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회 강의실에 들어서자 바로 옆자리 여 후배님이 처음 봤을 때에는 "에그, 예쁜 수를 놓은 이 의상의 무늬에 언더샤스하고 아주 잘 어울리네요. 바지만 흰색바지를 입으셨다면 아주 더 멋있었을 텐데..." 하던 그녀가 예리한 눈매로 나는 미처 발견치 못한 옷의 헌곳을 찾아낸 모양이다. 얼른 위에 걸친 옷을 벗고 보니 어깨 옆 접합 부분의 옷감이 밀리면서 터졌다. 어찌 할까. "괜찮아, 요즘은 거지 훼션이라고 일부러 떨어진 청바지도 입고 다니잖아^^?"
의연한척 했지만 영 마음이 찜찜하다. 세월은 모든 걸 낡게한다. 몇년 전 S백화점에서 제법 비싸게 사놓은 걸 세월만 보냈지 몇번이나 입었을까... 어제 늦저녁 집에서 옷장을 뒤져서 요즘처럼 푹푹 찌는 날씨에 맞을듯 한 옷을 찾으려 보니 모양새가 모두 다 구식이다. 마(麻)가 섞인 옷감에 시원할 듯한 옷들을 걸쳐보니 모두 옛날 화면에 나오는 사진 속 인물처럼 정말 더 뒤쳐진 할머니같이 보이게 한다. 그 시절에는 제법 잘 어울리던 옷들이 어째 이리 마땅치 않을까... 고심하던 끝에 이옷을 골라 새로 세탁을 하고 아침에 급하게 다려서 입고 나온 옷인데 미처 이걸 보지를 못했구나...
오늘은 수업이 끝난 후 모처럼 복날이라고 지도교수님께서 삼계탕을 사기로 되어 있는 데 이를 어쩌나... 할수 없이 총동사무실에 들러 바늘과 실을 빌려 회식장에 앉아 대강 어설프게 꿰매 본다. 집에 돌아 와서 꼬맨 실밥을 뜯고 다 잡아 다시 제대로 미싱에 꿰매어 놓는다.
한번 쯤은 더 입을까 하며 다시 세탁을 하여 다리려고 보니 이번에는 수를 놓은 앞자락의 섬유가 곱게 밀려났다. '그냥 모두 낡는구나...' 혼방 모시 옷에 비슷하게 가느다란 흰 실을 골라 올올이 베를 짜듯이 다시 곱게 손질을 하여 놓았다. 공연한 수고지 과연 한번쯤 입어 볼 수나 있을까 몰라. 흥부 집 마누라처럼 보일테지... 나이를 먹고 보니 이처럼 무더운 날 무어 선볼 일도 없는데 새로 옷을 사려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기도 힘에 겹고 보통 곤욕은 아닐 터이다.
문득 어떤 친구의 시어머니 생각이 떠 올랐다. 그 분은 며느리 시집살이를 몹씨 시켰는데 오래 살기 위해 철마다 녹용보약을 지어 꼭 자기가 보는 앞에서 약을 다리게 하였다. 혹시 며느리가 몰래 그 보약의 진국을 미리라도 좀 따라 마실까봐 노심초사 꼭 옆에서 지키곤 하였는데 그 당시로선 장수라 했지만 그래도 75세밖에 못살았다.
그 노인은 자고 새면 옷을 사는 게 취미인지라 마침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매일 옷을 사들이는 게 일이었다. 사온 후 마음에 안들면 꼭 며느리인 내 친구에게 물러 오라 시켜서 여간 황당한게 아니라 했다. 장수라지만 살아 생전에 얼른 새옷들을 사서 빨리빨리 입어 보려는 초조한 심사가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내 나이는 그보다 젊었나... 인생 백세시대를 맞은 요즘 정신적으로는 더 젊다고 생각키지만 내가 사는 방법이 옳은 걸까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세월의 더께에 밀려 견뎌 날수 있는 게 무얼까... 무지 튼튼할 것 같은 무쇠도 녹이 슬어 구멍이 나 깨지고 쇠가죽도 모두 뭉게진다. 하다 못해 낭창하던 파리채도 몇년을 쓰니 조각조각 부셔진다. 망가지지 않는 게 무엇이 있는지... 영원할 것 같던 위대한 왕국들도 역사 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매일매일 늙어간다. 요즘처럼 참기 어려운 무더위에는 정말 푹푹 쪄서 망가지는 느낌이다. 눈이 부셔 아침에 제대로 눈 뜨기도 어렵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 무더위 속에 모든 사색의 기능도 무뎌져 버릴 것만 같다.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지구의 경도가 기울면서 이제 서서히 가을날이 오겠지... 뒷곁 개천가 풀밭에서 매미소리와 뒤섞여 밤이면 간간히 귀뚜라미와 가을 풀벌레 소리가 귀를 간지른다. 모처럼 오늘 아침은 선 듯 찬바람이 일어 부엌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고 정리를 해 본다
살아 있는한 자기자신의 정신건강과 몸을 건전하고 멋지게 유지하려면 부단한 부지런함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걸 나이탓으로 돌리는 나는 그간 얼마나 무심 했던가...
이제 조금 더위가 개이면 얼마 전 이왕에 사 놓은 초가을에 맞는 마(麻)섬유질의 조금은 기장이 길고 멋진 의상을 입어 보리라.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들인가. 내가 살아 숨쉬며 행복했어야 되었던 날들, 혜진 옷을 입어 구겨진 내 상혼(傷魂)을 달래 보아야 하겠다며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 본다. 2013. 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