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교수의 [백세 일기] (4/4)
4부 <더불어 산 것은 행복을 남겼다>
[고마운 사람들, 아름다운 세상]
아침 식사를 끝내고 2층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본다. 히말라야를 상징하는 순백의 영봉(靈峯)이 아침 햇살을 받아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네팔에 한 번은 가보고 싶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박흥식 사진작가가 전시했던 작품을 보내준 것이다. 최근에는 100세를 헤아리는 나이 때문일까, 여러 사람이 내 기호에 맞는 선물을 보내준다. 구름 사진과 책들, 도자기들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생각을 더듬어봤다.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하루도 빼 놓을 수 없는 음식도 그렇다. 어느 것 하나도 내가 만든 것이 없다. 오늘 마시는 이 커피도 에티오피아 농민들의 작품이다. 식당에 가서 원산지 표시를 보면 베트남이나 노르웨이에서 수입해 들여온 해산물이 있다. 우리 농산물도 수많은 사람의 정성과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신발도 바다 건너 먼 외국에서 만들어 보내준 소재들이다.
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도와준 이들도 있다. 30여 년 동안 내 머리를 다듬어준 이발사 아저씨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에 갔을 때 “며칠 후에 폐업하기로 했습니다. 더 오래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면서 서운해 했다. 지난달까지 나는 치과 치료를 받았다. 잘 아는 제자 의사다. 그는“조금 따끔할 테니 참아주세요”라면서 돌보아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으나 앞으로는 더 많은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내 학문과 지식의 배경에는 2,000년에 걸친 선학(先學)들이 있었고 직접 가르쳐준 스승들과 동학들이 있었다. 사랑을 나눈 제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과 학문만이 아니다.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 삶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 모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 대신 나는 무엇을 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가 전부였다. 지난 99년을 이웃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아왔는데 나는 한 가지밖에 하지 못했다. 그 한 책임을 잘 감당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과 뜻을 전해온다.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인가.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섬기고 싶다.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겠다.
지금의 나이가 되어 깨닫는 바가 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 그대로이다. 하지만 더불어 산 것은 행복을 남겼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니까.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푼 사랑은 남아서 역사의 공간을 채워준다.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감사의 듯을 나누며 사랑을 베푸는 일이다. 더 늦게 전에 해야 할 인생의 행복한 의무이다.
[김성수와 하지 장군]
인촌 김성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해방 후, 미군정 때였다.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이 국정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그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치 경력은 없었고, 당시 우리 정치계는 심한 난맥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당 대표자들과 사회 지도자들은 저마다 군정청을 찾아가 하지 장군에게 진언도 하고 지지를 받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하지 장군은 확고한 주견 없이 때와 사건에 따라 발언하곤 했다. A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B에게는 다른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일관성 없는 발언의 결과가 한국의 정계에 혼란을 야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도 하지에게 그 실수를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이가 없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배후에서 누구보다도 잘 감지한 인촌이 장덕수를 통역인 삼아 함께 방문했다. 하지에게 단 둘이 예기를 하고 싶다며 측근 비서들을 방에서 나가게 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정 어린 당부를 했다.
하지는 처음에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R 씨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S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더니 항의 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인촌은 “이런 이야기를 해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는 당신과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신 어린 자세를 본 하지가 악수를 청했다.
돌아오면서 인촌은 하지가 내 진정에서 나온 충고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괘씸하게 여긴다면 서로 불행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도 했다.
그다음에는 다시 만나거나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떻게 알았는지 인촌 생일에 기대하지 않은 축하 카드가 왔다. 하지가 보낸 것이었다. 서양인에게는 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깊은 우정을 표시하는 관습이다. 그래서 인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하지를 대해왔다는 회고담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촌이 정당인이면서 그런 책임을 자진해서 감당했다는 것은 지나칠 수 없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한국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고, 하지의 선택과 결정이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촌은 자신보다는 유능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면 뒤로 물러나 그 사람을 추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덕수와 송진우는 모두 인촌의 후원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해방 직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이승만 정부 수립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자세였기 때문에 동아일보, 중앙중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성방직 모두를 성공적으로 육성해 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후에는 이 박사와 뜻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개구리들의 교향곡]
며칠 전 일이다. 늦은 저녁때인데 전화가 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후배였다. 지금 안산(서대문구)에 있는데, 개구리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중략)
이틀 동안 계속되던 비가 그친 날 늦은 저녁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맞은편 숲속으로 들어섰다. 작은 연못이 둘 있는데 그곳이 개구리들의 서식처다. 사면이 조용해지기를 10여분 동안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맞은쪽 숲속의 한 마리가 울어대니까, 양쪽과 뒤 습지에서도 화답하는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10여 마리가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지른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고향에서 해마다 들어오던 개구리 소리를 연상했다.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 음악도가 작곡가가 되려고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찾아와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들려주겠다면서 강가의 들판으로 이끌고 갔다. 그곳에서 하늘이 진동할 듯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가라고 해도 저렇게 천지를 경탄케 하는 음악을 창조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는 귀띔해준다. 그 젊은이가 훗날 제9심포니를 작곡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려서 초여름마다 들었던 개구리들의 울음을 연상했다. 수천수만 마리의 합창이라 불러도 좋고 교향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긴 세월을 지나면서 나는 어렸을 때 심취했던 개구리 교향곡을 듣지 못했다. 고향과 더불어 사라진 옛 꿈이 되어버렸다.
그런 소리가 듣고 싶어 5월이 되면 어느 지방 저수지 부근의 논두렁길을 걷기도 하고, 충남 부여 부근을 찾아가기도 했다. 백마강 기슭은 논이 많고 개구리들이 울어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고향에서 들으면서 자랐던 개구리 교향곡은 들 수 없었다. 농촌을 지키는 노인네들은 농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개구리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들은 안산 연못의 개구리들도 반쯤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 긴 인생을 살았으나 문명이 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자연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구리 소리만이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인 자연의 축복을 저버리고 사는 결과가 되었다.
내 나이 때문일까. 대학생 시절에 한 지붕 밑에 살았던 서 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그리움이 찾아든다. 서 형은 베토벤을 사모한 음악도였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제9심포니의 합창곡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는 못되지만 내 삶을 일깨워준 개구리 교향곡을 한 번 더 들어보고 싶다. 그 자연의 하모니 속에는 비참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생명의 강렬함이 있었던 것이다.
(유정민 이야기)
1988년에 해돋이 색 빨간 프라이드를 샀다. 적록 색약이라 면허를 따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고민하던 중 조카가 신호등 빨간색만 구별 할 수 있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면허를 땄다. 다음은 저렴한 자동차도 살 수 없었지만 할부로 살 수 있다고 해서 계약했다. 아버지가 운전수였기에 차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다. 우선 새벽에 학교까지 몇 번 주행 연습을 하고는 온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1991년 5월 개교기념일과 석탄일 연휴가 이어져 전주 남원 구례를 거쳐 밤늦게 묵계리 청학동까지 들어가는데 길이 비포장이고 험해 가다가 되돌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엄청 오지였다. 숙소도 없어 작은 가겟집 안에 방을 빌려 잤다. 피곤해서 자려고 누우니 주변 논에서 개구리 소리가 정말 엄청 크게 들린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서울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아주 진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독일 교환학생은 왜 울었을까]
큰손녀가 며칠 동안 독일에 다녀왔다. 오래간만에 연이 소식을 전해 들어 기뻤다.
오래전 일이다. 우리 집에 고등학교 2학년인 한 독일 여학생이 와서 1년 동안 지낸 일이 있었다. 기독교 기관의 교환학생으로 왔었다. 내가 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우리부부를 아빠, 엄마라 부르라고 했다.
집에 온 다음 날 연이가 아내에게 “엄마, 1년 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어야?”라고 물었다. 아내는 얼마 후에 얘기해 줄 데니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 애는 집에서 한 가지 가사를 맡아서 해왔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나는 연이에게 “한 달에 네가 쓸 용돈으로 2,000원씩 줄 테다. 학비나 책값은 따로 주겠고…”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애는 정말 구두쇠였다. 신촌 우리 집에서 서대문까지 버스비가 아까워 꼭 걸어가곤 했다. 한번은 나와 같이 버스를 탔다. 차장에게 내가 10원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요금이다. 차장이 그 돈을 받고 지나갔다. 연이가 5원을 꺼내면서 자기 버스비를 갚으려고 했다. 내가 “네 돈은 넣어두어라. 오늘은 아버지가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좋아서 5원을 도로 지갑에 넣는다. 마치 오늘 5원을 벌었다는 표정이다. 아내에게 연이가 저렇게 절약해서 무엇에 쓰는 지 좀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그 애는 사직공원 옆에 있는 아동병원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에 입원했다가 돌아가는 어린이들은 여러 고아원에서 와 치료를 받는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연이가 토요일 오후마다 그 병원을 찾아가 이이들과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면서 놀다가 오곤 했다. 그 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용돈을 줄이고 절약했던 것이다.
1년이 가까워지는 어떤 토요일 오후였다. 내가 집에 들어왔더니 아무도 없는 자기 방에서 연이가 혼자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1년 동안 있다가 떠나게 되니까 섭섭하지?”라면서 위로해주었다. 연이가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아동병원에 마지막으로 다녀왔어요. 다음 화요일에 독일로 떠나기 때문에 다시 못 오겠다고 했더니 애들이 다 울었어요. 집에까지 울면서 왔어요.” 참았던 눈물이 터졌는지 흐느끼면서 울었다.
나도 마음이 아팠다. ‘저 애들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구나’라고 부러운 마음에 숙연함을 느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 우리 청소년에게도 봉사 활동의 기회와 교훈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교육계는 학원폭력이라는 사회적 걱정거리와 싸우고 있었다.
애들을 키워보면 그들의 인생관은 청소년기에 형성된다. 다시 한 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제자들과 함께 눈물을 나누는 사랑을 베풀고 싶다.
[이 책은 2018년 3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이다. 주제별로 연재 글의 순서를 조정하였고, 머리말을 비롯한 몇몇 글은 새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