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새실마을의 어제와 오늘
송정 옛길 ‘기억의 쉼터’ 조성
새실[新谷]마을은 좌동 마을에서 동쪽 건너편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청사포의 새터마을처럼 좌동 마을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에 의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실 마을이라 불렀다. 새실마을에는 의흥 예씨를 비롯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며, 부흥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해 장자벌에 농사를 짓고 살았다. 지금의 달맞이길인 해송교 밑으로 청사포까지 통하는 길이 있어 구덕포와 청사포 주민이 이곳까지 와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새실 당산은 마을에서 동쪽 약 300m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부흥고와 화목타운아파트 사이 대원아파트에 위치하였다. 건립 연대는 1969년이다. 당산 뒤쪽에 노송 한 그루(200여 년)와 당산 양쪽에 포구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특기사항으로는 해운대신시가지 택지정지 작업을 하던 1993년 가을에 당산나무를 베려 하니 큰 구렁이가 당산나무를 감고 있어 당시에 베지 못하고 후일 베었다고 한다. 부흥봉(181m)의 정기를 받은 한가한 새실 마을은 해운대 지역의 급변하는 도시화로 인하여 깡그리 채 없어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대로 마을을 지킨 수호신 이무기가 승천했다는 당산도 사라졌다.
1952년 6월 16일 오전 11시경 장산 탄약고 야적장에서 탄약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야적되어 있는 탄약이 자연 발생적으로 태양열에 의해 한 달가량 폭발을 하였다. 사고가 발생하자 새실·좌동마을 주민들은 발 빠르게 빈 몸으로 친척 집으로 피신했다.
당시 주민 3명 사망, 주택은 한 채가 소실되는 등 많은 피해가 있었다. 새실·좌동의 텅 빈 마을을 서남경찰(1953년 창설, 같은 해 7월 1일 해산 ; 전투경찰의 시초)이 감시하였다. 피신했던 주민들이 2일 만에 집에 돌아오니 서적 등 귀한 소중품이 없어졌다.
이 폭발사고로 죽은 사람, 소실된 주택 등은 보상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해운대 온천 마을은 폭발 폭음으로 유리창이 깨지고 거리는 전쟁이 지나간 상흔을 방불케 하였다.
1992년 이후 이곳에 해운대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마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새실마을 위치는 지금의 대원아파트와 쓰레기 소각장 일대이다.
지금은 마을 옆 신곡산에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기억 쉼터’로 역사와 문화가 함께 하는 산책길이 조성되었다.
송정 옛길은 부산환경공단 앞에서 송정 해수욕장을 잇는 약 2km의 고갯길이다, 이 길은 일제 강점기 전부터 수영, 동래에서 기장으로 가는 이동로였으나 한국동란으로 당시 군수 탄약창 병기창이 들어오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민간인 통행이 제한되었다.
2008년 송정 일대 해안 군부대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부터 해제·개방되면서 신곡산을 찾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갯길은 허물어지고 다니기에 너무 불편했다.
해운대구는 역사 문화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국·시비 구비를 더해 10억 예산으로 옛길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허름하게 남은 폐가 탄약창은 지붕을 철거하고 벽면 철문 등 일부를 보존해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기억 쉼터’로 역사와 문화가 함께 하는 산책길을 조성하였다. 산책로는 환경공단 정원 메타세쿼이아 숲길(고흐의 길)에서 출발하여 신곡산 전망대를 경유, 달맞이길을 가로질러 송정 광어골로 가는 코스로 조성됐다. 기억 쉼터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무장애길(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걷기 편한 포장된 넓은 길)과 오솔길 산책로가 나온다.
무장애길은 송정동 산 58 두타사 앞에서 끝난다. 신곡산 전망대를 가는 코스는 무장애길을 따라 오르다 고갯길 정상에서 전망대로 가는 코스와 오솔길 산책로 덱 계단을 180m 오르는 코스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송정 옛길의 백미인 송정해수욕장, 죽도, 오시리아 관광단지가 파노라마 뷰가 들어온다.
- 의흥예씨 예형근(52년생, 해초 26회) 인터뷰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