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5백 년에 걸쳐 조선조의 절대사상, 유일사상으로
중국을 월등히 능가해 이 땅에서 꽃 피운 소중화(小中華)사상.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은
건국 이념과 통치철학의 기본 강령으로 이를 채택했다.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계급사회가 되며 반상(班常)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만주에 있는 우리 동족과의 이간책, 회유책으로도 썼던
소중화라는 미명의 이 사상은 치국(治國)의 근본 이념이 되었다.
훌륭한 학자들이요, 학문의 스승이었던 이들 학자들
국정을 전단했던 이들의 모화사상에 관련된 글들.
새삼 역사의식이 어떠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뼈아픈 기록들을 살펴보자.
이들이 과연 우리 한민족이었던가 ?
신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산을 짊어지고 바다에 둘러싸였으므로 지리(地利)는 험고(險
固)한 면이 있고, 중국 제도를 이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혁시켰으니, 문물은 찬란한 아름
다움을 이루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가 진정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으
로 이름을 얻은 것은 벌써 기자(箕子) 이전부터였고, 숙신(肅愼)으로 명명된 것은 공자(孔
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상서(尙書)》에 실려 있으니, 이로 본다면 우리나라가 중국에
서 불려지게 된 것은 매우 오랩니다.
<다산시문집 제8권 대책(對策) 지리책(地理策)>
내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중국을 사모하고 존숭하며,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중화의 제도와 비슷합
니다. 그래서 옛부터 작은 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언어(言語)만은 상기 동
이의 풍속[夷風]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외집 7권(外集 卷七) 연기(燕記) 손용주(孫蓉洲)>
만국의 삼라만상이 두어 폭 종이에 펼쳐져 / 萬國森羅數幅牋
삼한은 모퉁이의 한 작은 덩어리 같네 / 三韓隈若一微塊
보는 자는 작다고 말하지 말라 / 觀者莫小之
내 눈에는 조금 큰 편이로다 / 我眼謂差大
고금에 어진 인재 끊임없이 태어나 / 今古才賢袞袞生
중국에 견주어도 크게 부끄러울 것 없네 / 較之中夏毋多愧
인재 있으면 나라요 없으면 나라가 아니니 / 有人曰國無則非
오랑캐는 땅만 컸지 초개(草芥) 같을 뿐 / 胡戎雖大猶如芥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중화인이 우리를 소중화라 말한 것을 / 君不見華人謂我小中華
이 말은 진실로 채택할 만하네 / 此語眞堪採
<동국이상국전집 제17권 고율시(古律詩) 화이도(華夷圖)에 장단구(長短句)를 제(題)함>
황제의 편지가 친절하고 정녕하였으며, 사신이 계속 나와 끊어지지 않았다. 성명(聲名)이 빛
나고 문물이 번화하였다. 융성한 것이 상국에 견줄 만하여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다.
<동문선 제28권 책(冊) 문왕 애책(文王哀冊) 박인량(朴寅亮)>
우리 국가가 경인(庚寅)ㆍ계사년-경인년은 충정왕(忠定王) 2년, 계사년은 공민왕(恭愍王) 2
년 - 이전에는 통유(通儒)와 명사(名士)가 중국보다 많았으므로, 당 나라에서 이르기를 군자
의 나라라 하였고, 송 나라에서는 이르기를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나라라 하여 본국 사
신이 말에서 내리는 곳에다 쓰기를, “소중화(小中華)의 관(館)”이라 하였더니,
<동문선 제53권 주의(奏議) 벽불소(闢佛疏) 박초(朴礎)>
신라(新羅) 시대에 당태종(唐太宗)은 유신(庾信)과 김인문의 소식을 듣고 군자(君子)의 나라
라 하였고, 고려(高麗) 시대에는 김부식(金富軾)ㆍ박인량(朴寅亮)ㆍ김근(金觀)ㆍ이자량(李資
諒)의 무리가 송(宋)에 들어가서 문장으로 서로 이름을 날려서 사람들은 우리를 “작은 중화
[小中華]”라 하였으며, 민지(閔漬) 정가신(鄭可臣)은 또한 원세조(元世祖)에게 칭찬을 받았
으며, 익재(益齋)선생은 크게 중국 사대부의 칭찬을 받았으니, 누가 해외의 작은 나라라 하
여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속동문선 제16권 서(序) 송 이국이 부 경사 서(送李國耳赴京師序)>
1076년 추8월송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였다.
공부 시랑(工部侍郞) 최사량(崔思諒)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방물(方物)
을 바쳤다. 송나라는 본국이 문물 예악의 나라라 하여 매우 후히 대접하였고, 사신의 하마
소(下馬所)를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이라 제(題)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태수(太守)가 교외
로 나와 맞았고, 전송(餞送)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동사강목 제7하 병진년 문종 30년(송 신종 희령 9, 요 도종 태강 2, 1076)>
전하께서 선왕들의 5백 년 된 막중한 종사(宗社)를 받으시고 선왕들의 삼천리 강토와 많은
민생들을 맡으셨으니, 진실로 그 부탁을 완수하여 선왕들께 공헌해야 됩니다. 어찌하여 한
결같이 역적들의 모의를 쫓아서 국가의 법을 변경하여 어지럽게 하시어 당당한 소중화(小中
華 우리나라를 말함)를 이적의 풍속을 따라 금수와 같은 종류로 만드십니까.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4권 소(疏) 역적(逆賊)을 치고 의복 제도의 복구(復舊)를 청
하는 소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6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켰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서 인의(仁義)의
가르침과 예악의 풍속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중화(小中
華)라는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14권 서(書) 유길준(兪吉濬)에게 보내려던 답서 을미년
(1895, 고종32) 12월 7일>
공양왕(恭讓王) 때에 박초(朴礎)는 상소하기를, “당 나라는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라 하였
고, 송나라는 ‘문물 예악의 나라’라 하였으며, 본국 사신의 말 내리는 장소에 제하기를 ‘소중
화관(小中華館)’이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다 대국을 정성껏 섬긴 때문이었다.
<성호사설 제25권 경사문(經史門) 소중화관(小中華館)>
우리나라는 건국(建國)한 이후로 삼강(三綱)이 바르고 오상(五常 오륜)이 밝아 고려(高麗)의
호속(胡俗 오랑캐 풍속)을 일변(一變)시켜 삼고(三古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삼대(三代)를
말함)의 대도(大道)로 돌아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매양 소중화(小中華)라 칭한 것은 바
로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3권 소(疏) 차(箚)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부묘(祔廟)를 청하는 차자
(箚子) 기유년 1월 26일>
-숙방(宿坊)- 우측에는 ‘봉정(奉呈)’이라 쓰고 좌측에는 ‘지명 숙방모사 선탑(地名宿坊某寺禪
榻)’이라 쓰며, 마주 붙인 곳에는 ‘근봉(謹封)’이라고 쓰고 ‘소중화인(小中華人)’이라고 새긴
도서를 찍는다.
<증정교린지 제5권 단자식(單子式)>
우리 동방(東方)은 멀리 바다 밖에 있으나, 기자(箕子) 이후로 시서(詩書)의 풍속이 융성하
여졌다. 그리하여 신라(新羅) 때에는 당 태종(唐太宗)이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의
풍도를 듣고서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 하였고, 고려(高麗) 때에는 김부식(金富軾), 박인
량(朴寅亮), 김근(金覲), 이자량(李資諒) 등이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문아(文雅 문장과 풍
류)로써 번갈아 울리어, 송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다.
<점필재집 문집 제1권 경사에 가는 이국이를 보내는 서[送李國耳赴京師序]>
천지의 기운이 / 天地之氣
열림에 빠르고 늦음이 있으니 / 開有早晩
복희(伏羲)와 헌원(軒轅)의 때에는 / 羲畫軒裳
동국에 있어서 아직 혼혼하였네 / 在東混混
오운이 미친 바에 / 午運所被
신인이 만물의 조종(祖宗)이 되어 / 神人首出
길조에 홍몽(鴻濛)을 열자 / 吉朝闢濛
아름다운 햇살이 처음으로 밝았네 / 輝鮮初日
좌해가 진진하여 / 左海蓁蓁
이에 군장(君長)이 되었는데 / 是君是長
역사에 대개 말함이 있었으니 / 史蓋有云
천년토록 그 제향을 누렸다네 / 歷千厥享
소중화에 비기고 / 比小中華
예의의 나라라고 일컬어졌음은 / 曰禮義邦
다만 기자(箕子)의 팔조법금(八條法禁)뿐 아니라 / 匪直箕條
단군(檀君)의 교화가 크게 미친 까닭이었네 / 檀化攸厖
그 문명을 쌓아서 / 儲厥文明
우리 왕가에 남겨 주었고 / 留與我家
열조가 계속 이어받으니 / 列朝相承
바로 방훈(放勳)이요 중화(重華)였네 / 乃勛乃華
일광이 점차 중천을 향하는 듯하여 / 如曦漸中
복희 헌원의 군덕(君德)을 지녔으니 / 君其羲軒
자취를 혹 징험할 수 없으나 / 跡或無徵
그 덕만은 잊을 수 없다네 / 德未可諼
익익한 서경에 / 翼翼西京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배향하니 / 東明是配
송양에 위엄을 떨쳤고 / 奮威松壤
천지가 아직 어두운 때 나라를 세웠네 / 建邦草昧
세 사람의 준걸로 보좌하게 함에 / 佐以三俊
시대는 달랐으나 공로는 같았으니 / 異代同功
지난 신축년에 / 往歲維辛
경건히 나의 작은 충정을 베풀었네 / 虔申微衷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 心焉嚮慕
반드시 응하는 이치가 있어 / 理必有應
한 묶음 향을 마음에 담았으니 / 瓣香在心
신이 흠향하여 들어주길 바라네 / 庶格神聽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1권 숭령전(崇靈殿) 치제문>
* 방훈(放勳)이요 중화(重華) : 임금의 성덕(聖德)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사
신(史臣)이 요(堯)의 덕을 ‘방훈(放勳)’이라 하고, 순전(舜典)에 순(舜)의 덕을 ‘중화(重華)’라
고 한 데서 유래한다.
한문수 2008. 2. 22. 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