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Wessels
Speaker Van Niekerk-1978 N. C. Camp Meeting
경영학과장 Burdick 교수1966 in Cape Town-went to a spot on Table Mountain- tallgrass and tall trees amidst the ruins of a building.
테이블 산의 무너진 빌딩 자리에는 키 큰 나무와 풀만 무성하였다.
화잇 부인의 한 말만 가슴을 울렸다.
“이곳에 다시는 다른 건물이 서지 못하리라. 오직 풀과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옛날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용히 증언해 줄 것이다.” E.G.White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려는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Peter Wessels 혼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제칠일안식일이 올바른 예배일 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일을 더 깊이 연구해보고는 혼자서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의 국교 수준인 화란개혁교회(Dutch Reform Church)를 떠났다. 많은 친구 이웃이 “당신 미쳤어, 무슨 유혹에 빠졌어, 당신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잖아?" 그러나 그는 계속 지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이웃 Henry Van Drooten씨와 두 가정이 안식일을 준수. 여러 달 동안 이들은 전 세계에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은 자기들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신학자인 친구 Dr. Andrew Murray를 찾아갔습니다. 금요일 저녁 희망봉에서 50km 떨어진 그의 집으로 방문했습니다. 밤새도록 해가 뜰 때까지 둘이서 토론했습니다.
Dr. Murray : “자네는 진리를 발견했네. 화란개혁교회의 내 위치 때문에 난 어쩔 수 없네. 그러나 자네는 자네가 뭘 해야 할지 깨달았으니 그대로 하게, 왜냐하면 자네가 옳네.” 전보다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 나라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Wessels씨 소유의 농장 가까운 곳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왔습니다. 그 농장을 돌아보고 그곳 사정이 어떤지, 다이아몬드 채굴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Cape Town에서 북쪽으로 Bleumfontain 가까운 지역까지 기차로 갔습니다. 세 농장을 방문하고 다이아몬드 지역에서 목요일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하룻밤에 부자가 되기를 기대하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미친 듯이 맹렬히 파 재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광경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대단한 부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이아몬드광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곧 금요일 저녁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안식일을 여기서 보내기로 적정했습니다. 다이아몬드 발굴 인부들 텐트 옆 자기 텐트에서 안식일 아침 해 뜨는 시간에 자기가 하는 습관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들 열심히 다이아몬드 캐고 있는데 세 개 텐트 떨어진 텐트에서 한 사람이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로 가서 “안녕하세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뭐 하세요?” 역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화란어로 물었으니까.
"영어 할 수 있어요?” “예” “뭘 하세요?" '성경 읽어요."
“뭐라고요? 다른 사람은 일하러 갔는데”
“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입니다.” 그 이름이 John Hunt, 캘리포니아에서 왔는데 거기에 Seventh-day Adventists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총회 본부는 California의 Oakland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온 세상에서 홀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바다 건너 자기가 믿는 믿음을 가진 집단이 있다니. 그는 즉시 편지를 써서 수표를 넣어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 주세요."
편지 답장은 당시 대총회장인 제임스 화잇이 아니라 아내인 화잇 부인에게서 왔습니다. “우리 기관이 조직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자금이 없습니다. 당신이 보낸 수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다시 수표를 보냈습니다.
몇 개월 동안 협의 끝에 편지가 왔습니다. 어느 날짜에 선교사 가족이 탄 배가 희망봉에 도착할 거라고. 드디어 그날이 와서 온 가족은 항구로 나가 선교사를 기다렸습니다. 한 주일 함께 지나면서 할아버지는 Cape의 총독 George Grey경을 찾아가 “저를 좀 도와주세요. 이 선교사가 북쪽으로 가서 선교본부를 설립하고자 하니 땅을 좀 마련해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Grey씨는 봉함한 편지를 주며 “북쪽의 Rhodesia의 행정관을 만나 이 편지를 주세요.” 소달구지로 4개월간 여행했습니다. 그 편지를 본 로데시아 총독은 “땅을 얼마나 원합니까?"
“800-1000acre 주시면 좋겠습니다.” - 1000 에이커:1,224,000평
“George Grey경이 편지에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드리라고 했는데 이렇게 하셔요. 말을 한 필 골라 타고 당신이 원하는 지역에 가서 동쪽으로 1시간, 북쪽으로 한 시간, 서쪽으로 한 시간, 남쪽으로 한 시간씩 가서 그 안에 땅을 다 가지세요.”
제일 좋은 말을 골라 달렸습니다. 돌아온 말의 입에서 거품이 나올 지경. 4000acre(12000)를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여기가 Solusi Mission Station(솔루사 선교본부) 자산입니다. 4,896,000평 여의도:2,565,200평
할아버지는 대단한 부자로 의료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들어서 희망봉 지역은 위생병원을 하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므로 많은 방을 가진 큰 건물을 짓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건물을 다 지은 후 가구를 유럽으로 가서 주문해 왔습니다.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할아버지의 부자 친구들이 찾아와서 “우리가 자네가 지은 위생병원 건물에서 휴가를 즐기기를 원하네.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도박도 하면서 거기서 지날 수 있게 방을 몇개 좀 내주게나.”
할아버지는 얼마 동안 고민하다가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끈덕지게 졸라서 “그래 그들이 환자들과 섞이거나 마주칠 일이 없으니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을 한지 일주일 후 화잇 여사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당시에 미국에서 남아공까지 편지가 오는 기간은 3-4주일 걸리니 할아버지가 결정하기 2, 3주일 전에 발송한 편지. 그 내용은 Peter Wesels씨가 자기의 재산과 영향력을 잘 못 사용한다는 계시를 보고 쓴 편지였습니다. 이어서 두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편지가 계속 왔습니다. 네 번째 편지가 왔을 때 그는 화가 나서 “이 젊은 여자가 멀리 미국에서 내 사업에 대해 뭘 안다고, 내 돈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그 후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료상, 농장의 모든 장비, 식량, 비료 등을 전국에 전매특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게들이 하나씩 망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부채를 갚기 위해 농장을 하나 팔려고 북쪽 지방을 갔습니다. 그가 역에 도착하니 위생병원의 총무를 맡은 동생이 보낸 전보가 와 있었다. “병원이 불타버렸으니 즉시 오세요.” 바로 돌아가는 기차로 이틀에 걸려 1280km를 달려왔습니다. 희망봉 역에 도착하여 동생 Henry를 만나서 “병원이 불탄 건 안 된 일이지만 보험을 든 게 있으니 재정손실은 보상받을 수 있으니” 말도 떨어지기 전에 동생이 고개를 떨구며, “형, 전에 말하려 했는데...재정 사정이 안 좋아서 보험갱신을 못 했어요.” 병원 확장하느라 빚이 좀 많고 사업체들은 거의 다 문닫고 두 가게만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은 그가 늘 말하기를 은퇴하면 거기 가서 살겠다고 한 농장을 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 농장은 “Mouiefontaine” 뜻은 “beautiful fountain.=아름다운 샘” 아! 그 농장을 팔고 28일 만에 다이아몬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Kimberly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다.
매각하고 28일 만에 글자 그대로 그는 폭삭 망한 사람이 되었고 Henry Van Drooten외에는 그전의 모든 친구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탕자처럼) 채권자들이 와서 산 중턱의 큰 별장과 가구까지 다 가져갔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당시 법으로 망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뿐 1. 부엌세간, 2. 재봉틀1개, 3.침구,뿐이었다.
빈털터리가 되어 실망하여 물건을 정리하려고 시렁 위에 있는 박스를 당기니 화잇 여사가 보낸 편지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때까지 화잇 여사는 편지를 계속 보냈는데 69통 그중 64통은 열어보지도 않은 체 박스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날 변두리 극 빈민촌으로 이사하였다. 이삿날 Henry Van Drooten만 마차를 끌고 이사를 도왔습니다. 그날 밤 촛불 밑에서 64통의 편지를 다 읽었습니다.
우표를 보니 San Francisco, Seattle, Washington, New York, Boston, Frankfurt(Germany), Sydney(Australia), Oslo(Norway).
발송 날짜별로 정리하여 차례로 읽었습니다. 그 편지들에 자기의 전 생애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들 지금 앤드류스 대학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화잇 여사는 병원이 불 날 걸 알았을까? 그녀는 예언하기를 “3개의소방서가 동원되어도 결코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제가 12년 전 여기에 방문했을 때 화잇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이곳에는 건물이 세워지지 않고 숲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만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용한 증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화잇 여사는 할아버지의 재산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첫째: 만일 그가 자기 재산과 영향력을 바르게 사용하였더라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Anglo-Boer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뜻은 수천 명의 생명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당신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산과 영향력을 바르게 사용하였더라면 남아프리카 정부가 재림교회와 재림 기별에 호의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요" 이 말뜻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재림교회 정부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재림교회가 국교가 된다는 뜻. 얼마나 역사가 달라졌을까요?
남아공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 다음날 해 뜰 때까지 편지를 다 읽었는데 거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연까지 다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의사는 좋아하고 어떤 환자에게는 더 호감을 가졌고 교육적인 사업에는 투자가 인색했고 등등.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예언의 신의 교훈대로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서원을 하고는 몇 달 동안 기도하였다. 드디어 사료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작은 가게로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곧 사업이 잘되어 번창해지고 땅을 사들였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 시대에 이어서 황금시대가 열렸습니다. 그가 사들인 땅에서 금이 나왔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가족들이 금광을 경영하는데
“Wesselton Gold Mine” 거기서 나온 자금으로 하나님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 아들을 제 어머니의 아버지-베틀크릭에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교회를 짓는 데 도와 달라고 해서 15만 dollar를 송금, 어머니가 파이프 올간 설치하라고 15만 불을 송금 우리 교단 첫 번째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했다.
호주 에번데일 대학부지 구매 시 도움을 요청했는데 수표를 썼다가 찢고 다시 써서 보냈는데 딱 부족액이었단 말도 있습니다.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에서 나온 액수 요즘 돈으로 185억 불 첫 번째 할아버지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회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 기회는 하나님 뜻대로 잡아서 교회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