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성경본문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령은 가시적인 형체로 볼 수 없는 분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보였다(눅 3:22). 여기서 비둘기는 성령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예수님과 요한만이 이것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선포를 들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세례 요한이 직접 본 것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만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이 보았다고 한다.
요한복음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마태복음의 영어성경(KJV, NIV, NASB)도 우리 말 번역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NASB만 ‘자기 위에’를 대문자로 썼고(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as a dove and lighting on Him), 다른 성경에서는 소문자(on him)를 썼다. 칼빈도 예수님 외에 세례 요한이 목격자라고 말하였다. “세례 요한이 이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리스도 위에 임하셨다”는 어구가 그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이다.”(칼빈, 『칼빈주석, 공관복음』, 203.)
성령을 표상하는 용어들은 숨(“히브리어 “루아흐”는 숨, 바람, 영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번역들은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는 하나였던 것을 자연․정신․초자연적 관점들이 이해된 복잡한 의미로 불가피하게 구분한 것이다.” 『아가페 성경사전』, “성령”, 823.), 불(마 3:11; 눅 3:16; 행 2:3), 하나님의 팔(사 63:12), 하나님의 손(사 31:3; 눅11:20), 비둘기(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2) 등등이 있다(『아가페 성경사전』, 824.). 성령을 표상하는 용어들의 쓰임새는 문맥에 따라서 뜻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비둘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대홍수 사건이다(창 8:8~12). 고대인의 전통에서처럼 노아는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자 방주에서 나갈 때를 가늠하기 위해 새를 이용하였다. 까마귀, 비둘기 순서로 내보냈다. 까마귀는 땅에서 물이 마르기까지 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만 하였다(새번역, 공동번역 등). 까마귀는 죽은 동물을 먹는 육식조(잠 30:17; 욥 38:41)로서 물 위에 떠다니는 사체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율법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되어 식용이 금지되었다(레 11:15; 신 14:14). 노아는 비둘기 종류들의 회귀하는 습성을 활용하였다.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로 돌아왔다. 7일 후에 다시 나간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는 물에 잠긴 감람나무에서 새 잎이 돋아나온 것을 알 수 있는 단서도 되고, 홍수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생명과 생식력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회복과 새 생명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령사로 쓰였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 체결 때에 비둘기는 희생 제물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무수히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언약의 증표로써 쪼갠 고기들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갔다(창 15:17). 제사에 사용된 3년 된 짐승들(송아지, 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은 레위기에 묘사된 제사 제도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짐승들로서 반으로 갈랐으나 새의 몸통 부분은 따로 분리하지 않았다. 고대근동문화에서 비둘기는 너무 가난해서 소나 양을 제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신명기 14장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규정해놓았는데, 부정한 새로 규정된 것 이외의 정결한 새들은 식용을 허용하고 있다(신 14:11~20). 비둘기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새로서 정결한 짐승에 속한다. 유대인들은 깨끗한 곳에서만 자라고 정결한 것을 좋아하는 비둘기를 진실성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아가페 성경사전』, “산비둘기”, 759).
아가서에서 비둘기는 왕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연인과 신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르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5: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중략) |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당부하셨다.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 제자들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처럼 단순하고 순결한 것이 오히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길임을 알게 해준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비둘기는 회복과 새 생명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령, 가난한 자를 위한 희생 제물, 정결성과 진실성, 사랑받는 유일한 연인이자 신부로서의 아름다움, 순결함 등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 왔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임했던 하늘로부터의 계시는 이사야 11:2; 42:1 및 61:1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마태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이다. 이 예언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로 지목하였다. 하늘로부터의 선포는 시편 2:7과 이사야 42:1의 언어를 사용한다(『IVP 성경주석-복음서, 사도행전』, 46). “내 사랑하는 아들”이 사용된 단어는 창 22:2과도 관련이 있다(『IVP 성경주석』, “누가복음”, 195).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칼빈은 이사야 42장의 ‘종의 노래’를 근거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해석하였다. 여기서 성령의 표상으로서 비둘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하였는지를 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2-3). 이것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즉 그가 날마다 인자하고 온유하게 죄인들을 구원의 소망으로 부르신 저 온유하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무시무시한 능력으로가 아니라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은혜를 덧입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 상징을 통해서 가장 감미로운 위로를 나타내는 탁월한 징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었다.(칼빈, 『칼빈주석, 공관복음』, 203.)
칼빈은 “내 기뻐하는 자”(사 42:1, 마 3:17)는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겸손하고 온유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부각시켰다.
지금까지 성경의 인용구절들과 성경사전, 칼빈 주석, IVP 주석 등을 통해서 알아본 바, “비둘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특징과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성령은 독자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아들에게서 들은 것을 말씀하시고 알리신다(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의 말씀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섬기시기 위하여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특징을 대변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외아들이시지만 종의 신분을 입으셔서, 가장 가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진실한 분으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 인하여 만물이 회복되고 하늘나라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참고 도서>
아가페편찬위원회, 『아가페 성경사전』(서울: 아가페서원, 1991).
칼빈, 『칼빈주석, 공관복음』(파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J. A. 모티어 외, 『IVP 성경주석, 복음서/사도행전』(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9).
J. A. 모티어 외, 『IVP 성경주석, 예언서』(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9).
첫댓글 칼빈 주석 등을 토대로 작성자님의 담백한 성경 읽기로 좋은 상고와 묵상을 올려 주셨네요.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이 표현은 낯이 익은데요. 요즘 카페에서 아가서 관련된 것을 조금 자주 보았는데, 아가서에도 비둘기 표현이 꽤 있는 것은 오늘 알았어요. 글 올리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궁금해서 영문 칼빈주석이라도 찾아보았어요.
칼빈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주석은 쓰셨는데, 아가서 주석은 쓰지 않으셨네요. 아가서 부분은 코람데오님이 하신 것처럼 현대 주석을 보는 게 편하겠습니다.
@장코뱅 아! 아가서는 없군요. 아쉬운 대로 현대 주석을 봐야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요한복음이 인칭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면이 있네요.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요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네, 공감합니다.
비둘기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글을 다 읽고 나니 많은 동물들 중에 비둘기가 참 복을 받은 동물이네요.🕊
제사에 사용되는 정한 짐승중의 하나였으니 하나님이 인정하신 동물이며, 예수님께서 파송때 직접 비유하신 동물이구요. 심지어 성령님께서 표상으로 사용하셨으니 그 위상이 '양'에 버금가는 것 같습니다.
아파르님의 비둘기 평가에 동의합니다.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문자적으로 보면 양 같은 자들아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요.
@천이다
이사야서 42장을 종의 노래라고 하는군요.
사42:11-12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아멘!
아멘~
네. IVP 주석에 보면 사 42장에 두 편의 '종의 노래'가 있다고 나오네요.
성경구절을 찾아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가 양 한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될 때에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나 주에게 바치는 제물로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레위기 5:7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찌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위기 12:8
주께서 가난한 자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배려하셨는지 비둘기를 통해 배웁니다
또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께서 종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한 가정에 오시었던 사실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누가복음 2:23-24
아파르님의 풍성한 댓글에 공감합니다.
신앙적, 영적인 의미를 차치해도 비둘기의 단가가 가장 저렴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산비둘기는 포획하기 어렵지만 집비둘기는 집에서 기르므로 구하기가 더 쉬웠을 것 같습니다. 집비둘기를 바치는 분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분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가난에 대한 해석을 더 깊이 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가고 이 가난한 자들은 천국을 소유합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서 올려주시니 같이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누가복음 2장!! 아주 좋습니다.
감상평도 은혜롭게 잘 보았습니다.
@장코뱅 아멘~ 물질적인 가난과 심령의 가난을 돌보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아파르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처음에 볼 때는 덜 보였는데, 자꾸 읽다 보니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비하)이 보이며... 제 마음이 따뜻•포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뜬금없이 신학 책을 읽고 마음이 따뜻•포근해진 이유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성령의 개입으로 감지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낮아지심이 바빙크•벌코프•마이클 호튼 책에서 분위기만 조금 다르게 반복되는 걸 읽으면서 개혁주의 신학이 신학만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스도인(성도)의 낮아짐)
높낮이로 표현하면 낮아지는 것이 성도에게 필요하고요. 있고 없고로 표현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이 성도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코뱅 은혜와 복음을 담은 신학인가 봅니다. 저도 잘 읽어 보겠습니다.
@장코뱅 신학책을 읽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포근해진다는 것이 어떤것인지 저도 알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