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灣 上 (만상)
- 용만에서
王 事 風 塵 際 (왕사풍진제) 나라의 일이 풍진 속에 놓였으니
深 秋 賦 遠 征 (심추부원정) 깊은 가을에 원정가를 부른다네
難 危 唯 有 死 (난위유유사) 위기를 당해 오직 죽음이 있을 뿐
喪 禍 欲 無 生 (상화욕무생) 죽음 앞에서 살고 싶은 마음없네
絶 塞 三 年 別 (절새삼년별) 아득한 변경에서의 삼년의 이별
孤 燈 半 夜 憶 (고등반야억) 외로운 등불아래 깊은 밤의 추억
隔 江 東 館 信 (격강동관신) 강 건너 동관에서 소식이 있는지
揮 涕 問 蘇 卿 (휘체문소경) 눈물을 훔치며 소경에게 묻나니
(어 휘)
* 王 事 : 나라의 일
* 絶 塞 : 아득한 변경
* 半 夜 : 깊은 밤, 한 밤중
* 蘇 卿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인물로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19년을
사로잡혀 있으면서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이름은 소무(蘇武)이고, 자는
자경이다. 蘇卿은 소무의 높임 말이다.
(지은 이)
具鳳瑞 (구봉서, 1596~1644),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洲)로 서울에서 태어나다. 어려서 부터 시재
(詩才)를 보여 8세에 백사 이항복 공 앞에서 지었다는 시가 전해 온다. 13세에 석주 (石洲) 권필 (權韠) 선생
에게 시를 배웠다.
1624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이래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고, 승정원에서 승지로 임금을 가까
이에서 모셨다. 총명하고 재치가 있어 인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재능을 십분 발휘하였다. 이조 좌랑 시절에
인조의 부친인 정원군을 王으로 추존하는 일에 반대하면서, 이에 관한 판서(判書)의 지시를 거부하는 강직
함도 보여 주었다. 1636년 봄에, 병조참지로 재임 중에 대간의 탄핵으로 서천 군수로 좌천되었으나, 현지
에서 선정을 펼쳐 1년 만에 나주 목사로, 다시 1년 후에는 전라 감사로 발탁되어 지방관으로서의 면모를 잘
발휘하였다.
그 후에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에는 경상감사로 다시 임명되어, 호란 이후의 지방관으로서, 경상도
지역의 어려움에 잘 대처하여 임기를 연임하면서 지내다가, 다시 호조참의와 비변사 부제조로 일하던 중에
서북 지방에 중대한 현안이 발생하여 평안감사로 부임하였다.
당시의 국제관계는 대륙에서는 청(淸)나라가 크게 세를 떨치며 중원 일대를 석권하고 있으면서, 잔여 세력
으로 남아있던 명(明)나라와의 관계가 '태풍의 눈'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이 다시 명나라와 손을 잡고 혹시라도
배후를 공격하는 일에 의심을 품고 매우 민감하였던 상황에서,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과 명나라와의
비밀 무역을 폭로하여 청나라를 자극하였다.
이에 따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대신들, 나아가 나라의 안위가 다시 위기 상황으로 악화되어
가든 긴박한 시절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공을 평안감사에 임명하면서 현지에서 현안에 긴밀하게
대처토록 하였다. 이에 공은 현지에 부임해,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명민(明敏)하게 대처하여 현안의 실마리를
잘 풀어 갔다. 이로 인해 공에 대한 인조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웠으나 공에게는 지병이 악화되어, 마침내
1644년 1월 30일에 공은 평양 감영에서 순직하였다.
위에 소개한 시는 이 당시에 긴밀한 상황에서 동분서주하던 시절의 작품으로 전한다.
이 시의 출처는 한형길(韓亨吉) 선생의 '심양창화록 (瀋陽唱和錄)'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심양에서 세자를
가까이 모시던 분들이 서로 주고 받은 시들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공의 이 작품이 이 시집에 수록된 자세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의 현안을 수습하려고 심양에서 압록강 근처까지 와서 머물렀던 소현세자와
만나 현안 타결을 모색하던 평안감사 자격으로 만나는 기회에 지은 시로 사료된다.
당시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공께서 중앙 조정에서 내려 오는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아 국경
근처에까지 와 있던 소현세자와의 긴밀히 협의한 기록들을 참고하면, 이 무렵에 세자(世子)를 수행한 몇몇 신하
들과의 만남을 통해 주고 받은 시의 한편으로 포함된 듯 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시 전편(全篇)에는 긴장감과
함께 나라 일에 나서서 죽기를 각오하는 현지 감사의 각오가 묻어나 일말의 비장감(悲壯感)을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