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적 수필, 두 세계를 건너오는 여인
어느 늦가을 오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사르르 흘러내리던 날이었다. 숲길을 따라 걷던 한 여인이 있었다. 따뜻한 털모자를 쓰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색 머릿결을 어깨에 흘려두고,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렇게 환한지 알지 못했지만, 숲속 작은 바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아주 오래된 세계에서 온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길 옆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엽서를 꺼냈다. 엽서에는 오래된 일본화 한 장이 그려져 있었다. 부채를 들고 있는 한 여인, 담담한 눈매, 고요한 어깨선, 그리고 바람보다도 가벼운 정숙함. 그 그림 속 여인은 늘 침묵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녀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느 순간 그림이 아닌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녀는 농담처럼 그 말을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모르게 믿어보고 싶었다. 바람이 고요히 잦아드는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랐다.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황금빛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살짝 든 채, 마치 그림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얼굴. “당신은…” 그녀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림 속 여인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매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오래전 세계에서 잠시 온 손님입니다.’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지만, 침묵은 온기로 가득했다.
둘은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바람은 두 사람을 가리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현대의 여인은 걸으며 가만히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너무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해요. 사람들도, 계절도, 나조차도.” 그림 속 여인은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 부채질에는 오래된 사원의 종소리 같은 고요가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바람의 결, 사람의 마음,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질처럼.’ 숲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기모노 여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부채를 든 손끝을 가을 하늘 쪽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는 비로소 말을 했다. 목소리는 잔물결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오랫동안 그림 속에 갇혀 있었어요. 누군가 진심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나는 그저 종이 위의 색깔일 뿐이었죠.” 현대의 여인은 놀라서 물었다. ”그럼… 내가 바라봤기 때문에 나온 건가요?” 기모노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눈에 ‘조용한 나’가 보였답니다. 그리고 그 고요와 내가 닮아 있었어요.”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림 속 여인을 깨운 것은 그림 자체가 아닌, 바로 자신 안의 고요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둘은 다시 걸었다. 바람이 그들의 옷깃을 흔들 때마다 두 세계는 살짝씩 뒤섞였다. 어느 순간, 현대의 여인은 부채를 든 여인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그림자는 이미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해요.” 기모노 여인은 미소 지었다. “그림 속 세계는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까요.” 현대의 여인 역시 미소 지었다. 아쉽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으시겠네요.” 그림 속 여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외롭지 않은 건 당신이에요. 당신이 가진 고요와 단단함을 오늘 스스로 알아보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속삭였다. 아름다움은 꾸밈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걸… 꼭 기억하세요.”
두 여인의 발자국이 사라지자, 숲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대의 여인은 자신의 마음 한켠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걷던 여인이 남긴 온기가 아직 손끝에, 모자에, 머릿결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자신의 고요가 바로 자신만의 빛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고요한 빛이 시대도, 의상도, 문화도 넘어서 한 사람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와 엽서를 다시 꺼내든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엽서 속 기모노 여인이 아주 미세하게, 진짜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여인은 그림 속으로 돌아갔지만, 그녀에게 남긴 깨달음은 현실에 남았다. “아름다움은 너의 존재방식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오늘 만난 그 조용한 여인은 사실 그녀 안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또 다른 ‘나’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