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의 묘갈명(墓碣銘)
채유후(蔡裕後) 지음
【인물소개】 전치원(全致遠) : 1527-1596. 자는 사의(士毅), 호는 탁계(濯溪),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경상도 합천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이희안(李希顔)에게 수학하였다. 1546년 향시에 합격하였다. 조식의 문하에서 김우옹ㆍ정구ㆍ노흠ㆍ김면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 등과 연합하여 왜적을 격파하였다.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권3에 의하면 조식은 전치원이 집지하자 그의 재주와 기량을 매우 중히 여겼고, 전치원은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선생묘갈명」의 글씨를 썼다. 이를 보면 조식과 전치원이 사제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公贄謁先生之門 先生甚器重之 先生墓碑之文 成大谷所撰而公書之] 저술로 3권 1책의 탁계집ㆍ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 등이 있다. 【원문출전】 全致遠, 濯溪先生文集 권2, 附錄, 蔡裕後 撰, 「墓碣銘幷序」(경상대학교 문천각 古(기타)D3B전819ㅌ v.1-2) |
완산 전씨(完山全氏)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이다. 휘 사경(思敬)이 고려조에서 예부상서를 지낸 이후, 대대로 벼슬한 인물이 있었다. 국조에 들어와 휘 하민(夏民)이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이 분이 병마절도사를 지낸 휘 승덕(承德)을 낳았는데, 곧 선생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수문(秀文)은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냈다. 조부 휘 영수(永綏)는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냈다. 부친 휘 인(絪)은 종사랑을 지냈는데, 김해 허씨 우후(虞侯) 성(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정해년(1527) 10월 19일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휘는 치원(致遠)이고, 자는 사의(士毅)이며, 호는 탁계(濯溪)이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에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겨우 8세 때 부친 종사공이 세상을 떠나니, 어른처럼 몹시 슬퍼하며, 밥먹을 때마다 소금만 먹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부친 종사공이 타던 말이 늙어 죽을 때가 되자, 하인들이 그 말을 잡으려고 하였다. 선생이 그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말을 끌고 가서 마구간에 매어 놓고 예전처럼 여물을 먹였다.
선생이 자라서는 영특하고 용기가 있었다. 조부 재령공이 무예를 배우게 했는데, 선생은 그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청하기를 “우리 고을의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선생이 도학을 강론하며 밝히고 계시니 그 분을 따라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조부가 기뻐하며 그 청을 허락하였다.
선생이 황강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소학을 읽기를 청하였는데, 황강 선생이 소학을 배울 나이가 지났다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선생의 심지를 관찰하였다. 선생은 문 앞에 꿇어앉은 채 여러 날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황강 선생이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눈 속에 서 있었던 옛사람의 지조에 가깝다.”라고 하시며, 마침내 불러서 가르쳤다.
선생은 수년 동안 밤낮으로 부지런히 매진하여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어느 날 저녁 황강 선생에게 아뢰기를 “학문은 여력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노모가 살아 계시니 집으로 돌아가 봉양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황강 선생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너는 이미 도를 보았다.”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당을 세우고 한결같이 옛 법도를 따라 항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사당을 배알한 뒤 어머니께 문후를 드렸고, 아침저녁의 봉양을 반드시 몸소 살폈다.
옛 사람의 잠언(箴言)이나 경구(警句)를 취해 벽에 붙여 놓고 방안에 고요히 앉아 침잠하며 그 뜻을 완미하였다. 오직 진지(眞知)와 실천을 임무로 삼고, 기예를 익힘을 오로지 하지 않았지만 필법은 기이하고 고아했다. 세상을 경영하고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녔지만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았다. 황강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 삼년복을 입고, 선생을 위해 서원을 지었다.
갑술년(1574) 조정에서 선생의 행의(行誼)를 가상히 여겨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임오년(1582) 모친상을 당하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하루에 세 번씩 묘소를 살폈으며, 매양 기일이 되면 미음만 먹었다. 요절한 아우가 있었는데, 선생은 가슴 아파하며 자식들에게 삼대 동안 나와 똑같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임진년(1592) 왜구가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게 되니, 선생은 의병을 모집해 왜적을 토벌하였다. 그리고 창의(倡義)한 여러 공들과 함께 낙동강에서 왜적을 막았다. 이 일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행장에 들어 있다. 계사년(1593)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었지만, 또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1596)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0세였다. 매야산(梅野山)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선생의 초취부인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사인 사전(士詮)의 따님이며, 현감 순조(順祖)의 손녀이다.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우(雨)는 중림도 찰방(重林道察訪)을 지냈다. 딸은 창락도 찰방(昌樂道察訪) 이대약(李大約)에게 시집갔다. 후취부인은 강양 이씨(江陽李氏)로 봉사 정(精)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모두 요절하였고, 딸은 사인 안입후(安立厚)에게 시집갔다.
중림도 찰방 우(雨)의 초취부인은 사인 문우개(文友凱)의 따님으로, 딸 넷을 두었다. 장녀는 현감 박대수(朴大受)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찬성에 추증된-시호가 장의공(壯毅公)이다- 이윤서(李胤緖)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사인 이래(李)[12]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진사 김이원(金以元)에게 시집갔다. 후취부인은 승사랑 조광서(曹光緖)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창(昶), 차남은 윤(潤), 삼남은 양(漾), 사남은 진사 형(滎), 막내는 렴(濂)이다. 장녀는 사인 김대용(金大鎔)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 안절(安節)에게 시집갔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연곡(淵谷)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아! 후인들이 여기에서 선생의 학문이 순후하고 정심하며 행의(行誼)가 뛰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사 형(滎)이 대군사부(大郡師傅) 임진부(林眞怤)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선생의 묘갈명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그 행장에 의거해 간추려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붙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타고난 자질 아름답고, 質其美矣
학문 또한 넉넉하셨지. 學亦優矣
행실은 이미 고매하였으며, 行旣高矣
재주 또한 주공(周公) 같았네. 材亦周矣
저 매야산 언덕에, 梅野之原
숭상할 선생의 묘가 있네. 有崇其墓
연곡에 사당을 세우고서, 祠于淵谷
후인들이 선생을 추모하네. 惟後之慕
자헌대부 행 사헌부 대사헌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 채유후 지음.
[12]
● 채유후(蔡裕後) : 1599-1660.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본관은 평강(平康),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부친은 진사 채충연(蔡忠衍)이다. 1623년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이조 좌랑ㆍ이조 판서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7권 3책의 호주집이 있다.
● 우후(虞侯) : 조선시대의 무관직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부직(副職)이다. 병마우후는 종3품, 수군우후는 정4품이다.
● 이희안(李希顔) : 1504-1559.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 본관은 합천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雙冊面)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낸 이윤검(李允儉)이다. 김안국(金安國)에게 수학하였다. 고향에 황강정(黃江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1554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령현감을 지냈다.
● 눈 속에……지조 : 선종(禪宗)의 이조(二祖)인 혜가(慧可)가 달마(達磨)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밤새 서 있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의성, 안동 출신이다. 부친은 김진(金璡)이다. 이황에게 수학하였다.
● 학봉(鶴峯)……행장 : 학봉선생문집, 부록 권2, 정구(鄭逑) 찬 「행장」에 의하면, 초계(草溪)의 의병장 전치원ㆍ이대기가 사막(沙幕)과 황강(黃江)의 왜적을 쳐서 내쫓았다고 한다.(又令再祐相機進討玄風昌寧靈山三邑之賊 金鄭兩大將 亦遣兵擊茂溪安彦之賊 草溪義兵將全致遠李大期 亦逐沙幕黃江之賊 於是 三邑屯賊皆退 自茂溪鎭以下 至于鼎巖賊 不得闌入 江左右自是得通)
● 매야산(梅野山) : 경남 합천군 쌍책면 건태리에 있다.
● 임진부(林眞怤) : 1586-1658. 자는 낙옹(樂翁), 호는 구곡노부(九曲老夫)ㆍ임곡(林谷), 본관은 은진(恩津), 경상도 합천 출신이다. 부친은 임승근(林承謹)이다. 이상사(李上舍)에게 수학하였다. 1635년 대군사부가 되었다.
濯溪 全致遠 墓碣銘 幷序
蔡裕後 撰
完山之全 爲我東大姓 有諱思敬 仕高麗 官禮部尙書 世有衣冠 入我朝 有諱夏民 弘文修撰 是生兵馬節度使 承德 卽先生之高祖也 曾祖諱秀文 珍山郡守 祖諱永綏 載寧郡守 考諱絪 從仕郞 娶金海許氏虞侯誠之女 以嘉靖丁亥十月十九日生先生先生諱致遠 字士毅 濯溪其號也 先生生有異質峻整 不妄言語 甫八歲 遭從仕公喪 哀毁如成人 每飯只持鹽 見者皆稱孝兒從仕公所騎馬 老將斃 奴人欲宰之 先生聞之 驚駭而出牽 而納諸廐 飼之如故 旣長英達 有勇氣 載寧公欲令就武 不肯 仍請曰 吾鄕黃江李先生希顔 方講明道學 願從遊 載寧公喜而許之先生旣詣其門 請讀小學書 黃江以年晩 故却之 以觀先生志 先生危坐於前 不動者累日 黃江異之曰 斯人於古人立雪之操 庶幾焉 遂進而敎之 先生夙夜孜孜數年 學日進 一夕告于黃江曰 學問餘力 有老母在 願歸養 黃江歎曰 汝已見道矣 旣歸建祠廟 一依古制 常昧爽而興 謁于廟 仍省大夫人 朝夕之供 必躬親視之取古人箴警之言 貼諸壁 靜處其中 沈潛翫索 惟以眞知實踐爲務 不專於遊藝 而筆法奇古 抱經濟之才 而不自衒於世 遭黃江之喪 心喪三年 爲之營建書院甲戌 朝廷嘉其行誼 除司圃署別提 不就 壬午 丁內艱 廬于墓側 日三省墓 每値忌辰 只歠米飮 有弟夭 先生傷之 命子孫 祭之如己 以終三世壬辰 倭人入寇 乘輿西幸 先生募鄕兵討賊 與倡義諸公 遮絶洛江 事在金鶴峯行狀中 癸巳 除沙斤道察訪 又不就 丙申 終于第 得年七十 葬于梅野山午向之原先生初娶星山士人李士詮女 卽縣監順祖之孫 生一男一女 男曰雨 重林道察訪 女適昌樂察訪李大約 後娶江陽李氏奉事精之女 生四男一女 男皆早夭 女適士人安立厚
重林 初娶士人文友凱女 生四女 長適縣監朴大受 次適贈贊成諡壯毅公李胤緖 次適士人李 [12] 次適進士金以元 後娶承仕郞曹光緖女 生五男二女 男長曰昶 次曰潤 曰漾 曰滎 進士 曰濂 女適士人金大鎔 次適士人安節先生歿後 鄕人相與立祠于淵谷 而俎豆之 噫 後之人卽此 可以知先生學問之醇深行誼之超卓矣 進士君持林師傅眞怤所撰行狀而來 請先生墓道之文於裕後 裕後不敢終辭 謹依其行狀 略加敍次 而繼之以銘曰
質其美矣
學亦優矣
行旣高矣
村亦周矣
梅野之原
有崇其墓
祠于淵谷
惟後之慕
資憲大夫 行司憲府大司憲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同知經筵春秋館事 世子右副賓客 蔡裕後撰
[12]