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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이야기
靑松송 광 호
1997년까지 십여 년 간 몸담고 있던 회사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연일 보유 주식을 내다 판다는 소문이 들렸다. 결국 국내 가전업계의 큰 손 D전자로 피인수 되면서 6년 동안 법인대표로 근무 하던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을 정리하라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3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동구 유럽국가인 폴란드 바르샤바에 새로운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CEO로 폴란드 주재원 근무를 발령받았다. 이렇듯 나의 해외 근무 이력서에는 1991년 8월 인도네시아 법인 설립에 이어 또다시 폴란드법인 창립 멤버가 되는 고난의 훈장(?)을 하나 더 달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성으로 부지런한 습관 하나를 무기로 살아온 나였지만 또다시 동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 교황 바오로 2세를 배출한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 노조위원장 출신 바웬사가 대통령인 나라 폴란드로 발령을 받고 들어가 보니 모든 환경이 인도네시아와 완전히 달랐다.
인도네시아는 2억 명이 넘는 총 인구의 85% 정도가 이슬람교도인지라 여러 가지 분야에서 외국인이 현지 법인을 원만한 정서로 운영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첫 번째로 평생 무더운 기후 조건에서 생활하다보니 대체로 급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쁠란뿔란 문화가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어로 쁠란쁠란(Pulan pulan)이란 의미는 천천히 라는 뜻이다. 이렇듯 인도네시아는 우리와 전혀 상반되는 생활 의식의 차이가 있다. 둘째로는 이슬람이면 하루에 여섯 번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멧이 탄생한 지구의 서쪽 사우디 아리비아 성지를 향해 살랏(Salat)이라는 기도를 올려야한다. 잔업이 없는 근무 시간 중에 아잔(Azan)이라는 기도를 알리는 음악에 맞춰 2회의 기도시간을 허용해야한다, 이슬람은 코란에 있는 그대로 하루의 기도를 통하여 최고의 신앙심을 갈고 닦는다. 또한 구내식당 식단에 그 맛난 돼지고기 요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이다.
인도네시아로 발령을 받고 입국하기 1년 전부터 한국외국어 대학 인문대학원에서 6개월 과정으로 배워 기초를 다진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라는 표준어를 사용한 개인적인 의사소통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노사 문제 등 집단적인 논쟁이 생기면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그러므로 내심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로 근무지를 옮긴 것이 인도네시아보다 몇 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나의 달콤한 생각은 얼마가지 않아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폴란드 국토 면적은 한국의 1.4배인 31만 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3,950만 명으로 인구 순위로 세계 36위 국가로 땅덩어리도 제법 큰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참으로 혹독한 역사를 살아온 나라이다. 외세에 의해 장장 123년 동안 국가가 소멸된 채 지내오다 1918년 독립을 한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로 부터 겪은 125만 명‘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학살을 통해 받은 통한의 상처와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구소련의 식민통치를 받는 등 절망과 비극이 점철된 역사만으로 폴란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ci연대連帶)’의 역사적 상징성을 함께 갖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인과 낭만주의 시대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이며 천재 피아니스트인 쇼팽을 탄생시킨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라이므로 가히 동유럽의 문화 예술 대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와 정치적인 배경과 내가 카톨릭을 믿는 신자라는 동질성 같은 감정이 섞여 인도네시아와는 사뭇 다른 위안을 받게 되었고 인도네시아보다 웬 지 편안한 근무 환경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Warsawa)에서 북동쪽으로 서울의 한강처럼 흐르는 위스바 강(Wisla)을 건너 5분쯤을 지나 전철용 기차를 보수하는 관리창(管理倉) 같은 곳이 가까운 곳에 10,000여 평의 공장부지가 있었다. 내가 설립하고 운영할 공간은 대략 4,000여 평의 부지 내에 있는 1,000평 정도의 넓은 생산 현장과 창고를 겸비한 건물이었다. 회사 앞마당엔 오래된 돌배나무가 우뚝 서 있고 뒤 담장에는 60여 미터가 넘는 긴 담 바깥에서 넘어오는 엄청난 양의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나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다시 말하면 잘 꾸며진 넓은 정원 같은 공간에 폴란드 합작회사 북두 폴란드(BUKDOO POLAND Co.ltd)는 간판을 내걸고 대략 6개월 정도 기간 동안 한국에서 수입한 생산설비와 기계 장치를 설치하고 150여 명의 폴란드 인력을 채용하여 교육을 시키며 1998년 5월 경 그야말로 가슴 설레는 생산 활동을 시작하였다. 참으로 감회가 깊고 뜻 깊은 폴란드에서의 역사적인 시작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여 아침 조회를 하고 분명히 그날 작업지시대로 생산 라인을 돌려놓고 사무실로 올라가 결재 서류에 서명을 하고 다시 1층 생산 현장으로 내려가 보니 생산라인이 정지되어있고 작업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일손을 놓고 있었다. 담당 과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옆에 있는 스프링 공장의 나이 많은 노조대표 쿠친스키라는 위원장이 우리 현장으로 들어와 우리 생산현장에서 건강을 해치는 접착제 냄새가 심하니 절대로 작업을 시켜서는 안 된다며 생산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중단을 시켰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폴란드는 노동부의 권한이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지만 이건 아니다싶었다. 우리 회사가 음향용 스피커를 생산하므로 부자재로 사용되는 접착제 속에 배합된 유기용제 냄새가 나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생산 현장에는 이 냄새를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해 접착제를 취급하는 3개 공정 작업자 앞에 강력한 모터와 자바라 흡입 배관을 연결한 덕트(Duct)를 완벽하게 설치한 후 한 달 전부터 지역 노동부에 신고하여 검사원 2명이 일주일 동안 파견되어 접착제 냄새와 관련된 현장 점검 및 검사를 철저하게 실시하였고 인체에 해가 없는 수준이라는 합격 판정을 받고나서 생산 현장을 가동시켰던 터라 더욱 황당했다. 나중에 확인하였지만 폴란드는 복수노조 간섭이 허가된 노동조합법이 적용되어 타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이 얼마든지 우리 회사의 근무 조건을 이유로 작업중단이나 파업에 간섭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그 까다로운 노동부 현장 심사를 통과한 그야말로 깨끗한 근무 환경을 갖춘 합법적인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타사의 노조 간부가 여러 번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시키는 어이없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여 나는 폴란드로 입국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제가 이억 만 리 먼 한국에서 주님계시는 폴란드로 혈혈단신으로 들어와 폴란드 국민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며 그들과 더불어 협력을 통해 자자손손이 일할 수 있는 기업으로 발전시키려고 매일 기쁜 마음으로 출근하며 일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 쿠친스키라는 타 회사 노동조합위원장이 매일같이 우리 현장으로 들어와 정상적인 작업을 중단시키며 생산 활동에 큰 방해를 주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고 하여 제가 주먹을 움켜쥐고 난투극을 벌일 수 도 없고 하오니 주님의 옳으신 판단을 간청하오며 다음과 같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 주소서.
”만약 제가 잘못된 행동으로 선량한 폴란드 국민을 희생시키려 한다면 저를 일주일 내로 병으로 쓰러트리시고, 그와 반대로 쿠친스키 노조위원장이 옳지 않다면 그를 쓰러트려 주십시오.“ ”저의 이러한 기도가 온당치 못함을 아오나 급박하오니 주님의 판단을 겸허히 받을 것입니다”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해외 공장운영 초기에 발생한 생각지도 않은 난제를 풀기위한 다급하고 절박한 내 나름의 배수진이었다.
이억 만 리 한국에서 홀 홀 단신 입국한 폴란드 땅에서 쿠친스키 노동조합위원장과 같은 인물과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 회사의 정상적 경영도 무너질 뿐더러 내 권위도 땅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긴박한 시점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사즉생(死卽生)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그런 간절한 기도가 있고나서 일주일 지나고 월요일 출근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날 아침은 조용한 분위기로 생산 현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매일 아침 우리 공장에 들어와 작업을 방해하던 하얀 머리에 키가 작은 옆 회사의 쿠친스키 노조위원장이 보이질 않았다. 구매담당과장 베드로를 불러 알아보니 그토록 내 속을 썩이던 쿠친스키 노조위원장이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져 왼쪽 몸을 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였다. 아뿔싸!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어 한없이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내려주신 엄정한 결정에 안도의 마음이 솟구치면서도 하느님의 크나큰 권세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 주님은 이렇듯 분명하시다. 이억 만 리 대한민국 땅에서 홀 홀 단신 폴란드로 들어와 생산 설비를 깔고 직접 청소를 하고 폴란드 직원들을 교육시키며 이마를 맞대고 일하는 송바오로(송광호)를 이토록 믿고 사랑해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뜨거운 감사의 눈물과 경외심으로 폴란드 직원들을 보다 따듯한 사랑과 신뢰로 대해 줘야한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앞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병원에 입원한 쿠친스키 노조위원장을 찾아가서 병문안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퇴원하기를 기다려야하나? 고민이었다. 그리고 대략 1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쿠친스키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병원 응급실에 입원해있던 옆 회사 노조위원장 쿠친스키가 세상을 뜬 것이다
이렇듯 엄청난 상황 앞에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나는 선 뜻 그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문상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이억 만 리 먼 폴란드에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머리가 하얗고 키가 작아 착해 보이는 노조위원장이었는데 무슨 악연으로 나와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만나게 되었을까.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 당시 나에겐 솔직히 그의 죽음 앞에 진정으로 머리 숙여 명복을 빌어줄 마음의 여유와 용기가 없었다. 그가 바르샤바 변두리 공원묘지에 잠들고 난 후 2개월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나의 옳지 못한 기도에 대한 참회의 눈물로 내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그의 명복을 간절히 빌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모습의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이왕이면 악연이 아닌 좋은 인연으로 만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까마득하게 지난 일이 되었지만 그 일이 있고 4년이 지나는 시점에 나는 꿈 많았던 D그룹의 몰락을 목전에서 보며 아쉽고 정든 폴란드 바르샤바 공장을 폴란드 현지기업으로 매각하고 한국으로 철수했다.
온갖 풍상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선 큰 누님 같은 내 모습을 본다. 태양같이 뜨겁고 용광로같이 활활 타오르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지극히 절제되고 차분한 심정으로 돌아왔다. 유독 머리가 하얗고 키가 작았던 쿠친스키 할아버지의 영전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조용히 속삭여 본다. “쿠친스키 할아버지 제가 저지른 잘못된 기도를 용서하셨나요?. 할아버지, 저는 그 때 제 모든 진심과 열정을 다해 폴란드와 우리 회사에서 일하던 모든 가족들을 너무 너무 사랑 했답니다”
“하느님 앞에서 진실한 사랑에는 결코 적(滴)이 없어야 합니다.”
“쿠친스키 할아버지 저를 한 번 더 용서해 주세요.”
첫댓글 해외시장 개척에 고군분투하신 님에게 성탄절의 축복이 내리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이젠 퇴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2019년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