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84:4]
고라 자손의 시편으로 '순례자의 노래'에 해당한다.
순례길에 오른 순례자는 '주님의 집'을 그리워하며, 주님의 뜰 안에서 지내길 소망한다.
순례자자에게 그 하루는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낫기에(10),
악인의 장막에서 천날을 주인으로 사느니,
하나님의 집 문지기가 되어 하루라도 그 기쁨을 누리고 싶어 순례의 길을 걸어간다.
순례자는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야만 한다.
이 골짜기를 건널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한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사랑의 열매 모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아이들은 자궁을 떠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를 만납니다.
내가 당신의 집에서 쫓겨나서 당신과 멀어졌을 때, 당신을 뵙는 일이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에덴동산, 탕자의 비유를 연상하게 하는 문장이다.
에덴동산의 추방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도 없었을 것이고,
탕자의 집떠남이 없었더라면,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품도 없었을 것이다.
순례의 길을 떠나려면 집을 나서야 한다.
집을 떠나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시편 84편에 등장하는
주님이 계신 곳, 시온 등을 건물인 '성전 혹은 예배처소'라는 협소한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요 주님의 집이다.
온 우주가 주님의 성전이요, 집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주님의 집, 주님의 뜰, 시온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뜰에서 살아가고 있다.
타고르의 문장을 되새겨보라.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주님의 집에서 살고 있지만 길을 잃었다.
그래서 이미 주님의 집에 살고 있지만, 그것이 주님의 집인줄도 모른다.
마치,
자궁을 떠나지 못해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아이처럼 말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처럼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는 이들만이,
하나님 알게 되고,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 하나님의 집을 우리는 어떻게 가꾸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