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7. 산을 넘으면 또 산 1 1963년에 접어들면서 내 싸움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혁명정부에서도 종교단체 심사위원회를 부활시켰다. 12명으로 구성된 대학 총장, 신학대학교수, 언론인, 변호사, 불교인 각계각층 인사들이었다. 12명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일일이 알아가지고 먼저 내가 잘 아는 사람부터 방문을 했다. 2 아는 사람을 만나면 체면도 염치도 제쳐놓고 ‘좋은 감투를 쓰셨군요’ 하고 서두를 끄집어 내면 깜짝 놀란다. “그런 감투는 비밀 감투요, 그것도 감투라고 얻어 썼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종교단체를 심사하오. 심사 기준을 어디다 두고 하오. 종교인도 아닌 당신이 이런 어리석은 짓 하다간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오. 이런 감투는 당신을 위해 충고하니 제발 벗어 버리시오? 3 입장이 곤란하면 심사위원회에 안 나가면 되지 않소. 종교는 신앙이오. 신앙은 생명과도 같소. 이 나라에 헌법이 있고 사법기관이 있소. 어느 종교단체가 위헌(違憲)이나 잘못이 있다면 법으로 다룰 것 아니겠소? 이것은 기성 교회가 우리 같은 신흥교단을 모략하는 거요. 4 우선 심사를 하려면 그 종단의 내용을 알고 교리를 알고 연구해야 될 것 아니겠소? 우리 원리 책을 드릴 터이니 잘 읽어보고 용기가 있거든 해보시오” 하고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유효원(劉孝元) 협회장과 같이 찾아다니면서 만나보고 우리 원리 책을 한 권씩 반드시 주었고 따라서 전도도 겸했다. 5 그들도 양식있는 사람들이라 책임감을 느꼈는지 심사위원회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지막 고비가 또 남았다. 그것은 교단 등록 문제였다. 김인철(金寅哲) 선생과 몇몇 식구들이 수고하고 애를 써서 서류가 정식으로 문교부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장관 선(線)에서 드롭됐다는 것이다. 6 그때 마침 이종우(李鐘雨) 문교부 장관은 해방 전부터 잘 아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리 책을 가지고 장관실을 찾아갔다. 7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통일교회는 지금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 서독 세계적으로 포교를 하고 있는데 일본과 미국은 종교단체 등록이 나온 지 오래되었으나 본산지인 한국이 아직 등록을 못한 것은 기성 기독교의 모략과 반대 때문임”을 설명하고 8 “만일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찾아와서 문교부 장관께 이러한 이유를 묻는다면 이것은 국가적 망신이요, 또 모른다고 해서도 안 될 말이니 우리 원리를 읽어 보고 수속에 잘못이 없는 한 빨리 허가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분은 철학 박사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이해는 깊으리라고 믿었다. 기성교회에서 투서가 수 10통 들어갔으나 우리 등록이 허가된 날이 1963년 5월 31일이다. 9 우리 역사와 더불어 이종우 문교부 장관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질 것이다. 과연 일본, 미국, 영국 세계선교사들로부터 문교부 장관에게 국제전보가 날아들었다. 투쟁의 10년간. 비로소 통일교회가 한국에서 햇빛을 보게 된 셈이다. 10 1966년 1월에는 선화 어린이 무용단(리틀엔젤스) 단장 발령을 받았다. 귀국 공연 준비도 있었지마는 그보다는 미국 순회공연하느라고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10명의 아동문제를 해결짓는 것이 내 임무였다. 11 아무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문화사절단으로 세계를 순회하면서 우리의 찬란한 예술을 세계 앞에 자랑했고 또 가는 곳마다 절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내에 돌아와 진학의 길이 막히고 버림받는 위치에 놓인다면 누가 이런 문화 사업을 하며 또 어떤 학부모가 자기 자녀를 무용소에 보내겠는가. 12 이때는 문교부 장관이 바뀐 뒤였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모든 서류를 갖추고 박 대통령의 메시지와 주미 대사의 추천서도 첨부하여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보았으나 행정상 근거 있는 조문이 없다고 보기 좋게 각하되었다.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하늘을 믿고 떼를 쓰는 것이다. 13 홍종철(洪鐘哲) 공보부 장관을 찾아가 적극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며 찾아다닌 것이 두 달이 걸렸다. 이미 학교들은 다 개학을 했다. 얼마나 초조했는지 밤잠을 못 자고 해결책을 강구했다. 하늘의 위신이 있다. 크나큰 역할을 갖고 이 민족을 위해 기어이 성공을 시켜야 할 터인데 내 능력이 없으니 하늘만 믿었다. 14 입학기가 지나고 나면 모든 낙제생들의 학부형들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자칫하면 문교부가 신문에 오르내리는 판에 내가 이것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15 그러나 홍종철 공보 장관의 적극적인 협조와 문교 차관의 후의를 얻어 아동 10명을 경희 여중과 다른 학교에 분산 입학을 시키고 나니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을 믿고 용감하게 싸우면 승리한다는 비결을 체험하고 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볼 뿐이다. 16 무용단이 창설된 1963년 낙원동 중앙 문화회관에서 처음 시작할 때는 아이들을 보내주지 않아서 교회식구 자녀들을 강제로 뽑다시피 하여 3년 동안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훈련을 시킬 때 신순심(申順心) 무용 선생을 위시하여 몇 명이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지도한 결과 1965년에 미국 순회를 떠나보낼 때 전 식구들이 얼마나 기도의 정성을 쌓고 또 하늘은 얼마나 관심을 가져 주었으며 염려해 주셨는지 모른다. 17 또 미국에서는 한미문화자유재단을 창설하여 무용단을 미국으로 초청할 때까지 모든 수고와 탁월한 외교, 조국애에 불타는 박보희(朴普熙) 씨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미국을 움직이고 그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크나큰 성공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18 우리의 예술이 세계무대에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실로 피땀의 노력이요, 백절 불굴의 투지요, 여러 사람들의 단합이었다고 본다. 천여년 전 신라 시대의 문화가 어둠 속에 짓밟혔다가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 그 속에 숨은 어려움이야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극과 느낌이 없겠지마는 작은 일이라도 처음 시작할 때는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는 일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이 갈 것이다. 큰일을 벌이면 그만큼 시련도 크게 따르는 법이다. 20 그러나 박보희 씨는 어떠한 난관도 늠름히 극복하였으며 우리 리틀엔젤스는 세계의 총아가 되었고 우리의 자랑이 되었으며 그분 또한 한미문화 자유재단의 총재 직위를 획득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 21 1966년의 제2차 순회 때에는 나 자신이 인솔하고 4개월 반 동안 미국을 순회할 때 첫째는 하늘을 믿고 둘째는 마음을 합하여 어린이들과 선생들이 떠나는 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맡겨진 책임을 다했기에 일행은 무사히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된 것이다. 양양한 앞날에 영광된 발전을 지금도 빌어 마지않는다. 22 1971년 1월 21일은 국제승공 연합부인회 회장의 임명을 받았다. 처음 부인회장을 맡기실 때 선생님께서는 “봉애 씨 금년 몇 살이오?” “환갑이 지났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나이 많으면 어때 마음이 젊었으면 됐지” “네, 맘은 아직 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3 이 중책을 맡겨주신 것은 정말 내 생애를 통해 마지막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이 내 힘껏 토대 쌓을 것을 맘속으로 맹세했다.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내 손으로 만들어 주어야지. 24 그리고 우리의 이 운동은 남북이 통일되고, 그리고 남북 땅에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의 이념을 심어주는 선무공작도 내가 먼저 가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5 크나큰 포부가 많지만 말을 앞세울 필요는 없고 극히 작은 분야에 맡겨진 임무에 충실해 보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앞으로도 더욱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
証言 朴奉愛 - 世間のものには目もくれずに 7. 山を越えれはまた山 一九六三年に入って私の闘いはまた始まった。革命政府でも宗教団体審査委員会を復活させた。十二名によって構成され、大学の総長、神学大学教授、言論人、弁護士、仏教人、各界各層の人が集まっていた。 十二名の住所と電話番号を調べ、まず私がよく知っている人から訪問していった。顔見知りの人に会うと体面も恥も捨て「いい役職に就きましたね。」と前口上を掴むとあっと驚いた。「その役職は秘密の役職なのにそれでも役職だから貰ったのか。あなたは、何の資格を持って宗教団体を審査するのか。審査の基準をどこに置くのか。宗教人てもないあなたがこんな愚かなことをしたら歴史の罪人になりかねない。あなたのために忠告しておくけどこんな役職は捨ててほしい。それでは立場がないというんだったら審査委員会に出なければいいんじゃないのか。宗教は信仰なんだ。信仰は命と言ってもいいんだ。この国に憲法があって司法機関があるんだ。どこかの宗教団体が違憲行為や間違った行為をしたら法律でかたずけてくれるんじゃないか。これは既成教会が我々のような新興教団を謀略しているんです。まず審査をするなら、その宗教団の内容を知り教理を知って研究するべきなんじゃないんですか。私たちが原理の本をあげるので、よく読んでみて、勇気があったらやってみてください。」と言ってあるときは個別的に、あるときは劉孝元協会長と一緒に訪ね歩きながら、私たちの原理の本を一冊ずつ必ずあげ、伝道も一緒にやった。 彼らも良識を持った人なので責任感を感じたのか審査委員会が静かになった。 しかし私たちには最後の峠が残った。それは教団登録問題だった。 金寅哲先生と何人かの食口が苦労して書類が正式に文教部に提出されたが長官の所でストップしたというのだ。 そのときちょうど李鐘雨文教部長官は解放前からよく知っている人だったので、その方に会うのは私がやらなければと考え、原理の本を持って長宮室を訪ねた。 懐かしい喜びの挨拶を交わし、「統一教会は今、日本を始めとしてアメリカ、イギリス、西独と世界的に布教をしているが、日本とアメリカでは宗教団体登録がされて久しいのに、本山地である韓国がまだ登録ができずにいるのは、既成教会の謀略と反対のせいだ。」ということを説明し、「万一、外国から宣教師たちが来て文教部長官にその理由を聞くようなことがあったら、これは国家的恥さらしであり、また知らないと言っても話にならないことなので、私たちの原理を読んでみて、手続きに間違いがない限り早く許可してください。」と懇切にお願いした。その方は哲学博士なので宗教に対する理解は深いだろうと信じた。既成教会から投書が数十通届いたが、私たちの登録が許可された日は、一九六三年五月三一日である。 我々の歴史とともに李鐘雨文教部長官の名も永遠に残ることだろう。日本、アメリカ、イギリスが入ってきた。 闘争の十年間、やっと統一教会が韓国で日の目を浴びるようになった。 一九六六年一月には仙和子供舞踊団(リトル・エンシェルス)の団長の発令を受けた。 帰国公演の準備もあったが、それよりアメリカ巡回公演のために中学校に入学できない十人の児童問題を解決するのが私の任務たった。 どんなに国家と民族のために文化使節団として世界を回りながら、私たちの見事な芸術を世界の前に誇り、また行く所々で絶賛を受けたとしても、国内に帰ってきて進学の道が閉ざされ捨てられた位置に置かれるとしたら、誰がこんな文化事業をやり、またどこの父兄が自分の子供を舞踊団に送るだろうか。 このときは文教部長官が代わった後だった。しかし合法的にすべての書類を揃え、朴大統領のメッセージと駐米大使の推薦書も添えて、納得できる説明をしてみたが行政上根拠のある条文がないと言って却下された。深刻な問題が起こると、天を信じてお願いしてみることた。洪鐘哲公報部長官を訪ね、積極的に協助してくれることをお願いするのに二か月かかった。すでに学校は全部始まっていた。焦る気持ちで、夜も昼も眠らず解決策を練った。天の威信がある。大きな役割を持ってこの民族のために必ず成功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私には能力がないので天だけを信じた。入学の時期が過ぎると、すべての落第生たちの父兄は神経が逆立っていて、ともすれば文教部が新聞に載せられようとしているところに、私がこのことを成功させるというのは、星を掴むように難しいこには間違いなかった。しかし、洪鐘哲公報長官の積極的な協助と、文教次官の厚意を受けて、児童十名を慶煕女子高と他の学校に分散入学をさせることができて、私は感謝の涙を流した。私たちはいつも天を信じて勇敢に闘えば勝利するという秘訣を体験しながら生きてゆくので、最善を尽くすのみなのだ。 舞踊団が創設された一九六三年、楽園洞の中央文化会館で始めたときは、子供たちが集まらすに、教会の食口の子供たちを強制的に選んで、三年間お金を一銭もとらず訓練していたときに、申順心先生を始めとする何人かが苦労して熱心に指導した結果、一九六五年にアメリカ巡回に出発できた。見送るとき、全食口がどんなに祈祷の精誠を尽くし、また天はどんなに関心を持ってくださり心配してくださったかわからない。またアメリカでは、韓米文化自由財団を創設し、舞踊団をアメリカに招請するまでに、あらゆる苦労と卓越した外交、祖国愛に燃える朴普煕氏の精誠が天に届いてアメリカを動かし、それに関連するたくさんの人々の心を動かして、大きな成功をもたらしたのである。私たちの芸術が世界の舞台で脚光を浴びるようになったのは、実に血と汗の努力の結果であり、百折不屈の闘志の結果であり、多くの人々の団結のおかげだったと思われる。千余年前、新羅時代の文化が暗闇のなかで踏みにじられていたのが、湧き出ずる太陽の様に世の中を驚かせた。その中に隠された困難は、経験したことのない人には何の刺激も感覚もないだろうが、小さなことでも初めはどんなに苦労が伴うものなのか、やったことのある人は共感するだろう。大きなことをやろうとすれば、それだけ試練が大きく付いてくるものだ。朴普煕氏はどんな難関も凛々しく克服し、我々リトル・エンシェルスは世界の寵児になり、我々の誇りとなり、朴普煕氏もやはり韓米文化自由財団の総裁の位置を獲得されたことも当然のことである。 一九六六年の第二次巡回のとき、私が自ら引率し四ヵ月半の間アメリカを巡回したとき、最初に天を信じ、次に子供たちと先生が心を合わせて、出発のときから帰ってくるまで任された貴任を果たしたので一行は無事に祖国の懐に再び抱かれることができた。 揚々たる未来に栄光の発展を今でも祈ってやまない。 一九七一年一月二一日は、国際勝共連合婦人会会長の任命を受けた。初めて婦人会長を任されるとき、先生は「朴奉愛氏は今年何歳なの。」と聞かれるので「還暦を過ぎました。」と答えた。先生は「歳が多いからどうだというの。心が若ければいいじゃないの。」と言われ、私は「はい、心はまだ若いです。」と答えた。 この重責を任せてくださったことに対し、本当に私の人生を通して最後に私ができる仕事だと思い、喜んで私の力の限り土台を積み上げていくことを心の中で誓った。後から来る後輩たちに仕事ができる基盤を作ってあげなくては。そして私たちのこの運動は南北が統一され、そして南北の地にいる若い世代の人々に私たちの理念を植えつける宣撫工作も私が先に行ってやれることを望んでいる。 大きな抱負が多いが、言葉だけを表に出す必要はなく、極く小さな分野で任された任務に忠実になりたいと思い、身悶えしながら生きていくのだ。 これからも、更に最善を尽くそうと努力するのみである。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