모든 것 다 내어주는 심정으로 몇 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어떤 사랑으로 교육시키고 싶으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옥편에서 전해지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왜 일찍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아버지는 그렇게 당신의 방식대로 자식들을 사랑했고, 내가 잘 되기를 마음으로 빌고 있었던 것이리라. 의외로 횡재한 광복옥편을 다시 펼쳐 본다. 하여 내 온 전신이 건강한 탄력으로 재충전됨을 느낀다. 옥편 속장마다 배여 있는 아버지의 묵직한 향기를 맡는다.
-<광복옥편>에서 -
이 수필의 읽는 묘미는 아버지에 대한 추모를 통해 작가가 아버지의 영혼을 달랠 해법을 찾아가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있다. 이 작품은 친정의 안방에 있는 광복옥편이라는 책을 제재로 아버지의 흔적을 그려보며 추모하는 수필이다. 흙 묻은 아버지의 손자국과 텁텁한 막걸리 냄새가 배어 있는 옥편을 보고 작가는 눈을 떼지 못한다. 책장을 넘기다 네잎클로버도 책갈피에 곱게 끼워져 있음을 본다. 아버지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물건을 접하고 작가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라서 살아 생전에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런 아버지를 작가가 옥편으로 다시 만나게 될 때는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부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사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질곡의 현대사를 겪은 실버세대 수필에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자부심은 문맥의 곳곳에 묻어난다. 자식의 존재는 아버지의 존재이유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부성성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위치가 이 수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정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작가는 유품을 통해서 아버지의 인품을 드높이고자 한다. ‘의외로 횡재한 광복옥편을 다시 펼쳐 본다. 하여 내 온 전신이 건강한 탄력으로 재충전됨을 느낀다. 옥편 속장마다 배여 있는 아버지의 묵직한 향기를 맡는다.’는 표현에는 이길순의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남도 여행에 한껏 여유를 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바다와 하얀 구름과 낮달이 어우러져 우리들의 휴가를 풍성케 한다. 반쪽짜리 낮달은 다도해 여러 섬들을 못 잊어서 서쪽으로 내려가지 못 했을까. 남도의 청정 해역에서 풍광과 어울려서인지 글감이 저절로 나올 것 같은 감성이 솟는다. 갑자기 남편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은 왜 드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부부는 어디를 가나 남편은 앞에 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가는 멋없는 동행이 아닌가. 앞서가는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더니 남편도 내 의도를 알았음인지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준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이런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나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다. 환갑을 넘기고서야 잡은 손이 어찌 이다지도 어색할까. 이제부터 누구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손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늦은 시작을 해봐야 할 듯하다.
<여로>에서-
사모곡와 사부곡에 이어 나오는 작가의 순수한 남편 사랑도 눈길을 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부부의 인연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사연이다. 특히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관계 속의 그 아릿한 사랑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 이길순 수필은 주로 자신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감동적 사연이 형상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부부애를 축으로 하는 <여로>라는 수필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랑과 행복, 만남과 인연의 가치를 ‘앞서가는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더니 남편도 내 의도를 알았음인지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준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이런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나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다.’라는 문장에서 남편을 향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감동이라는 고지로까지 잘 끌어올리고 있다. ‘환갑을 넘기고서야 잡은 손이 어찌 이다지도 어색할까.’라는 진술에서 표현에 서툴렀던 자신의 사랑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한여름 태양빛이 불타게 내리쬐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든, 가는 허리 휘청거리면서도 바닥에 스러지지 않고 위만 바라보는 아마도 우리 부부가 받은 여행 선물은 부부 손잡기가 아니었을까. 쑥스럽기는 했어도 저지를 수 있었던 용기는 남도 바람처럼 상쾌하였다.’라는 말로 늦은 사랑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수필미학’의 진수가 빛난다 하겠다. 아내가 잡은 손에 부끄럽지 않게도 힘을 주는 남편의 모습도 멋지다. 최고의 여행선물이 남편과 손잡고 거닐던 추억이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길에서든 산에서든 공식적인 관계에서 사랑을 합법적으로 나눈다는 데 누가 뭐라 하랴. 이처럼 작가는 살아가면서 있었던 부부간의 행복을 작은 손잡기로 풀어내어 빛나는 사랑의 가치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 운명적으로 엮어가려는 순수한 사랑의 정신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3. 온정을 부르는 부드러운 곡선
이길순은 저층에 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서를 깔고 있는 작가다.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여류 수필가다. 이길순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자매애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이불의 추억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동기애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이리라 본다. 대부분 그녀의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동기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이불> 이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자매간의 소통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사랑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길순의 수필적 정서는 언니로서 어머니 역할을 다 하는 헌신과 희생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개나리 진달래 몇 번 피고 지는 세월이 눈 깜박할 순간처럼 지나갔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께 당신이 마련해 놓은 광목으로 비단이불 해가지고 시집와서 잘 덮고 살았다고 고맙다는 인사는 먼 훗날 해야 하나. 나도 이제는 어머니 돌아가실 때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먹었다. 며느리를 두 사람이나 얻었다. 그들도 혼수이불로 침대보와 침대 이불을 해가지고 시집을 왔다. 나는 그들이 해 온 이불로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싶었다.
인간은 체온을 유지하는 정온 동물이다. 다른 길짐승처럼 털이 없는 우리 몸은 온기를 절실하게 원한다. 그 시절 나는 정온동물이고 싶었다. 언제고 우리 집에 동생들이 오게 되는 날이면 솜이불 한번 펴서 덮어주면서 옛날 추억 한 자락 펼쳐보고 싶다. 크고 넓은 이불도 한 채 장만해두었다. 솜틀어서 새로 만든 이불이라 어머니의 채취는 예전만 못하겠지만, 그 속에 솜은 같은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못 다한 사랑을 이불로나마 둘둘 말아 챙기고 싶다. 몸과 마음의 쉼을 얻지 않을까.
- <이불>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어머니의 못 다한 사랑을 이불로나마 둘둘 말아 챙기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이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시모로서 며느리를, 언니로서 동생들을 생각하는 작가가 행복을 찾아가는 상황 제시를 통해 우리 시대 여인상을 다시 반추하게 한다. 동생들이 오면 덮어줄 크고 넓은 이불 한 채가 주는 말의 온도에 담긴 사랑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인생관과 버물어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이불’의 상징성에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모녀지간, 동기간의 애정과 우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 형제자매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행복들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나는 모성애, 동기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쩌면 이불은 어머니가 만들어 준 무대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정온동물이고 싶었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금강이 흐르는 곳에 갈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갈대는 사람 키보다 훌쩍 커서 들어서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이사이 난 오솔길로 헤집고 들어가면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어 자꾸만 안으로 발길이 옮겨진다. 갈대숲에는 새들도 등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해서 나가기도 한다. 찌르레기 소리, 때까치 소리, 갈새 소리가 어우러지면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연상케 한다. 갈밭에는 조그마한 원두막을 군데군데 지어 놓아서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지기도 한다. 이런 갈대밭이 남아있기에 친정에 갈 때마다 고향의 품안에 안기는 것 같은 정겨움을 느낀다. 신성리 갈대숲만이라도 개발에 내어주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바란다.
- <매실나무 단상>에서 -
이길순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토포필리아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어딘가에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것 같은 작가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유년시절에 머문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향을 제재로 하는 수필들은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낸다. <매실나무 단상>은 친정에 갈 때마다 느끼는 자연서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수필이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토포필리아의 향기’라 할 수 있다. 이들 향토성이 짙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향토서정이 자연친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합리성 차원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신성리 갈대숲만이라도 개발에 내어주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바란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그녀가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런 작가의식의 표출은 향토성의 서정이라는 지점에서 문학적 향기를 발할 뿐만 아니라 작가정신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에코필리아의 정서도 작품 속에 넘실거린다는 점이다.
저녁때가 되니 산 뻐꾸기도 집을 찾아갔는지 조용해지고 비둘기가 짝을 찾는지 구구대며 울어댄다. 오월 어버이날 시골에서 부모님 산소도 찾아보고 맑은 공기도 마시고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새들의 훔쳐 먹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자연이 주는 은혜가 이런 것인가 생각되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리움 한아름 안고 왔지만 산 뻐꾸기도 나를 반겨주는 고향이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오월의 고향은 동네 어르신들 찾아오는 자녀들로 인해서 풋풋한 향기로 가득하다. 고향에 가서 볼 적마다 어른들이 조금씩 쇠하여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짠해진다. 나를 반겨주는 어른들이 계셔서 고향에 마음 한 자락 놓고 왔다.
<걸객>에서-
이 수필의 결말부에서, 작가는 오월의 고향은 동네 어르신들 찾아오는 자녀들로 인해서 풋풋한 향기로 가득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의 조금씩 쇠하여 가는 볼 때마다 마음 아파한다. 고향에 가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지는 날에는 가슴에 별 하나 품고 고운 꽃 피워내는 부모님의 산소를 찾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이 주는 은혜에 기쁨도 행복도 맛본다. 고향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맑은 공기도 마시며 산새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이 수필은 이런 그녀의 애향심을 표백하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글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이길순 수필은 향토적 서정이 물결친다고 하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버지 어머니 쌍분으로 해 놓은 산소를 찾아갔다. 나를 반기는 것 같이 산 뻐꾸기가 청명하게 울어 주는 게 아닌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그 정을 못 다한 내 심정을 날짐승들이 알아보는 걸까.’ 라며 자신의 심사를 산 뻐구기 울음소리에 투사하여 정서를 간접화해서, 어떻게든 사향의 향기를 문학적으로 구체화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높이 평가된다.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청명하게 울어주는 산 뻐꾸기’는 가장 적절한 고향의 상징으로써 기능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운명론적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4. 긍정의 미학과 나눔의 실천
이길순 수필의 네 번째 큰 물줄기는 긍정미학의 발견과 휴머니즘의 추구라는 사상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다양한 체험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이길순 문학의 본령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실현을 위한 상승심리와 함께 긍정효과에 대한 믿음이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작가가 되고 문학성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이길순에게 미래에 대한 꿈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된 것으로 보인다. 성공과 멀어져 있는 여성으로서 꿈이 있는 생활 공간이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기 긍정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추억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기에 안성맞춤이므로 작가는 향수에다 추억이라는 제재를 투여해서 긍정미학의 효과를 수필화한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부부는 사십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두 사람만 남았다. 혹자는 “그 시절 다시 가라하면 나는 못 가네”라고 한다지만 내 남편만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게 절절한 사랑 없이 맞선보고 결혼해서 무덤덤하게 살았어도 뜨거운 사랑보다 진한 사랑으로 살았지 않았나 싶다. 가마솥에서 오래 우려낸 진국 같은 사랑이 아닐까.
성남의 용다방은 우리 부부의 중매쟁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인연을 알아보는 용한 다방이지 않은가. 발에 신발이 꼭 맞는 짝을 찾듯이 용한 다방에서의 사건으로 그 남자와 나는 꼭 맞는 짝을 찾았다고 여긴다. 가끔 용다방의 아스라한 계단에서 구르던 순간이 떠오르면 망신스러워서 손사래가 쳐진다. 그 남자가 밑에서 받아주기라도 하는 듯 내 볼은 발그레해지니, 그럴 때마다 나는 이십대 맞선 보던 촌뜨기 아가씨가 되고 만다.
- <용다방>에서 -
그녀에게 남편은 뜨거운 열기보다 진한 향기로 다가오는 그리움이다. 그녀는 큰 탈 없이 남편과 함께 세상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이길순은 ‘내 남편만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라는 진술을 통해서 남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드러낸다. 용다방의 추억을 통해 숙명적인 만남을 역설적으로 음미하고 있다. ‘성남의 용다방은 우리 부부의 중매쟁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인연을 알아보는 용한 다방이지 않은가.’라고 묘사하는 데서 그녀의 정서를 압축해서 간접화하는 문학적 역량이 드러난다.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전설의 동물 ‘용’에 중요한 삶의 의미를 주면서 메타포로 작용하게 하는 수법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인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작가에게 용다방은 참으로 고마운 곳이다. 이 부분은 그녀가 관조의 세계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서구에서는 주로 인연을 개척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인연을 어디까지나 운명으로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용다방은 다시 만나고 싶은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게 해 준 용한 공간이 된다. 그녀에게 한마디로 행운의 터전이었다. 운명의 질서 안에는 긍정적인 삶의 양태가 내재되어 있다. 용다방을 제재로 하여 쓴 이 수필은 작가가 남편을 향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녀의 마음,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울음을 삼켜주며 위로를 주던 사립문을 아버지는 애지중지 다듬고 가꾸시다가 이 사립문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아버지는 사립문을 가족들의 행복을 들여놓는 통로로 여기고 우리 남매들의 역사를 새기신 듯하다. 사립문은 우리 가족 모두를 지향했던 것이리라. 사립문 기둥에는 어머니의 손때가 많이 남아있다. 어머니가 항상 밖에 나가 뛰놀다 들어오는 자식들을 반가이 맞아주던 곳이고, 아버지가 약주 한 잔 마시고 들어올 때도 발자국소리만 듣고도 아버지임을 알아 흐뭇하게 맞으시던 곳이다.
사립을 열고 동구 밖에 서서 만월을 바라보던 아스한 날의 기억이 아슴하다. 잘 보존된 우리 삶의 모습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어머니가 먼저 떠나가신 자리에 새어머니가 그 사립문을 통해서 오셨다. 새어머니의 수고와 남모르는 애환도 받아주었으리라. 푸른 대나무 사립문이 이제는 엉성한 백발의 사립문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 형제들도 중년을 넘겼으니 당연한 모습이리라. 우리 가족들의 출입을 지켜보던 사립문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아버지가 가족을 근수하던 때처럼 활짝 열어 젖혀진 사립문을 마음 놓고 드나드는 옛 모습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사립문>에서 -
사립문이란 작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안식뿐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잘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길순의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소재로 하는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작가의 긍정원리뿐만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는 휴머니즘을 확인하는 데 있다. ‘아버지가 가족을 근수하던 때처럼 활짝 열어 젖혀진 사립문을 마음 놓고 드나드는 옛 모습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일침을 놓은 이 대목은 작가가 전통적인 것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길순은 자신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립문 앞에 서있다. 현실이 각박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사립문 앞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향기가 서려 있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의 깨달음과 느낌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에게 사립문은 행복의 통로요, 슬픔의 통로이기도 하다. 불안할 때,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생득적인 감성이다. 뿐만 아니라 집으로 드나들던 통로이기도 했던 문은 타인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그 당사자에게는 마냥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전통적 소재에 관한 근래 수필들 중에서 이처럼 진지하게 삶의 모습에 천착해 보인 수필이 있었던가. 흔들리는 자신을 다 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전통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리라. 더욱이 작가로서 기원의식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의 추구다. 전통이란 원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인간성을 성숙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발거음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크게 자라는 나무들을 작은 화분에 앉혀서 옹이가 박히면서 오래 묵은 나무처럼 멋을 낸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 만들어서 원하는 장소에다 멋스러운 장식으로 활용하지 않는가. 사람들의 삶이 분재처럼 굴곡지고 어려우면 진지한 용기가 나올 것 같다, 삶의 격언인 ‘고진감래’가 그렇고, 시학의 근본이 되는 ‘시궁이후공론’ 또한 그렇지 아니 한가. 그런 삶을 이겨낸 사람들은 단단한 옹이 한 무더기를 달고 살지 않을까 싶다. 고난을 승화시켜 삶을 이겨내느라 고비를 넘고 있지 않은가.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다.’ 분재처럼 철사로 비틀고 감아서 어려움 당하는 것은 보는 이의 행복이란 말일 게다. 인생살이가 모진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분재와 무엇이 다를까. 분재도 나무로서는 힘든 옹이가 박히고서야 사람들의 즐기는 대상이 되니 말이다.
- <분재꽃>에서 -
이길순의 수필 <분재꽃>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따뜻한 인정이요, 휴머니즘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이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제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이 수필 ‘사람들의 삶이 분재처럼 굴곡지고 어려우면 진지한 용기가 나올 것 같다, 삶의 격언인 ‘고진감래’가 그렇고, 시학의 근본이 되는 ‘시궁이후공론’ 또한 그렇지 아니 한가. 그런 삶을 이겨낸 사람들은 단단한 옹이 한 무더기를 달고 살지 않을까 싶다. 고난을 승화시켜 삶을 이겨내느라 고비를 넘고 있지 않은가.’ 라는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아닌가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분재를 시궁이후공론에 견주는 것이 자뭇 문학적이다.
이렇게 역경을 겪지 않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수필을 쓰겠는가. 이길순 역시 어느 여성 작가와 마찬가지로 역경의 중요성을 느끼는 마음이 있는 작가이기에 그녀에게 분재는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분재는 그러한 의미에서 이길순에게 인생의 스승인 셈이다. 눈길이 분재로 향하는 것은 삶의 자양분을 키워 준, 궁핍한 시대의 인내와 인고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수필은 ‘분재’를 제재로 인생의 진리를 파헤친 수필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길순이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요,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라는 사실이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다. 그것은 인간의 흥건한 정이 배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분재꽃>처럼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5. 견고한 인성과 반성적 성찰의 힘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길순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인간의 문화, 신체적 지각, 개체적으로 독특함이 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길순의 문학은 이런 생명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세상은 본연의 순수성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작가의식을 눈뜨게 한다. 그녀의 지성적 정서는 견고한 인성과 반성적 성찰에 밀착되어 있다. 이는 인성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나는 옷을 살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은 겉이 아닌 내면을 아름답게 치장해 줄 수 있는 옷을 사고 싶다. 내가 원하는 걸 뒷받침해주는 것은 값비싼 옷도 아닐 것이고, 에스라인 몸매도 아닐 것이다. 입어서 편하고 검소한 옷이면 좋지 않겠는가. 장롱이 가득 채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옷 몇 가지를 사들고 왔다. 막상 외출하려면 옷이 없다는 소리가 새어나오기 때문이다. 새 옷도 좋지만 있는 옷을 잘 손질해서 입으며 멋지게 살아야겠다. 장롱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다. 유행이 지난 옷가지들을 골라서 재활용에 내어놓았다.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을 느끼곤 슬며시 웃는다.
<장롱을 정리하며>에서 -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소재의 빈곤과 작가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성찰’을 통하여 그 인성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깨달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반성적 성찰의 내면 풍경을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작가에게 있어 비움의 철학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창작물은 마음의 결과물이고, 그 의도는 수필이라는 그릇을 어떻게 보느냐에 다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장롱을 정리하고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 되는 것은 비움이 인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네오필리아적 가치관과 함께 비움에의 천착은 작가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작가적 삶에 있어서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시니어의 계절은 짙푸른 신록에서 단풍으로 물드는 시기가 아닐까. 유난히 단풍이 아름다웠던 올가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단풍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은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날카로운 바람, 순백의 은세계를 지나면 바로 연둣빛이 눈부신 새봄이다. 시퍼렇게 날선 청춘의 한 여름 무더위에 지쳐갈 즈음 우리는 단풍의 계절과 마주한다. 우리 인생의 막바지 열정을 모두 태워 만들어낸 열매 같은 이 가을이 시니어로 익어가는 나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래서 결실과 마무리의 계절이지 않은가, 박경리 작가는 유고시집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하였다. 나는 무엇을 버리고 가야할까, 아니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빈손으로 왔듯이 갈 때도 우리는 빈손이다.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이듯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그 값을 하려면 내가 먼저 솔선수범 하는 덕을 많이 쌓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식이야 젊은이들을 못 따라가겠지만 내게 있는 선한 성품으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어른다운 삶을 이어간다면 나름 잘 익어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시니어카드>에서 -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세계에 대한 정면적 대결로 빚어지는 이길순의 자기반성과 빈손철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녀가 보여준 반성적 자기 성찰이 근래 수필의 한 경향인 내성적 경향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문학적 장치와 유추를 동반하면서 고백을 ‘고백’ 아닌 것으로 끌어올리는 힘이야말로 이길순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케 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이 행하는 작가적 자기반성이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빈손으로 왔듯이 갈 때도 우리는 빈손이다.’라는 진술은 익어가고자 하는 결연한 자세 없이는 반성적 통찰 또한 가능하지 않다. 결연한 의지로 영원히 멈추어지지 않을 구도의 행보를 계속해 나간다. 이 수필 속에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기에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난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겸허한 자세로 시니어의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내게 있는 선한 성품으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어른다운 삶을 이어간다면 나름 잘 익어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향적인 태도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리라.
우리 아파트에서 보이는 굴뚝은 옛날 D자동차 공장이었을 때부터 있었는데,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 그 자동차공장은 지역민들의 일터였다. 그때는 그 일대 협력업체 공장들도 분주했다. 그러던 자동차공장이 주인이 바뀌고 외국회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자동차 생산을 계속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등을 만들기도 했다. 굴뚝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수출도 하고 국내에도 팔아서 많은 이익을 남겼으리라. 대기업 공장들이 주민들과의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 동반 성장하는 관계로 발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바람이 멈추었나보다. 공장굴뚝에서 나오는 하얀 거인은 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바람의 방향을 보고 오늘은 추울지 따듯할지 날씨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주인이 관리할 수 없는 하늘이지만 정화작용을 통해서 깨끗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으면 좋겠다.
<굴뚝> -
이길순은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이 수필은 노사 동반성장의 소중함이 ‘굴뚝’이란 제재로 잘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이길순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작가는 해외여행에서 마주친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이 수필은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바른 삶의 실천자로서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 인정의 넉넉함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동반 성장’라는 단어는 그 어떤 어휘보다도 사람을 하나로 모우고, 경직되고 얼었던 마음을 데우는 역할을 한다는 데서, 그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특히 작가가 ‘굴뚝의 연기’를 ‘하얀 거인’으로 치환해서 환경보전에 대한 가치로 연결시킨 대목은 단연 압권이라고 하겠다.
II. 로그아웃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수필집은 건강한 가정을 바라는 작가의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그녀는 삶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작가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을 수필에 담아내었다. 그리고 이 수필집을 통해서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길순은 무엇이 삶의 논리이며, 우주의 심오한 질서인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물음에 대한 문학적 해답을 찾는 데 목표를 두었다. 진정한 수필적 감동은 ‘따뜻한 인간애’에서 싹을 틔운다. 이길순 수필은 작가의 인연에 대한 그리움과 생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반성적 성찰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생성된 건강한 인식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어 공감과 감동을 준다. 그녀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의 저장창고에 쌓아두고 있어 언제나 영혼의 스파크가 휘황하게 번쩍이는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일상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절제된 정서로 표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수필은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인 인연을 문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다. 이 수필집에는 작가 자신의 순수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고, 자신의 인품과 덕성을 거울에 비치듯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인간적 향기가 짙게 풍긴다. 현란한 색채로 나타나는 허욕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색처럼 겸허한 삶을 그려내었다. 이런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난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그리움의 범벅인 것이다. 글을 퇴고 하듯이 생을 퇴고하여 의미화한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이길순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더욱 더 향기로운 여인으로 성장해서 더 멋진 수필을 써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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