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증명” イエス様の証明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수학을 배웁니다. 산수나 수학이라고 할 때 생각나는 것은 덧셈이다 뺄셈이다 해서 무슨 계산문제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답을 딱 내는 것을 생각합니다만, 어떤 수학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숫자가 있고 이를 계산해서 답을 내는 것은, 그 문제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이다. 그렇다면 진짜
수학은 무엇인가 하면 이는 바로 <증명>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몇 학년 때 배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때는 중학교 때부터 이 증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각형 A와 B의
크기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은 문제였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슨 삼각형의 합동조건 같은 것을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뭐, 첫째는 대응하는 세 변의 길이가 각각 같거나 3辺がそれぞれ等しい。, 둘째는 대응하는 두 변의 길이가 각각 같고 그
끼인각의 크기가 같거나 2辺とその間の角がそれぞれ等しい。, 셋째는 대응하는 한 변의 길이가 같고 그 양 끝각의 크기가 각각 같을 때
1辺とその両端の角がそれぞれ等しい,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 뭐 이런 걸 이용해서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이라고 하는 상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무슨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서 답을
맞췄다거나, 무슨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무슨 어떤 어려운 이론에 대한 증명을 해서 받게 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증명 중에서도 대학생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1+1=2라는 것을 증명하라.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이 문제는 보기보다 꽤나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러셀과
화이트헤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수학원리>라는 책에 나옵니다만, 이 증명을 모두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자면 5분도 안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졸아버릴 것이요, 10분도 안 되어서,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도 아마 졸아버릴 것입니다.
이 1+1=2라는 증명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 그것도 오늘은 성탄예배인데, 왜 느닷없이 수학 증명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매주 설교 동영상을 촬영한 다음 한국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메일을 발송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미국에 계신 목사님께서 격려메일을 보내주시는가 하면, 상해에 계신 분께서 감사 메일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터키에 계신 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메일을 보면서 저 자신도 힘이 나기도 하고, 또한 상담을 해드리면서 저 스스로도 많은 공부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보내드린 메일 내용은 선교후원에 대한 요청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 계신 분으로부터 대단히 흥미로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선교후원을 요청하시는데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어떻게 압니까? 내 돈이 진짜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면 아깝지 않은데 당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면 가짜 하나님일 것인바 매우 아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데 당신이 착각 속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이 메일은 지금까지 제가 받은 메일 중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메일이었습니다. 이는 비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성경 속에 적혀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증명해 보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니,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증명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비단 저만이 받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만이 아닌,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증명문제인
것입니다.
문제 출제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으십니까? 아멘. 예, 아멘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아니요,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귀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멘이라고 고백하신 분께서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또 우리가 하는 말이 있죠? 예, 성경에 써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 또한 대단히 귀한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묻겠습니다. 성경에 적힌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힌트는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1+1=2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만약에 1+1=2이다……라는
증명을 하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좀 어렵나요? 그렇다면 좀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치원생 아이에게 1+1=2다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죠. 예를 들어서 무슨 공이나 아니면 무슨 과일 같은 것을 이용해서, 자, 여기 한 개가 있지? 그리고 여기 또 한 개가 있지?
그렇다면 이거랑 이거 전부는 몇 개야?
한 개, 두 개, 세 개 정도를 아는 아이라면 이 정도 설명으로 분명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해서 못 알아듣는다면 몇 번
설명을 하면 알아듣겠죠. 조금 똑똑한 아이라면, 그걸 알려주면 한 개랑 두 개를 합하면 세 개라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잘못된 증명방법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면 왜 알아 들을까요. 예, 눈으로 보니까
알아듣습니다. 속담에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훨씬 더 쉽게 빨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증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이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
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우리가 사람들끼리 어떤 계약을 한다고 하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일반적으로 서명 날인을 합니다. 즉, 계약내용을 적고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모두 언약 즉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등 다양한 언약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 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언약궤 만으로는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을 보이시기로 마음 먹으시고 사람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다는 뜻이지요. 이게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 이전에는 선택된 극히 일부 선지자들한테만 보이셨습니다만, 이제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고는 직접 말씀해주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를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이제 보통 사람들은 근처에도 못 갔던 가장 거룩한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에까지,
하나님 앞으로까지 직접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장 10절~11절을 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
この方はご自分のくにに来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다 못한 분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그 자체이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했대요? 예,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요. 태어난 자식은 자기 부모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뱃속에 있을 때 기억이 없잖아요? 자기가
뱃속에서 나올 때 기억이 있어요? 뱃속에서 나와서 엄마 얼굴을 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내가 엄마다,
내가 아빠다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그죠.
사람이 배가 고픈 것은 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배가 고픈 것은 느낄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누가 부모인지 누가 형제인지는
주변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는 어떻습니까.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낳았으니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기 부모도 알아볼 수 없는데,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까지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 지혜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알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해놓은 해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そうしてアブラハムは、その場所を、アドナイ・イルエと名づけた。今日でも、「主の山の上には備えがある」と言い伝えられている。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어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제일 나중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사야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8절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天を創造した方、すなわち神、地を形造り、これを仕上げた方、すなわちこれを堅く立
てた方、これを茫漠としたものに創造せず、人の住みかにこれを形造った方、まことに、この主がこう仰せられる。「わたしが主である。ほかにはいない。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핵심은 우리를 거주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이 아니라 태초부터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미 창조해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저 만들어놓으시고 끝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 삶을 통해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시편 23편 1절~6절을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
v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主は私を緑の牧場に伏させ、いこいの水のほとりに伴われます。
主は私のたましいを生き返らせ、御名のために、私を義の道に導かれます。
たとい、死の陰の谷を歩くことがあっても、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あなたが私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それが私の慰めです。
私の敵の前で、あなたは私のために食事をととのえ、私の頭に油をそそいでくださ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힘을 주시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원수들의 목전에서도 나를 후하게 대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 기쁨이 넘칩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이렇게 감사하신 하나님께 내가 영원토록 꼭 붙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냥 한 번 시를 읊어본 것인가요? 아닙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이렇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증명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해 보이실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증명해 보이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증명해 보이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생증이 있습니다. 학생증이 있으면 학생 할인도 받을 수 있고, 만약에 경찰이나 누군가가 나한테 신분을
묻는 경우라고 한다면, 중고등학생한테는 유일한 신분증이 바로 학생증입니다. 이건 중요하지요.
회사생활을 하게 된다면 사원증이 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에는 사원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에서는, 무슨 생각을 해서인지 성도등록증……이라는 것을 전 교인한테 나누어주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찾아보니까 지금도 제 서랍 안에 들어있더라고요. 뭐, 그게 있으면 교회 서점이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 같은 곳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 조금 찝찝했습니다. 이유는 좀 있다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전에 인터넷을 보니까 목사 신분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큰 교회에서는 그 교회에서 발급하는 마치 사원증
같은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또 교단에서 제작하는 경우에는 나름 여러 가지로 필요해서 신분증을 만든다고 하는데, 글쎄요. 저는 이를 보고 마치 전교인한테
나누어주었다는 신분증을 받았을 때처럼 찝찝했습니다.
제가 왜 찝찝했을까요? 내가 꼭 교회 성도라는 증명서를 내보여야 내가 성도라고 알아요? 내가 목사 신분증을 내보여야 목사라고 인정을
해주나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목사님들이 학위 논문도 표절하고, 설교도 베껴 쓰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설교할 때 앞에서, 소매에 줄 세 개 있는 박사학위 가운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목사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서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지만 목사라고 인정해준다면, 그렇지 않으면 안 믿어줘요. 저 사람이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걸 보면 영 목사 같지가 않아……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이건 무슨 신학박사, 목회학 박사가 아니라, 일개
목사로서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아니요,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야? 교회에 다닌다고? 에이, 거짓말, 저 사람
말하는 것, 행동하는 걸 봐.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뭘 저래?
만약에 우리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이거 문제 심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자기 술 안 마신다고, 담배 안 피운다고 믿음 좋은 줄 알고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 모태신자라고, 헌금 많이 낸다고, 주일마다 교회 나간다고 거룩한 줄 알고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 목사라고, 자기 장로, 권사라면서 금배지 은배지 달고 다니면서 인사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부터 있었어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また、彼らは重い荷をくくって、人の肩に載せ、自分はそれに指一本さわろうとはしません。
彼らのしていることはみな、人に見せるためです。経札(きょうふだ)の幅を広くしたり、衣のふさを長くしたりするのもそうです。
また、宴会の上座や会堂の上席が大好きで、
広場であいさつされたり、人から先生と呼ばれたりすることが好きです。
벌써 예수님 당시부터 겉모습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증명하고 예수님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주위 사람이 나를 보면서 “야, 나는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지만, 저 사람을 보면 정말 예수님이 있긴 있는 것
같애. 하나님이 살아있긴 살아 있는 것 같애”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하이고……인간이 어떻게 된 게 믿는다는 인간들이 더 해” 이런 말이 나온다면 이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가진 돈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시간, 내가
가진 자존심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내 이웃을 위해서 기뻐 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이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예배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위해 오신 날입니다. 지금도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분들에게 열 마디 백 마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을 보이고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웃을 사랑하면 이처럼 예수님이 전파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된다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쁨에 찬 성탄절 이브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삶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을 증명하고 이웃에게 우리 주님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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